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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2. 목요일

펜더


 


V. 모든 자살에는 ‘시위성’이 섞여 있다


 


1. 미묘한 시위성


 


모든 자살을 보면 그 정도가 다를 뿐,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소생 가능성과 시위성이다. 소생 가능성은 말 그대로 자살을 결심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살고 싶다’는 인간 본연의 욕망이 표출된 것이다.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을 보면, 치명적인 상처 주변에 주저흔(hesitation marks : 치명상 주위에 깊이가 얕고 미세한 손상)이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자살 방법을 선택할 때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느 정도 소생 가능성이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투신이나 총기 사용처럼 극단적인 자살 방법이 아닌 이상 소생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이성은 자살을 결정했지만, 몸은 자살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위성’은 뭘까? 간단히 표현하면 억울하다고 느끼는 감정, 분노의 폭발이다. ‘내가 얼마나 억울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어?’ ‘얼마나 견디기 어려웠으면 자살을 선택했겠어?’ ‘이렇게 사람을 몰아붙이니 어떻게 살겠어?’


 



 


분노, 억울함, 원통함, 결백 혹은 다른 주의나 주장을 호소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 욕구를 역행하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이를 통해 자기 내부에 있는 어떤 ‘주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그 대상은 특정 인물일 수도 있고, 사회나 국가, 제도, 어떤 상황 혹은 불특정 다수가 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전태일 열사다. 자기 몸을 불태워 당시 노동 현장의 열약함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거창한 주의 주장이 아니라도 모든 자살자의 죽음에는 어느 정도 시위성이 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면 그것을 실행한 이들이 있을 테고,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렸다면 사기 친 사람에 대한 분노가 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등록금과 청년 실업난에 절망한 이들은 대학 당국과 사회에 대한 분노가 있을 것이다. 이 분노와 상실감을 어떤 식으로든 표출하려 하고, 이것이 제대로 표출되지 못했을 때 자살을 생각한다.


 


이는 간략하게 예를 든 것뿐이다. 자살에는 이보다 복잡 미묘한 감정과 상황이 섞여 있다. 다만 이 감정과 상황 속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느 정도 ‘시위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못 믿겠다고? 지금 당신이 죽으려는 이유를, 당신의 ‘결정’을 찬찬히 살펴보라. 오로지 당신 혼자의 문제로 죽음을 결정했는가? 이 질문에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제 내가 당신들에게 질문할 차례다.


 


“당신의 시위성을 극대화하고 싶어서 자살하는 것인가?”


 


2. 분노 그리고 말하기


 


여기까지 온 당신들은 죽음에 대한 신념이 확고부동한 사람들이다. 그 신념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이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멋있게 죽을 방법만 찾으면 된다. 그런데 당신이 죽음을 선택한 계기 중에는 분명 시위성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 시위성이 당신이 죽으려는 이유의 전부일 수도 있다. 물론 당신의 억울함과 분노,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어떤 ‘주장’을 이해하고 지지한다. 죽으면서까지 말하려고 한다면, 남아 있는 자들은 그 주장을 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기본적인 책무다(죽음으로 주장한 내용이 공동체의 문제로 인식되고, 그 죽음을 일종의 ‘사회적 비용’으로 인정한다면 그 주장에 대한 대답을 하게 된다. 최근 청소년 자살 문제가 불거지자 학원 폭력을 근절하겠다며 사회 시스템을 바꿔나가는 것이 그 예다). 들어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질문도 던져야겠다.


 


“그 주장을 꼭 ‘죽음’으로 말해야겠는가?”


 


예민하지만 꼭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원초적인 질문이다. 죽음만이 당신의 감정과 주장, 분노를 모두 담아낼 수 있을까?


 



 


냉정해지자. 심호흡을 크게 하라. 목도 한 번 돌려보고, 어깨도 몇 번 돌려봐라. 이제 진정이 됐는가? 그런 다음 데스 노트와 종이 한 장을 꺼내라(감정을 객관화하는 데는 글만 한 게 없다). 적어라. 뭘? 당신에게 자살을 고민하게 한 결정적인 상황을 적으면 된다(앞에서 ‘단어’를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단어’를 쫓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분노 말하기


①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② 여자 친구 때문에 분노하는가, 아니면 여자 친구의 결혼 상대자 때문인가? 혹은 내 처지 때문인가?

