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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26. 목요일

펜더


 


III. 왜?


 


1. 모든 사람의 고통의 총량은 똑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절대적 가치 기준은 ‘돈’이다. 돈의 속살을 한 번 더 파고들면 ‘남들처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우리는 남의 시선이 두려워서, 남의 시선을 받기 위해 자신을 얽어맨다. 남들이 중형차를 몰기 때문에 나도 중형차를 몰아야 한다. 경차를 몰고 나가면 왠지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고(실제로 그런 시선이 있다), 남들이 100제곱미터(30평)대 중형 아파트에 사니 자신도 그런 아파트에 살아야 한다. 이 시선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돈이라는 절대적 가치 기준을 내세운다. 돈만 있으면 모든 고통과 번민이 해결된다는 환상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돈만 있으면 우리는 행복을 살 수 있다!”


 


과연 행복할까?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왜?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사더라도 사는 순간부터 행복의 강도가 점점 줄어 나중에는 그 물건을 사기 전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긍정적인 경험이나 부정적인 경험이나 동일하게 작용하는 심리적 기제다. 물질을 통해서 얻는 행복은 거의 대부분 짧은 순간의 희열로 끝난다.


 



 


기본적으로 돈은 행복을 위해서 필요하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돈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생활수준(한국의 경우 월평균 400만 원)을 유지하면 ‘돈=행복’이란 공식이 성립되기 어렵다. 이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공통된 모습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돈에 집착한다. ‘남의 시선’ 때문이다.


 


“남들처럼 살려면 차도 굴려야 하고, 집도 아파트로 바꿔야 하고, 애들도 번듯한 대학에 보내야 하는데…….”


 


우리는 언제나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남’의 기준에 자신의 삶을 끼워 맞춘다. 그 ‘남’은 TV 광고에 나오는 15초짜리 인생일 수도 있고(상당 부분 각색된 모습), 한 다리 건너 들려오는 ‘풍문’일 수도 있다. 실체 없는 ‘남’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초라해지고, 그때마다 허상과도 같은 ‘남’을 쫓아가기 위해 발버둥 친다. 여기에서 하나 질문해보자.


 



“이 ‘남’들도 고통을 겪을까?”



 


우리가 상상 속에서 그려내는 이 실체 없는 ‘남’들도 우리처럼 고통 받고 힘들어하지 않을까? 너무 완벽한 삶이라 고통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까?


 


우리네 기준으로 봤을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다. 과연 그럴까? 단언하건대 이건희 회장도 말 못 할 고민과 고통이 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파편적인 정보만 조합해도 과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대기업을 이끌면서 느껴야 할 고민과 번뇌는 또 어떨까(이건희 회장에 대한 사회적 가치 판단은 배제하겠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고통의 총량은 똑같다.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크기와 깊이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부정적인 상황’은 비슷하다는 얘기다.


 


파레토의 법칙이란 게 있다. 전체 결과의 80퍼센트가 전체 원인의 20퍼센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탈리아 인구의 20퍼센트가 이탈리아 전체 부의 80퍼센트를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의 주장이다. 신기하게도 이 법칙은 인간사의 모든 법칙에 그대로 적용된다. 20퍼센트의 범죄자가 80퍼센트의 범죄를 저지르고, 20퍼센트의 운전자가 전제 교통 위반의 80퍼센트를 차지하며, 전체 주가 상승률의 80퍼센트는 상승 기간의 20퍼센트에서 발생하는 등 파레토의 법칙은 인간의 삶과 고통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20퍼센트밖에 안 된다. 나머지 80퍼센트는 그 사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출근 시간에 버스가 늦게 도착했다. 덕분에 과장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왜 난 이럴까?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과장한테 잔소리나 듣고,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됐지? 확 사표나 내버릴까? 그럼 뭘 먹고살지? 진짜 비참하다. 먹고살려고 이렇게 살아야 하다니……. 내 인생은 여기에서 끝나는 걸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출근 시간에 버스를 놓쳐서 지각한 것과 과장에게 잔소리를 들은 것뿐, 나머지는 당신이 만들어낸 ‘생각’이다. 이 생각은 당신의 고통을 증폭한다. 낙천적인 사람은 실제 벌어진 사건을 최대한 ‘긍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사람은 실제 벌어진 사건을 최대한 ‘부정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인간에게 고통의 총량은 똑같다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엇비슷하다는 얘기다.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살아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생각’이다. 실제 벌어진 ‘사실’과 당신의 ‘생각’을 분리해보라. 당신들은 죽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다.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사실’은 모두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툭툭 털고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명확히 해보자.


 



“당신이 죽기로 결심한 이유가 뭔가?”



 


이유가 명확한가? 그 이유를 자신 혹은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가?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자,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다.


 


“내가 내 마음대로 죽겠다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돼?”


 


당연한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다.


 


“당신이 야생에서 살았다면 자살하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 땅에서 원시인류로 살아가던 우리 조상들은 자살을 선택했을까? 자살하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처럼 34분에 한 명씩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집단 자살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이렇게 죽는 이유가 뭘까? 한국에서 마음만 먹으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 일을 하란 말이 아니다. 방법만 찾으면 노동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다. 의식주 수준이 우리가 사회 통념상 알고 있는 수준과 좀 거리가 있을 수 있지만, 나름 괜찮은 수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선택한다. 왜 그럴까?


 


“인간이 짐승이냐? 밥만 먹고 살라는 소리냐?”


 


이런 반응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밥이 절대적 우선 가치로 생각되던 시절은 지나갔다. 기본적인 생활을 넘어 사회적인 시선, 환경,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의 죽음에는 상당 부분 사회적 원인이 개입돼 있다.


 


이런 추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살론》의 핵심 명제를 더듬어봐야 한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묻고 싶다. 당신이 죽으려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가? 당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죽음의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가? 광기와 같은 자살 열풍 속에서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자살하는 사람 중에서 자신이 정말 죽으려는 이유, 죽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당장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서?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아서? 현재 상황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거 같아서? 좋다. 이해한다. 다 이해할 순 없어도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극단에 몰린 당신들의 심정을 존중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사람들의 고통의 총량은 똑같다. 당신은 당신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였고, 이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죽음’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해한다. 그러나 그 이해의 범주에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죽어야 할 이유’에 대해 고민해본 흔적이 있는가? 한 발 더 나아가서 당신이 죽으려고 하는 이유가 실제 일어난 ‘사실’을 기반으로 한, 그러니까 극복 불가능한 절망적인 현실 때문인지, 그 ‘사실’을 확장한 당신의 ‘생각’ 때문인지 고민해봤는가?


 


중요하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나에게는 중요하다. 그리고 당신도 이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죽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어차피 죽을 목숨, 미련 없이 죽게 내버려둬!”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지상에 한 조각 미련 없이 깔끔하게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은가? 죽는 이유를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데 죽는다면 그건 ‘개죽음’이다. 남들이 이해 못 하는 건 상관없다. 어차피 내 삶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방아일 뿐이니까. 그렇지만 자신이 죽는 이유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문제가 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조금 지나면 당신은 단백질 덩어리가 될 것이다. 조금 늦춰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까? 한 번 고민해보자. 당신의 인생을 정지하는, 아니 중단하는 ‘이유’다. 적어도 본인은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2. 왜?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왜 죽으려는 건가?”



 


수많은 이유가 스쳐 지나가는데 딱 하나를 고를 수 없는가? 너무 어려운가? 그럼 쉬운 질문을 하겠다.


 


“자신이 죽으려는 이유를 이해했는가?”


 


죽어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다면, 어떻게 죽을지 고민하면 된다(최대한 ‘덜’ 고통스러운 방법을 찾아 헤맬 것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묻고 싶다. 아니 자신에게 물어보라.


 



“난 지금 죽어야 할 확실한 이유가 있는가?”



 


대답할 수 있는가? 자신이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 있는가? 죽는 데 이유가 필요할까? 자존감이 떨어져 자신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지구상에 살아 있는 건 민폐다. 난 산소를 낭비하고, 똥만 만드는 놈일 뿐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받은 고통, 앞으로 살아가면서 받을 고통을 생각하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나를 위해 좋을 거 같다. 살면서 받을 고통이 죽어서 얻는 안식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정한다. 거듭 말하지만, 난 자살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자살하려는 사람이 스스로 그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난 그 자살을 ‘개죽음’이라고 부를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이가 내뿜는 에너지, 초인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가진 이가 이 에너지의 존재조차도 모른 채 죽겠다는 행위에만 천착하는 모습…… 너무 추하지 않은가?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3〉로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른 ‘울랄라세션’이 있다. 음악성도 음악성이지만, 이 그룹의 특별한 스토리 덕분에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리더 임윤택의 위암 투병 사실이다. 위암 4기 판정을 받은 그는 하루하루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런 그가 죽음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공평하게 누구한테나 오니까. 그러나 인생을 아무렇게나 끝내고 싶진 않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인생을 아무렇게나 끝내고 싶진 않다”는 한 마디를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제정신으로 온전히 하루하루를 영위한다는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상황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것이 대한민국 국민의 삶이다(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버텨간다). 그렇기에 자살을 선택하거나, 선택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자살은 인생의 금기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 사항’, 옵션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 옵션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며, 그 선택에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이란?


 


첫째, 당신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확실하고, 그 이유를 자신이 이해하는가?


