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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8. 01. 수요일


논설우원 파토


 



 


 


(우원은 지난 10년간 고대 이집트와 관련해 여러 편의 글을 쓴 바 있고 읽은 분들도 꽤 있을 거다. 그래서 비슷한 소리를 반복하고 싶진 않지만 이 대목에서 그냥 넘어갈 수도 없다. 링크를 걸까 생각했으나 당시 글이 가진 의도나 결론과 지금 이 글과는 상의한 점이 많다. 그래서 일부 취사선택해서 아래에 다시 수록하고 필요한 부분들은 수정 보강하니 어디서 본거라고 욕하지 마시라덜.)


 


퀴즈 좀 풀어보자.


 


1. 2012 년 현재, 지구상에 서있는 단일 건축물 중 부피가 가장 큰 건물은?


2. 역시 현재, 지구상에 서있는 단일 건축물 중(댐, 다리 제외) 가장 무거운 것은?


3. 건설된 이후 4천년 동안 아무도 들어가보지 못했음은 물론 아직도 내부가 다 밝혀지지 않은 건물은?


4.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고 서있는 마천루는?


5. 역사상 가장 정밀한 계산과 공법 하에 지어진 건물은?


6.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는 건물은?


 


눈치 챘겠지만, 바로 이집트 기자에 있는 대 피라미드가 정답이다.


 


이 피라미드의 나이는, 주류 학자들의 주장대로 4 왕조 쿠푸 왕의 무덤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해도 BC 2,500년, 즉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다른 두 개, 카프레와 멘카우레의 파리미드 역시 나이나 규모, 정밀도 및 난해함의 측면에서 별로 밀리지 않는다.


 


이 거대 건축물군은 우리가 주저 없이 고대의 인물이라고 부르는 2천년 전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나 솔론, 혹은 카이사르나 예수 같은 이들에게도 까마득한 고대의 유적이었다. 그 오랜 옛날부터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피라미드들은 이미 아득한 고대의 경이이자 신비였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이 어이없이 크고도 정교한 건물들이 말 그대로 반만년이 지난21세기까지도 거의 멀쩡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자 피라미드들이 울퉁불퉁한 모습이 된 것은 15세기경 카이로의 대지진 이후다.

그 전까지 4천년 간, 피라미드 위에는 석회암으로 된 얇은 판이 물샐 틈없이 얹혀져

전체가 이음새 하나 드러나지 않는 평면을 이루고 있었고

이 면들이 반사하는 태양빛이 멀리서도 눈이 부실 정도였다고 한다.

위 사진에서처럼 카프레 피라미드의 상층부에는 아직 그 흔적이 꽤 남아 있다.

- 우원 직찍


 


유럽의 모태는 로마다. 세계 국가로서, 문명의 전달자로서, 정치와 사회 시스템의 정립자로서 로마의 위치는 유럽에서 확고부동하다. 역사의 단선(單線)적 발전이라는 고정관념을 의심케 할 정도의 성숙된 의식과 사회 시스템의 측면에서 고대 로마의 선진성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뒤에는 그런 로마를 가능하도록 한 또 다른 바탕들이 있게 마련이다. 흔히 그 자리에 우리는 지중해 지역에서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꽃피웠던 그리스를 위치시킨다. 그러나 그런 그리스 역시 무에서 스스로 만들어진 문명은 아니다. 그리스의 정치적, 문화적 성장의 배경에는 또한 과거에서 전해진 지혜와 경험이 담겨 있다.


 


그리스가 위치한 지중해와 에게해 지역은 고대 문명의 보고다. 크레타 섬에서 발현된 미노스 문명의 기원은 기원전 2,700년, 즉 지금으로부터 4,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청동기 초기에 해당하는 만큼 이 사실만으로도 지역의 오랜 역사를 대략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미 지중해의 반대편에는 그보다 더 일찍 발현한 세련된 문명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BC 3,100년, 즉 지금으로부터 5.100년 전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진 이집트의 통일 왕조다.


 



위성사진으로 본 이집트 북부.

아래 쪽의 녹색 줄기가 나일강 하류이고 위쪽의 부채꼴 지역이 비옥한 나일 삼각주다.

위쪽의 푸른 바다는 지중해이며, 아래 쪽 중간 우측의 길쭉한 바다는 홍해.

부채꼴과 강 어귀가 만나는 지점 왼쪽에

작고 하얀 삼각형 지역이 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가 위치한 기자.

