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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7. 화요일

유명 역사가 파토


 


[caption id="attachment_95468" align="aligncenter" width="250" caption="장미십자회의 문장"][/caption]


 


본 우원, 지난 2년간 <외계문명과 인류의 비밀> 2탄을 쓰라는 끝없는 주문에 시달려 왔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내용으로는 더 이어갈 게 없다. 아니, 없는 건 아니지만 1탄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 같다고 할까. 전편만한 속편 없다는 말은 아쉽게도 우원에마저 해당되는 것이다.


 


그래서 방향을 좀 선회하기로 했다. 구라논픽션이라고 이름 붙였던 <외계문명과 인류의 비밀> (책 좀 사라 이것들아. 큰 인터넷 서점가면 다 있다) 보다 더 진지하고 지적인 본격 은비주의와 이단 이야기. 수천 년의 서양 역사 전반에 흐르는 비밀스런 전통과 중세 기독교 유럽과의 애증(愛憎)의 상관 관계, 나아가 로마 카톨릭과 게르만, 켈트계 이교(pagan), 그리스정교, 그리고 이슬람과 힌두, 불교를 포함한 동방의 세계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신 세계의 이합집산, 그리고 그 결과로 정립되는 유럽인들의 문명과 사상의 빛과 그림자…


 


오랜 숙원이었던 이 주제에 대해 덤벼드는 건 바쁜 우원으로서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국내 자료 현황도 열라 열악해서 인터넷 서점에서 ‘은비주의’로 검색하면 아무것도 안 나오고 ‘이단’으로 검색하면 ‘이단옆차기’ 따위가 등장해 불쌍한 우원을 농락하는 이 엄혹한 현실.


 


그래서 머 일주일에 한번씩 쓰거나 할 자신은 없지만, 여하튼 다른 쓸 것도 마땅찮고 정동영은 대선 안 나간다고 하고, ‘잊혀진 영웅’ 식 코메디 만으로 이어나갈 수도 없으니 이제 드디어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일단 은비주의(隱秘主意) 라는 용어부터 보자. 은과 비라는 한자 단어에 둘 다 비밀이라는 뜻이 있으니 원칙적으로는 비밀주의 같은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은비주의에서 비밀의 소재는 정보와 지식, 지혜다. 지금같이 정보가 오픈되고 빠른 속도로 교환되는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불과 10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어느 사회에서나, 아주 기본적인 지식조차 특수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일단은 문자 해독능력의 여부. 제 아무리 타고난 머리가 좋다 한들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라면 지식에 접근할 길은 차단될 수 밖에 없다. 19세기 중반까지도 프랑스, 독일, 영국 등 당시 최고 선진국들의 문맹률조차 50%를 훌쩍 넘었었다. 일반 백성들에게 정보나 지식을 전한다는 당위성 자체가 없었고, 따라서 공공 교육시스템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지역에 따라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21세기 현재 방글라데시의 문맹률은 71%, 인도의 문맹률은 41%에 달하고 있다.


 


보다 과거로 올라가면 또 다른 문자 해독의 문제가 있다. 바로 라틴어다. 16세기 마틴 루터가 독일어 성경을 발표하기 전까지 천여 년 동안 서구 기독교 세계의 모든 성서는 라틴어로만 쓰여 있었으며, 고급 지식을 다루는 대부분의 종교, 학술 서적도 사정은 다를 것 없었다. 따라서 라틴어는커녕 모국어도 해독하지 못하던 유럽 각지의 일반 백성들로는 그저 사제나 학자들이 취사선택해서 해석하는 것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라틴어에 능통한 사제 계급이 신과 인간의 중간자적 위치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대중을 호도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중세 카톨릭의 군대식 조직에 속한 정식 사제는 신을 대신해서 인간의 죄를 용서할 권위를 갖고,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해 권위와 권력을 유지하면서 이를 신의 뜻으로 규정하여 세속에서 강제할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특히 바티칸의 교황은 단순히 종교조직의 수장이 아니라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신과 직접 대화하며 그 뜻을 지상에 펴는 자로서의 절대적 지위를 누렸다.


