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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30. 월요일

miseryruns

 

 

 

 

움베르토 에코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아예 제목부터 '세계적 석학 움베르토 에코' 다. 총 2편으로 이루어진 이 인터뷰에서 조선일보가 강조한 지점은 인터넷은 결국 '지식의 부자' 가 되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는 이야기였다. 이 글에 대해 '인터넷은 역사가 <장미의 이름> 보다 짧으며, 우리는 그 실험을 계속할 테니, 움베르토 에코여, 걱정하지 마시라' 는 글이 또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조선일보에서는 은근슬쩍 그들의 섭외력을 자랑하면서 동시에 '노인의 지혜' 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굳이 이후 [조선데스크] 라는 사내칼럼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던 기자가 글을 쓰기도 했다.

 

 

 

 

 

 

 

 

 

 

나는 이 인터뷰를 기사가 나온 다음 날 읽었고, 조선일보를 욕했다. 고작 이따위를 끌어내려고 인터뷰를 하다니. 이게 무슨 인터뷰야. 아이돌 인터뷰냐. 적어도 움베르토 에코의 책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9 / 열린책들을 참조하라) 을 읽은 적이 있다면 (에코식으로 말하자면, 지적으로 부자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읽었다면) 이런 인터뷰는 하지 않았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이후에 문제 제기 지점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지만, 이 인터뷰는 조선일보가 움베르토 에코라는 '기호' 를 멋대로 해석 (이에 대해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책 <해석의 한계>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3 / 열린책들을 참조하라) 해 버린, 아마도 에코가 이 인터뷰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이것들이 해석의 한계따위 생까고 멋대로 했군' 이라고 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인터뷰의 정리에 있어 조선일보는 노림수가 있었고, 그 이후의 대응들은 거기 말린 것 같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나름 '에코 빠돌이' 를 자처하는 입장에서, 지금까지 에코의 책과 저작들을 읽고, 생각하고, 머리속으로 정리하는 것이 취미가 된 사람으로서, 이 사단의 문제들을 좀 따져볼까 한다.

 

 

 

 

 

 

 

 

조선일보는 야비하다

 

 

 

 

 

 

 

 

 

 

혹 아직 안 봤다면, 우선 조선일보와 에코의 인터뷰 첫 번째를 보고 이야기하자.

 

 

 

 

 

[보러가기]

 

 

 

 

 

움베르코 에코 인터뷰의 시작은 7월 2일 움베르토 에코가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장서각에서 킨들과 종이책(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집어던진 이야기로 시작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종이책 애호가로, 종이책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옹호하고 주장하는 입장에 있다. (이 해프닝 역시 그가 그런 입장을 주장하기 위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이 이벤트로 '인터넷, 또는 e-로 시작하는 어떤 것이 기존의, 더 오래된 콘텐츠 전달의 방식보다 더 '좋다' 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에코는 밝힌다. 그의 아이패드를 꺼내면서.

 

 

 

 

 

그리고 그 뒤에, 바로 그는 아이패드를 꺼내며 기본적으로 테크노포비아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그는 퍼스널 컴퓨터의 애호가이며 그의 소설 <푸코의 진자>에서는 이 퍼스널 컴퓨터 - 아불라피아 - 가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이 소설에서도 그의 e- 에 대한 문제제기는 남아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글 뒤쪽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자) 그 다음, 그는 그의 문제 의식의 핵심 지점을 이야기한다.

 

 

 

 

 

 

"가령 부자와 빈자가 있다고 칩시다. 돈이 아니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지적인 부자,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으로 불러보자고. 이 경우 베를루스코니(이탈리아 전 총리)는 가난하지. 나는 부자고(웃음). 내가 보기에 TV는 지적 빈자를 돕고, 반대로 인터넷은 지적 부자를 도왔어. TV는 오지에 사는 이들에겐 문화적 혜택을 주지만 지적인 부자들에게는 바보상자에 불과해. 음악회에 갈 수도 있고, 도서관을 갈 수도 있는데 직접적 문화적 경험 대신 TV만 보면서 바보가 되어가잖소. 반면 인터넷은 지적인 부자들을 도와요. 나만 해도 정보의 검색이나 여러 차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 하지만 정보의 진위나 가치를 분별할 자산을 갖지 못한 지적인 빈자들에게는 오히려 해로운 영향을 미쳐요. 이럴 때 인터넷은 위험이야. 특히 블로그에 글 쓰는 거나 e북으로 개인이 책을 내는 자가 출판(Self Publishing)은 더욱 문제요. 종이책과 달리 여과장치가 없어요.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선별과 여과의 긴 과정이오. 특히 쓰레기 정보를 판단할 능력이 부족한 지적 빈자들에게는 이 폐해가 더 크지. 인터넷의 역설이오."

