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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7. 25. 수요일

 

한불로

 

 

 

 

 

 

 

 

 

 

 

1. 토지개혁이 가져온 혁명적인 사회 변화

 

 

30년대 대표적인 소설가 중 한 명인 김유정은 탁월한 작가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이 30세에 지병으로 요절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보통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봄 봄', '동백꽃', '만무방' 등 그의 작품 중 단 하나라도 접하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당대 농촌 소작농들의 비참한 현실을 생생하게 전하는 대목들이 많다. 그들의 곤궁한 삶과 비애를 해학과 아이러니를 통해 드러내면서 진한 페이소스를 풍기는 것이 그의 작품의 백미다.

 

 

 

 

 

그 중에서도 소작농의 비참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대표적인 작품이 '만무방'이다. 소설 제목 '만무방'은 요즘의 시쳇말로 하면 '양아치' 정도로 번역될 지 모르겠다. 대체로 그냥 염치없이 막가는 사람 정도의 뜻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대체로 이렇다.

 

 

 

 

 

형 응칠은 소작농이었으나 뼈빠지게 일을 해도 추수하고 나면 남기는커녕 빚만 쌓여가는 현실을 견디지 못해 살림살이 전부를 빚쟁이에게 던져주고 아내와 어린애들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한다. 부부가 구걸하면서 지내지만, 아이 하나 건사할 수 없을 정도로 막장에 몰리자 아내의 제안으로 헤어지게 된다. 아내가 어디서 재가라도 해야 아이가 굶어죽기를 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때부터 그는 떠돌이 인생이 되어 도박을 하거나, 좀도둑질 등을 하면서 '만무방'의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다가 간만에 동생을 보러 고향에 잠시 내려왔다.

 

 

 

 

 

동생 응오 역시 소작농으로서의 곤궁한 생활은 형과 다를 바 없었다. 늘어가는 빚, 아파 누워있는 아내... 추수 때가 다가왔지만 그는 아내의 병을 이유로 타작을 계속 미뤄왔다. 그러다가 동생 응오가 소작하는 논의 벼가 도둑 맞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형 응칠은 지주와 동네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는다. 절도 전과도 있는데다 얼마 전 가혹한 소작료 문제로 응칠이 동생네 지주의 귀싸대기를 때린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응칠은 자신의 누명도 억울했거니와 동생을 위해서라도 도둑을 잡기 위해 응오의 논에 잠복하여 도둑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도둑이 나타나 벼를 몰래 베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들고 있던 몽둥이로 도둑을 후려패서 잡았는데 알고 보니 그의 동생 응오였다.

 

 

 

 

 

고지식하고 성실한 농군 응오는 추수를 해도 빚잔치 하고 나면 남은 것 하나 없이 빚만 도로 쌓이는 현실에서 병석에 누워있는 아내를 보다 못해, 자신이 1년 내 농사지은 벼를 '도둑질'할 수밖에 없었다. 형에게 잡힌 동생 응오는 울면서 절규했다.

 

 

 

 

 

"내것 내가 먹는데 누가 뭐래!"

 

 

 

 

 

자기가 농사지은 것을 도둑질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묘사될 정도로 일제시대 때 소작농들이 당한 수탈은 끔찍했다. 조선시대 이래 지주와 관료들에게 수탈당해왔던 농민들에게 '경자유전'이라는 원칙은 숙원이었고 이상향이었다.

 

 

 

 

 

따라서 해방 직후 인구 80%가 농민이었던 당시에 농지개혁은 우리 사회 제1의 시대적 과제였다. 당시 영호남 가릴 것 없이 건준이나 인공 등 좌익 정치단체가 농촌에서 큰 지지를 받게 된 것도 사실 이 토지개혁에 대한 농민적 염원이 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8년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남한에 난립했던 수십 개 정파들의 입장을 갈라 놓았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익 민족주의자 일파와 남로당 및 좌파들은 이승만의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제헌의회에 참여한 정치 일파들 역시 복잡한 정파들로 뒤엉켜 있었으나, 크게 보면 독립촉성회 등의 친이승만계, 지주세력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 조봉암 등의 소장파들을 주축으로 한 무소속 구락부 등의 중간파로 갈려 있었다.

 

 

 

 

 

중간파와 두 개의 보수 정당만이 참여했던 5.10 선거에서도 입후보자들은 한결같이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내걸 정도였다. 그리고 제헌 의회에서 제정된 제헌 헌법에서도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서 정한다"라며 농지개혁 실시를 명문화했다.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파격적으로 일제시대 때 공산주의자쳤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고 토지개혁의 과제를 맡겼다. 농림부 차관도 좌파계였던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농업 이론가로 활동했던 강정택이었다. 실무 담당자인 강진국 농지국장 또한 열렬한 조봉암 신봉자였다. 비록 북한의 토지개혁 정책이었던 '무상몰수, 무상분배'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들이 제출했던 토지개혁안은 당시 남한에서는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친농민적인 정책이었다.

 

 

 

 

 

연간 수학량의 15%를 3년 거치 한 후에 10년 상환, 자작농 소유 상한은 2정보(편집자 주 : 땅 넓이의 단위)로 하고 농지 매매 및 소작 임대차를 금지하는 것이 주요 골자였기 때문이었다.

 

 

 

 

 

농림부의 이러한 친농민적 개혁안에 지주 계급을 대변하던 한민당 계열의 반발은 극심했고, 의회 내에서 지연책을 펼치며 방해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이 법안은 이승만 계열과 중간파의 연합으로 소출량의 15%를 농민이 5년 동안 상환하는 것으로 조정되어 통과되었다.

 

 

 

 

 

이후, 국회프락치 사건 등으로 개혁적이었던 국회내 소장파 그룹은 몰락했다. 국회는 양당제 비슷하게 크게 이승만계열과 한민당계열로 나뉘었다. 이때 한민당계는 농지개혁법안을 지주에게 다소 유리하게 개정하려고 했지만 이승만 계열은 토지개혁 법안을 거의 원안에 가깝게 관철시켰다.

