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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8. 수요일

펜더


 


I. 자살, 당신의 선택을 존중한다


 


 


1. 자살? 사회 공동체의 타살


 



“그는 미쳤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다. 미친 사회가 그를 죽인 것이다.”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빈센트 반 고흐의 자살 앞에서 앙토냉 아르토가 내뱉은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1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친 사회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 미친 사회에서 자살은 일상용어가 되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10년 국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만 5566명이라고 한다. 얼른 와 닿지 않는가? 이를 세부적으로 나눠보면 하루 평균 42.6명이 자살, 좀더 세부적으로 보면 34분마다 1명씩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남들과 줄 세우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성을 고려해 다른 나라와도 비교해보자.


 



-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는 31.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2위 헝가리(19.8명), 3위 일본(19.7명)을 여유 있게 제치고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 OECD 평균(11.3명)의 3배에 육박하는 자살자 수치를 보여주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자살률을 집계하는 세계 105개국 가운데 한국 남자의 자살 사망률은 세계 7위, 한국 여자는 세계 1위다.

- 돈으로 모든 가치판단 기준을 치환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특성을 고려해 경제적인 측면을 말해보면, 대한민국에서 자살이 야기하는 사회-경제적 소실은 한 해 평균 5조 원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피부로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그래 봤자 10만 명당 31.2명이 죽는 것뿐이니 말이다. 좀더 충격적인 통계를 말해볼까? 보건복지부의 ‘2011년 정신 질환 실태 조사’를 살펴보면, 자살을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100명 중 16명, 실제 자살을 기도한 사람은 100명 중 3명이라고 한다. 1년간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무려 10만 8000명이나 된다는 소리다.


 


참 많이 죽는다. 그리고 많이 죽으려고 시도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죽지 못해 안달일까? 우문현답이다. 대한민국이 자살 왕국이 된 원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수많은 언론 매체에서 분석 기사를 냈고,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들이 그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수많은 글을 쏟아냈다. 정답은 나와 있다. 인터넷 검색만 조금 해보면 한국 사회의 자살 열풍에 대한 분석 기사, 논문, 상담, 정부 대책 등 수많은 원인 분석과 해결 방안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이 글에서 굳이 그 원인 분석과 해결 방안을 말하고 싶진 않다(자살의 원인은 실로 다양하기 때문에 그것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책 한 권이 나올 것이다).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자살론》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자살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의 ‘타살’이다. 그게 바로 이 글의 시작이다.


 


 


2. 당신의 선택을 존중한다


 


독자들이 어떤 ‘선택’을 두고 고민한다면…… 난 그 선택에 동의하지 못하지만, 이해하고 존중할 수는 있다. 여기에서 ‘선택’은 자살이다.


 


자기 목숨을 끊겠다는 생각은 생물체로서 섣불리 하기 힘든 생각이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설에 따르면 생리적인 욕구(먹고 자고 싸고)가 해결되면 위험과 위협, 박탈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불안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난다. 생명체로서 기본인 ‘생명 유지 욕구’다. 그런데 이걸 포기하겠다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사고하며 행동한다. 이 대목에서 자신의 생명을 중단하겠다는, 생물체에게 기본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생존의 욕구를 뛰어넘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렇다, 어떻게 보면 당신은 생물체의 기본적인 ‘욕구’를 포기한 것이다. 생물체임을 포기했다고 해야 하나?


 



 


자살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선택일 수도 있다. 탄생은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삶은 당신의 선택으로 결정되지만, 그 결과가 모두 당신의 바람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당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자살 실패율이 꽤 높긴 하다(국내에선 10분의 1의 확률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의지의 문제다. 확실히 죽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당신 인생에서 이보다 확실한 선택은 없고, 거의 유일하게 선택이 예상된 결과로 이어지는 ‘사건’이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선택이고, 당신의 의지가 가장 잘 반영된 결과가 ‘자살’이다. 이것만으로도 자살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당신의 의지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 나는 당신의 선택과 의지를 존중한다. 단 여기에서 이해와 존중에는 전제가 필요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쪽’팔리게 죽지 마라!”



 


 


3. 나는 당신들의 죽음이 ‘쪽’팔리다


 


TV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자살 관련 뉴스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아, 정말 쪽 팔리네. 기왕 죽을 거 왜 쪽팔리게 죽을까?’