 

 

 

 

 

이 이야기 이후 바로 에코와의 대화가 아니라, 인터뷰이가 끼어들면서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 파트는 에코를 꼰대 할아버지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이 글에서 하는데, 사실 위에서 인용한 부분을 좀 더 다룰 필요가 있었다. 정작 움베르토 에코가 말하려는 주제의식의 핵심은 여기 있는데, 이 뒤의 사례들로 후딱 넘어가버리면서 움베르토 에코를 '꼰대' 로 만들어내버리고 있는 거다. (물론 움베르토 에코가 꼰대가 아니라는 건 아니다. 에코식으로 말하자면, 그는 '지적 부자인 꼰대' 이기 때문에, 충분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 저 앞 문장을 좀 더 뜯어보도록 하자.

 

 

 

 

 

 

가령 부자와 빈자가 있다고 칩시다. 돈이 아니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지적인 부자,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으로 불러보자고. 이 경우 베를루스코니(이탈리아 전 총리)는 가난하지. 나는 부자고(웃음).

 

 

 

 

 

우선 에코는 사진과 베르루스코니 전 총리를 비교하는데, 조선일보는 '이탈리아 전 총리' 라고 써 놨다. 여기서 조선일보가 조금 더 합리적이려면 그가 언론사와 축구팀을 가진 재벌이라는 것, 특히 언론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야 했다. 그래야 다음 문장의 'TV는 지적 빈자를 돕는다' 는 에코의 말이 명확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베를루스코니는 우리 가카와 종종 비교되는 (구글에는 연관검색어로 뜬다) 인물로, 세계 14위의 부자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나 태도, 상황을 보면 그와 유사성이 높은 건 외려 박근혜 쪽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열심히 돈을 벌려는 태도는 가카와 유사하지만 그가 대중과 상대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언론 재벌로서의 태도를 가지고 있고, 이에 대응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박근혜다. 두 사람 모두 이미지와 현실적 인물이 너무 다르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고, 미디어 노출의 방식과 형식,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적 위치에 있다. 물론 가카도 이를 충실히 하고 있지만, 적어도 가카의 경우는 '하고 있다' 는 것이 너무 명확히 보인다는 차이가 있다.물론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런 지점을 찍고 갈 거라고는 생각 안한다. 기대감이 없다.

 

 

 

 

 

 

 

 

 

 

 

내가 보기에 TV는 지적 빈자를 돕고, 반대로 인터넷은 지적 부자를 도왔어. TV는 오지에 사는 이들에겐 문화적 혜택을 주지만 지적인 부자들에게는 바보상자에 불과해. 음악회에 갈 수도 있고, 도서관을 갈 수도 있는데 직접적 문화적 경험 대신 TV만 보면서 바보가 되어가잖소. 반면 인터넷은 지적인 부자들을 도와요. 나만 해도 정보의 검색이나 여러 차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

 

 

 

 

 