 

 

 

 

 

그리고 한국 전쟁시 법정 쌀값은 시중 값의 30~40%에 불과했으며 인플레율은 거의 1,000% 가까이 되었으니, 지주들이 현금으로 보상받은 금액의 가치는 거의 휴지값에 불과했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난 직후 지주 계급은 완전히 몰락했다. 그리고 농민의 90% 이상이 자영농화 되었다.

 

 

 

 

 

이것은 소설 '만무방' 속 소작인들의 비참한 현실이 주를 이루었던 1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던 혁명적 변화였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을 위아래 계층으로 이동시키고 뒤섞이게 한 한국 전쟁은 사회문화적으로 잔존하던, 기존의 반상의식 같은 봉건적 의식마저 뿌리채 뽑아버렸다.

 

 

 

 

 

자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칭송받는 브라질 대통령 룰라의 개혁 정책 중에서 가장 찬사를 받는 것이 다름 아닌, 농민 보조금 지급 조건에 학교 진학을 내건 것이었다. 농민들의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지금까지도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와 필리핀에선 토지개혁이 아직 사회적 과제로 남아있다. 남미지역에 수십년째 잔존해 있는 무장투쟁 세력의 대부분은 농민 출신이다. 이들의 핵심 요구는 '토지개혁'이다.

 

 

 

 

 

이 같은 남미의 현실과 비교하면 당시 토지개혁이 한국 사회에 가져다준 의미는 가히 혁명이라 불릴 만큼 심대했고 강한 평등의식을 한국인에게 심어주었다.

 

 

 

 

 

자기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은 지주가 아닌 자기 가족을 위한 노동으로 정말 밤낮으로 토지를 경작하였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여기서 나온 잉여 생산물로 자식들을 교육시키며 이들의 출세를 위해 헌신할 수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주대환은 토지개혁이 가져다준 사회경제적 의미를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필자는 1954년생이니 전후세대라 할 수 있다. 우리 친구들은 한날한시에 전국에서 꼭 같이 국립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 동류의식과 평등의식이 있다. 달리기든 공부든 주먹이든 모두가 경쟁상대였다. 간혹 부자 집 아이들을 편애했던 선생님들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비난을 받는다. 그만큼 우리는 공평한 걸 좋아한다. (...)

 

 

 

 

 

나라가 망하면서 철저히 망하니, 왕족이니, 양반 귀족이니 모든 지배층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근대화를 주체적으로 하지 못하니 사대부, 전통지식인들이 존경받지 못했다. 식민지를 거치고, 토지개혁을 하고, 전쟁을 거치면서 전근대의 잔재는 일소되었다.

 

 

 

 

 

무엇보다 토지개혁의 영향이 실질적이다. 70퍼센트에 가까운 소작농들을 자영농으로 바꾸었다. 바로 그 자용농이 대한민국 국민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들의 독립불굴과 근검절약의 정신이야말로 국민정신이 되었다. (...) 숱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 파괴와 희생이 있었지만, 바로 그 전쟁을 통해서 어떤 혁명도 이루지 못할 만큼 전근대적 전통과 신분 질서의 잔재를 철저히 청소하였다. 결과만을 놓고 보면 그것은 거대한 사회혁명이었다."(주대환, "편애 못참는 한국인, 복지국가 가능성 있다", [프레시안]2010.6.1)

 

 

 

 

 

이러한 토지개혁은 한국인의 성격도 완전히 뒤바꾸었다.

 

 

 

 

 

'빨리빨리 문화', '부지런한 근면성' 등은 자주 거론되는 현대 한국인의 특성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만 해도 일본인이나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민족성을 지금의 평가와는 정반대의 특질들로 파악했다.

 

 

 

 

 

조선 말기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친구 조지 캐넌이 우리나라에 잠시 왔다가 길거리의 풍경을 본 후, 루즈벨트에게 충격적인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한국을 돌아보니 입과 코에 붙은 파리마저 떼어낼 생각도 안하고 할 일없이 낮잠을 자며 지내는 사람들로 길가가 가득차 있다고 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 나라라고 한들 나라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일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게 어떻겠냐고 말할 정도였다.

 

 

 

 

 

구한말과 일제 시대 때 한국인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대개 무능하고 게으르다는 것이었다.

 

 

 

 

 

100여년 전, 세계를 여행하고 많은 기행문을 남긴 비숍여사가 우리 나라를 묘사한 내용도 대동소이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 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곧 그녀는 러시아의 자치구 프리모르스키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을 보고는 이내 다른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

 

 

 

 

 

“같은 한국인인데도 정부의 간섭을 떠나 자치적으로 마을을 운영해 가는 그곳 이주민들은 달랐다. 깨끗하고 활기차고 한결같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국의 남성들이 지니고 있는 그 특유의 풀죽은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심과 게으름과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근성은 어느새 주체성과 독립심으로 바뀌어 있었고, 아주 당당하고 터프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기생충으로까지 평가한 관료들과 지주들의 극심한 수탈에 신음했던 농민들의 자멸적 상황. 그 조건에서 벗어나 자기의 토지를 일구게 된 이주 조선인들이 동시대의 자국민들과 전혀 다른 성격으로 순식간에 변모해 있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한국의 토지개혁은 바로 이와 같은 한국인의 '성격 변화'를 이끈 근본 바탕이 되었고, 이것은 후에 박정희의 군사주의와 결합된 발전주의에 대중들이 열성적으로 호응하여 '잘살아보세'라는 집합적 의지가 모아진 동력이 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근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후 박정희가 추진했던 산업화의 노동력 수요를 충당하고도 남을만한 양질의 값싼 노동력 공급을 가능케 했다. 특히 지주계급의 해체는 개발을 주도하는 국가의 계획자들에게 장애가 될 만한 사회계급이 제거되는 효과까지 가져왔다.