 


여기부터 좀 복잡 미묘해지는데, 오해하지 말고 듣기 바란다. 난 당신들이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 과정이나 고민, 사정은 모른다.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른다. 다만 그 상황을 끝내기 위한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암에 걸려 병상에 있는 친구를 보며 자기 손톱에 박힌 가시의 아픔이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그렇다, 사람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대상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한다. 그렇기에 사람이란 존재는 타인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없다. 역지사지란 말이 있다. 솔직히 말해보자.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사람까지 갈 필요도 없다. 가족의 마음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다만 유추하고 추측하며, 당신의 입장에 빗대어 생각하는 게 고작이다(이 정도도 훌륭하지만).


 


왜 이런 말을 계속하는지 아는가?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다.


 



“어느 누구도 당신의 고통과 고민을 100퍼센트 이해하고 납득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 당신의 고통을 100퍼센트 이해하고 납득하는 건 당신뿐이다.”



 


즉 타인이 보기에 별거 아닌 고민도 당신에게는 지구 멸망보다 중차대한 문제다. 그게 사실이고, 진리며, 현실이다.


 


당신에게 지금 어떤 고민이나 고통스런 상황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고민과 번뇌의 과정을 거친 ‘선택’이 자살이라면, 일단 존중하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왜? 죽겠다는 의지는 100퍼센트 당신 것이며, 그 생명도 당신 것이기 때문이다. 난 당신의 의지와 선택을 존중한다. 그러나 너무 쪽팔리다.


 



○○군에 위치한 ××모텔에서 자살 카페 회원으로 추정되는 남녀 3명이 연탄불을 피워놓고 죽은 것을 모텔 직원 C모씨가……



 


신문 사회면에 나온 이런 기사를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왜? 내가 다 쪽팔리기 때문이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부끄럽다. 기사의 ‘야마’를 자살이라는 사회현상으로 잡은 사회부 기자가 자살에 대한 심층 취재에 들어가면 더 부끄럽다.


 



A양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으며, 평소 지인들에게 ‘죽고 싶다’는 표현을 자주 한 걸로…….



 


천편일률적이다. 몇 차례 자살 시도를 통해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자살 카페에 가입해서 동반 자살을 원하는 멤버들과 한적한 교외에 있는 모텔에 들어가 연탄불이나 청산가리 등을 나눠 먹고 집단 자살을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다.


 



 


궁금한 게 두 가지 있다. 첫째, 정말 죽고 싶다면 왜 혼자 죽지 못할까? 둘째, 정말 죽고 싶다면 왜 하필 그 초라한 모텔인가? 죽고 싶은 의지가 있다면 좀더 멋지고 화려한 곳에서 ‘화끈하게’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죽고 싶다면 혼자서 멋있게, 화려하게 죽는 것이 좋지 않은가?


 


당신의 자살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의 ‘초라한’ 자살은 반대한다.


 


 


4. 죽을 거면 화려하게 죽자


 


태어난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삶의 선택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그러나 자살은 결과를 거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삶에서 가장 확실하게 결과를 말할 수 있는 여정이다(그 ‘의지’가 확고하다면 말이다). 이 선택을 ‘완벽하게’ 만들자.


 


죽으려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인생을 돌아봤을 때 한 번이라도 빛난 적이 있는가?”



 


죽음은 인생의 마침표이자, 인생에서 가장 빛난 순간이 될 수 있다. 특히 자살은 그 파괴력이나 파급력이 상당히 크다. 당신이 조금만 더 ‘신경’ 쓴다면 대한민국을 뒤흔들 수 있고, 정말 신경 쓴다면 전 세계 뉴스에 나올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만큼 파괴력이 있다. 생명체의 제1원칙은 ‘생존’이다. 생존을 제1의 원칙으로 움직이는 것이 생명이 있는 존재들의 기본 모습이다. 그런데 이 원칙을 포기하는 행동이 나온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모습! 이건 지구상에 살아 있는 그리고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본분을 망각한 행위다. 그 자체로 충격이다.


 


죽겠다는 당신의 결심, 인정한다. 그런데 기왕이면 멋있고 화려하게…… 남은 사람에게 강렬한 충격을 남기고 떠나는 게 어떨까?


 


모든 자살에는 시위성이 있다. 많든, 적든 자살자는 죽음을 통해 ‘뭔가 말하려’ 한다. 사회적인 요구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욕망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고, 당신들도 모를 수 있다(불만이 쌓였고, 분노가 팽배했다지만 정작 그 원인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TV 9시 뉴스에 나오거나 신문 사회면에 실리는 자살 사건 중에는 정말 어이없는 자살도 많다. 물론 안타까운 이들도 많고, 가슴 아픈 사연도 많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자살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자살이 안타깝다. 왜?