가장 기본적이지만 중요한 이유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단지 지금의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지금의 상황을 최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힘들다. 아니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더 비정상적이다. 제정신인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겠는가? 감정 과잉 상태에서 자기감정에 취해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여기에서 한 발만 물러나 자신에게 물어보자.


 


“내가 정말 죽을 이유가 있는가? 난 내 죽음을 이해하는가?”


 


힘들겠지만 정말 중요하다. 왜? 당신의 인생을 끝내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인생을 ‘아무렇게나’ 끝내고 싶은가? 태어난 것은 당신의 의지가 아니지만, ‘자살’은 당신의 의지로 마지막을 선택하는 순간이다. 그 마지막을 아무렇게나 끝내고 싶은가? 당신이 죽음을 각오하면서 부여받은 한시적인 ‘두려움 없는 삶’을 보내기 위해서도 이는 꼭 필요한 과정이다. 상식적으로도 맞는 말이 아닐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고,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맞는 말일까?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그 이해란 순간적으로 감정이 동요되어 억지로 자신을 설득하는 게 아니다. 그건 감정에 휩쓸려 자살을 선택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최대한 객관적으로(감정을 걷어내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보라.


 


둘째, 당신의 죽음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당장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변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도 많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주변의 시선을 생각하라는 말이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다. ‘내가 내 생명을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그게 무슨 문제야? 남이 왜 이 일에 개입하는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당신의 죽음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면서 사회적인 문제이자, 주변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는 중대한 사건이다. 물론 이 모든 걸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게 맞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의 선택지일 수 있다. 인정한다. 그러나 당신의 가족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의 가족을 위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오해하지 마라. 이런 멘트를 날리려는 게 아니다. WHO가 발표한 ‘자살 예방 지침서’에 따르면, 한 명이 자살했을 때 타인이 받는 ‘충격’은 평균 여섯 명에게 전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 가운데 자살자가 있는 경우 자살 가능성이 4.2배 높아진다는 보고도 첨부되었다. 무슨 의미일까? 당신의 죽음으로 애꿎은 당신의 가족까지 자살할 수 있다는 소리다. 이를 보면 ‘자살은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살인 사건’이라 하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당신에게 죽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남아 있는 가족에게 당신은 커다란 충격을 주고 떠난다는 사실을 인식하란 얘기다. 당신의 죽음으로 가족과 지인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분명 죄책감과 허탈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왜 진작 그 녀석이 힘든 걸 눈치 채지 못했지? 그 녀석과 대화다운 대화도 변변히 못 해봤는데…….”


 


이렇게 자책할 것이다. 그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게 뭘까? 자살하지 않는 것?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본질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남아 있는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당신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최소한의 ‘끈’은 남겨주고 가라.


 


‘불가항력’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그 설명에 걸맞은 노력을 했다는 증거를 보여줘야 한다. 물론 그런 노력이란 없다. 가족의 죽음 앞에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할까? 그러나 희뿌옇게 이지러진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은 다음 남아 있는 가족이 이성과 논리로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 ‘끈’이라도 남겨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그들에 대한 마지막 예의이자, 당신이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셋째, 이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다. 당신의 ‘죽음’을 보고 당신을 모르는 타인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그 공감을 동정으로 이어나가게 할 만한 설득력이 있느냐 하는 부분이다.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다.


“오죽하면 죽었을까?” 이런 멘트가 나올 정도라면, 최소한 당신의 죽음이 개죽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솔직해지자. 모든 자살에는 시위성이 섞여 있다고 했다. 그 양이 얼마나 되느냐의 문제지, 모든 자살에는 ‘시위성’이 있다. 무슨 의미일까? 당신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당신의 자살에는 어느 정도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난 억울해! 난 결백하단 말야!” “날 이렇게 만든 건 이 사회야!” 등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기 바란다. 단순히 지금 상황을 끝내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고 해도 그 안에는 어느 정도 시위성이 있을 것이다. 나를 이런 상황으로 몰아간 사회, 떠나간 애인에 대한 복수심, 88만 원 세대를 만든 대한민국에 대한 분노, 내 전 재산을 날리게 한 사기꾼에 대한 증오, 악플을 단 네티즌에 대한 항변 등 자살에는 말로 담아내지 못한 묵직한 항변이 담겨 있다.


 


당신은 이런 당신의 속마음을 아는가? 당신의 이런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지 않은가? 죽음을 통해 말하고 싶은 당신의 이야기, 당신의 주장을 타인에게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그 주장이 공감을 얻어낼 수 있도록) 당신의 죽음을 준비했는가?


 


세 가지 기준을 보며 생뚱맞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장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잘 살펴보기 바란다.


 


당신은 자신의 죽음을 100퍼센트 이해했는가? 그리고 자신의 죽음에 대해 주변 지인들에게 설명할 준비가 되었는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죽음으로 뭘 말하려는 것일까?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준비하는 자살이 있다면, 그게 자살인가?”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되묻고 싶다. “당신은 이런 생각도 안 해보고 자기 인생을 ‘아무렇게나’ 끝내려 했나?”


 


한 생명이 그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로 말이다. 생명체 본연의 절대적 본능인 ‘생존 욕구’를 역행하며, 스스로 죽겠다는 것이다. 한 생명에 담긴 수많은 역사와 잠재된 무궁한 가능성을 포기하는 결정이다. 그 결정을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내리려고 하는가? 자살은 인터넷 홈쇼핑에서 물건을 구입하듯 충동구매나 반품이 불가능하다. 죽음 앞에서 조급해하는 당신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어차피 죽을 목숨,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하면 후회 없이, 의미 있게 죽을 수 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고민해서 멋지게 죽는 건 어떤가?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똑같다면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안 되는가?”


 


그 ‘생각’과 ‘고민’이 자살을 가로막는 건 아니다. 좀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후회 없이 죽을 수 있는 발판이 돼줄 것이다. 최소한 ‘개죽음’은 막아줄 것이다.


 


 


3. 이해를 위한 과정


 


자살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이 자살하는 이유를 이해하느냐다. 감정에 휩쓸려 일단 죽고 보자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그 뒤는 어떻게 될까? 죽어도 문제가 되고, 죽지 않아도 문제가 된다. 죽는 경우 우리는 ‘개죽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본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성급하게 자살을 선택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좀더 꼼꼼하고 세심하게 관찰한 다음에 자살을 선택해도 되지 않을까? 하다못해 가방 하나 살 때도 요모조모 뜯어보고, 가격을 비교하는 게 요즘 풍속이 아닌가. 여차하면 반품도 한다. 그런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는 마당에 충동구매 같은 짓을 저지른다는 게 이해되는가. 이건 반품도 안 되는 결정이다!


 


자살 시도가 실패해도 문제다. 주로 여성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문제인데, 남성들은 총기를 사용하거나(한국에선 총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렵지만) 고층 빌딩에서 투신하는 등 극단적이면서 확실한(!)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여성들은 약이나 독 같은 온건한(?) 방법을 선호한다. 덕분에 자살 성공률은 남성이 여성에 비해 3배나 높다.


 


“자살 시도에 실패한 게 뭐가 문제인가? 마음을 추슬러 잘 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정말 좋겠지만, 자살 미수자 가운데 14퍼센트는 다시 자살을 시도한다. 특히 자살 미수자 중 5퍼센트는 세 번까지 자살을 시도한다. 그 사이 피폐해진 심신은 어떻게 할까? 자살 시도와 실패, 다음 자살 시도 사이의 시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만 해도 처절하지 않은가? 이 황폐한 시간은 그 자체로도 지옥이다. 주변의 시선은 무시한다 해도 본인이 위축되고 더 극단적인 방법을 찾아 헤맨다(실패했으니 보다 확실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번 되짚어보자.


 


실패할 확률이 있는 온건한 자살 시도는 무의식적으로 살겠다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남성의 경우 특유의 성향과 즉흥적인 성격이 작동했을 뿐,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욕망은 똑같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는 ‘생존’에 대한 마지막 미련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이성이 본능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으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직까지 당신은 ‘죽음’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럴 바에는 죽음과 자살에 대해 확실히 이해하고 다음 절차를 밟는 게 낫지 않겠는가. 아니 죽을 이유를 먼저 확인하고, 그에 대한 동의 절차를 밟은 뒤에 죽는 것이 상식에 맞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본인이 이해하지 못한 죽음은 ‘개죽음’일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죽을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각자 죽음을 생각하는 이유나, 살면서 고통을 느끼는 강도가 다를 것이다. 일괄적으로 ‘이건 죽을 이유, 이건 죽어선 안 될 이유’라고 결정을 내릴 수도 없다(자살에 이르는 수천수만 가지 이유 중 타인의 시선에서 동의를 구할 만한 이유는 몇 가지 안 될 것이다).


 


자살은 개인의 판단이다. 그렇기에 죽을 이유도 자신만이 확인할 수 있다. 동의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죽어야 할 이유를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그 논리를 몇 단계 검증 절차를 거쳐 완벽하게 다듬자는 것이다. 이런 검증 절차를 거치면 최소한 본인이 죽음에 대해 이해할 것이고, 잘하면 가족이나 주변 지인 혹은 타인들의 관점에서 이런 멘트를 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럼 죽을 이유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유일한 원칙이자,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감정을 배제한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수십 년간 수양한 도인이라도 자기 감정을 배제하는 일은 어렵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감정을 배제할 순 없어도 최대한 ‘객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문자, 바로 글이다. 감정을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감정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다. 믿기지 않는가? 속는 셈치고 한번 해보라. 너무 쉬워서 허탈해질지도 모른다.