 

 

 

 

 

 

 

 

2. 남한의 토지개혁과 사회주의권의 토지개혁

 

 

우리가 운동권 시절 한국 현대사의 교과서로 보아온 '해방전후사의 인식'에서 이승만 정권시절의 '토지개혁'은 북한에 비해 매우 불철저한 개혁으로 폄하되었다. 그것도 북한에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토지개혁의 영향 때문에 마지못해 실시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실제 그런 점도 없지 않았다. 조봉암의 농림부에서 마련한 '토지개혁법안'을 한민당에서 대폭 수정하고 후퇴시키려고 할 때, 소장파는 물론 친이승만 세력들조차도 "공산주의자들이 무상몰수, 무상문배를 주장하는 마당에 이와 같이 지주를 위한 지주만을 생각하는 토지 분배를 구성해 가지고 농민들을 민국 정부로 유도할 수 있는가"(이정회 소속 유재근 의원 발언)라며 반발할 정도였다.

 

 

 

 

 

따라서 소장파가 제거된 국회에서였지만 이승만계 세력들이 한민당-민국당 계열의 지주 중심적 농지개혁 시도를 제압하고 개혁적 내용을 그런대로 끝까지 고수하게 된 것은 그런 외부적 영향이 매우 컸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전후사'까지만 공부하고 불행하게도 ‘전후사’는 거들떠 보지 않았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이후 집단농장제로 변질되면서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철학이 사라졌다.

 

 

 

 

 

사회주의권에서 실시한 토지개혁은 모두 국가몰수 체제였고 그것은 때로 지주제보다 훨씬 가혹한 농민 수탈체제로 변질되었다. 소련에서 처음 실시한 농업 집단화는 엄청난 생산성의 저하를 가져왔는데, 이는 농촌에서 트랙터 대신 쟁기 따위를 끌던 소나 말 같은 가축의 수가 극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자기 가축이 몰수당할 것을 겁낸 농민들이 미리 도축해 버리거나, 곡물을 강제로 도시에 보내다보니 가축에게 먹일 사료가 부족해졌던 것이다. 농업 부문이 이렇게 와해되면서 30년대 소련은 심각한 대기근이 발생했고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은 대약진 운동으로 소련보다 오히려 더 철저하게 농지를 국유화했다. 심지어 농기구마저 집단화하였다. 이로써 2천만명 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하게 되었으니, 20세기 최악의 대참사로 기록될 만한 일이다.

 

 

 

 

 

북한 역시 전후 복구체제가 끝난 직후힌 60년대 초부터 이미 식량 부족을 경험했고, 소련과 동구권으로부터 식량을 수입하고 있었다. 북한은 대외적으로는 매년 쌀 생산량이 급증한다는 통계를 발표했지만 이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신뢰성이 떨어졌다. 예컨대 73~4년도에 3년간 2배라는 유래없는 알곡생산증가를 기록했다고 자랑했지만, 바로 그때 유래없이 300만톤에 가까운 분량을 대량 수입하였다.

 

 

 

 

 

아무튼 북한이 90년대 대량 아사자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사회주의권 붕괴 등 대외적인 영향이 직접적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집단 농장 체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등소평이 개혁, 개방 정책으로 중국을 발전시키기 시작한 시점인 80년대에 이르러서야 중국에서 본질적인 토지개혁이 시작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1978년 11월 24일 밤, 중국 안휘성 봉양현 소강촌의 허름한 농가에 18명의 농민이 모였다. 이들은 대표 엄준창(嚴俊昌)이 펜으로 쓴 문서에 서명했다. 100자도 되지 않는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농지를 개별 농가에 나누어준다. 이로 인해 간부가 감옥에 갈 경우 나머지 사람들이 그의 자녀를 18세까지 돌본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소강촌 농민들이 서명한 문서는 중국 농촌정책의 근간이었던 인민공사 제도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생사결의문'이었다. 1958년 설립된 인민공사는 농촌 마을을 집단농장으로 묶고, 경제·행정·교육·군사활동 등을 관할하는 실질적 정부 조직이었다. '반동(反動)'으로 내몰릴 위험을 감수한 소강촌 농민들은 이듬해 가을 평년의 5배에 달하는 엄청난 식량을 수확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농민이 책임지고 생산목표를 달성한 뒤 남은 농산물을 스스로 처분하는 도급제 생산방식인 가정승포제(家庭承包制)가 집단농장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생산방식은 2년 후 등소평의 추인을 받아 전국으로 확대됐다.

 

 

 

 

 

80년대 진보 지식인들은 해방 전후 체제를 설명할 때 북한과 비교하면서 남한의 토지개혁을 불구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후의 전개과정을 비춰보면, 그들은 참으로 속절없는 허구적 관념론자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3. 여촌야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우리나라의 정치적 지지 판도를 크게 보면, 여촌야도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런 경향은 50년대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관철되고 있다. 이것을 두고 농촌의 생태적 보수성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해방 직후 반란의 근거지는 오히려 농촌이었다. 4.3 항쟁, 여순반란사건, 10.1 대구 반란 등 좌익의 투쟁이 활발히 전개된 곳은 도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농촌은 토지개혁으로 말미암아 저항의 근거지에서 지지의 근거지로 변모하게 되었다.

 

 

 

 

 

박명림 교수의 논문([1950년대 한국의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은 이 과정을 잘 분석해놓았다. 내용의 일단을 살펴보자.

 

 

 

 

 

원래 이승만은 45년에서 48년까지 한민당과 긴밀히 연대하는 동안 농민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지 않았다. 당시 농민을 동원한 것은 오히려 이승만-한민당 연합과 가장 강력하게 맞서있었던 공산주의세력이었다. 농민들은 10월 항쟁과 빈발하는 소작쟁의를 통해 이들 연합에 강력하게 저항하였었다.