 



‘좀더 잘 죽을 수도 있는데, 왜 저렇게 허무하게 죽는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당신이 선택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죽는 이유와 남기고 싶은 이야기, 당신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고 간 ‘어떤 것’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 방법이 있는데 어째서 이 모든 기회를 성급히 날리는가?


 


가장 마음 아픈 건 당신의 마지막 모습이다. 기왕에 죽음을 택할 것이라면,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왜 그토록 초라한 죽음을 선택하느냐는 것이다.


 


안타깝다. 나는 당신의 자살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렇기에 되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운(과연 아름다운 죽음이 얼마나 있겠냐만, 최대한 아름답게 포장해보자) 죽음을 권유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의 죽음이 좀더 아름답게 포장되기 바란다. 더는 “○○시 교외에 있는 A모텔에서 자살 카페 회원으로 추정되는 남녀 3인의 시체가……”로 시작되는 뉴스를 보고 싶지 않다. 당신은 아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 이 글은 자살을 권하는 글이 아니다. 자살을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본다면, 그 선택을 잘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해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하루 평균 4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세상이다. 미친 세상이다.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34분마다 한 명씩 자살자가 발생한다. 이들의 죽음의 의미를 밝히는 노력도 있고, 이들의 선택을 만류하기 위한 노력도 있으며, 이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도 있다. 이 글은 이런 노력 사이에서 좀더 아름답고 완벽하게 자살하려는 ‘색다른’ 노력을 시도해보려 한다. 어차피 존재하는 자살이고,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태가 사라지지 않는다면(인류의 역사가 이어지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자살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자살’이라는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의 자살에 ‘완벽하다’는 형용사를 붙이고 싶다면, 이 글을 계속 읽어주기 바란다. 이 글이 완벽한 자살을 말해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다만 그 ‘완벽’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은 할 수 있다.


 


 


 


II. 당신 생명의 가치는 얼마인가?


 


 


1. 당신의 몸값은 얼마인가?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사람의 가치는 무한하여 측량할 수 없다는 도덕 교과서 같은 말은 하지 말자. 이 사회에서 ‘가치’란 단어는 ‘돈’이라는 손쉬운 판단 기준으로 치환된 상태다. 툭 까놓고 한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돈으로 환산할 수 있어?” “이제 사람의 목숨도 돈으로 거래되는 거야?” “아무리 이 사회가 거꾸로 돌아가도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말할 수 있어?” 이런 도덕적인 발언은 여기에서 끝내자. 이 글을 쓰는 나도 알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안다. 이 사회에서는 사람의 목숨 값이 공공연하게 책정되고 거래된다. 살아 있을 적에는 ‘연봉’이라는 변동 가격이 꼬리표처럼 붙어 있고, 죽고 나서는(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면) 위로금 혹은 보험금이라는 확정 가격이 책정된다.


 


보험회사에 가보면 ‘호프만식 계산법’이라 해서 사람 목숨을 가격대별로 나눠놓았는데, 이걸 자본주의의 인명 경시 풍조라고 말하긴 어렵다. 미국 환경보호국(EPA)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 정책에 반영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사회적 가치 기준이 ‘돈’으로 규정된 현대사회에서 그 기준에 알맞은 방식을 개발?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은 자본주의가 뿌리내리기 전에 사람의 목숨에 가격을 매겨왔다. 중세 게르만의 ‘베어겔트(wergeld)’가 대표적인 예인데, 실수로 사람을 죽이면 그에 합당한 배상금 혹은 속죄금을 지불했다. 중세의 영웅 서사시 ‘베어울프(Beowulf)’에도 이 속죄금에 대한 내용이 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돈으로 사람의 목숨 값을 매겨온 것이다.



예전에 장례식장에서 겪은 일이다.


 


불의의 사고로 가장을 잃은 상황에서 업체 관계자가 위로금을 들고 찾아왔다. 싸늘한 장례식장 분위기에서 망자의 가족이 외쳤다.


“사람 목숨을 어떻게 돈으로 계산해? 이러니까 염치없다는 소리를 듣지!”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그러나 ‘업체’는 이런 일에 단련돼 있었다. 프로는 괜히 프로가 아니고, 고수는 괜히 고수가 아니다.