자, 에코는 여기서 어떤 정보 전달 수단이 어떤 준위의 문화 콘텐츠를 담을 수 있는지를 전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대로 된 인터뷰어라면 여기서 이 지점을 짚고 넘어갔어야 한다고 본다) 즉, 어떤 매체가 담을 수 있는 지적 전달 수준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거다. TV는 지적으로 높은 수준을 지닌 정보를 전달하기에는 좋지 않은 매체에 해당한다. 이는 TV를 보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감각의 많은 부분을 사용하며 수동적 상태에 머물며, 특히 그 정보와 자신이 닿는 시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기인한다고 본다. 물론 근래의 TV들이 훌륭해지긴 했지만, 내용을 명확히 이해하고, TV가 제공한 정보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0.8배속으로 TV를 돌려보거나 하는 경험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에 비해, 책은 정보와 내가 만나는 시간, 정보 전달의 반복 등을 정보를 전달받는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어떤 책을 딱 한 번 읽고 '읽었다' 고 하는 것과, 몇 번을 곱씹어가며, 시간을 반복해 들여가며 읽는 사람과의 지적 부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러나 TV의 경우 전달할 수 있는 정보량은 책에 비해 절대적으로 작고, 정보량에 비해 월등히 많은 시간을 잡아먹으며, 게다가 그 정보 전달을 뇌에서 재구하고 정리할 시간적 기회는 주지 않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예를 들어, <세서미 스트리트> 의 경우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만 그 댓가로 같은 방송을 한 주 내내 방영한다)

 

 

 

 

 

 

 

 

어떤 미디어의 전달력의 깊이와 재현성의 관계

 

 

 

 

 

 

 

 

 

 

이러한 문제 지점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미디어의 '전달과 재현의 준위' 라고 하면 어떨까. 미디어의 형식은 기본적으로 개별적인, 독립적인 '전달 준위' 를 갖는다는 것이다. 책과 같은 미디어는 전달 준위가 깊지만, 경험적인 측면에서는 재현성이 낮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에 비해 인터넷 등의 미디어는 다양한 형식을 통해 전달 준위는 얕지만 경험적 재현성은 높다는 것으로 말이다. 대개의 문화예술컨텐츠는 이 준위가 양쪽 모두 낮은 것이 상업성이 높은데, 이는 그렇게 낮은 준위의 컨텐츠가 개인에게 그 컨텐츠의 감상 경험을 빠르게 내재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이에 대한 에코의 저작은 꽤 많아서 딱히 뭐 하나 소개하기 애매할 지경이지만 굳이 하나를 뽑자면 <애석하지만 출판할 수 없습니다>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2권 / 열린책들) 의 [<평범>의 현상학] 을 권한다.

 

 

 

 

 

 

하지만 정보의 진위나 가치를 분별할 자산을 갖지 못한 지적인 빈자들에게는 오히려 해로운 영향을 미쳐요. 이럴 때 인터넷은 위험이야. 특히 블로그에 글 쓰는 거나 e북으로 개인이 책을 내는 자가 출판(Self Publishing)은 더욱 문제요. 종이책과 달리 여과장치가 없어요.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선별과 여과의 긴 과정이오. 특히 쓰레기 정보를 판단할 능력이 부족한 지적 빈자들에게는 이 폐해가 더 크지. 인터넷의 역설이오.

 

 

 

 

 

인터넷의 정보는 기본적으로 수동성을 가진다. (한국의 포털 사이트는 능동적이긴 한데, 이 방식은 거의 한국이나 몇몇 '문화적 빈자' 를 위한 서비스만 그렇다. 한국에서는 이게 주류여서 그렇지) 그리고, 현대 문명 자체의 상당 부분이 기본적으로 구매라는 수동적(이지만 능동적이라고 설득하느라 노력하는 행위) 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 유념할만한 지점이다. 여기에 에코의 이야기의 핵심이 있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선별과 여과의 긴 과정이다.

 

 

 

 

 

그리고, 이후 에코는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언설을 반복한다. 예를 들어 질문에서 "인터넷, 포털, SNS는 우리의 직접 경험을 제한하고 통제합니다. 인터넷이 백과사전이자 학교인 손자 손녀들에게 인터넷 시대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친다면 뭐라 하렵니까." 라는 질문에는 악의가 있다. 특히, 'SNS가 우리의 직접 경험을 제한하고 통제한다' 라는 말은 한 마디로 말해 온라인이라는 것의 본질 자체를 호도하는 표현이다. 이 질문의 문제제기 지점 앞에 있는 이 문장은 뒷 문장에서의 질문과는 사실 크게 직접적 연결성이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정작, 지금 세대에게 SNS가 직접적이냐고 물었다가는 아마 대부분의 경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말 저 인터뷰어는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기본적으로 어떤 것이든, 컨텐츠화가 되는 순간 그 내용의 '직접성' 은 약화된다. 복제되고 전달을 위해 형식이 변화하는데 그 내용이 온전할 리가 없다는 것은 아무리 지적 빈자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참이라고 믿는, 지적 빈자들의 인식의 문제지, SNS 시대라고 해서 이런 것들을 '직접적' 정보로 이해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대충 뭉뚱그려, 온라인의 폐해를 강조하기 위한 언설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질문에 대한 움베르토 에코의 답변은 그 문제 자체를 지적한다. (이걸 생각하지 않고 이 인터뷰를 정리했다면, 솔직히 뭔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정작 에코의 대답은 '그들' 에게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시스템에게 하는 답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고 젠장