③ 대학을 졸업하고 남은 건 학자금 대출과 청년 실업이라는 꼬리표다.

④ 따지고 들어가니, 학비도 지원해주지 못하는 우리 집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⑤ 동기들은 집에서 학비를 해결해주니 방학 때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나고, 스펙 관리를 하며 차근차근 경쟁력을 키웠다. 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로 방학을 보냈다.

⑥ 내게 남은 건 빚과 다달이 들어가는 이자, 맥잡(Mc job : 맥도날드 아르바이트처럼 저임금 단순노동)이라 할 수 있는 일뿐이다. 세상은 번듯한 직장과 결혼할 집을 마련해줄 수는 있는 부모, 미래를 함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남자를 원한다. 그렇지 못한 남자들은 결혼할 수 없다. 내가 그런 남자다.

⑦ 이런 세상에 분노하며, 이런 시스템 자체에 화가 난다.

⑧ 이런 시스템을 만든 건 누굴까? 사회? 국가? 자본주의?


 


그냥 예를 든 것이다. 이 예를 일반화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고민하게 만든 ‘어떤 것’에 다가가기 바란다. 그 대상은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일 수도 있다.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면 수많은 이유가 튀어나올 것이다. 그 이유를 끈덕지게 물어뜯어라.


 


“내가 정말 이것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어했나? 이것 때문에 자살을 고민했나?” 수없이 질문하고, 그 이유를 찾아라. 다시 말하지만, 분노의 명확한 대상을 찾아야 한다. 그 대상은 거대한 것일 수도 있고,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콕 찍어 말할 수 있는 ‘대상’일 수도 있으며, 어떤 시스템일 수도 있다. 아니면 당신 자신일 수도 있다.


 


분노의 대상을 찾았으면 종이에 그 대상의 이름을 적어라(어떤 상황이나 구체적으로 지칭할 수 없는 제도일 수도 있다). 그런 다음 종이를 접어 책상 서랍에 넣어라. 눈치 챘겠지만, 숙성 과정이다. 자살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의 배제’다. 최대한 객관화하고, 감정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래야 보이는 것이 당신의 본심이고, 냉철한 현실 파악이다. 당신이 죽고 싶은 게 아니라, 당신의 생각이 만들어낸 ‘감정’이 당신을 자살로 몰고 가는 것이다. 물론 자살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순간의 감정으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당신의 인생이 아깝지 않은가?


 


이렇게 숙성시킨 ‘분노’를 하루 뒤에 꺼내보라. 아직도 감정이 남아 있는가? 분노의 감정이 있어도 어제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라면 당신이 아직까지 자기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했거나, 분노의 감정이 깊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지금 중요한 건 당신이 자기 ‘분노’를 분리했다는 사실이다. 분명 인정받을 일이다. 자,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자.


 


“누구에게 뭘 말할 것인가?”


멍해지지 않는가? 내 죽음으로 뭘 말하려는 것일까? 이런 생각해본 적 없나? 모든 사람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자신의 죽음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아니라고 외면하지 마라. 당신 가슴속에는 응어리진 무언가가 있다. 그 응어리를 끄집어내란 소리다. 내 한(恨)을 말하고 싶은데, 그것을 들어줄 대상이 누구이고, 그 한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소리는 말자. 그건 당신이 자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삶을 마감하려 했다는 방증일 뿐이다. 모르겠다면 다음의 양식을 작성해보라. 참 적을 게 많다고? 적으면 적을수록 당신은 점점 본심에 가까워진다. 군소리하지 말고 적어라(데스 노트의 페이지가 점점 늘어나는 게 보일 것이다).


 


누구에게 뭘 말할 것인가?


①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실체(분노, 위압감, 공포, 수치심 등)는 무엇인가? 그 대상을 하나로 콕 찍어 말하라(이건 벌써 했다. 그냥 적으면 된다).


② 뭘 말할 것인가? 당신의 억울함인가, 분노인가, 주장인가? 뭘 말할지 논리 정연하게 적어라.


③ 누구에게 말할 것인가? 불특정 다수에게 말할 것인가, 주변 지인들에게 말할 것인가, 범국가적 차원에서 국민을 대상으로 말할 것인가?


④ 말하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복수할 것인가, 답답함을 토로할 것인가?