“맞습니다, 귀하디귀한 사람의 목숨을 어떻게 돈으로 계산하겠습니까? 이 돈은 돌아가신 분의 목숨을 계산한 게 아닙니다. 유족 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드리기 위해서, 유족 분들이 현실적으로 고인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덜 느낄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이 돈은 고인의 목숨이 아니라, 고인이 마지막으로 유족 분들에게 드리는 전별금이라 생각해주십시오.”


 


업체 관계자의 능수능란한 대응도 그렇지만, 사람의 목숨 값을 참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당시 위로금을 건넨 업체 관계자도, 그것을 받은 유족도 그 돈이 망자의 목숨 값이란 걸 알았다. 표현이야 어떻든 그 돈의 본질이나 성격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다(물론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이때부터 나는 사람의 목숨 값이 얼마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보험회사에 가면 연봉과 직업, 나이에 따른 계산표가 깔끔하게 정리되지만, 이 계산은 보험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 상황에 맞는 목숨 값을 구체적으로 계산해보고 싶었다.


 


물리적인 가격부터 사회적인 가격, 생화학적인 가격까지 인간의 가격을 매기는 방식은 다종다양하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가격표, 즉 보험회사에서 책정하는 가격표는 논외로 한다. 보험회사에서 말하는 사망보험금의 경우 ‘자살’인 경우 보다는 사고나 질병에 의한 보험금 계산과 지급을 우선으로 하는 곳이다. 물론 자살자에 대한 보험금을 지급하는 경우가 있지만 예외적이고, 통념상 보험금의 성격은 사고나 질병에 의한 보상 규정에 입각한 ‘사회적인 몸값’이다. 나는 사람 그 자체의 가격이 궁금하다. 불손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20대 성인 남녀를 기준으로 생각해보자.


 


물리적인 가격


① 인체의 성분 원소로 공업 제품을 만든다고 가정할 때 나오는 가격은 10만 원 내외다. 몸무게 70킬로그램인 성인 남자를 기준으로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성분을 모아보면 비누 7개, 성냥개비 2000개, 설사약 1봉지, 못 1개, 연필 2000자루를 만들 수 있다. 이걸 돈으로 환산하면 10만 원어치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몸의 값어치는 10만 원 정도일까?


② ‘매트릭스 계산법’도 있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기계들이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전기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데, 실제로 성인 한 명이 하루에 신진대사를 통해 소모하는 에너지가 2400킬로칼로리 정도 된다. 이를 전기로 환산하면 약 166와트인데, 사람의 일생을 70년 기준으로 보면 평생 동안 전기를 14만 원어치 생산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몸의 값어치는 14만 원 정도일까?


③ 생화학적인 계산법도 있다. 앞에서 말한 계산법은 단순히 공업용 성분이나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환산하는 정도지만, 우리 몸을 인간에게 ‘판매’한다는 전제 아래 계산하면 가격은 엄청나게 오른다. 당장 의약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헤모글로빈, 알부민, 콜라겐, 트립신, 인슐린 등 호르몬 제제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약 600만 달러(60억 원)의 가치가 있다.


 


어떤가, 느낌이 오는가? 당신의 몸을 물리적으로 ‘해체’하면 이 정도 값어치가 있다. 얼른 와 닿지 않는다. 사람을 ‘해체’해야 나오는 가치라니, 정육점 붉은 조명 아래 있는 고기의 느낌이 아닌가? 과학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본 사람의 몸은 너무나 을씨년스럽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인 관점’에서 우리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 보험회사가 책정한 산출표가 아니라(그 적용 범위가 너무 넓다) 사람의 진짜 가치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caption id="attachment_95747" align="aligncenter" width="232" caption="영화 '매트릭스' 中"][/caption]


이 역시 산출하기 어렵다. 당신의 현재 가치가 연봉 3천만 원짜리 사무직 직원이라도, 10년 뒤에 당신이 어떤 놀랄 만한 아이템을 들고 나가 연 매출 1000억짜리 사업체를 만들지 누가 알겠는가? 사람의 가치를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인간의 가치가 무궁무진하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래도 이야기를 진행하려면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일단 배제할 것이 사람의 미래 가치를 기준으로 한 가격 산정이다. 이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 사람이 미래에 무슨 일을 할지, 어떤 성과를 낼지 확신할 수 없지 않은가? 현재 가치에 따라 일률적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것도 어렵다. 각자 처한 환경이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확인해야 할까?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투자비’다. 앞으로 가치는 모르지만, 이제까지 투자한 비용을 계산해서 사람의 목숨 값을 계산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가격