 


우선 문구점에 가서 20페이지짜리 클리어 파일을 구입하라. 간 김에 A4 용지도 조금 사두는 게 좋겠다. 이것은 당신의 데스 노트(death note)다. 당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노트니 가급적이면 취향에 맞는 걸 골라라. 그럼 시작해보자.


 


A4 용지 한 장을 반으로 접어 맨 위에 ‘내가 자살할 이유’라는 타이틀을 적는다. 그리고 타이틀 바로 밑에 죽어야 할 이유를 적어 내려가면 된다. 단 죽어야 할 이유는 명사나 대명사로 한정해야 한다. 돈 문제라면 ‘부채’ 혹은 ‘금전 문제’라고 적으면 된다. 단어 하나만 적고, 이 단어에서 파생된 다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다. 이렇게 적다 보면 의외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죽으려는 이유가 의외로 단순하구나.’


 


이 문제들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이유가 굉장히 복합적이고 많을 것 같지만, 이렇게 단어로 적어보면 의외로 적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적어놓은 단어들을 쭉 훑어보라. 가끔 10개가 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5개 이하 3개 내외인 경우다(확실한 1~2가지 이유가 결정타다). 10개가 넘는다면 두 가지 중 하나다. 정말 파란만장하고 구구절절하게 힘든 인생이거나, 이 단어 중에 감정이 섞여 있는 경우다.


 


이 단어들에 대해 당장 가치 판단을 하자는 건 아니다. 여기까지 적었다면 자신에게 칭찬을 해줘도 좋다. 자신의 상황을 냉철하게 돌아봤다는 사실만으로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는 이 종이를 고이 접어 책상 서랍 안에 넣어라. 애써 적은 종이를 왜? 숙성시키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선회를 먹을 때 활어(活魚)가 더 맛있다고 느끼지만, 일본인은 95퍼센트 정도가 선어(鮮魚)를 먹는다. 선어는 이노신이 풍부해(숙성시킬 경우 최대 10배까지 늘어난다) 감칠맛이 더 좋다. 죽어야 할 이유도 마찬가지다. 급한 마음에 무작정 수면제나 노끈을 구하는 것보다 냉철하게 돌아보고 죽을 이유를 숙성시키는 것이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이다.


 


하루 동안 숙성 과정을 거친 다음(보통 2~3일 여유를 두는 게 좋지만), 종이를 꺼내 단어를 하나하나 검증하라. 여기에서 거름막이 필요하다. 단어를 걸러내는 것이다. 어떻게 걸러내야 할까? ‘시선, 시간, 시도’로 나눠서 하나씩 살펴보기 바란다. 자살 직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3시’다(자살하기 좋은 시간이 오후 3시란 뜻이 아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있다. 당신은 초인이란 사실을 명심하고, 거름막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죽기로 각오한 사람에게 두려움은 없다. 단어를 하나씩 살펴볼 때마다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야 한다.


 


“그래, 어차피 난 죽을 몸이다. 죽는 사람에게 뭐가 두려울까? 난 조금 있으면 단백질 덩어리가 될 몸이야. 체면도, 남의 시선도, 자존심도 필요 없다. 나만 생각하고, 나를 기준으로 바라본다. 난 초인이다. 날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죽음을 각오한 순간 지상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건 사고는 지나가는 ‘배경’이 될 뿐이다. 사흘 뒤에 죽겠다는 사람에게 예비군 훈련 참가 통지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같은 의미로 카드 사용 대금 명세서가 무슨 의미일까? 죽음을 전제로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시선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죽겠다면 생각을 달리하는 것이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체면이나 자존심에 목숨 거는 경향이 있는데, 분명한 사실 하나 말해야겠다.


 


“다른 사람은 당신을 해칠 힘도, 능력도 없다.”


 


평범하면서도 확실한 진리다. 단어를 잘 살펴보기 바란다. 당신의 감정이 섞여 있는가?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이런 느낌이 섞여 있는가? 인간에게는 방어기제가 있고, 이중 하나로 추정되는 것이 망각 기능이다. 인간(특히 한국 사람)은 순간순간 상황에 강렬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그 반응이 평생 이어질까? ○○녀 사건들을 보자. ‘빛의 속도’라고 할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고, 폭발력도 대단하다. 그러나 지속력은 어떨까?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만, 곧 다른 남의 이야기를 찾아 떠난다. 하이에나라고 해야 할까? 실컷 물어뜯고 즐기면 곧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반드시 염두에 둬라.


 


“하이에나의 식사 시간은 무척 짧다.”


 


당신에게 고통을 주고, 그 고통이 ‘자살’을 고민하게 만드는 단어에 ‘남의 시선’이 포함되었다면 자살을 선택하는 걸 보류하기 바란다. 타인은 당신을 해칠 힘이나 능력이 없으며, 결정적으로 ‘관심’도 없다. 그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며, 순간적인 관심도 곧 수그러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잠깐 즐길 ‘먹잇감’이 필요한 것이다. 먹잇감은 한 번이면 족하다. 당신이 자살하면 그들의 만찬은 더욱더 풍성해질 것이다.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한다면 계산기를 두드려보기 바란다. 당신을 잠깐 괴롭히는 수치심과 남은 인생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해보라. 어떤 게 더 가치가 있는가? 이성적으로 판단해보라. 정 안 되면 남들의 기억이 사라질 동안 잠깐 다른 곳으로 도망가도 좋다.


 


“그럼 남은 인생은 어떻게 하고? 내 사회생활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데, 어차피 당신은 죽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정확하게 30일만 사건 혹은 상황과 떨어져 있어보라. 남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 무너질 거 같다고? 미안하지만 웃기지 마라. 남의 시선 때문에 죽음을 택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왜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시선과 의견 때문에 자신의 죽음에 영향을 받는가? 억울하지 않은가? 평소 내 인생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거나 관여했다면 모를까, 전혀 그렇지도 않은 사람 혹은 안면만 익힌 사람들이 당신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배우 최민수를 아는가? 그는 이제 까마득한 옛일(?)로 회자되는 ‘노인 폭행’ 사건에 휘말렸다. 그는 언론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한 뒤, 산속으로 들어가 몇 년간 참회(?)의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최민수는 억울해하거나 후회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평안을 얻은 것이다(물론 그가 괴짜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최민수에 관한 이야기는 극단적인 예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남의 시선과 입방아가 얼마나 가볍고 빠른지 확인하는 좋은 예다. 지금 최민수 사건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냥 지나가는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하고 만다. 아니 그 사건을 아직까지 기억한다는 게 신기한 일이다. 남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남의 시선일 뿐이다.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남의 인생을 사는 게 아니다.


 


둘째, 시간이다.


시간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고민해볼 만한 사안이다. 우리는 현재를 살지만, 언제나 과거와 미래에 붙잡혀 허덕인다. 과거는 후회라는 이름으로, 미래는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현재를 좀먹는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에 붙잡혀 허덕인다. 여기에서 명확히 해야 할 게 있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밖에 없다.”


 


우리가 활용할 수 없는 시간대에서 벌어진(혹은 벌어질 것이라 예측하는) 사건이나 상황 때문에 자살을 고민한다면, 말리고 싶다. 이건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다.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의 《연금술사》에 “고통 자체보다 고통에 대한 두려운 기억이 더 나쁜 것”이란 구절이 나온다. 고통은 한시적이다(지속적인 육체적 고통을 제외하고). 시간은 흐르는 것이며, 시간의 변화에 따라 상황도 바뀐다. 단언하건대 평생 이어지는 고통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한다. 안다. 과거의 기억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온몸을 뒤흔든다. 괴롭다. 힘들다. 죽고 싶다. 이해한다. 그러나 기억을 바꿀 수는 없다. 다만 그 기억이 점점 무뎌지고 흐려질 것이란 사실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절망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고 이어지는 건 없다. 자연조차 세월이 지나면 풍화돼 그 모습이 변한다. 하물며 인간과 인간이 마주하는 사회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일이 얼마나 될까?


 


당신은 지금 겪는 고통이나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거 같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당연하다. 누구나 절망적인 상황에 몰리면 내 앞에 큰 벽이 솟아오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 벽이 영원히 서 있을까? 오늘 아침에 신용 불량자가 됐다. 신용 불량자라는 딱지가 평생 따라다닐 거 같은가? 우리는 미리 절망하고 포기한다.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를 바라본다. 오늘이 절망이라 해서 내일도 절망일 것이라 단정할 수 있는가?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한시적인 시간에 갇힌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군인이나 학생들을 나는 ‘한시적인 시간에 갇힌 사람’이라 부른다.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 있다.


 



나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 쉬는 시간마다 빵셔틀이 돼서 일진들 빵 심부름을 한다. 점심시간에는 옥상으로 끌려가 애들의 장난감이 된다. 학교에서 날 사람 취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들은 날 외면하고 아예 없는 사람, 공기 취급을 한다. 내게는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상대성이론’이 있다. 우리의 시간도 그렇다. 개인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시간은 길게도 느껴지고, 짧게도 느껴진다. 한없이 지루하고 힘든 시간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지고, 즐거운 사람에게 그 시간은 너무나 짧다. 괴로운 시간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은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는 당연하다. 고통과 절망의 깊이만큼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다만 내 정신 상태가 그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괴로울 뿐이다. 그 괴로움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이 한정 없이 이어질 거란 생각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시간은 흐르며, 언젠가 그 시간은 끝난다.