 


쉽지 않을 것이다. 분노와 수치심, 굴욕감, 공황 직전에 몰린 불안정한 감정 때문에 글을 쓰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써 내려가야 한다. 힘들면 심호흡을 크게 하고, 스트레칭을 해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끈질기게 물어보라.


 


“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 죽음을 담보로 어떤 말을 하려는 것일까?”


 


시간은 많다. 죽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시간은 무의미하다. 생활도 무의미하다. 생계도 무의미하다. 어차피 죽을 목숨, 학교는 왜 가고 직장은 왜 가나? 선생님의 잔소리, 직장 상사의 눈치, 동료들의 책망과 질시…… 이 모든 시선과 억압에서 자유로워지자. 이 세상에는 당신과 당신 앞에 놓인 ‘종이 뭉치’만 있는 것이다. 주변에 티 내지 않고 ‘쿨’하게 죽겠다면, 그건 인정하겠다. 티 나게 온갖 추태(?)를 부리고 나서 정작 살겠다고 돌아서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 조용하게 당신의 ‘거사’를 치르겠다면, 죽는 순간까지 평소 생활을 해나가는 것 인정하겠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당신의 ‘죽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죽음은 모든 걸 지워버리는 마력이 있다. 내일 자살할 사람이 오늘 건강검진을 받는다면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지금 당신은 ‘누구에게 뭘 말할 것인가?’를 성실히 작성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다 작성하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 갈 길이 멀다. 빨리 진도 빼야 한다.


 


 


3. 당신의 마음을 확인했는가?


 


당신은 이제 당신을 자살로 몰고 가게 만든 실체를 확인했고, 당신이 죽음을 통해 말하려는 내용과 목적, 그 대상까지 정리했다. 쓰고 나니 어떤 느낌인가? 허탈한가, 아니면 후련한가? 설마 기쁨으로 충만하지는 않겠지? (농담이다. 드물지만 이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제대로 따라왔다면, 당신은 지금 자살의 ‘목적과 수단’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목적과 수단이 뭐냐고? 생각해보라.


 


“나는 이제 죽어야 해. 이 세상에서 내게 남은 선택은 자살밖에 없어.”


 


당신은 자살이라는 목적에만 집착했다. 일단 죽고 보자, ‘죽는 게 최선’이란 생각만 하던 게 당신이다. 왜 죽어야 하는지, 왜 죽음을 생각했는지에 대한 성찰은 고사하고,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자살이 하나의 ‘수단’이 되고, 죽으려는 이유가 조금씩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을 것이다.


 


“난 죽음을 통해 ○○○을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뭘 말하려 하는가는 중요치 않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고, 그 할 말이 절박하다는 게 중요하다. 당신에게 남은 모든 생을 걸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치 않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인류 멸망과 비견될 만한 중요한 말이다. 왜? 당신에게 자살은 인류 멸망과 동급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죽는데 나머지 사람들의 삶이 당신에게 의미가 있을까? 죽음과 맞바꿔 말하려는 이야기는 그만큼 절실하고 파괴력 있는 이야기다. 여기까지는 내 생각이다. 이제부터 일반 상식적인 질문을 던져보겠다.


 


“과연 죽음을 담보로 할 만큼 절박한 이야기인가?”


 


오해하지 마라. 당신의 이야기를 폄하하는 게 아니다. 당신의 목숨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라. 당신이 분노를 느끼는 상대, 당신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이야기하는 데 ‘죽음’이 담보돼야 할까? 아니 당신이 ‘복수’나 답답함을 토로하는 데 죽음을 동반해야 하는가? 이건 닭 잡는 데 핵폭탄을 꺼내는 것과 같은 짓이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꺼내는 건 그래도 오차범위 안의 문제다(어쨌든 칼이 아닌가). 그러나 당신은 아예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 당신에게 자살이란 세계 멸망과 동급이다. 당신이 죽은 뒤 억울함이 풀리고, 복수에 성공한다고 치자. 당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뭘까? 아니 그전에 당신이 복수에 성공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오로지 유추와 가정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 자살 뒤의 복수와 답답함의 해소다. 물론 치밀하게 계획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면 어느 정도 성과를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의 성공을 직접 볼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복수의 쾌감은 상대방을 내려다보는 자기만족이다. 그래야 ‘성공한 복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걸 포기하려고 한다. 스포츠로 보면 역전승이 가능한 상황에서 무승부 경기를 펼치겠다고 소극적으로 플레이하는 경우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당신의 상황을 찬찬히 살펴보라.