 


마치 반신반인(半神半人)을 연상케 하는 이런 중간자, 중재자의 존재를 없애고 인간 개개인과 신이 직접 대면하는 것이 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필두로 한 지역언어화 이후 가능해 진 거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주된 테마 중 하나였다. 참고로 이슬람의 경우 7세기 태동 때부터 이런 상황이 야기하는 위험성을 인지한 듯 카톨릭 사제같은 중재자를 배제했다. 그리고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멧은 유럽식 표기) 자신이 일자무식의 문맹이었다.


 


[caption id="attachment_95470" align="aligncenter" width="345" caption="마틴 루터보다 100년 정도 전에 태어난 구텐베르크는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술의 혁명을 일궈냈다.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도 그가 개발한 인쇄술을 통해 삽시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이후 지역 언어로 된 성서의 인쇄와 대중화에 기여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진은 구텐베르크가 생전에 인쇄하여 퍼트린 라틴어 성서."][/caption]


 


이 비슷한 상황은 고대로 소급해 올라가는 과정에서 다시 반복된다. 중세에 라틴어는 고급스러운 학문 언어였지만 정작 라틴어의 고향인 로마시대에는 그리스어가 그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요한 지식이나 지혜를 직접 입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어를 익혀야 했으며 귀족 자제들은 아테네나 여타 그리스 지역으로 유학을 보내 언어와 함께 앞선 학문을 익혀 오도록 했다. 극히 실용적이었던 것으로 평가 받는 로마 사회에조차 ‘고급’ 언어의 권위에 기초한 이런 아카데미즘의 전통이 남아있던 것은 흥미롭다.


 


여하튼, 이렇게 문자 해독이 안 되는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지식이 대중에게는 사실상의 은비적 상태에 있는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배 계층의 의도적인 지식 독점이다. 그것은 지식의 독점이 곧 권위와 권력의 독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열분들도 잘 아는 성서의 에덴 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창조주가 아담과 이브에게 금지한 과일의 이름은, 흔히 우리는 선악과(善惡果)라고 하지만 히브리어로는 '에츠 하다트 토브 와라' 의 열매였다. 이것을 대략 영어로 번역하면 ‘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즉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의 열매쯤 된다. 즉 신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식을 허락하지 않은 것인데, 이것은 지금 관점에서는 윤리학에 가까운 어감이지만 그보다는 철학적 사유와 지식 전반에 걸친 의미일 것이다. 구약의 신에게는 인간이 이 지식에 가까워지는 것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짓이었다.


 


[caption id="attachment_95471" align="aligncenter" width="372" caption="The Temptation and Fall of Eve. William Blake. 1808. 유명한 밀튼의 <실락원>의 삽화. 난 그저 우로츠끼 동자가 떠오를 뿐."][/caption]


 


이런 스토리는 유태교/기독교 전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벌로 코카서스 산의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형벌을 3만년간이나 받게 되는데, 이 불(의 사용)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지식이기도 하지만 실은 지식 전반을 상징하는 의미라고도 해석된다.


 


그리고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이 이름은 이집트의 신 토트와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를 그리스식으로 융합한 것인데 역시 지식의 신이자 전달자다. 이들은 벌을 받은 것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신적 지식을 미개한 인간에게 처음 전달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지식의 독점과 그 해방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토트와 헤르메스, 그리고 그 융합체로서의 이 존재는 은비주의에서 아주 중요하며 이후 다시 등장할 것이다.