가장 확실한 비용은 양육비다. 한 사람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연령(경제활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키우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어디로 가지 않고 그대로 쌓인다. 즉 양육비만큼 가치는 있다는 소리다. 사람이 죽으면 양육비는 매몰 비용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20대 성인 남녀의 ‘가격’은 얼마나 될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행한 ‘한국인의 자녀 양육 책임 한계와 양육비 지출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출생해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자녀 한 명에게 지출되는 양육비가 2억 6204만 4000원으로 나타났다. 즉 대학을 갓 졸업한 남녀의 몸값은 2억 6204만 4000원이다(재수나 어학연수, 유학하는 데 드는 비용은 제외). 이를 세부적으로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영아기 3년 지출 비용 : 2466만 원

유아기 3년 지출 비용 : 2937만 6000원

초등학교 6년 지출 비용 : 6300만 원

중학교 3년 지출 비용 : 3535만 2000원

고등학교 3년 지출 비용 : 4154만 4000원

대학교 4년 지출 비용 : 6811만 2000원



 


중학교 3학년 때 죽으면, 이 학생은 최소한 1억 5238만 8000원을 날렸다는 소리다(매몰 비용).


 


단순 계산으로 자기 나이에 죽으면(혹은 자살하면), 그 나이만큼 든 ‘비용’을 날린다는 소리다. 자신의 몸값을 생각해서 신중하게 ‘처신’해야 할 것이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그 몸값은 더 올라간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 비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그 비용을 대부분 부모님이 지원해주는 실정이다. 남자는 평균 5000만~1억 원(집을 얻기 위해), 여자는 1000만~3000만 원이 든다. 이는 어디까지나 평균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결혼까지 한 성인 남녀의 평균 몸값은 얼마일까?


 



남자 : 3억 1000만~3억 6000만 원

여자 : 2억 7000만~2억 9000만 원



 


이것이 당신의 목숨 값,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당신에게 들어간 비용이다.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최소 2억 6204만 4000원이 투자됐거나, 앞으로 투자될 고급 인력이란 소리다.


 


이렇게 투자했는데 죽어버린다면 아깝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의 감정이나 상실감 등 수치화되지 않은 비용을 제외하고, 오로지 들어간 비용(사회적 손실 비용도 제외)만 계산했을 때 이 정도다. 아깝다. 정말 자살하고 싶다면 최소한 이 비용은 회수하고 죽는다거나, 이 비용이 넘는 ‘경제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만 자살을 고려해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Tip 당신의 몸값


 


여성가족부가 2010년 발표한 ‘제2차 가족 실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투자가 절대적이다. 대다수 부모들은 자신의 노후는 뒷전이고, 자녀 교육과 양육에 대한 투자에 경제력을 소진한다. 문제는 자녀들을 언제까지 지원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자녀에 대해 어느 시기까지 경제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학 졸업할 때까지’ 57퍼센트, ‘결혼할 때까지’ 14.2퍼센트, ‘취업할 때까지’ 11.7퍼센트로 나타났다. 절반이 넘는 부모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혹은 그 이상(취직, 결혼) 자녀들에 대한 지원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용은 얼마나 될까? 한국 보건사회연구원과 미국 농무성(USDA)에서 각국의 자녀 양육비를 추정한 바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한국은 대학 졸업까지 2억 6204만 4000원을 지출한 데 반해, 미국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7세까지 22만 2360달러(약 2억 4000만 원)를 지출하는 것으로 나왔다. 이렇게 보면 미국 부모들의 양육비 부담이 한국 부모들보다 심한 것 같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수치를 단순 비교한 결과일 뿐이다. 경제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과 미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적용하면 놀라운 결과가 나오는데, 한국은 자녀 양육비가 1인당 GDP의 9배, 미국은 5배에 해당한다(여기에 대학 등록금을 추가한다 해도 5.4배 정도다). 결혼 비용까지 추가하면 한국은 1인당 GDP의 10~12배, 미국은 6배 정도다.