 


“‘자살’이라는 히든카드를 너무 일찍 꺼내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모두 자살이라는 히든카드를 품에 지니고 있다. 일단 꺼내는 순간 어떤 카드라도 눌러버릴 수 있는 절대 카드다. 조커라고 해야 할까? 이 카드는 언제든지 꺼낼 수 있다. 오늘 꺼내도 되고, 내일 꺼내도 된다. 기한도 없고, 기한이 흐른다고 해서 파괴력이 줄어들지 않는다. 문제가 있다면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카드를 너무 쉽게 낭비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반대로 자신에게 이런 카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냥저냥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무의미한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아니라고? 좋다. 당신이 말하려는 게 무엇인가? 한번 보여달라!


 


① 경제 문제(절대 빈곤, 사업 실패, 실업, 사기 등)


② 인간관계(실연, 왕따, 배신 등 인간관계에서 부당한 대우 혹은 그런 감정)


③ 명예(부당한 대우를 당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됐을 때)


④ 국가, 사회, 기업 등 거대한 조직에 의한 탄압이나 부당한 대우(혹은 그런 감정)


⑤ 건강 문제(난치병이나 불치병에 의한 상실감, 왜 나만 이런 병에 걸리는지 부당하다는 심정)


⑥ 기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느꼈을 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여섯 항목 중 하나(혹은 하나 이상)로 자살을 생각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을 것이다. 너무 단순화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당한 대우’라는 관계적 이유가 등장한다. 내가 집중하는 것이 바로 ‘부당한 대우’다. 시위성이란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한 ‘요구’에 대한 반작용이 아닐까? 부당한 대우는 경제적 원인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에 의해 발생했을 수도 있다. 부당한 대우가 발생했거나 발생하지 않았거나, 자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선 세 가지 전제를 두겠다.


 


첫째, 당신에게 벌어진 일은 상당 부분 당신이 선택한 결과다. 당신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또 다른 선택을 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둘째, 운명적으로 비참하다고 판단하는 경우(가정 문제, 절대 빈곤 등)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진리는 원래 단순하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셋째,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꽤 허술해 보이지만, 잘 찾아보면 나름 쓸 만한 ‘것’들이 많다. 찾겠다는 의지와 도움을 요청하겠다는 결심만 있으면 당신의 삶은 변할 수 있다.


 


당신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죽음’이라는 판돈을 내놓은 이상 대한민국이란 나라와 그 안에 있는 구성원들은 당신에게 ‘꽤’ 많은 양보를 해준다. 여기에서 만족할 텐가? 이건 어디까지나 죽음을 전제로 얻어낸 양보다. 죽음을 각오하고 능동적으로 찾아보면 탈출할 방법(현재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탈출’이라는 극한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은 꽤 많다. 그리고 죽음이 당신에게 건네준 초인적인 에너지를 통해 효과적인 복수 혹은 당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다. 물론 죽음 아니면 방법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사의 거의 모든 문제는 삶을 내려놓고 뛰어드는 순간, 어느 정도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죽음이라는 단순하고 결과가 불확실하며, 지속 효과가 짧은 선택을 하는가, 약간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지만 그 효과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쓰는가의 차이다. 둘 다 죽음을 통한 에너지를 활용하는 것이지만(죽음과 죽음을 각오했다는 차이가 있다), 그 과정과 결과는 다를 수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죽음을 반대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죽음을 전제로 이것저것 시도해본 다음에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어차피 죽을 건데, 해볼 건 다 해보고 죽어야 후회가 적지 않겠는가?”


 


당신이 하고 싶은 말, 복수하고픈 심정,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감정을 단순히 ‘자살’에 섞어서 흘려보내야겠는가? 한 번에 흘러나가니 속은 시원할 것이다. 생각할 필요도 적으니 머리 아플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떨까?