 


이렇듯 고대 신화, 즉 신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지식 독점의 중요성은 영원한 형벌이나 죽음, 무한한 고통에 맞먹는 무게로 그려지고 있다. 물론 이런 형태는 현실 속에서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비록 픽션이긴 하지만 인기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첨성대의 건립 문제를 두고 덕만과 미실이 벌인 논쟁에서 지식의 이런 측면은 잘 드러나고 있다. 첨성대를 세워 천기를 모든 백성들이 알게 하려는 덕만에 대해 미실은 그런 일이 덕만과 미실을 포함한 왕족과 지배계급이 가진 특권을 빼앗을 뿐 아니라 무지한 백성들에게 혼란만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caption id="attachment_95472" align="aligncenter" width="480" caption="미실은 정보와 지식을 제한함으로써 유지되는 권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보수 우익을 상징한다. <선덕여왕>은 단순 사극을 넘어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그 배경, 전개 과정 등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훌륭한 텍스트이다. "][/caption]


 


특히 종교적이나 이념적으로 극히 통제된 사회에서는 작고 사소한 정보조차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 혹은 그럴 것이라고 지배계급에 의해 우려되는 - 비밀스러운 요소로 확대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제한된 지식은 그 자체로서 비의의 의미가 있다.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는 점을 떠나 제한성 자체가 만들어내는 가치와 잠재적 불안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소설 <장미의 이름> 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상의 저작 <시학 2편>와 그 전파를 막기 위한 집착을 그림으로써 지식과 정보의 통제에 기반하는 사회가 품고 있는 근본적 불안정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의 예로는 각국 정부 등의 기밀 정보를 빼내 개재하는 위키리크스를 들 수 있을 거다. 위키리크스가 다루는 내용의 종류나 양은 원체 방대하고도 비밀스러운데다가 큰 사회적 여파를 몰고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위정자들의 정보 통제력을 뒤흔드는 심각한 불안 요소다. 그런 만큼 전 세계의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이 위키리크스와 그 수장인 줄리언 어센지를 타겟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다루려는 은비주의는 이보다는 좀 좁은 영역이다.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비밀주의에 대해 이 단어가 가진 고유명사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톨릭이 지배하던 중세 기독교 유럽의 배면에 자리했던 특정 형태의 사상과 역사관의 일단을 총칭한다. 그 기원은 기독교가 태동하던 때보다 훨씬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이후 지역의 다양한 사상들과 만나고 결국 기독교 자체와도 일부 융합되어 간다.


 


이런 흐름의 기저에 있는 관점은 유럽을 지배했던 본류의 사상 체계와는 위협적일 만치 다른 것이다. 역사책에는 잘 등장하지 않지만 유럽과 서구 문명에서 이 은비주의적 요소는 늘 존재해왔고, 실은 유럽과 서구 역사 전체에 직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95473" align="aligncenter" width="480" caption="Freemason 회원 반지."][/caption]


 


현대적 관점에서 은비주의라는 말이 먼저 연상시키는 것은 비밀결사로 알려진 프리메이슨 Freemason 이다. 프리메이슨은 18세기 초 당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런던에 그랜드 랏지를 열면서 국제적인 활동의 첫발을 내디뎠다. 현재는 전세계 대부분 국가에 수천 개의 지부와 수십만 명 이상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으며 대중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비밀'이나 '결사'라는 말이 무색한 상태다.


 


그런데도 이 프리메이슨이 소위 그림자 정부의 이미지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단지 거대한 조직과 많은 회원을 거느렸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류의 조직이라면 우리나라에도 흔한 국제 로타리 클럽이나 라이온스 클럽 등도 해당되지만 이들을 가리켜 그림자 정부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 않냐.


 


이렇듯 차별화되는 프리메이슨의 이미지는 그들이 모종의 비기독교적, 혹은 선(先) 기독교적 고대 전통과 연관되어 창설됐고, 21세기 현재까지도 그 신비함의 일단이 상존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즉, 그들만이 알고 있는 비전(秘傳)의 정보, 지식, 지혜가 있으며 그것이 거대한 국제 네트워크를 통해 일반인의 눈에 보이는 질서와는 다른 차원에서 막후의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질서야말로 세상을 움직여가는 실제 동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연재물에서 현대의 프리메이슨으로까지 이어지는 유럽 은비주의를 한 꺼풀씩 추적하게 될 것이며, 그것이 유럽 및 세계 역사와 갖는 연결고리와 현재 퍼져있는 관련 음모론의 허와 실에 대해 탐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한 파트다.