- 우원직찍 아님


 


그리스와 이집트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헤로도토스와 솔론 등 그리스의 일급 학자/정치가들의 증언에서도 고스란히 살펴볼 수 있다. 특히BC 5 세기 경의 인물로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세계 최초의 역사책이라고 할 총 9권으로 된 저서 <역사> 2권을 통해 이집트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남기고 있다. 특히 본인 스스로가 이집트의 신관들만이 독점하고 있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카비리 Cabiri비밀 의식을 수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


 


한편 그리스 7현의 하나로 존경 받는 솔론은 BC 590년 경 이집트를 방문하여 고위 신관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알려진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때 솔론은 이집트 신관들에게서 그의 시대로부터 9천년 전에 멸망했다고 하는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동시에 이집트 문명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따라서 당시 번영을 자랑하던 신생 그리스의 학문과 경험이 얼마나 일천한 것인지에 대한 지적도 들었다고 한다. 또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잘 알려진 수학자이자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22년에 걸쳐 이집트에서 고대의 지혜를 배우고 비밀의식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이탈리아 남부 크로톤에 그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학교와 정부를 세우기도 했다.


 


이런 일화들을 보면 그리스의 최고 지성이자 리더들이 이집트와 지속적인 접촉과 토론을 가짐은 물론 소위 고대의 지혜를 배워 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굳이 이런 이야기들을 언급하지 않아도 그리스 문명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은 다음의 정황들로 볼 때 확인할 수 있다.


 


 


1. 이집트는 그리스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미 고도의 문명을 성립시켰다.


그리스의 전성기를 BC 3 세기 전후로 봤을 때, 이 시점은 이미 대 피라미드가 건설된 지 2천여년이 지난 후다(우리 역사에서 지금부터 2천년 전은 삼한시대 초기. 그만큼의 시대적 차이가 있다는 뜻). 또한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19 왕조의 람세스 2 세는 BC 1,200 년대의 인물로 그리스 철학의 정수인 아리스토텔레스보다 1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이렇게 발달된 문명이 주변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2. 이집트는 문명적, 지리적으로 그리스와 동일한 권에 속해 있다.


유럽에서 먼 우리 시각으로 보면 그리스는 유럽, 이집트는 아프리카이니 두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는 걸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프리카의 일반적인 이미지는 사하라 사막 이남 흑인들의 땅으로 자리 잡혀 있다. 그러나 이집트와 그 일대의 북아프리카는 고대로부터 중부 및 남부 아프리카와는 인종이 다른, 유태인 계열과 같은 함족의 땅이고 그리스, 로마, 페니키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카르타고, 페르시아 등과 관계하면서 유럽 문명의 직접적인 바탕인 지중해 문명의 중요한 일원을 이루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도 그리스와 이집트 양국은 지리적으로 아주 가깝다.


 


실은 유로파(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대륙 구분 자체가 애당초 그리스 시대의 지중해와 에게해 일대를 근거로 만들어졌다. 즉 지중해 북쪽은 유럽, 남쪽은 아프리카, 동쪽은 아시아로 규정된 식이다. 따라서 이 단어들은 모두 그리스어다. 지금은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내해(內海)’ 일 뿐인 지중해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큰 바다였고 그에 연한 주변의 육지가 교통하는 세상의 전부였다. 서쪽으로 펼쳐진 광대한 대서양이나 페르시아(이란) 너머 동쪽의 땅은 범접조차 할 수 없는, 지구의 끝으로 이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플라톤이 솔론을 인용하며 아틀란티스가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롤터 해협) 너머’ 에 있다고 말한 것은 대서양을 지칭했다기 보다는 그들의 세상 바깥을 뭉뚱그려 언급한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 지중해 주변의 육지를 분류하기 위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의 명칭을 도입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명은 소위 ‘지리상 발견’ 이후 유럽 중심의 역사관 속에서 동쪽과 남쪽으로 무한 확장해 중동과 인도, 중국을 넘어 우리나라에 이르고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남아프리카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을 지칭하게 된다. 우원이 작년 잠시 연재하다 무한 연기해 둔 <파토의 아시아 이야기>에서 아시아와 동양을 구분한 근거도 여기에 있다.


 


 


3. 이집트의 문명과 문화는 3,000 년 이상 큰 변화 없이 존속되었다.