 

 

 

 

 

그러나 공산세력과의 투쟁이 분단이라는 역사적 귀결로 정렬되고 48년에서 50년 사이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이승만은 한민당-민국당과 결별하고 농민과의 연대를 높여갔다. 농촌에서 지주들의 농민장악력은 토지개혁을 통해 결정적으로 침식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 종식되어 공산주의자들과 체제투쟁이 끝나자 이승만과 민주당은 마침내 생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제로섬 투쟁, 즉 60년 4월을 향한 긴 투쟁을 시작하였고 농민들의 정치적 지지는 민주당을 떠났다.

 

 

 

 

 

농촌이 이승만정권의 지지기반으로 변모하여가는 동안 도시는 그에 대한 반대의 근거지로 변화되엇다. 그리고는 이승만-자유당과 민주당의 대립이 독재 대 민주주의로 정렬되면서 도시민들은 민주당을 대안으로 밀어올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로부터 1950년대의 가장 핵심적인 정치균열인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균열이 왜 여촌야도, 도농균열로 나타났는가 - 도시가 왜 민주주의의 근거지가 되었고, 그 귀결이 왜 4월 혁명이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지배당과 반대당의 균열이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대결로 전화하면서 결국 여촌야도라는 가장 뚜렷한 정치균열구조를 형성하였던 것이고 그것의 한계는 2공화국과 61년의 군사쿠데타까지 연결되었다. 민주당의 전신인 한민당의 원래 근거지는 농촌이었으나 사회균열구조의 급격한 변모는 정치적 근거지를 농촌에서 도시로, 완전히 정반대로 변전시켰던 것이다.

 

 

 

 

 

‘반공’의 범위로 좁혀진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근대화로 추동된 ‘자유주의’는 자연스레 민주당-민국당의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절대다수의 인구가 농민이었던 조건에서 도시는, '산업화에 앞선 근대화'의 결과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월남민과 이농민 등으로 도시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이상의 고급학교가 10배 가까이 증가하면서 교육의 팽창 역시 큰 폭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때 학교 교육의 주요 이념은 반공주의와 함께한 근대화와 민주주의였다.

 

 

 

 

 

산업화의 부재로 부르주아와 노동계급의 형성이 지체된 상태에서 토착 지주 계급마저 사라져버린 50년대. 한국 도시는 계급적 진공상태와 다를 바 없었다.

 

 

 

 

 

이 공간은 주로 소수의 도시 중간층과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던 도시 빈민층 등 주로 주변부 계급들로 채워졌다. 불안정한 미래와 생활고 등의 문제에 노출되었던 이들은 주변부 계층만이 아니었다. 개국 이래 최초로 광범위한 대중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기 시작한 학생과 엘리트층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근대 교육 속에서 반공과 동시에 ‘민주주의’의 이념 세례를 함께 받았던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계급적 투쟁과 합의의 산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진 어떤 윤리적 덕목에 가까웠다.

 

 

 

 

 

도시는 ‘사회적 잉여’로 남게 될 불안을 안고 살아야만 했던 이들 계층들로 계속 들어차고만 있었고, 이런 요소들이 도시를 체제 저항의 공기로 가득 차게 했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이승만은 ‘토지 개혁’ 이외에는 별다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미 80이 넘은 이 노회한 정치인에게 산업화와 근대화에 대한 역량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유교적 이념과 미국식 자유화가 기묘하게 얽혀있는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방식은 도시민들과 엘리트 계층의 저항 의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를 대체할 정치세력은 민주당밖에 없었다. 전쟁과 학살 등으로 인해 마치 태풍이 휩쓸고 가듯 남한 내의 좌익과 중간파들 대부분은 모두 북쪽으로 쓸려 나갔고, 잔존해있던 소수의 중간파들은 조봉암의 죽음으로 구심마저 잃고 자유당과 한민당으로 형성된 지형 안에 산개해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태생적으로 친일 지주와 친일 관료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정당이었다. 계급적 성격으로 본다면 오히려 가장 반동적이며 보수적인 정당이었다. 더구나 그들 상층부들은 신분적 의식마저 끈적하게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건국 직후부터 이승만에 대한 도전세력으로 성장해 왔다. 하지만 이념과 능력 면에서 결코 이승만을 뛰어넘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4.19 이후 민주당의 무능한 정치행태는 예고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록 도시민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사회 계급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또한 좌파와 중간파마저 거세된 정치 공간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대안 부재에 따른 소극적 지지의 성격이었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5.16 당시 무기력하게 정권을 내주게 된 근본 배경이기도 하다. 개인 윤보선이나, 장면 등의 나약한 성정은 부차적인 요인일 따름인 것이다.

 

 

 

 

 

 

 

 

4. 5.16세력의 출현과 산업화의 원동력

 

 

5.16으로 한국 정치 무대 전면에 등장한 군부엘리트들은 이승만과 민주당 정권의 구엘리트들과 완전히 종류가 다른 정치 집단이었다.

 

 

 

 

 

민주당의 주류 엘리트층은 식민지 시기의 수혜자는 아니더라도 기득권이 박탈된 계급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해방 이후 혼란이 왔을 때 구질서가 최소의 변화와 더불어 온존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토지 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보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법질서를 강력하게 요구했던 완강한 극우보수 세력이었다.

 

 

 

 

 

예컨대, 60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병옥은 경무국장으로 있으면서 친일 경찰을 다시 대거 등용했다. 이로 인해 다른 정치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신을 꺾지 않았다. 조병옥의 극우 반공주의는 4.3 사건의 끔찍한 학살을 주도했던 것에서 잘 드러나는데, 심지어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빨갱이 소굴 제주도 전토에 휘발유를 뿌리고 한꺼번에 태워버려야 한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비록 이승만의 권위주의에 저항할 때 민주주의의 치장을 하였지만 이승만의 라이벌이자 동시에 민주당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조봉암'을 이승만 정권이 법살할 때, 민주당은 마다하지 않았다.

 

 

 

 

 

5.16의 주역들이었던 군부엘리트들은 최빈층, 빈한한 농민 출신들이 대다수였으다. 비록 친일로 비판된다 하더라도 해방 후 북한으로 갔던 동시대의 젊은 세대들과 유사한 계급적 배경을 갖는 존재들이었다.