 


‘문명이란 무대 뒤로 감추기’란 말이 있다. 고기를 얻기 위해 도살을 하고,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는 것들은 1000년 전 우리 조상이 하던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도 고기를 얻기 위해 도살하고, 소나 돼지, 닭을 해체한다. 하루에 한 번 이상 화장실에 가는 것도 똑같다(일부 변비 환자들은 다르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1000년 전보다 ‘문명’했다. 어떻게? 그 과정을 감추는 방법을 개발해낸 것이다. 이제 길거리에서 소나 돼지를 잡는 경우는 없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마을 잔치가 열리면 소나 돼지를 직접 잡았으나, 이제는 정육점을 찾는다. 닭고기가 먹고 싶으면 배달을 시키거나, 마트에 가면 된다. 직접 조리된 닭이 나오기도 하고, 잘 손질된 닭고기가 넘쳐난다. 화장실을 볼까? 가장 극적으로 변한 곳이 화장실이다. 이전에는 우리가 배출한 ‘부산물’을 직접 보고 처리해야 했다(재래식 화장실, 요강 등). 그러나 지금은 수세식 화장실에 비데까지 등장했다. 본질은 똑같지만 그 ‘과정’이 상당 부분 감춰진 모습이다.


 



 


자살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시위성이 섞인 자살이란 카드를 꺼냈다. 그러나 그 카드에는 시위성을 직시할 ‘용기’가 빠져 있다. 물론 극단적인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이란 ‘커튼’ 뒤로 도망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신의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그 상황을 기반으로 냉철하게 분석해야 한다.


 


“과연 내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죽을 정도로 절박한가?”


 


어차피 본질은 똑같다. 자살이란 커튼 뒤에 숨어 이야기하는 것이나, 현실 앞에서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나. 이야기한다는 사실은 똑같다. 거기에 당신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당신더러 죽지 말란 소리가 아니다. 잠시 죽음을 유예하고, 죽을 용기로 상황을 직시하란 얘기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전제를 기억하는가? 그걸 기반으로 생각해보자.


 


① 당신의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봤는가?(이제까지 작성한 데스 노트를 펼쳐보라. 넘기면서 뭘 느꼈는가?) 죽음을 전제로 생각해보라.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은 문제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뭔가를 해결하겠다고 결심하고,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순간 문제는 70퍼센트가 해결된다.


② 도저히 극복 불가능한 상황인가? 대한민국은 허술해 보이지만, 꽤 괜찮은 ‘것’들이 많은 나라다. 예를 들어볼까? 당신이 빚에 허덕이다가 연이율 30퍼센트가 넘는 사채를 썼다 치자. 당장 수입도 없는 상태에서 이자만 쌓여간다면 인터넷을 뒤져보라. ‘바꿔드림론’처럼 이름은 좀 구리지만, 꽤 괜찮은 해결책도 있다. 찾아보면 나름 살 방법이 많은 나라다. 울어라 그리고 찾아라. 그러면 방법은 나온다. 주변에 울 곳이 없다고? 그럼 나라를 상대로 울어라. 왜? 당신은 이 나라에 세금을 냈다(하다못해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어도 당신은 나라에 세금을 낸다. 그리고 세금은 당신같이 힘든 사람을 위해 쓰려고 걷는 것이다). 매달릴 수 있는 모든 것에 매달리고 죽자. 그래야 덜 억울하다. 자살이라는 조커는 모든 카드를 쓴 다음 마지막에 꺼내는 히든카드다.


③ 1퍼센트라도 가능성을 발견했다면 그것에 매달려봤는가? 매달리지 못한 이유가 뭔가?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당신은 죽으려는 사람이다. 죽으려는 사람이 뭐가 두렵고, 뭐가 쪽팔리고, 뭐가 수치스러운가? 죽으면 단백질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뭐가 두려워 상황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고, 도움을 말하지 못하는가? 분명 당신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고, 방법이 있다. 찾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길은 있다.


 


당신의 삶을 받아들여라. 당신 앞에 놓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문제의 해답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리고 도움을 받아들여라. 가족이나 주변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가? 이걸 극복해야 한다. 아니 이건 극복의 대상이 아니고, 당연히 요청해야 할 일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 가족 중에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도와주지 않을까? 당신은 이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지금 난 세상에 고립돼 있고, 절대 고독 속에 방치돼 있다. 아무도 날 도와주지 못한다.”