 


한국 중산층 가정의 성인 남녀는 부모 세대의 노후 자금을 갉아먹고 자라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살은 부모의 투자와 노력, 노후 자금을 모두 날리는 행위다(현재 노후를 자식에게 기댈 부모는 거의 없겠지만, 그 자금이 공중으로 날아간 것만은 사실이다). 한국 사회의 비정상적인 교육열과 이에 편승한 교육 시장의 확대, 학벌주의는 그 자체로도 자살을 ‘유도’하는 치명적인 독이지만, 이 독을 품기 위해 부모 세대의 안정된 노후와 삶의 질을 갉아먹는다. 당신이 죽기 전에 부모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대목이다.




 


 


2. 죽음의 힘


 


1944년 10월 25일 오전 8시.


세키 유키오 대위가 이끄는 첫 가미카제(神風) 공격대가 필리핀 레이테 만 미군 함정 정박지에 출현했다. 각각 폭탄 250킬로그램을 실은 일본군 제로센 전투기 4대가 2만 피트(약 6100미터) 상공에서 최고 시속 372마일(약 600킬로미터)로 미군 항공모함 1척과 군함 3척을 향해 돌진했다.


첫 가미가제 공격 후 일본은 항공기 3461대, 가미카제 대원 4379명을 동원해 종전 때까지 공격을 계속했다. 그 결과 정규항모 20척, 경항모 3척, 호위항모 17척, 전함 14척,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8척, 구축함 138척, 이외 함 173척을 중파 혹은 대파하고 호위항모 3척, 구축함 12척, 이외 함 38척을 격침했으며, 미군은 이오(硫黃) 섬 전투 이후 3919명이 전사하고, 3572명이 부상당했다.


[caption id="attachment_95748"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가미카제에 피격당한 미 항공모함 Essex"]가미카제에 피격당한 미 항공모함 Essex[/caption]


전쟁이 끝나고 가미카제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가 다각도로 진행됐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우리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무장된 가미카제 대원이 특공 임무에 자원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지원을 강요받았으며 불가항력적인 명령에 따라 특공 임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이다. 전과 역시 대단한 게 아니어서 성공 확률은 6퍼센트에 불과했으며(미군이 가미카제 공격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초창기에 많이 당했다), 그 효과는 점점 미미해졌다. 심리적인 효과는 컸으나 실제 전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미리 말하지만, 가미카제 공격을 미화하거나 정치적 의도 혹은 군국주의를 찬양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로지 ‘죽음’ 그 자체에 의미를 두려고 한다. 물론 가미카제 대원들이 강제로 징집되었고(그중에는 조선인도 11명 있었다), 패전 말기 일본의 광기에 의해 그 죽음이 미화됐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가미카제 공격의 시작을 알린 세키 유키오 대위조차 조국이나 천황을 마음에 두고 공격을 시도한 게 아니다. 세키 유키오 대위는 아내를 위해 패전을 막아보고자 돌격했다.


 


가미카제 공격에 대한 이야기다. 왜 이 이야기를 했을까? 가미카제 공격의 효과를 말하기 위해서? 군국주의를 추앙하기 위해서? 기왕에 죽을 거 멋있게 자살 폭탄 테러를 하라고 부추기기 위해서? 아니다. ‘죽음의 힘’을 말하기 위해서다.


 


일본의 광신적인 자살 돌격 앞에서 미군은 치를 떨었다. 죽을 각오로 임한 공격 앞에서 비록 그 효과는 미미해도 심리적 충격은 엄청났기 때문이다. 죽음은 그 자체로 엄청난 에너지와 힘을 보여준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볼까?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이런 글이 있다.


 



생즉필사(生則必死) 사즉필생(死則必生)



 


살겠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란 뜻이다. 중국의 병법서 《오자(吳子)》에 있는 ‘필사즉생(必死則生),행생즉사(幸生則死)’를 변형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뜻은 휘하 장졸들에게 충분히 전달됐고, 이런 각오 덕분에 세계 해전 사상 전무후무한 전적 23전 23승을 만들어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군대가 뭘까? 간단하다. 바로 사병(死兵)이다. 죽기를 각오한 병사만큼 무서운 게 어디 있을까? TV 뉴스를 보라. 테러와 전쟁을 벌이는 미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뭔가? 자살 폭탄 테러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001년 발생한 9?11테러를 살펴보자.


 


언제나 그렇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말할 때 가장 편한 게 ‘돈’이다. 돈이 모든 가치 기준을 흡수했으니, 돈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9/11테러 당시 빈 라덴이 투자한 비용은 자살 폭탄 테러범 몇 명의 목숨과 50만 달러(기관에 따라 추정치가 다르지만, 40만~50만 달러로 추정)가 고작이다. 그렇다면 9/11테러의 피해액은 얼마나 될까?