 



 


그럼 이단(異端)은 뭐냐. 이 단어에서 열분들이 떠 올리는 것은 매스컴을 자주 타고 있는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JMS, 오대양, 미국의 헤븐스 게이트 등등 주로 기독교계 변형 종교들이다. 하지만 본래적인 이단의 의미는 이보다 훨씬 다양하며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 페르시아의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이단이라고 볼 수 있고, 이슬람 시아파는 수니파의 이단, 불교는 자이나교의 이단, 신교(프로테스탄트)는 구교(카톨릭)의 이단 등으로 해석도 가능하다. 이단은 특정 종교에서 비롯되었으면서도 거기에 반하는 세계관이나 교리를 주창하는 모든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종파'가 이단으로 규정되는 지점의 경계선이 흐릿한 경우도 많고, 중세 이단심판과 관련되어 이 부분은 수시로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해 두자. 이단이 곧 악(惡)이라는 기성 종교들의 등식에 우리가 매몰될 이유는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기독교인이 아닌 우원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정통적 세계관이나 교리를 기준으로 여타 종교를 재단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이들 ‘이단 종교’들의 가치도 여타 기성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가지는 윤리적 수준과 교리적 의미 등으로 판단될 뿐, 주류 기독교가 여호와의 증인을 이단으로 규정하니 마니는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원이 이 글에서 쓰는 이단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고 단지 주류 종교와 가치관의 대안적 변형의 의미로 쓰일 뿐이다. 이 이단들이 여러 관점에서 주류 기독교(본 연재물에서는 특성상 기독교를 기준)보다 종교적, 사회적 의미에서 긍정적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세 이단 종교들이 가졌던 중요한 의미는 융합이었다. 그 융합은 유럽과 지중해, 소아시아(과거 그리스/로마/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터키 일대)와 그 동쪽 너머의 사상들의 조합이며, 가급적 논리적, 윤리적, 존재론적으로 기존 기독교 철학보다 더 그럴싸한 종교관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로마 종교회의 이전의 초기 기독교적 세계관, 그노시즘(영지주의) 등으로의 회귀도 포함되며 적어도 일부는 역시 유럽과 주변지역의 잊혀진 과거의 사상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것을 탐구하는 것이 다른 한 파트다. 하지만 이 두 파트는 분리되어 따로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연동되어 논의될 것이며 그럴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본 연재물의 목적이 은비주의와 이단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그들이 유럽 문명의 발흥과 변천 속에서 어떻게 기능했느냐, 그리고 그 결과 역사책에서는 가려져 있는 유럽 문명의 진면목을 이해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이 절반은 픽션이었던 <외계문명과 인류의 비밀> 보다 훨씬 진지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런 은비주의와 중세 이단의 본성에 대해 이해하려면 결국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닿아 있다는 문제의 고대 전통이 무엇인지 먼저 찾아 나서야 한다. 그것은 근세나 중세는 물론 기독교나 로마, 그리스보다도 더 오래된, 어쩌면 인류 역사의 시원(始原)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무엇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알려진 인류 최초의 문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초(超)고대라는 시대적 한계를 한껏 비웃으며 놀랍도록 정교한 기술과 독특한 신념 체계를 구축했던, 그리고 이후 3,4천년이 지난 현대의 우리들에게 답보다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문명.


 


…고대 이집트.


 


[caption id="attachment_95475" align="aligncenter" width="481" caption="기자 Giza 의 카프레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우원 직찍. "][/caption]


 


논설우원 파토

@pato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