 


‘끝나는 그 시간을 기다릴 수 없을 거 같다. 차라리 내가 그 시간을 끊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차라리 자살하겠다는 것인데, 그 자체가 미래의 시간을 스스로 ‘결론’ 내리는 행위다. 미래가 언제나 절망적인 상황으로 향하겠는가?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게 사람이다. 그런데 내일을 미리 결론 내린다는 것인가? 고통이나 상황은 언제고 변한다. 특히 한시적인 시간에 갇힌 경우에는 더 확실하다. 그 시간만 벗어나면 상황은 변한다. 시간의 함정,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란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의 고통과 절망이 내일까지 이어질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라.


 


셋째, 시도다.


적어놓은 단어들을 가만히 응시하기 바란다. 이 단어가 당신을 절망적인 상황에 빠뜨렸다고 치자. 여기에서 질문 들어간다. 세 가지다.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방법이 있다면 시도해보았는가?”


 


“시도했다면 어느 정도 시도해봤는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당신이 적은 단어를 지그시 응시하라. 이 고통(혹은 상황)이 절망적인 상황인지 생각해보기 바란다. 물론 불가항력적인 상황도 있다. 분명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그 문제 자체에 해답이 있다(시험문제가 아니라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본능 가운데 ‘투쟁 도주 반응(fight or flight response)’이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 뭘까? 바로 생존 욕망이다. 뇌는 생존에 관한 일이라면 철저하게 기억하고, 이를 본능적으로 실천한다. 다른 사람이 내게 위협적인 행동을 취하면, 우리 뇌는 재빨리 본능을 작동한다. 심장 박동이 갑자기 빨라지고, 신장 위의 부신에서는 아드레날린이 샘솟듯이 분비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 몸의 근육에 혈액이 몰린다. 도망가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지 않은가? 모든 근육에 혈액을 잔뜩 머금고 준비를 한다. 이때 ‘위’와 같이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장기는 일시적으로 정지된다(스트레스가 쌓였거나 불편한 상태에서 밥을 먹으면 위에 탈이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몸은 위급한 상황에서 생존 본능에 입각한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인생에서 위급한 상황이 터졌을 때 우리는 투쟁 혹은 도주를 선택해야 한다. 맞서 싸울지, 도망갈지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제3의 선택을 한다.


 



“모든 걸 포기하자. 죽으면 상황은 끝난다.”



 


과연 그럴까? 정말 절망적인 상황일까? 냉정하게 현실을 살펴보자. 충격적인 상황에 직면하면 공황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사람의 모습이다. 이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니 자책하지 말자. 중요한 것은 공황에서 언제 빠져나오느냐다. ‘모든 문제에는 그 해답이 숨겨져 있다’는 말이 인생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간단한 예로 왕따를 당하는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의 인생을 다시 보자. 죽기로 작정한 이 학생에게는 수많은 해결책이 있다. 그러나 이 학생은 경험이 적고(이제까지 살아온 인생이 전부이기에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 능력이 떨어진다), 사회적인 시선과 극도로 떨어진 자존감 때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에 몰린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학생에게는 수많은 해결 방안이 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세 가지나 된다. 하나씩 살펴보자.


 



① 원초적인 투쟁 도주 반응이다. 맞서 싸울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또 다른 카드 ‘도망가기’가 있다. 전학을 가거나, 아예 학교를 그만둘 수 있다. 어떤 경우도 죽는 것보다 낫다. 고등학생이 인생에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함부로 내릴 수 없다고? 결정권이 없다고? 죽음을 각오한 상태가 아닌가? 죽음 앞에서 인생의 모든 문제는 길가의 돌멩이만도 못한 존재다. 죽음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②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다. 하다못해 부모님에게 말하는 것도 괜찮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살기 힘든 나라지만, 죽음을 각오한 고등학생 한 명의 도움을 매몰차게 거절할 사람은 없다. 아니 있어도 상관없다. 그 손길을 거절한 사람에 대해서는 적절한 ‘응징’을 하면 된다(이 부분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다).


③ 최악의 선택이지만 졸업할 때까지 버티는 방법이 있다.



 


이 학생에게 ‘해답’은 뭘까? 바로 자신이다. 인생의 문제에서 해답은 대부분 자신에게로 모아지는 경향이 있다. 방법을 아는데 선택하지 못했다거나, 선택지 자체를 잘못 골랐다거나 하는 문제가 많다. 자신의 인생을 저울에 올려보자. 그 인생과 지금 내가 겪는 고통과 절망을 등가로 처리할 수 있을까? 당장은 그럴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기에 한 발 떨어져서 감정을 배제한 당신의 본심과 인생, 현 상황을 냉정하게 살펴보자는 것이다.


 


쉽게 말하는 것 같은가? 기분이 나쁜가? 기분이 나빠도 어쩔 수 없다. 왜? 쉽기 때문이다. 죽음을 각오한 순간, 인생의 모든 문제는 보잘것없는 게 된다. 죽음은 모든 문제를 단순화하는 마력이 있는 존재다. 그렇기에 문제를 쉽게 바라볼 수 있다. 또 인간사의 모든 문제는 그 문제 안에 해답이 있다(이 얼마나 쉬운가).


 



당신의 고통을 냉정하게 바라보기 바란다. 그 고통에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보이는가? 당신이 노력하면 분명 어떤 식으로든 바뀔 것이다. 그 시도를 해봤는가? 해봤는데 안 된다면 방법이 잘못됐는지 고민해보라. 죽음을 전제로 자신에게 물어보라.


 


- 이 문제가 정말 절망적인 상황인가?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해결하지 못할 문제인가? (당신의 죽음은 지구 멸망과 동일 선상에서 바라봐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지만, 당신에게는 하나의 세계가 끝나는 상황, 즉 지구 멸망과 같은 수준의 이야기다.)


- 극복 가능한 부분이 있는가?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인가?


- 시도해볼 만한 방법이 있다면(그 시도가 허무맹랑하더라도), 왜 시도하지 않는가?


- 혹시 시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두려움’이라면, 자신에게 이런 주문을 하기 바란다. “난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이 세상 그 어떤 신체적 고통, 정신적 학대, 모멸감이 찾아와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뭐가 두려운가? 난 초인이다!”



 


이제 접은 A4 용지를 쫙 펴라. 그런 다음 각 단어에 3시(시선, 시간, 시도)를 적용해서 판단을 내려보는 것이다. 예컨대 ‘경제 문제’라면 이 문제가 남들의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경제적으로 힘든 ‘절대적 빈곤’ 문제인지, 이 문제가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고착화됐는지,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어떤 시도를 했는지 아니면 시도도 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인지 접혀 있던 부분에 적어보는 것이다. 단어가 몇 개 더 있다면 이 단어에도 시선과 시간, 시도를 적용해서 적어본다. 그런 다음 이를 찬찬히 바라보라.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이건 순수한 의미에서 응원이다). 자, 이제 자신에게 질문해보자.


 


“나 죽어도 될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첫 단어에 주목하자. 죽어도 된다고 하는가? 그럼 이제부터 당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단어’에 대한 검증을 시작해보자. 지겹다고? 그렇지 않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다. 당신의 인생을 끝내려는 순간인데 아무렇게나 끝내야겠는가.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화려하고 멋있게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날 믿고 따라와라. 어차피 당신은 죽을 목숨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다 ‘헛소리’처럼 들려도 이런 사람의 헛소리에 장단 맞춰서 손해 볼 게 뭔가? 어차피 당신은 죽을 목숨이다. 죽기 전의 여흥이라 생각하라.


 










Tip 관심


우울증임상연구센터(www.smileagain.or.kr)가 우울증 환자 1183명을 분석한 결과, 10명 중 2명꼴(21.4퍼센트)로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평균 2.1회, 최대 4.8회 자살을 시도했다. ‘자살하는 사람의 80퍼센트는 우울증 환자’라는 조사 결과를 확실히 뒷받침해주는 통계 자료라 할 수 있는데, 국내의 발병률을 보면 위험한 수준이다. 여성은 평균 10~25퍼센트, 남성은 5~12퍼센트가 우울증에 걸린다.


 


문제는 우울증 발생이 아니라 자살 예방이다.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 발생 비율과 자살 시도는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우울증 환자 가운데 3분의 2는 자살을 생각하고, 10~15퍼센트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다. 문제는 국내의 자살 시도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다는 점이다. 국내 우울증 환자의 자살 시도율은 21.4퍼센트지만, 미국은 16.5퍼센트다. 왜 우리나라가 높을까? 우울증의 상담과 치료 비율이 낮기 때문이다. 국내의 경우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 질환자의 15퍼센트만 상담과 치료를 받지만, 미국은 39퍼센트에 이른다. 적극적인 상담과 치료만이 우울증에 따른 자살을 막을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우울증이란 걸 확인하고, 상담과 치료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 어떻게 우울증을 진단할 수 있을까? 미국정신의학회(APA)에서는 다음 증상 가운데 다섯 가지 이상이 2주일간 지속되면 우울증으로 판단한다.