 

 

 

 

 

 

 

 

 

 

 

"학교에서 정보를 여과하고 필터링하는 법, 분별력을 가르쳐야 해요. 인터넷 정보를 이용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반드시 '비교'를 해봐야 하오. 하나의 정보 소스만으로는 절대 믿지 말 것. 같은 사안에 대해, 가령 열 개의 정보를 찾아본 뒤 꼭, 꼭, 꼭 비교할 것. 이것이야말로 교사들이 먼저 실천하고 가르쳐야 해요."

 

 

 

 

 

이 인터뷰에 대한 비판적 글이라고 SNS에 소개된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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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도 이 지점을 재론 라니에의 <디지털 마오이즘>, 인드류 킨의 <아마추어를 추종함> 등의 저작을 예를 들어 별로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라고 하고 있는데, 이 지적은 에코가 지적하는 문제의 지점을 조금 잘 못 보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에코가 방점을 찍은 지점은 그 뒤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항상 회의하라(Always be skeptical). 그걸 배워야 합니다. 위대한 기술이자 학습 방법이오. 사람에 대한 판단은 여럿의 이야기를 종합해보고 나서 결정하라는 것도 같은 이야기야. 사실상 교육의 유일한 방법론이오. 회의를 바탕으로 다른 정보를 취하고, 비교해서 판단하라. 교사들은 이렇게 얘기해야 하오. 인터넷도 물론 사용하되 관련 책도 찾아 읽어보라고. 그리고 따져보라고."

 

 

 

 

 

아마도 이 글의 저자께서는 <디지털 마오이즘> 과 연결되는 언설이 나오는 순간 이쪽으로 확 정리를 해 버리신 듯 한데, 진짜로 읽어야 하는 지점은 이 지점이 아닐까 한다. 항상 회의하라(Always be skeptical). 사실, 이런 언설의 시작은 마오 쩌둥이 아니라 칼 마르크스다. 의심과 회의야 말로 인간을 바르고 강하게 만든다고 한 마르크스의 언설은 여전히 유효한 셈이다. 그런데, 이 다른 정보를 취하고, 비교해서 판단하라. 는 에코의 말은 조선일보의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이 작동하는 것이지 싶다.

 

 

 

 

 

'인터넷에 있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정보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제공하는 '좋은' 정보들도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라. 인터넷을 무조건 믿지 말 것이며, 그렇게 무조건 믿는 사람들은 의심하고 경게할지어다' 근래 조선일보의 논점과 딱 맞는 방식으로 해설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나 싶다. 어짜피 이 인터뷰의 소비 대상이 기본적으로 움베르토 에코의 표현대로 '지적 부자' 라기보다는 '지적 부자 워나비' 에게 작동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자기계발서가 팔리는 방식과 같다. 움베르토 에코 같은 '지식의 공룡' 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만한 사람의 이야기라면 우선 믿고 따라볼 만 하지 않겠냐는 이런 '지적 가난' 을 작동시키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진실은 어디 있는가

 

 

 

 

 

 

 

 

 

 