 

 

 

 

 

즉, 4.19의 결과로 탄생한 민주당을 이끈 윤보선과 장면과는 질적으로 다른 집단이었던 것이다.

 

 

 

 

 

99칸의 대저택의 만석꾼 자식으로 태어나 식민지 시절 '아시아에서 온 왕자님'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30년대에 영국 에덴버러 대학을 나오고, 카퍼레이드로 화려하게 선거운동을 했던 윤보선.

 

 

 

 

 

역시 일제시대 때 미국 뉴욕에서 유학한 엘리트로서 선거 유세중 여러 사람과 함께 투숙한 여관에서 이불이 더럽다며 혼자서만 덮지 않고 시골 주막에서 떠준 막걸리는 표주박이 더러워 마시지 못했다는 일화를 남겼던 장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황소를 로고로 삼았던 공화당에서 밀짚모자를 쓰며 선거 유세를 하던 박정희와 그들 군부엘리트 세력들.

 

 

 

 

 

바로 이런 점에서 공화당이 당시 가난한 농민들의 간절한 바램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말하자면 사태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공화당이 가난한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을 때, 원래 지주 계급의 당이었던 한민당의 뿌리로부터 나온 무능한 민주당보다는 가난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백성들의 생각은 쿠데타라는 절차적 정당성 문제에 매달리는 지식인들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이 성삼문의 충절을 기리면서도 수양대군과 신숙주의 유능한 정치가 주는 혜택을 마다하지 않았던 백성들의 이중적 태도인 것이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역사의 우여곡절이고 복잡함인 것이다."(주대환)

 

 

 

 

 

"5.16 세력들은 이처럼 민주당의 구엘리트들과는 상반된 계급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과 동시에 미국식 교육으로 훈련된 군사경험과 특히 전쟁의 경험으로 당시 한국 사회에서 가장 근대화된 집단이기도 했다.

 

 

 

 

 

즉, 이들의 정향은 군사주의의 중심적인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도구적 합리성과 기술관료적 경영주의로 특징되었고, 목적합리성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조직의 목표를 수행할 수 있는 근대적 조직이었다."(최장집)

 

 

 

 

 

한국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미국이 대한원조와 경제발전을 지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조건을 구체적인 결과로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국내자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조직화하고 동원해 내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위와 같은 군부 엘리트들의 성격은 당시 산업자본주의로 이행하려는 한국의 근대화에 매우 중대한 요인으로 파악될 필요가 있다.

 

 

 

 

 

물론, 5.16 세력은 쿠데타 할 당시부터 경제 발전에 대한 치밀한 전략을 준비해놓았던 것은 아니었다. 쿠데타 직후 1~2년은 부패척결, 강제적 물가 정책 등으로 좌충우돌했고 초기 경제 계획에서 수출주도형 경제 모델이 제시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초창기 경제계획은 남미와 비슷한 민족주의적/수입대체형 공업화 전략 속에 수출은 어디까지나 보조적 목표로 설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제개발 계획을 시행한 후 수출액이 목표를 초과하며 예상치보다 호조세를 보이자, 여기에 자신감을 얻어 이후 계획은 수출주도형 경제 모델로 넘어가게 되었다.

 

 

 

 

 

지금에야 수입대체형 산업화에서 수출주도형 모델로 전환된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 세계적 기준에서 본다면 결코 일반적으로 통용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입대체형 산업화의 경제이론은 개발도상국에서 크게 지지받았었고 실제 남미는 그런 전략을 채택하여 60년대까지 성공적으로 발전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브라질의 기적'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모델은 곧 시장 수요의 한계로 인하여 곧 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의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미에서 수입대체형 산업화가 수출 중심으로 전환되지 못했던 것은 국내 산업자본가들의 현상 유지라는, 기득권 보호의지가 강력하게 작동한 것이 컸다. 때문에 그들은 보다 손쉽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국내 시장 확대에 더 힘을 쏟게 되었다. 따라서 사업영역을 수직적 계열화하고 국내 시장 보호를 위한 고평가 환율을 고집하여 결과적으로 수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수출을 하려면 많은 정보와 보조 및 연구가 필요한데 이를 유리하게 할 정부의 의지와 역량(통화금융, 관세정책)역시 부재하였다. 즉, 남미의 산업자본가들에게 수출은 수입보다 '위험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남미와 비교해볼 때,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을 일찍부터 채택한 한국의 경제정책은 그 적실성에서 평가받을만 하다. 물론 박정권은 수입대체 산업화와 유사하게 높은 관세와 유치산업 등으로 국내시장을 보호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 향상의 도구로 활용된 요소가 컸다. 산업화와 근대화에 대한 종교적 열정을 갖고 있던 권위주의적 정권은 기업이 국내 시장에 안주할 수 없도록 가혹할 정도로 기업을 통제했고, 이는 한편으로 자본가들의 기업가 정신을 지속적으로 추동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주체적 조건은 지주 계급의 소멸로 인한 근대화,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세력의 부재라는 사회계급적 조건과 결합되었다. 이는 산업자본주의로의 근대화 드라이브가 추진될 수 있는 백지위임장에 가까운 호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이 점은 앞서 말한 '토지 개혁'의 직접적 결과로서, 비록 빈곤이 전반화된 공간이었지만 평등화된 사회적 상황은 근대화에 대한 집합적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한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가 여실히 보여주듯 궁핍으로부터 탈피하겠다는 집합적 의지가 발전주의와 깊이 결합되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평등했던 사회적 조건이 불평등이 극심했던 남미나 다른 개발도상국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정부 주도 산업화에 대한 대중적 호응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으며, 바로 이런 국민적 에너지야말로 박정희가 성공적인 산업화를 지속하게 된 근본적인 동력이었다.