 



① 주관적 설명(예 : 슬프거나 공허함)이나 타인의 관찰(예 : 눈물을 글썽임)에 의해 거의 매일 하루 종일 우울한 기분이 보임.


② 주관적 설명이나 타인의 관찰로 거의 매일 하루의 대다수 활동에서 흥미가 현저하게 감소됨이 나타남.


③ 식이 조절을 하지 않는데도 체중 감소나 증가가 나타남(예 : 한 달에 체중이 5퍼센트 이상 변화) 혹은 거의 매일 식욕의 감소나 증가가 보임.


④ 거의 매일 못 자거나 지나치게 많이 잠.


⑤ 거의 매일 정신운동 흥분 혹은 지체(안절부절못하거나 느려진다는 주관적 느낌뿐만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도 관찰이 가능함).


⑥ 거의 매일 피로 혹은 에너지 상실.


⑦ 거의 매일 단순한 자기 비난, 무가치함이나 과도하고 부적절한 죄책감이 보임(망상적일 수도 있음).


⑧ 주관적 설명이나 타인의 관찰에 의해 거의 매일 사고와 집중력의 감소, 결정 곤란을 보임.


⑨ 죽음에 대한 반복적인 생각(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님), 구체적 계획이 없는 반복적인 자살 사고 혹은 시도, 자살을 시도하려는 구체적 계획.



 


우울증이 의심되면 즉시 전문의를 찾아가 상담과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 속에서 우울증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우울증에 걸렸거나 우울한 증세가 이어진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생활 속에서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혼자 있지 말고 가급적 주변 사람과 함께하라. 혼자 있으면 절망감에 빠져 극단적인 생각을 할 수 있고, 스스로 우울한 기분을 증폭할 수 있다.


② 가족이나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대화하는 시간을 늘려라.


③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라.


④ 세로토닌이 왕성하게 분비되는 아침에 햇살을 받으며 자주 걷고, 가급적 일찍 잠자리에 들라. 햇빛은 비타민 D 생성을 촉진해, 낮에 억제된 멜라토닌 호르몬 분비를 자극함으로써 숙면에 도움이 된다.


⑤ 과도한 음주와 흡연을 자제하라.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전문의를 찾아가 상담과 치료를 받는 것이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다. 초기에 치료하면 가볍게 앓고 넘어가지만, 방치하면 폐렴으로 발전해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다. 감기 따위에 생명을 위협받는다면 이 얼마나 황당한가? 감기에 지지 말자. 감기는 며칠 가볍게 앓고 툭툭 털고 일어나야지, 생명을 걸고 치료해야 할 중병이 아니다.




 


 


IV. 검증


 


1. 당신이 자살할 이유는?


 


당신은 지금 ‘내가 자살할 이유’라는 A4 용지 한 장짜리(한 장으로 부족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음을 손에 쥐고 있다. 이 어음은 당신의 데스 노트에서 첫 장을 장식하고 있다. 이 어음을 제출하면 당신은 ‘편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음을 현금화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어음을 현금화할 때는 보통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한다. 하나는 드물지만 어음을 약속한 기일까지 갖고 있다가 어음에 적힌 금액을 돈으로 받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업계 전문 용어(?)로 ‘깡’을 하는 것이다(어음 할인보다 어음 깡이란 표현을 많이 쓴다). 어음을 발행한 회사의 등급(신용도)에 따라 할인율이 다르며, 대기업일수록 할인율이 낮다.


 


자살하겠다는 당신의 신용도는 얼마나 될까? 자살을 결행할지 하지 않을지에 대한 신용도가 아니다. 그 성공률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이고 핵심적인 의문 하나다.


 



“당신이 자살할 이유가 충분한가?”



 


당신은 자신이 죽을 이유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다고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주장’일 수 있다. 당신의 결의가 굳고,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 해도 증명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죽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 난 죽을 이유가 충분하고, 지금 죽는 것이 내게 더 유익하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좋다. 당신의 목숨이다. 당신이 자기 목숨을 포기하겠다는데, 제삼자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인정한다. 대신 다음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가?


 



첫째, 당신은 인정 욕구가 없는가?


둘째, 당신은 억울하지 않은가?


셋째, 당신은 마지막을 아무렇게나 끝내고 싶은가?


넷째, 당신은 당신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한(恨)으로 남고 싶은가?


다섯째, 당신은 누가 말려주길 바란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가?



 


다섯 가지 질문 중 하나라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가? 있다면 그냥 따라와라. 당신 마음에 한 점 미련 없이 깔끔하게 자살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찾아보자. 완벽할 순 없다. 그러나 당신의 자살을 최대한 이해하고, 당신 편에서 바라보겠다. 약속한다, 따라와라.


 


 


2. 사람들은 왜 자살을 꿈꿀까?


 


여자의 행복의 척도를 확인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결혼 생활에 그대로 적용된다). “과거보다 불행하면 지금 삶은 불행한 것이고, 과거보다 행복하면 지금 삶은 행복한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 아닌가?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며, 남자들 기준에서 보면 말장난 같다! 잘 들여다보라. 여자의 행복의 기준은 명확하게 오늘에 맞춰져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과거를 기점으로 해서 오늘을 평가한다(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지만, 그 맥락만 보기 바란다).


 


이 말을 자살에 적용해보자. “(과거를 포함해서) 현재보다 미래가 ‘확실히’ 불행할 거라고 판단되면 자살하는 것이고, 현재보다 미래가 불행하겠지만 생각보다 ‘덜’ 불행할 거라는 판단이 서면 자살하지 않는다.” 자살자나 자살 후보자들의 마음이 대부분 이렇지 않을까? 앞으로 삶이 불행할 것이고, 현재 눈앞에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판단에서 죽음을 선택한다는 얘기다. 앞으로 닥쳐올지 모를 더 절망적인 상황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한마디로 포기하면 편한 것이다. 이런 감정을 분석해보면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재의 삶을 기준으로 봤을 때 앞으로 삶이 절망적이다.


둘째, 과거나 현재, 미래의 삶을 확인해본 결과 삶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셋째, 한국 사회의 기준으로 봤을 때 ‘정답’에서 벗어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지금 내 삶이 불행하고, 이 삶이 변화가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현재 살아가야 할 이유, ‘끈’이 없다는 의미다. 토대가 없다고 해야 할까? 현재 삶이 괴롭고, 현재 삶에 미련이 없는 경우 자살을 생각한다는 것이다(자살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단순화해서 생각해보자). 하긴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다면 왜 죽으려고 할까? 그냥 살면 되는데 말이다.


 


여기에 대한 내 견해를 말해볼까 한다. 개똥철학이라고 할까, 선배의 술자리 푸념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다만 이걸 받아들일 때 ‘죽음’을 전제로 생각하기 바란다. 한 가지만 말하겠다. 그건 바로 ‘욕망’이다.


 



“당신은 욕망이 없는가, 아니면 지금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석’됐는가?”



 


인간에겐 욕망이 있다. 생존 욕구는 당연한 것이고, 살아가면서 느끼는 각종 욕망과 그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 있다. 정말 원초적인 질문이다.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각자 자기만의 세계관이 있고, 가치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똑같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살아간다.


 


그렇다. 인간의 삶에서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은 행복이다. 여기에서 행복이란 단어의 정의가 궁금하다. 표준국어대사전에 행복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한 상태’라고 나온다. 철학적으로 들어가 쾌락주의부터 금욕주의까지 언급하는 머리 아픈 짓은 접어두고, 단순히 국어사전에 있는 정의만 생각해보자.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살아왔다. 그리고 당신은 더 이상 행복을 추구하지 못할 것이란 판단에서 삶을 포기하려고 한다. 지금 데스 노트를 꺼내라(이제부터 자주 접할 것이다. 손 닿는 곳에 놓기 바란다). A4 용지 한 장을 꺼내 맨 위에 ‘나의 행복’이라고 적은 다음, 당신이 느끼고 지금까지 추구한 행복의 ‘종류’를 명사와 대명사로 적어라. 한 마디로 행복 리스트다(지금 쓰는 나도 낯간지럽다. 행복 전도사도 아니고…… 그러나 꼭 필요한 절차다).


 


홍대 뒷골목에서 일본식 라면을 먹은 게 행복했다면 그걸 적어라. 의외로 이런 소소한 일상이 행복을 구성한다. 행복이란 내가 즐겁고 기쁜 시간의 총합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 커피를 마시는 10분은 행복한 시간이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즐거운 시간, 즐거웠던 시간을 적어라. 여자 친구와 데이트한 기억, 온라인 게임에서 레벨 업 순간, 친구와 수다 떤 일, 여행, 자동차 드라이브 등 모든 걸 적어라.


 


이번에는 뒷장으로 넘어가서 ‘행복할 것 같은 것’이라고 쓴 다음 내가 소망하고 추구한 ‘행복’을 적어라. 해외 유명 여행지로 떠나는 것이나 크루즈 여행도 있을 것이다. 다 적었으면 이 종이를 서랍에 넣어라. 눈치 챘겠지만, 또다시 ‘숙성’시켜야 한다. 많은 시간도 필요 없다. 하루면 충분하다.


 


하루 동안 잘 숙성된 당신의 행복 리스트를 꺼내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라. 의외로 행복이 별거 아니란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아직 희망(?)이 있다. 내가 진정 원한 행복이 아니라, 이 사회가 내게 심어준 ‘행복의 기준’을 헐떡이며 쫓아간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면…… 당신은 정말 희망(!)이 있다.