하긴, 에코의 책은 어렵다. 심지어 전 세계 판매량 20위권에 들어가는 <장미의 이름> 도 읽어봤냐고 물어보면 그렇다는 사람이 많은데, 어땠냐 물어보면 말을 잇지 못하는 사람들, 많이 만났다. 에코의 책을 이해해 볼라지면 도리없이 관련된 다른 자료들을 찾고, 읽고, 분석하고, 정리하는 과정들을 겪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 과정은 에코가 이야기하는 '지적 부자' 가 되는 과정과 일치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이 글에서는 기차여행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준 영향들을 다루고, 인터넷 역시 그런데다, 아직 그 역사는 20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그리고 그 실험은 우리 세대에서 수행할테니, 꼰대 어르신께서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글을 맺는다. 그런데, 이 글 자체가 우선 이야기의 방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은 - 조선일보의 관점을 - 결과물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우리는 모두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로 인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살아가는 어린아이' 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런 문제를 '성장통' 으로 바라보는 것이 과연 적합한가에 대한 논의는 별개로 치고,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게다) 이 관점을 그대로 받아, 어린아이의 인지 - 인식으로 이걸 표현해보도록 하자.

 

 

 

 

 

이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대로라면 Trail-Error 의 반복으로 결국 이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그러므로 그 결과 우리는 이것과 잘 지내게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고 요약할 수 있겠다. 문제는, 이 Trial의 상황에서 발생하는데, Trial 이전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간접적인 경험이다. (대개의 경우 직접적인 경험보다 덜 위험하고, 영향도 적다) 간접적 경험은 기본적으로 컨텐츠의 형식으로 전달된다. 그런데 그 컨텐츠의 전달 방식 자체가 가지는 '전달 준위' 는 낮게 되고, 재현성은 그보다 높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 단계에서 이런 콘텐츠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그래서 더 효율적이고, 결과적으로 그 개인과 사회읩 발전에 도움이 될) 이해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점점 컨텐츠가 전달하는 재현성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작업을 반복해나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조선일보의 움베르토 에코의 두 번째 인터뷰의 가장 재미있는 지점은 제목이다.

 

 

 

 

 

 

"거짓과 날조를 파헤치고 싶나… 진실을 먼저 공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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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조선일보의 이 기개. 거짓과 날조에 가장 일조하며 이렇게 쓰다니. 두 번째 인터뷰의 밀도는 첫번째보다 더 낮고, 솔직히 말해 이정도면 연예인 가십 인터뷰와 뭐가 다른가 싶다. 어쨌거나, 여기에서 그나마 건질 만한 거리는 이 지점밖에 없다고 본다.

 

 

 

 

 

 

생물학적으로는 팔순이지만, 소설가로는 삼십대입니다.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쓴 게 1980년이니까 소설가로서는 올해 서른둘?(웃음) '문학적 청춘'의 비밀은 뭔가요.

 

"비밀이 있다고 한들 가르쳐 줄 것 같은가?(웃음) 비밀은 없어요. 단 창작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마음과 참을성이랄까. 내 소설은 6~8년마다 한 권씩 나왔소. 1년에 1권씩 책을 내는 사람은 다른 비밀이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비밀은 기다림의 미학이지. '장미의 이름' 이후 '푸코의 진자'까지 8년이 걸렸소. 쓰는 시간 그 자체가 기쁨이지요. 나는 책을 다 쓰고 나면 슬퍼져요. 완성의 기쁨이 아니라 책을 쓰는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는 게 더 즐겁죠. 내 소설의 서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보다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재해석하는 쪽이죠. 갈릴레오에 관한 책을 읽다가 (세 번째 소설인) '전날의 섬'의 모티브를 찾았던 건데, 이런 조사와 공부가 좋아요. 그런데 책을 다 쓰고 나면 슬퍼. 더 이상 관련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게 되잖소."

 

 

 

 

 

사실 이 내용은 첫 번째 인터뷰에서 지적한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굳이 창작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적 부자의 특징은 지식을 습득하고 그 지식이 자신이 생각핬던 '추리' 와 맞아들어갈 때 느끼는 즐거움은 지적 부자와 지적 가난을 분리하는 가장 큰 지점이다. 움베르토 에코가 '더 이상 관련 책을 읽을 필요가 없게 되니 슬프다' 라고 하는 것은, 그가 그러한 지식 탐색의 과정을 일종의 레크레이션과 같은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런 에코의 태도는 그의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에코 마니아 콜렉션 15권 / 열린책들) 에 잘 드러나 있다. 아, 그러고보니 열린책들의 에코에 대한 소개 속에 나와있기도 하다. 선데이 타임스에서 말하는 "플라스틱 포크로 비행기 안에서 콩을 찍어 먹으며 파시즘을 걱정하는 사람" (열린책들의 에코 마니아 선집의 뒷표지에 나와 있다)