 

 

 

 

 

 

 

 

5. 박정희 정권이 남긴 유산과 함의

 

 

산업화를 통해 고도성장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박정희의 업적은 분명 평가받을만 하다. 그리고 그가 이끌던 세력의 주체적 역량은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허약한 정치적 의지, 파당적 이해관계에 대한 집착 등에 허우적대던 당시 민주당의 역량과 비교해볼 때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이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그를 영웅적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 이유는 없다.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던 국가주도적 개발방식 및 산업정책, 자본통제 등은 그의 독창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가 만연한 것처럼 케인스주의에 바탕을 둔 개입주의 정책은 당시 세계사적으로 보편화된 시대정신이었고 동시대에 승승장구했던 사회주의권의 영향도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관료 엘리트들의 아이디어에 많이 의존한 것이기도 했다.

 

 

 

 

 

또 그 당시 공업화에 일정한 성과를 보인 북한과의 경쟁, 일본과의 지정학적인 조건 및 비교적 관대했던 미국의 수출시장이라는 외부적 조건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승만 정권 시기 마련된 토지개혁이라는 사회, 경제적 토대는 그것을 근본적으로 가능케 했던 중대한 요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개인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한국의 경제성장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박정희가 없더라도 무조건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가정만큼이나 부질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박정희를 통해 한국이 고도 성장을 하게 된 주된 요인을 분석하고 현재의 시점에서 의미 있게 받아들일 요소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생산적인 태도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장하준과 정승일 등은 박정희 발전 전략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던 제조업 중시, 산업정책과 자본통제 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정책으로 채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동력은 정치적 역학관계와 밀접하다. 때문에 정치적 문제를 좀 더 심도 있게 짚어 나갈 필요가 있다.

 

 

 

 

 

박정권 하에서 창출되고 육성된 재벌은 국민적 자산이랄 수 있다. 재벌 오너들의 기업가적 헌신과 노력과 같은 주체적 역량은 분명 평가할만 하지만 그들이 성장하게 된 모든 자원은 국가적 지원 속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시장 보호와 정책 금융 등을 통한 재벌 지원은 결국 국민의 일정한 부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

 

 

 

 

 

'시장은 좋은 하인, 나쁜 주인'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장(및 기업)은 국민 경제의 이익이라는 목적 하에서 도구로 활용될 때는 유용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권력)이 되면 불평등이 심화되고 그 결과 국민 국가의 공동체성이 크게 훼손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더구나 자본주의 체제는 대자본을 거느린 자들이 기본적으로 주도권을 갖을 가능성이 크므로 이들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민주주의를 가늠하는 주된 잣대일 수밖에 없다.

 

 

 

 

 

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정치화된 군부를 병영으로 퇴진시켰다. 민주화는 경제적 시장 자유화와 동일시되었다. 그 결과 재벌의 힘은 정치의 통제를 벗어날 정도로 팽창하게 되었다. 아니 바로 그 자신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주인'이 되어갔다. 박정희 사후 김영삼을 포함한 '민주 세력'이 실패하게 된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이다.

 

 

 

 

 

 

 

 

 

 

박정희 정권 때는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으로 시장을 '하인'으로 비교적 성공적으로 관리했고,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하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민주화된 지금 현재 그와 같은 통치 방식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바로 이 지점에서 최장집이 제기한 민주주의의 과제가 대두된다.(이하 최장집 외, [어떤 민주주의인가] 참조)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각기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회집단들이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대표되어 일정한 내용의 잠정적인 합의를 이루어 결정에 도달하는 제도적 장치"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민주주의를 선거에 한정시키는 관점’이나 ‘사회운동과 시민의 직접 참여’로서 실현한다는 관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전자는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지지하는 방식의 민주주의며, 그들의 눈에 민주주의는 생산적이지 못하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가급적 좁은 제도적 실천에 묶어두고 싶어한다.

 

 

 

 

 

가령 '여의도정치'를 혐오하는 이명박이나 당정 분리나 국민 경선제 등으로 정당의 역할을 최소화하려 했던 노무현 등도 이같은 관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 볼 수 있다.

 

 

 

 

 

후자는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선 관점으로서 정치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며 공동체 전체의 선을 추구하는 것을 정치의 역할로 바라본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현실 정치인들의 행위는 대의를 위한 연대가 아니라 갈등과 분열을 일삼으며 이전투구를 벌이는 집단들로 매도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보면 민주주의와 정치의 가치는 곧 도덕성 차원으로 치환된다.

 

 

 

 

 

대표적인 것이 박원순의 참여연대 등과 같은 시민운동 진영이다. 이들은 준정당적 조직을 구성하여 어떤 사회집단의 이해관계와도 무관하며 공평무사한 판관의 입장에서 '시민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미명하에 반정치주의적 이념을 간접적으로 확산시켰다.

 

 

 

 

 

더욱이 이들은 이러한 반정치주의를 무의식적으로 조장하며,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면서 정치권에 진입하는 모순된 존재들이기도 했고, 그 영향력은 정치권 전반에 반정치주의를 심어놓는 데 일조했다.

 

 

 

 

 

이런 까닭에 진보파들 역시 결과적으로 정치를 비효율적으로 보는 보수파들과 반정치관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익과 부분 이익의 자유로운 표출을 전제하지 않는 공익과 전체 이익의 논리는 민주주의와 배치된다. 갈등하는 이해 집단들의 소리가 조직되고 대표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루어지는 정치의 장이 개방되지 않는다면, 사회적 약자나 시장에서의 열패자들을 포함해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권익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중심적 제도는 바로 정당이다. 정당은 그런 사회적 세력들의 이해를 조직하면서 경쟁 정당과의 충돌과 합의를 통해 세력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고 그렇게 잠정적으로 합의된 내용들이 다름 아닌 ‘공익’이다.

 

 

 

 

 

그러나 사회 집단 간의 이해관계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한국 정당의 대표성 부재와 정당 체제는 바로 민주주의 위기와 직결되는 구조로 만성적으로 굳어져 갔다.