 


각설하자. 갈 길 멀다.


리스트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가? 지금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 이제 리스트를 지워나가야 한다. 어떻게? 이 상황(혹은 고통) 때문에 더 이상 추구할 수 없는 행복이다. 죽으면 이 모든 걸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상황을 감내하면 혹은 잠깐 떨어져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하나씩 지워나가라. 앞장의 ‘나의 행복’을 다 지우면 지워버린 항목을 찬찬히 살펴보고,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 감정에 의해 섣불리 단정 지은 게 아닌가? 그런 게 아니라면 이 행복을 대체할 것이 있는가?”


 


신중하게 생각해보라. 리스트에 몇 개나 남았는가? 최소한 3분의 1 이상 남았다면 삶을 포기하지 마라. 당신은 지금 감정에 휘둘려서 죽음을 고민하는 것이다. 당신은 삶에 미련이 있고, 아직 살 만한 상황이다(장담하건대 꽤 많은 걸 그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죽음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가? 그렇다면 뒷장으로 넘어가서 ‘행복할 것 같은 것’을 찬찬히 훑어보라.


 


이제부터는 좀 복잡해지는데, 우선 이 상황(혹은 고통) 때문에 더 이상 추구할 수 없는 것을 찾아서 지워라. 다시 말하지만, 정말 신중해야 한다. 몇 개나 지울 수 있을까? 지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우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리스트를 다 지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질문한다.


 


“왜 그걸 이제까지 못 했나? 이 상황(혹은 고통)에 이르기 전에 할 수 있었던 건 없는가?”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당신은 왜 행복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았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면서 살았나, 아니면 마음속에 여유가 없었나? 이 상황에 맞닥뜨리고 나니 인생이 참으로 허무하단 느낌이 들지 않는가? 죽음은 모든 걸 단순하게 만든다. 당신은 왜 ‘이걸’ 추구하지 못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사흘 안에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체크하라. 죽음은 삶을 단순하게 만든다. 당신이 추구한 것들 중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걸 지금 해보라. 죽기 전에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받아들여도 좋다. 하지만 난 좀 다른 걸 기대한다. 행복은 별게 아니다. 손을 뻗으면 당장 잡을 수 있는 곳에 있다.


 


물론 사흘 안에 할 수 있는 것 중에는 하고 나서 실망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하지 않고 동경하고 자신을 탓하는 것보다 낫다. 지금 당신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초인이 됐다. 까짓 저지르고 보자. 당신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당신의 욕망에 충실한 ‘얼마간’을 보내도 된다. 이 모든 작업이 끝난 종이는 당신의 데스 노트에 그대로 넣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주겠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생뚱맞은 소리일 수도 있는데, 이 말을 꼭 새겨들어야 한다. 왜? 대한민국에는 정답이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 대한민국에는 ‘정답’이 있다.


 



특목고 같은 좋은 고등학교 나와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 수준이 비슷한 이성을 만나 결혼하고, 남들 다 사는 중형 아파트와 자동차를 사고, 1년에 한두 번 해외여행을 다니고, 재테크를 하면서 노후를 준비한다. 당연히 자식도 잘 길러야 한다.



 


대한민국에는 ‘성공한 인생’이라는 정답이 있다. 돈 많이 벌고, 예쁜 마누라 얻고, 토끼 같은 자식을 낳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아야 성공한 인생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말하는 정답은 대부분 돈으로 귀결되고, 남과 비슷하게 따라가면 정답의 근사치가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차이가 차별로 인정되는 대한민국의 본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남에게 뒤처진다는 이유로 차별받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주어진 정답에 도달하기 위해 달려가는 단순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효율적인 것 같지만, 인간이란 존재의 다양성이 싹 무시되었기에 가능한 구조다. 우리가 불행한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사회구조가 우리를 정답이란 틀에 가두고 개인을 평가하는 획일적인 모습, 이 정답에서 벗어나는 순간 가차 없는 질책과 차별과 멸시라는 벌칙이 떨어지는 무서운 사회가 대한민국이다. 웃기는 건 이런 구조를 만들고, 이런 시스템을 굴리는 것이 우리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에 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앞에서 말한 한마디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인생은 레일 위에 있는 열차이기에, 인생의 레일에서 벗어나는 순간 네 인생은 끝난다고 가르치는 것이 대한민국이다. 과연 그럴까? 분명 말하지만, 그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인생이 끝나지 않는다. 사회가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찬찬히 살펴보라. 대부분 ‘소비’를 통한 증명을 말한다. 어떤 걸 사야 당신이 어떤 수준에 이른 사람이 되고, 사는 집이 당신의 소득수준을 증명해준다.


 


지금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소비’란 것에 집중해 정답을 생각해봐도 당신의 인생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당신의 수명은 무한하게 ‘증식’하고 있다. 1975년생 남자의 평균수명은 94.38세가 될 것이다. 의학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평균수명은 2년마다 1년씩 증가하는 추세다. 사람의 수명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기회는 아직 많다(1975년생보다 어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100세를 바라볼 수 있다).


 


둘째,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온다. 예를 들어보자.


 



커널 샌더스(Colonel Sanders)란 사람이 있다. 켄터키프라이드치킨(KFC)을 창립한 미국의 기업가다. 샌더스의 인생은 그야말로 ‘불행’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여섯 살 되던 해에 죽었고, 홀어머니와 두 동생을 위해 이른 나이부터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재혼하자, 집을 나와 닥치는 대로 일했다. 농장 일부터 보험사 영업, 미슐랭타이어 영업 등 돈이 되는 일은 뭐든지 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돈이 모여 주유소 사업을 했는데,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파산한다. 서른아홉 살에 그동안 모은 돈을 다 날린 것이다.


 


샌더스는 다시 주유소를 차리고, 여기에서 ‘닭 장사’를 시작한다. KFC의 첫발이라 할 수 있다(어린 시절 두 동생에게 음식을 해주던 솜씨가 도움이 되었다). 샌더스는 큰 성공을 거둔다. 닭은 잘 팔렸고, 손님들은 열광했다. 이제 모텔까지 연결해서 대규모로 장사를 한다. 그런데 다시 망했다. 그의 나이 마흔아홉 살 때 불이 난 것이다. 화재 때문에 모텔과 레스토랑이 모두 불타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샌더스는 다시 사업을 일으킨다. KFC 통닭의 맛도 이때 개발된다. 이제 다시 돈만 벌면 될 것 같은데, 옆에 새로운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사업은 악화 일로를 걷는다. 여순다섯 살이 되던 해 사업은 완전히 망한다. 말 그대로 파산이었다. 이때 그의 손에 남은 건 연금으로 나온 105달러와 낡은 트럭 한 대뿐이었다.


 


이 정도면 포기할 만도 한데, 샌더스는 낡은 트럭과 105달러를 들고 미국 전역을 달린다. KFC의 프랜차이즈를 위한 순회다. 그는 정확히 1008번 거절당한다. 그 뒤는 어떻게 됐을까? 지금 당신 집 근처에 있는 KFC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공한 사람의 예를 들어 아직 살 만하다거나 인생은 노력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확실히 온다는 걸 이처럼 확실하게 보여주는 예가 없다.


 


인생은 길다. 레일을 벗어났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레일 위에서 끝까지 버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인생은 정답이 없다. 지금 당신이 죽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적어도 남들의 기준이나 이 사회가 당신에게 내민 정답에서 멀어졌다는 이유로 죽겠다면 생각을 달리해보는 것이 좋다. 아직 시간은 많고, 기회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죽음을 생각하겠다면, 그 역시 이해한다. 당신의 인생이 아닌가? 좋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3. 자살 사유서 작성


 


죽겠다는 당신의 확고한 신념에 박수를 보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자살할 이유’도 작성했고, 평소 추구하던 행복의 종류를 모아 ‘나의 행복’ 리스트도 작성했다. 당신의 인생을 이만큼 돌아본 적이 있을까 싶을 것이다. 덤으로 지금까지 생각만 해온 당신의 행복을 실행에 옮겼다(사흘 안에 할 수 있는 행복을 실행에 옮겼다면 말이다). 남은 건 당신의 삶을 타인에게 말하는 시간이다. 당신이 왜 죽으려 하는지 그 마음의 실체를 본격적으로 검증해나가는 것이다.


 


“개인의 고통을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데, 타인의 시선이 왜 필요한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는데, 역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혼자 감정에 매몰돼 별거 아닌 일로 죽으면 손해 아닌가?’ 집단 지성이란 거창한 말까지 할 필요도 없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하다 보면, 고립돼 혼자만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결론은 아주 단순하다.


 



“죽은 놈만 병신이지.”



 


조금 여유를 가져보자.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좀더 확실하고 꼼꼼하게 당신의 자살 사유를 검토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당신이 죽을 이유가 알고 보니 별게 아니고, 쉽게 해결될 문제일 수도 있다.