앞서 말했듯 이집트 역사 시대의 시작으로 인정되는 통일 왕국이 이집트 땅에 세워진 것은 기원전 3,100년경으로 약 5,100 년 전이다.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한 것을 BC 2,333 년으로 보고 있으니 우리의 단군조선 시대보다도 8 백년 가까이 앞서 있다. 그러나 우리의 단군 시대는 신화적인 요소가 많은 데에 반해 이집트의 고왕조는 유적과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명백히 뒷받침되고 있는 역사 속의 현실이다(따라서 이집트의 신화시대는 이보다도 수천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지구상에 이에 준하는 문화적/역사적 영속성의 실체를 보여주는 문명은 중국뿐이다. 최초의 역사적 왕조인 상(商)은 기원전 16 세기인 3,600 년 전에 건국되었고 문화적으로 이후의 역사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주(周)의 성립은 BC 1,000 년 전후다. 중국 문화와 역사 전체를 관통한 공자의 유학이 주 문왕(文王)과 그 아들 주공(周公)의 치세를 이상으로 본 사상이었던 만큼, 청(凊) 말기 서구 열강의 침략 시기 이전까지 근 3 천년 간 그 문화적 동질성은 상당히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그리스 문명은 이집트 문명의 직간접적 영향 하에 있었고, 그들 특유의 지성과 상상력을 통해 철학사상과 자연과학으로 만개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로마로 전해지고, 로마에 의해 전 유럽으로, 그래서 지금 열분들이 쳐다보고 있는 컴퓨터가 만들어진 과학기술에까지 이른 것이 결국 서구/유럽 문명의 흐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일목요연해지는 듯한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이집트 문명은 어디서 왔나?


 



룩소르 신전의 오벨리스크. BC 13세기경.

-우원 직찍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의 사슬에 의해 얽혀있다. 연이나 카르마, 업 등의 동양적 개념도 떠오르지만, 서양의 종교철학이 신으로 소급해 올라가는 과정에서도 이 인과의 고리가 그 핵심으로 제시된다. 요컨대 삼라만상에는 인과율에 따라 그 이전의 원인이 있는 만큼,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그 모든 것의 제1원인인 신과 대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 주창된 신의 우주론적 논증이다.


 


그러나 이때의 문제는 그 제 1원인은 더 이상의 원인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여야 하기 때문에, 그 지점에 이르러서는 증명의 방법으로 사용한 논리를 스스로 기만한다는 점에 있다. 신만이 인과율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논리를 사용해 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이미 상정한 채 그것을 좇아가는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그래서 이집트 문명이 과연 이런 제 1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신중히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경우는 신의 논증과는 상황이 다르다. 신과는 달리 문명은 조금씩 '성장'할 수 있다. 따라서 석기를 사용하던 미개 원시인들이 모여 살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발전해서 결국 고급한 이집트 문명을 건설해 나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견 합리적인 이런 접근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극 초기부터 보여지는 이집트 문명의 놀라운 완성도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된, 중국의 최초 역사 왕조인 은나라의 유적 은허(殷墟)를 발굴하는 과정에서는 이른바 용골(龍骨)이라고 불리던, 초기 형태의 한자가 적혀진 갑골문(甲骨文)(거북 등껍질) 유물의 발견이 큰 역할을 했다. 3천년 전이라는 세월이 말해주듯 이 갑골문의 문자는 지금의 한자에 비해 훨씬 단순한 선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경우는 이런 중간 발전 과정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또 이집트 특유의, 측면으로 그려지는 인물화 형식과 뱀, 매 등 각종 상징들도 이미 왕조 태동기인 5,100년 전부터 세련된 형태로 등장했다. 나중에 의미나 내용이 바뀌었을망정, 그 미학적 수준은 이후와 비교해 부족할 것이 없다.


 



BC 1,600 년 경의 은허 유적지에서 출토된 갑골문.

이후의 한자와는 달리 아주 원시적인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BC 3,100년 통일 왕조 성립기 이집트 회화.

위의 갑골문과 달리 후세나 다를 바 없는 세련미가 잘 드러난다.


 


점진적 성장론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대 피라미드다. 이것이 건립된 때는 장구한 이집트 역사상 아주 초기라고 할 4왕조때니 역사 시대가 시작된 지 600년 후인데, 모든 것이 정신 없이 바뀌어 가는 현대와는 달리 고대 세계에서 600년은 무에서 유가 만들어질 만큼 긴 세월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에서 시작한 사실상 인류 최초의 문명이, 너무 일찍 발흥해 누군가에게서 기술이나 문화를 배울 기회조차 없었을 그들이 불과 600년만에 인류 전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건축물로 경외의 대상이자 현대 기술로도 건립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는 저 대 피라미드를 세운다.


 


…그래서, 결국 모든 비밀은 이 석회암 덩어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 To be continued


 


 


논설우원 파토

@pato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