 

 

 

 

 

수백만 명에 이르는 근로대중과 자영업자를 대표하는 여,야 국회의원의 숫자가 인구의 1%도 안되는 법률가 출신들과 비교하여 존재감조차 없을 정도로 턱없이 부족한 한국 정치의 현실은 이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심지어 근로대중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진보정당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17대 국회에 처음 입성할 당시엔 초창기 노동자 등 근로대중 출신의 비율이 비교적 높았지만 19대에 이르러서는 그 비율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그 자리에는 정파 엘리트들이 둥지를 틀었다.

 

 

 

 

 

한때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던 법조 엘리트 이정희가 어떤 한 중소기업의 파업현장에 참석한 후, "같은 나이 또래였지만 이렇게 힘든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는지는 잘 몰랐고 충격적이었다"라는 발언은 곱씹어볼만한 진술이다.

 

 

 

 

 

이처럼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덕주의적 접근으로 말미암아 정치가 현실 사회 집단을 대표하지 못한 채 인간적인 토대없이 민주주의를 공허한 껍데기로 만들어 버렸다. 그로 인해 오늘날의 만성적 정치위기와 허약한 정당체제가 심화되었다.

 

 

 

 

 

그 결과 지금의 한국 사회는 국가 관료제와 거대 사익집단이 지배하며 불평등한 체제로 고착되었다.

 

 

 

 

 

해방이후 격렬한 계급투쟁과 사회 개혁에 대한 민중적 요구는 비록 아래로부터의 직접적인 관철에 실패하며 한국 전쟁이라는 파괴적 참사를 불러일으켰지만, 그것은 이승만의 토지개혁과 박정희의 산업화로 수렴되어 위로부터의 개혁적 수용의 형태로 관철되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사회적 토대가 성공적으로 구축되었고, 우리는 지난 시절과 전혀 다른 토대 속에서 전혀 다른 사회경제적 요구에 놓여 있다.

 

 

 

 

 

박정희의 성과와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변화된 사회 경제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조건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박정희의 성공을 일정하게 가능케 했던, 즉 권위주의적 통치로 억누르며 고도 성장을 했던 방식을 대체하는 정치적 힘을 새롭게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윤리적 문제로 치환했던 4.19 민주당 정권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이후 정치권은 사회경제적 문제의식이 결여된 4.19적 민주주의로 박정희를 극복하려고 했다. 이러한 퇴행적 민주주의가 오늘날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한 정치적 불신과 무관심을 잉태하게 된 근본 배경이다.

 

 

 

 

 

따라서 박정희를 향수하는 대중적 무의식이 발현되는 지금,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한 고찰없이 그를 영웅화하는 것과 악마화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짓도 없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의 통치 스타일을 부분적으로 코스프레하는 이명박에 대한 조롱이 있고, 반사적 대립물로서 윤리적, 절차적 정당성 문제에만 매몰되어 허우적대는 야권에 대한 냉소가 있다.

 

 

 

 

 

그러면서도 이 두 세력 모두 ‘능력 있는 박정희’나 ‘착한 박정희’에 대한 소망을 묘하게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박정희의 그늘 속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격렬한 대립양상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의 아이러니적 비극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가카가 다 잘 해주실 거야”라는 희망은 “노짱(슨상님)이 그럴 리가 없어”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심성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거의 승패여부와 관계없이 정치 세력의 재구성하기 위해 혹은 정당 체제를 강화하기 위에 문제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파고드는 것이 우리가 구축해야 할 정치적 멘탈리티이다. 

 

 

 

 

 

 

 

 

6. 토지개혁의 정신으로 복지국가를 바라보자

 

 

 

 

 

 

 

 

 

 

다시 토지개혁 문제로 돌아와 보자. 앞서 서술한 대로 소작제의 극심한 불평등에 신음했던 당대의 현실에서 농지개혁은 제1의 사회적 과제였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면서 평등화된 사회계급적 구조는 대한민국의 발전에 중대한 조건으로 작용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매우 소중하다.

 

 

 

 

 

오늘날 ‘복지국가’ 라는 이슈는 반세기 전 ‘토지 개혁’ 문제에 비견될 만큼 중대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정치인(비록 낙선했지만)중에 유일하게 토지개혁의 사회경제적 의미와 현대적 적용을 주장했던 주대환의 진술은 깊이 음미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다소 길게 인용되더라도 양해바란다.

 

 

 

 

 

“그동안의 경쟁의 결과 토지개혁의 효과도 거의 소진된 듯하다. 이제 부동산 자산의 불평등 지수는 토지개혁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강남의 아파트를 가진 사람과 갖지 못한 사람으로 대비되는 부동산 소유의 양극화도 결국 토지 소유의 양극화로 볼 수 있다.

 

 

(...........)

 

 

여기서 한국 사회의 위기가 있고, 그 위에서 격렬한 정치적 변화도 일어나고 있으며, 문화와 현실, 의식과 생활의 격렬한 충돌이 있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아직 양극화 사회, 격차 사회, 계급 사회를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의 미래에 대한 비전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종종 "'큰 미국'과 '작은 스웨덴' 가운데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식으로 던져지는 질문이다. 자본주의 선진국의 문턱에 선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과연 한국은 복지국가로 갈 수 있을까?

 

 

지역 연고를 가진 보수 양당이 대립하는 정치구도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보수주의+자유주의' 세력이라는 점에서 여야가 다를 바 없다. 유럽에서 보는 것과 같은 강력한 사회민주당이 없다. 진보파 지식인들은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멋으로 안다. 노동조합의 조직율은 겨우 10%밖에 되지 않아 미국보다 낮다. 개인주의, 연고주의 문화는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다. 대학과 언론은 미국 유학 갔다 온 사람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요컨대 유럽식 복지국가를 실현할 힘과 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한국에서 복지국가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역사,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 근거한 주장이다. 어떤 외국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한국의 특수한 사회경제적 발전 과정이, 그 경로가 복지국가를 가리키고 있다.