 


세계안보분석연구소(IAGS)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9/11테러가 벌어진 뉴욕은 일자리 상실, 세수 감소, 사회간접자본 시설 파괴 등으로 피해액이 100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이후 벌어진 ‘테러와 전쟁’의 전비까지 포함하면,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브라운대학 부설 왓슨국제문제연구소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치른 전비, 파키스탄에 지원한 금액을 포함할 경우 최소 3조 2000억 달러에서 최대 4조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불과 몇 명의 목숨과 50만 달러로 이끌어낸 엄청난 결과다.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가 뭘까? 자살하겠다는 당신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눈앞에 놓인 공포를 극복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다.”



 


당신 눈앞에 미지의 ‘공포’가 다가왔다고 치자. 이 공포는 경제적 위협일 수도 있고, 신체적인 위협일 수도 있다. 어쩌면 미지의 질병일 수도 있다. 이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은 뭘까?


 


지금 다가오는 저 검은 물체는 동물원에서 탈출한 수컷 반달곰이야. 두 살밖에 안 됐지만, 그래도 곰이니까 조심해야 해. 그렇다고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어. 녀석은 사람 손에서 자라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친구로 생각하거든. 지금 우왕좌왕하는 건 난생처음 철창 밖으로 나와서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해서야. 이런 때는 쓸데없이 자극하지 말고 천천히 녀석의 시야 밖으로 물러나면 돼.


 


미지의 물체가 ‘곰’이란 걸 알고 곰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공포는 급속도로 줄어들고, 조금 뒤 공포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이것이 정보의 힘, 지식의 힘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물체(혹은 상황)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있다면, 눈앞에 있는 공포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없다면? 당신은 그 물체(혹은 상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앞에서 당황할 수도 있고,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다.


 



“까짓 죽기밖에 더하겠어? 정말 최악의 상황이라면 그냥 죽으면 되잖아? 죽으면 인생 끝나는 건데 뭘 더 두려워해?”



 


인간에게 죽음이란 모든 것의 끝이다(종교적인 윤회설은 배제하겠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는 위협이나 압박이 먹히지 않는다. 그 순간 당신은 초인이 되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의지만으로 당신은 엄청난 힘(!)을 얻는다. 당신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온갖 상념! 수치감, 두려움, 자존심, 공포, 타인의 시선 등을 가만히 지켜보라.


 



“어차피 죽을 건데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야? 다른 사람 시선? 죽을 건데? 그 사람이 나한테 뭐라고…… 난 조금 있으면 단백질 덩어리가 되는데?”



 


광화문에서 옷 벗고 대자로 누워보라. 사람들이 수군거리겠지만 경찰이 달려와 제지할 때까지 당신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배가 고프다고? 음식점에 달려가 가장 비싼 메뉴를 배 터지게 먹고 계산대 앞에서 말하라.


 


“나 돈 없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경찰이 달려와 무전취식으로 약식재판에 회부하기 전에 당신을 제재할 방법은 없다. 왜? 당신은 죽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니 지상에 있는 어떤 법률로도 속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법률에서 최고형은 사형이고, 몇 년째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런데 당신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법률로 당신을 제재할 수단이 딱히 없다는 얘기다.


 


‘어차피 죽을 건데, 범죄나 저지르고 테러나 일으켜볼까?’


 


이런 생각을 하라는 게 아니다. 물론 어떤 생각을 하든 당신의 자유다. 어차피 당신의 목숨이고, 그 목숨을 에너지로 마지막을 불태우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깝지 않은가? 당신은 죽기로 각오했다. 그 ‘각오’가 진짜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지만, 그 각오로 당신은 일반인이 쉽게 얻을 수 없는 ‘두려움 없는 삶’을 얻은 것이다. 물론 한시적이지만, 죽음을 극복한 삶의 무게와 파괴력은 어마어마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죽음을 각오한 순간 당신은 초인이 된다. 이 에너지를 의미 없이 써야겠는가?


 


 


3. 죽음을 각오한 당신의 가치는 얼마일까?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가진 것 없고, 못생기고, 가방끈도 짧아. 나는 똥 싸는 기계일 뿐이야.”