 

 

 

 

 

 

 

 

진실에서 시작한 믿음으로 실패하는 인물들

 

 

 

 

 

 

 

 

 

 

 

'장미의 이름'부터 곧 출간될 '프라하 공동묘지'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거짓의 힘' '날조의 메커니즘' '음모론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여왔죠. 이유는?

 

"그렇게 묻는다면, 왜 단테는 천국과 지옥에 관심을 쏟았고 반대로 발자크는 프랑스 사회문제를 썼느냐고 물을 수 있지요. 제임스 조이스는 왜 다른 곳이 아닌 더블린에 집착했느냐고 할 수 있겠고. 6권 중에서 '전날의 섬'과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이 범주에 묶을 수 없을 거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일 뿐이지. 나는 위조와 날조에 관심이 많아요. 나는 철학자고, 철학자는 당연히 진실에 관심이 있는 법이지.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거짓인가. 거짓이나 위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진짜가 뭔지를 알고 시작해야 해요. 반쪽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어요. 둘은 연결되어 있지. 진실을 모른다면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거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중, 그가 지적한 대로 자신의 이야기로 분류하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과 <전날의 섬>를 제외한,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지>, 그리고 <바우돌리노> 을 보면, (아마도 새 소설 <프라하 공동묘지> 도 그럴 것 같은데) 에코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여기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적 부자, 그것도 보통 부자가 아닌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지적 부자들은 대부분 실패한다.

 

 

 

 

 

<장미의 이름> 에서는 배스커빌의 윌리엄과 호르헤는 실패하고, 아드소는 성공한다. 이는 그가 지적 부자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적어도, 소설에서 묘사하는 '사건' 의 시간에는) 그보다는 지적 부자들이 서로 자신의 지식을 신뢰하고 신봉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커진다. 두 수도사 모두 우연을 필연으로 이해하면서 답에서 멀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 결과가 마지막 한 번에, 두 문제인물의 대화 과정에서 드러나버린다는 것은 소설적 장치로는 꽤 재미있는 지점이지만, 솔직히 여기까지 읽기 전에 진이 빠져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서 배스커빌의 윌리엄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이해' 하게 되는 데 반해, 호르헤는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믿는다'.움베르토 에코 식으로 말하자면 윌리엄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의심하고 (이는 소설 중에서 아예 아드소에게 정리를 해 주기도 한다) 그 결과 시간적으로는 너무 늦었지만, 문제를 해결한다. 그에 비해 호르헤는 그렇지 못했다.

 

 

 

 

 

<푸코의 진자> 에서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지적 부자들이고, 이들 모두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기 위해 지적 부유함을 도구로 사용한다. 결국 그러지 않는, 의심하는, 그래서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레아 하나 뿐이다. 이들은 사실을 (재미와 욕망에 따라) 뒤들고, 가짜 진짜들을 만들어내며, 그 가짜 진짜들이 진짜로 작동하는 것이 이 소설의 갈등 지점이며 소설의 줄거리가 된다. 아드소는 결국 이런 문제들을 '이해' 하게 되지만, 그 결과로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 바우돌리노는 지적 빈자에 가깝구나. 그러나, 바우돌리노를 둘러싼 사람들이 지적 부자인데다, 이들은 그들의 욕망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바우돌리노를 이용하려 든다. 물론, 바우돌리노는 지적 빈자이긴 하나 상식이 없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나간다. 그는 매우 속물적인 인물이지만 동시에 거의 유일하게 입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에코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의심' 을 멈추거나, 적절하지 못하게 사용함으로서, 그리고 그 의심을 '계속 반복' 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지위에서 굴러떨어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어쩌면 지금 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굴러떨어지는 사람들이 좀 많지 않나 싶다. 뭐, 조선일보는 아예 굴러떨어져주세요. 하는 것 같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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