 


데스 노트를 꺼내 앞에서 작성한 ‘내가 자살할 이유’ 부분을 펼쳐라. 거기 남아 있는 단어들을 가지고 컴퓨터를 이용해 자살 사유서를 작성하라. ‘내가 자살할 이유’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작성했다면, ‘자살 사유서’는 단어들을 배치한 다음 거기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듯이 작업한다. 어느 정도 감정이 섞여도 상관없다. 그러나 감정 과잉 상태가 되면 곤란하다.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기에 감정 과잉 상태가 드러나면 ‘욕’으로 돌아올 확률이 높다. 어디까지나 ‘적당히’ 써야 한다. 기본적으로 들어가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① 성별, 출생 연도


② 최종 학력과 인적 사항


③ 자살을 고민하게 만든 상황(혹은 고통)


④ 현재 상태(재정 상태나 가족 관계, 인간관계 포함)



 


나열식으로 써도 상관없다. 1992년생 남자고, 현재 서울 소재 4년제 대학(경기 지역 대학 중 한 곳에 재학 중) 중 한 곳에 다니며, 성격은 어떻고, 현재 상황이 어떻다 등 자신이 처한 상황을 솔직히 적어 내려간다.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처럼 거짓말을 적을 필요도, 미사여구나 포장도 필요 없다. 솔직 담백하게 쓰되, 다 작성하면 맨 앞에 다음 문구를 입력하라.


 



“소설도, 장난도 아닙니다. 어떻게 받아들이셔도 좋습니다만, 저로서는 인생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렵겠지만 당신의 가족으로 생각해 진지하게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말입니다.”



 


낯간지럽지 않은가? 쓰는 나도 낯간지럽다. 그러나 이렇게 써야 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어떻게 보면 매몰차고, 자기만 알고, 냄비 근성으로 똘똘 뭉친 것 같다. 그러나 한 겹 벗겨보면 정 많고 착하다. 사람은 상대방의 진심을 아는 순간 진지해지고, 가슴 한쪽을 열어둔다. 이렇게 보면 세상에 악한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진지하게 당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바란다. 아, 제목도 잘 뽑아야 한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뭔가 낚일 만한 제목을 붙여야 한다(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48시간 뒤에 죽으려 합니다’와 같이 시간을 한정한 제목이 좋다).


 


이렇게 작성한 자살 사유서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부 프린트해서 데스 노트에 넣어두고, 파일은 긁어 붙인다. 어디에? 포털 사이트의 지식 검색을 비롯해 각종 자살 상담 사이트, 게시판에 긁어 붙여라. 회원 가입 절차가 번거롭다면, 포털 사이트나 몇 군데 게시판에만 올려도 좋다. 그리고 하루나 이틀 정도 기다려라. 댓글이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달리지 않으면 다른 제목으로 다시 올려라).


 


내용을 훑어볼까? 각 포털 사이트의 게시판에 ‘죽고 싶다’는 글을 올리면 반응이 셋 중 하나다.


 


“죽을 각오로 살아라! 자살의 반대말은 살자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이렇게 질책 어린 충고를 하는 이들(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그 심정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인생은 살 만한 것이고, ‘님’의 상황이 힘들긴 하지만 절망적이진 않습니다. 절망감에 빠져 있기에는 ‘님’의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다시 한 번 힘을 내보시죠?” 이렇게 위로와 격려를 하는 이들(이타적인 이들이 꽤 많다).


 


“그래, 죽어버려라. 네가 지구상에 살아 있는 건 산소 낭비야. 후딱 죽어!” 개념 없는 막말들(원래 인터넷이 좀 그렇다). 정말 소수지만, 몇몇 사람들은 같이 죽자며(혹은 약을 팔겠다며) 조심스레 쪽지를 보내기도 한다.


 



 


사는 게 낫다는 의견과 함께 자신의 경험담과 경험을 기반으로 한 해결책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끔은 자신이 조그만 기업을 운영하니 자기 회사에 취직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경제적인 문제일 경우). 인터넷 상이기에 과장되거나 축소된 부분이 있겠지만, 충고하는 경우 좌절을 극복한 경험담이 많을 것이다.


 


이들의 사례를 보고 당신의 고통이 별거 아니니 죽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당신이 이 댓글을 보고 좀 다른 생각을 했으면 한다. ‘세상은 넓고, 여러 가지 일과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 한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주변을 바라보기 힘들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힘든 사람 같다(맞는 말이지만, 상대적인 평가도 고민해봐야 한다). 이런 생각이 계속되면 아무도 날 바라보지 않고, 세상에서 버림받은 느낌이 들게 마련이다.


 


우는 아이가 젖 한 번 더 먹는다.


 


그렇다. 세상은 울어야 관심을 기울인다. 자존심 때문에 함부로 울 수 없겠지만, 일단 울면 세상은 관심을 쏟는다. 그리고 그 관심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면, 분명 해결책이 보일 것이다. 해결책이 아니어도 좋다. 관심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될 것이다(아닌 거 같다고? 한번 해보라.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렇게 글을 올리고 반응을 확인해본 다음에 할 일은 그 게시판에 있는 다양한 ‘자살 후보자’들을 만나는 것이다. ‘자살’이란 단어로 검색해보면 수많은 사건과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죽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다. 지식인을 뒤져보면 카테고리별(자살 사유별)로 자살의 유형을 검색할 수 있을 정도다. 장담하는데 이렇게 올라온 글을 쓴 사람 중 1퍼센트, 아니 1퍼센트 이하가 자살한다. 글을 올리는 심정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있는데, 이 감정 가운데 ‘위안’과 ‘푸념’이 있다. 더불어 누군가 말려주길 원하는 감정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글을 올리는 행위 자체만으로 감정이 정리되고, 자기 ‘감정의 실체’를 확인한다.


 


지금 당신이 올린 자살 사유서와 인터넷에 올라온 자살 후보자들의 글, 그 밑에 달린 댓글을 살펴보라. 뭔가 감정이 정리되고 후련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지 않아도 좋다.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살펴볼 기회를 얻었고, 이 기회를 활용한 것이다. 대단한 용기이며 장족의 발전이다. 이제 대화로 이어나가면 된다.


 


 


4. 대화


 


사람은 기본적으로 말을 해서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어한다. 자살과 같이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하는 경우에는 특히 심하다. 그러나 ‘대화’할 수가 없다. 왜? 우선 자신이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 상황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괴롭다. 이 괴로움은 나만 이해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니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적이다.’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하지?’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리거나,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한다. 마음 깊숙한 어느 곳에는 분명 대화하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이걸 막아서는 장애물이 많다. 죽음을 각오한 상태라면 이런 ‘사소한 이유’에 발목 잡힐 이유가 없겠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감정 과잉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이성적인 접근이 어렵다. 여기에서 물어보자.


 



“익명성이 보장된다면 당신은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지 않은가? 죽지 말란 소리가 아니다. 당신의 현재 상태를, 억울한 심정을,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고 다른 사람이 당신 편이 돼서 들어주는 경험을 해보고 싶지 않은가?”



 


죽기 전에 다른 사람이 당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100퍼센트, 아니 120퍼센트 감정이입 돼서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주는 경험, 가능하다!


 


“그런 걸 왜 해?” 이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번 물어보자. 당신 속마음이 진짜 그런가? 당신은 답답한 마음을 그대로 안고 죽음의 길로 가고 싶은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한번쯤 마음속 이야기를 다 토해내고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게다가 익명성이 보장되고, 언제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돼 있다. 그 사람은 새벽 2시에도 부스스 일어나 (초반 얼마간은) 졸린 목소리로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지금 포털 사이트에 ‘자살’이라는 검색어를 쳐보라. 당장 전화번호 몇 개가 뜬다.


 



① 자살 예방 핫라인(1577-0199)


② 생명의 전화(1588-9191)


(청소년은 1599-3079로 걸면 ‘청소년 자살 예방 상담’으로 연결된다.)



 


두 번호는 24시간 열려 있다. 그냥 전화를 걸어라. 이름을 밝히기 싫으면 밝히지 않거나, 가명을 사용해도 좋다. 전화번호 추적? 그딴 거 없다. 그냥 걸어라. 나도 걸었다. 새벽 1시에도 걸어보고, 새벽 2시에도 걸어봤다. 졸린 목소리도 한 5분 지나면 변한다. 전화를 건 다음에? 이제까지 적은 당신의 ‘자살 사유서’를 그대로 읽어준다. 바로 반응이 나온다. 친절한 여성이 낭랑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당신의 고통과 아픔, 괴로움을 이해해준다. 이 세상에 당신과 그 ‘목소리’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이한 경험을 할 것이다. 그 목소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당신의 모든 이야기를 받아주고, 이해해주고, 같이 고민해준다. 농담 같은가? 한번 걸어보라. 이 전화기의 ‘목소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느 순간 ‘재미있다’는 감정까지 생긴다.


 


내 눈치를 보며, 내 마음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지금 내 감정이 어떤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모습이 역력하다(몇 번 걸어보면 그런 감정이 어떤 건지 확실하게 느껴진다).


 


“AS센터의 매뉴얼에 나와 있는 고객 응대와 뭐가 다르냐?” 이렇게 반문할 수 있는데, 그 질문이 정답이다. 당신은 지금 자기 생명을 반품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반품을 최대한 막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어떤 희열을 느낄 수도 있다(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지만, 고객이 왕이라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당신의 목숨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어떤 사람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 한다.