 


이렇게 자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당신이 죽음을 각오한 순간 어떻게 될까?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라도, 못 배운 사람이라도, 못생긴 사람이라도 죽음을 각오한 순간 이 세상의 모든 걸 가진 사람이 된다. 물론 유서 한 장 달랑 남겨두고 목을 매달면, 당신의 가치는 0원이 될 것이다. 아니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당신이 죽으면서 남긴 흔적을 치우기 위한 비용 때문).


 


그러나 당신이 죽음을 각오한 순간, 당신의 가치는 무한대가 된다. 9?11테러를 저지른 사람의 사례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상황도 생길 수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를 아는가. 그는 젊은 시절 공산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급진 모임에 참여하여 당국에 체포됐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형 집행 직전 상황까지 몰린다(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체포된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경고를 하기 위한 연극으로 사형을 활용했다. 실제로 사형시킬 생각은 없었다).


스물여덟 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5분이 주어졌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결정을 내린다.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 데 2분, 오늘까지 살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한마디씩 작별 인사를 나누는 데 2분,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금까지 서 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는 데 쓰자.’


이렇게 마음먹었지만, 가족과 친구들을 잠깐 생각하며 작별 인사와 기도를 하는 데 2분을 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난 인생을 떠올리며, 그동안 시간을 헛되게 낭비한 것을 자책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형 집행 마지막 순간! 그는 기적적으로 사면을 받는다(이 모든 게 연극이지만). 짧디짧은 5분 사이에 곁에 있던 사형수 중 몇몇은 머리카락이 백발이 될 정도의 긴장감을 맛봤다. 그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뒤로 미친 듯이 자기 인생에 뛰어든다. 작품을 향해서 말이다.


 


이 이야기는 꽤 유명한 에피소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생관과 작품 세계가 뒤바뀌는 일생일대의 사건이다(덕분에 우리는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게 됐다). 그는 죽음 앞에서 삶의 가치를 확인했고, 죽음의 ‘위력’을 확인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사형’을 경험했다. 그렇기에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살고 싶은데 다른 사람에 의해 삶이 정지되는 것과 살기 싫어서 스스로 삶을 정지하는 건 엄연히 다른 이야기니까 말이다. 그러나 ‘죽음의 힘’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아쉬움을 경험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후 미친 듯이 글을 썼고, 그 결과 전 세계 모든 이들이 기억하는 대문호가 됐다. 죽음의 힘, 아니 죽음을 각오한(혹은 경험한) 이가 보이는 삶에 대한 열정이다.


 



“죽어보기도 했는데 뭐가 두려운가? 한 번 죽은 이가 뭘 더 두려워하는가? 오직 내 앞에 놓인 삶에 집중하자.”



 


죽음은 어떤 두려움도 극복하고,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힘을 준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잠깐 이야기해줄까? 사형 집행 ‘쇼’가 끝난 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대로 방면됐을까? 아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4년간 수형 생활을 했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성경을 붙잡고 생활해야 했다(감옥 안에서는 성경을 제외한 어떤 출판물도 허용되지 않았다). 작가에게 책을 보지 말고, 글을 쓰지 말라는 건 형벌이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을 가다듬었다. 출소한 뒤에는 세미팔란치스크 수비대에서 다시 4년간 사병 생활을 했다. 그는 1859년에야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다. 10년 가까이 글을 쓰지 못한 것이다. 그 뒤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모습 그대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친 듯이 글을 써 내려갔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의 힘이다. 죽음은 우리 내부에 있는 ‘절박함’의 끝을 보여준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에너지를 준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초인으로 살 수 있다. 죽음을 각오했는데 뭐가 두려운가? 시베리아 수형소의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해도 죽음 앞에서는 가벼운 산책 정도였을 것이다(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이 그랬다). 어떤 고통이 죽음보다 심하겠는가. 죽음을 각오했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순간에는 ‘그래? 힘들면 까짓 죽어버리면 되잖아? 죽는데 뭐가 걱정이야?’ 이렇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결심한 순간 당신은 그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는 이 힘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 힘의 존재를 알지만 진정한 위력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죽음을 각오한 순간 당신은 세상 어느 사람보다 강한 초인이 된다. 당신들은 이제 초인이 된 것이다.


 



“당신은 지금 못 할 일이 없다. 당신이 평소 꿈꾸던 모든 걸 ‘시도’해볼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이 힘을 써보지도 않고 세상을 떠날 셈인가? 억울하지 않은가?”



 


억울하면 다음회를 기다려라.


 


(계속)


 


 


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