 

 

(......)

 

 

2010년 5월의 조사에서는 질문의 표현을 조금 바꾸었는데 '북유럽식 복지국가 사회'에 손을 든 사람이 무려 67퍼센트에 이르고, '미국식 신자유주의 사회'에 손을 든 사람이 24.2퍼센트에 불과하다. 표현을 바꾼 영향도 있겠지만, 6년 사이에 생각이 바뀌기도 하였다.

 

 

(.......)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이러한 응답자의 비율이 지지 정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자연히 보수니 진보니 하는 정체성과도 상관없다. 지금의 이념적, 정치적 귀속감이 새로운 시대적 과제 앞에서 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혹시 국민들이 잘 모르고 대답하지는 않았을까? 복지국가로 가려면 세금 많이 내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까? 아니다. 일관되게 응답하였다. 전체 응답자의 72.1퍼센트가 "세금을 많이 내더라도 모든 국민에게 복지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

 

 

(........)

 

 

우리 사회의 미래상으로 46.6퍼센트가 '빈부격차가 크지 않은 사회'라고 응답하여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라고 응답한 21.6퍼센트보다 훨씬 많았다.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은 평등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토지개혁으로 자영농이 된 사람들의 자식, 손자들인 것이다. (.........)

 

 

건국하면서 토지개혁하고, 전쟁으로 전근대의 잔재를 일소한 한국은 1965년부터 1996년까지 31년간 연평균 7.3퍼센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초고속 경제성장을 하였고, 지난 30년간 민주주의를 실현하였다. 앞으로 30년간 복지국가를 실현할 것이라고 필자는 믿고 싶다.”(‘편애 못 참는 한국인, 복지국가 가능성 있다’ 주대환, [프레시안]2010.6.1.)

 

 

 

 

 

 

 

 

7. 소결

 

 

 

 

 

 

 

지금까지 토지개혁이 해방 이후의 현대사에 가져다준 사회경제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토지개혁이 어떻게 박정희정권으로 하여금 산업화에 성공하게 된 주/객관적인 요인을 고찰해보았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박정희를 극복하는 일이, 쿠데타의 절차적 정당성이나 공과를 평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동반하는 보다 깊은 문제라는 것도 파악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의 결핍이 아닌 과잉으로 고통받고 있다. 해방 직후의 상황처럼 불평등이 심화된 환경 속에서 장하준, 주대환이 제기한 사회경제적 과제가 놓여 있다. 국민적 지지를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과거 이승만과 박정희와 같은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이를 해결할 수는 없다.

 

 

 

 

 

여기서 민주주의적 해결이라는 정치적 과제가 도출되는 바, 지금까지 이해되었던 윤리적이고 절차적인 의미로 형해화된 민주주의는 문제를 오히려 더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기각되어야 한다.

 

 

 

 

 

즉, 민주주의는 ‘사회집단의 대표성 확대’라고 최장집이 정의한 정당 정치의 본령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작금의 여야 정치 현실에 비추어봤을 때 이런 정치적 과제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육사의 ‘초인’이 오기만을 기원할 일도 아니다. 결국 우리는 현재의 정치 구도와 체제 속에서 이것의 실현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최장집의 정치노선으로 주대환, 장하준의 사회 경제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상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크게 두 세 가지 길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민주당을 제대로 된 정당으로 만들 가능성이다. 그 역사적 뿌리가 지주계급에 바탕을 두고 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자유주의에 깊이 경도되어 있던 정당이었다고 해서 ‘진보적 정당’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노예제 지주계급의 정당이었던 미국의 민주당이 대공황 이래 뉴딜 연합을 통하여 흑인과 여성, 노동자들의 정당으로 탈바꿈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새누리당의 변신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보수적 개혁에 성공했던 전력이 있는 만큼 그때의 멘탈리티를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으니 이것도 성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이들이 바탕을 둔 지지세력 자체가 기득권에 강하게 연계되어 있어 그 가능성은 매우 제한될 것이므로 고려의 대상에서 일단 제외한다.

 

 

 

 

 

셋째, 제3의 정치세력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민노당-통합진보당과 같은 교두보를 마련한 경험도 있으니 불가능한 것만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보수 양당체제를 지속시키는 소선거구제와 지역구도라는 제도적 제약, 민주노총이라는 인적-물적 토대가 갖춰졌던 조직적 조건, 비록 많이 쇠락했으나 수 십년에 걸친 그들의 운동 자산 등과 비교해보았을 때 이 길도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 밖에 어떤 노선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우리가 제시한 과제는 결코 단기간에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보다 긴 호흡으로 이 문제를 대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나는 대선에 큰 관심도 없다.

 

 

 

 

 

어쨌든 앞으로 ‘대한민국의 뒤통수’ 시리즈는 바로 이 과제를 어떠한 방식과 내용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가를 중점적으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결론은 어떻게 나오게 될지 솔직히 지금 나도 잘 모르겠다. 씨바, 독자들의 열성적인 참여와 고견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열성 야권 지지층이 갖고 있는 한국 정치에 대한 통념적 인식 전반은 지금보다 훨씬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음  편에서는 좀 더 현재적인 정치 현안 문제를 디벼 보겠다.

 

 

 

 

 

 

 

 

ps: 정의감과 애국심이 넘치는 노빠 ‘야권 열성 지지층’을 본의 아니게 까게 되니까 나도 미안해 죽겠다. 사실 그런 성정은 정말 사회적으로 매우 소중한 자원이다. 그런데 정치 발전에 생산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그런 귀중한 에너지와 정념이 빠심으로 소진되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점 때문에 좀 더 가혹하게 딴지 독자들을 까대는 것임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내가 사디스트라서 그런 거 아니다.

 

 

찌는 더위 속에 쓰다보니 잉여력은 고갈되어가고 힘이 든다. 한 여름 독자 열분들의 건강과 건투를 빈다.

 

 

 

 

 

 

 

 

 

 

 

 

 

 

 

 

한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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