 


당신이 친구나 가족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들은 정말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같이 고민해준다. 당신이 하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고, 그 정보를 기준으로 당신에게 조언해준다(그러니 당신의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말해줘야 한다). 하다못해 자살을 핑계로 인생 상담을 청해도 다 받아들인다. 상담계의 블랙홀이라고 해야 할까? 당신의 생명을 반품하기 전에 한번쯤 상담원과 통화해보는 게 어떤가? 당신의 생명이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란 사실을 확인할 것이다. 정 안 되면 당신의 인생, 생명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고 속이 다 풀린 다음 반품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선택은 당신의 몫이고, 하다못해 제품(당신의 인생)에 대한 불만이라도 털어놓고 반품하면 후회는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했는데도 사람을 직접 대한 상태에서 이야기하고 싶거나, 전화 상담으로 당신의 굴곡진 인생을 다 토해낼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다른 방법이 있다. 어렵지 않다. 발품을 팔 필요도 없다. 그저 컴퓨터 자판만 몇 번 두드리면 된다. 인터넷에 ‘자살’이라고 치면 많은 단체가 뜨는데, 그중 심리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으면 된다. 심리 치료란 말이 부담스럽다고? 부담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냥 대화일 뿐이다. 이런 단체가 싫다면 인터넷에 ‘심리 치료’ ‘상담 심리 치료’ ‘심리 상담 치료’라고 입력해보라. 수많은 단체와 개인이 뜰 것이다. 이건 비용이 좀 드는데, 50분에 6만~7만 원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 정신과와 별개의 문제이기에 의료 기록이나 보험에 전혀 문제가 없다. 걱정 없이 전화해서 상담을 받으면 된다. 당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은근히 이런 ‘단체’나 ‘개인’들이 많다.


 


이 나라에는 이런 제도나 장치들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근히 많다. 조금만 찾아보면 공짜로 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꼭 자살이 아니어도 인생의 고민이 있다면 한번쯤 찾아볼 만하다. 좋다. 보증한다. 대화 5분 만에 눈물이 샘솟듯이 나올 것이다).


 


“지금 나보고 죽지 말란 소리잖아?” 이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는데, 그건 당신이 판단하기 나름이다. 몇 단계에 걸쳐서 죽겠다는 마음이 바뀌었다면 애초에 당신의 자살 사유가 작은 것이었거나, 당신이 자살을 생각할 당시 감정에 몰입돼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감정 과잉 상태가 당신의 현재 상황(고통)을 부풀렸다는 걸 확인했을 것이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 아니 배제할 수 없다면 최대한 객관화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객관화에 성공해서 자살하겠다는 마음을 접으면 조용히 현실로 복귀한다(아니면 잠깐 현실에서 벗어나 은둔해도 괜찮다. 섣불리 나서서 감정을 다시 과잉 상태로 돌려놓는 것보다 약간 휴지기를 갖는 게 좋다).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은 잠시 멈춰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것이다. ‘인생을 확 포맷해?’라고 생각했다가 마음을 바꿔서 하드에 깔린 프로그램들을 정리하고, 디스크 조각 모음도 하고, 레지스트리도 정리해서 쌩쌩하게 돌리는 것이다. 당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그동안 집착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한 것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것이다(긴급 상황에 처해 한번 더듬어본 것일 뿐이다. 확실한 건 당신이 ‘우는 만큼’ ‘찾는 만큼’ 인생이 풍성해진다는 사실이다. 주변에 아픈 걸 말하고 노력하는 만큼 당신이 찾는 해답에 가까워진다). 부끄러워할 일도, 수치스러워할 일도 아니다. 인생의 당연한 과정이다. 이런 과정 없이 어떻게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유명 인사의 명언을 적는 것이 불편하지만, 두 개 적어보려고 한다.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괴테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 ―에이브러햄 링컨



 


다시 말하지만, 고난 없는 인생은 없다. 입바른 소리라고? 사람은 쇠와 같아서 두들겨 맞는 만큼 단단해지고, 튼튼해지며, 당신이 목적하는 삶에 가까워진다. 인터넷 검색창에 ‘고통’ ‘고난’이라고 쳐보라. 수많은 저명인사와 유명인의 어록과 명언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내용이 대부분 이런 식일 것이다. 그들이 표절의 위험(?)을 무릅쓰고 비슷비슷한 말을 한 이유가 뭘까?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울어라 그리고 찾아라. 그러면 사람들이 당신의 고통과 고난에 위로와 격려를 줄 것이다(다시 말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그렇게 악하지 않다. 진심으로 대하면 그들도 당신에게 진심 어린 충고와 조언을 해줄 것이다).


 


링컨의 격언을 쓴 이유도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긍정 심리학’을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그건 오프라 윈프리로 충분하다). 그러나 링컨의 말은 사실이다. 이 역시 인터넷에 검색어를 입력하면, 비슷비슷한 명언과 어록으로 도배가 될 것이다(덕분에 긍정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책을 쓰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당신 앞에 놓인 수많은 난제와 고민, 고통은 따지고 보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당신 인생을 구성하는 사실은 20퍼센트밖에 안 된다. 나머지 80퍼센트는 당신의 감정으로 채워진다. 불교 용어 중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있다. 간략하게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일’이라는 뜻이다.


 


원효대사의 해골 물바가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그 뜻을 대충 알 것이다. 마음이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고, 죽음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다.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다고,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걸 잃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잠깐 돌아서서 행복했던 것들을 상기해보라(당신이 직접 쓰지 않았는가). 별거 없다. 행복은 의외로 소소하고 간단한 것들이다. 아울러 손에 움켜쥐려고 하면 얼마든지 움켜쥘 수 있는 것들이다.


 


“지상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미련을 땅에 박아두라!”


 


여기에서 말하는 미련은 당신이 찾아야 할 ‘행복’이다. 행복은 마음먹은 만큼 당신에게 찾아올 것이다. 다시 살겠다는 마음이 든다면 지상에 최대한 많은 미련을 뿌려두자. 그 미련이 싹 틔워 줄기가 되고, 잎이 되어 당신을 지상에 튼튼히 뿌리박게 해줄 것이다.


 


여기까지는 자살을 재고한 이들을 위한 내용이다.


 


당신이 죽음을 선택했다 해도 이제까지 과정은 헛된 것이 아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당신은 최소한 세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당신의 감정이 배제된 확실한 ‘자살 사유’를 확인했다.


둘째, 당신이 누려왔고 누리려고 하는 것의 실체를 확인했다. 이를 통해서 당신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확인했고, 당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이해했다(아니라면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절차를 밟아보라).


셋째, 당신이 죽어야 할 이유에 대한 타인들의 판단을 들어봤고, 이를 통해서 당신의 ‘자살 사유’를 검증했다.



 


당신의 자살은 형식적으로나마 ‘검증’ 과정을 통과했고, 당신은 충분히 죽을 이유가 있다는 걸 이해했을 것이다. 이제 그걸 실행에 옮기면 된다. 앞에서 말한 초인의 힘을 기반으로 화려하고 멋있게 당신의 죽음을 포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당신이 일생 동안 누려보지 못한 스포트라이트를 단번에 받을 수도 있고(당신이 그걸 보진 못하겠지만),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억울함’과 ‘분노’를 토해낼 무대를 마련했다. 자, 이제 멋있게 죽으러 가자!


 










Tip 관심


 



첫째, 자살을 계획하는 사람 중에서 유서를 남기는 경우는 12~20퍼센트에 불과하다.


둘째, 자살자 중 80퍼센트는 한 번 이상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


셋째, 자살 충동을 억누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3초라고 한다.



 


 


세 가지 명제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바로 당신들의 ‘관심 부족’이다. 당신들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 사회의 자살률은 줄어들 것이다. 이해가 안 가는가?


 


 


첫째, 자살을 계획하는 사람 중에서 유서를 남기는 경우는 20퍼센트가 되지 않는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바라보면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기 의도를 주변에 알리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각이다. 유서를 남기는 경우는 자살자 10명 중 2명이 안 되지만, 자살자 10명 중 8명은 살아 있을 때 자기 의도를 은연중에 주변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이는 자신을 말려달라는 무언의 외침이다. 그 외침을 당신들은 가볍게 치부하고 무시했다. 예비 자살자들은 끊임없이 주변에 외치고 있다. 이들의 외침을 듣고 적절한 반향(反響)을 보내면, 예비 자살자들은 자살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낼 것이다(그 반향은 굉장히 큰 ‘무언가’가 아니다. 적절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대화다. 가족이나 지인들이 보내는 사인을 가볍게 무시하지 말고, 관심과 애정의 눈으로 지켜보고 대화만 시도해도 자살을 막을 수 있다).


 


 


둘째, 자살자 중 80퍼센트는 한 번 이상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 이 대목도 중요한데, 자살한 사람들은 그전에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당신 옆에 있다는 얘기다. 자살 시도자들에게는 적절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관심과 애정이 있다면 이들은 두 번째 시도를 포기할 수 있다. 첫 번째 시도는 앞에서 말했듯이 주변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사인을 보낸 것이지만, 두 번째 시도는 너무나 명확하다. 자살 시도자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끊임없이 관심과 애정을 보내야 한다. 그들이 하는 건 ‘쇼’가 아니라 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한다.


 


 


셋째, 자살 충동을 억누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3초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마음을 돌려먹는 데 걸리는 시간이 겨우 3초라는 말이다. 이 3초간 온갖 상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시간은 겨우 3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돌리기로 마음먹으면 정말 쉽게 돌릴 수 있는 것이 죽겠다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을 돌리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관심’이다. 주변 사람들의 작은 관심이 모이면 한 생명을, 아니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


 




 


 


(계속)


 


 



 


 


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