 


학교 폭력이나 사업 실패, 아니면 인생의 중대한 문제로 좌절했을 수도 있다. 분명히 말하는데,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절대 혼자일 리가 없다. 당신이 태어나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 자체가 그 시간 동안 무수한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왔다는 증거다. 당신이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키워준 사람이 누구인가? 당신의 부모님이다(부모님이 아닌 타인일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길러준 사람이 있다). 당신의 친구는 어떤가? 친구가 없다고? 그렇다면 당신이 생활하는 주변의 지인들이 있을 것이다. 이마저 없다면 이 사회와 국가가 있다. 당신이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 무시했을 수도 있다.


 


당신은 지금 무수한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다. 이 관계 중에는 고맙게도 당신이 말하는 걸 들어주고, 당신 편이 되어줄 사람들이 있다. 그 이름이 가족이 될 수도 있고, 부모님이 될 수도 있다. 혹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 다가가라. 죽음을 고민할 만한 문제라면 당신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 버겁다. 버거울 때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다행히 당신에게는 가족이 있고, 친구도 있다. 일단 알리고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들어주는 것뿐이라도 당신을 짓누르던 압박감을 상당 부분 덜어낼 수 있다. 가족과 친구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무조건 당신 편이 되어줄 영원한 우군을 방치하지 마라. 우선 말하자. 당장 해결되지 않더라도 머리를 맞대고 당신의 고통과 고난을 같이 고민해줄 사람을 얻을 수 있다.


 


이들이 미덥지 않다고? 관계를 더 확장할 수 있다. 이들을 기본으로 깔아두고 더 큰 관계 속에서 실질적으로 당신을 도와줄 사람이나 단체를 찾아라. 적어도 당신이 세금을 낸 국가와 당신이 속한 사회에서는 당신이 도움을 요청하면 못 도와줘서 안달인 사람들이 있다(개중에는 어쩔 수 없이 돕는 경우도 있지만). 왜 그들을 활용하지는 않는가? 이들을 활용해서 복수하거나 억울함을 토로할 수도 있다. 왜 두려워하는가? 왜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는가? 방법은 많다.


 


 


4. 지부상소


 


진도 빼는 게 힘들다. 빨리 따라와야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세 가지를 말해야겠다. 왜? 당신들이 혹시 날 오해할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다. 오해 살 만한 이야기는 확실히 정리하고 가자는 것이다. 잘 들어라.


 


첫째, 난 당신들의 ‘자살’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당신들의 죽음을 말리는 듯한 뉘앙스가 여기저기 보이는데, 난 당신의 죽음이 아니라 당신의 죽음이 발휘하는 힘이 아깝다. 그 힘을 다 쓴 뒤 자살하는 것이라면 아깝지 않다.


둘째, 기왕에 죽을 목숨이라면 감정에 휘둘리는 자살이 아니라, 의미 있고 목적성이 뚜렷한 자살을 선택해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마디로 당신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란 소리다.


셋째, 당신이 죽음을 각오한 순간 당신의 문제는 의외로 간단해지고, 당신의 삶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에너지로 가득 찰 것이다. 제발 자살을 해도 그 순간을 다 누린 다음 하란 소리다. 한마디로 해볼 건 다 해보고 죽으란 소리다. 아깝지 않은가? 얼마 걸리지 않는다. 기껏해야 한 달? 아니 3~4주 고민하고 노력하면 된다. 그런 다음 ‘어라, 살 만한데?’ 그러면 살고, ‘역시 나는 죽는 게 맞아’라고 생각하면 자살해도 된다.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마라. 어차피 죽을 목숨, 몇 주 정도 늦춰지는 것이다. 단! 그 몇 주 사이에 당신에게 일어날 놀라운 변화는 체험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다.


 



 


서설은 여기까지 하겠다. 진도 빼야 한다. 지부상소라는 게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자.


 



지부상소(持斧上疏) : 〈역사〉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머리를 쳐달라’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



 


TV 사극에서 성균관 유생들이 도끼를 들고 궁궐 대문 앞에 엎드려 뭔가 외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지부상소를 올리는 장면이다. 왕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자기 목숨도 첨부한 것이다. 일반적인 상소와는 그 느낌부터 다르다. 절실함과 절박함이 물씬 배어난다고 할까?


 


생뚱맞게 지부상소 운운하는 것은 당신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당신들은 앞에서 자신의 죽음에 시위성이 섞여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그 시위성과 분노, 복수심이나 억울함에 대한 감정이 자살의 목적인지 물었다. 자살은 목적이 돼서도 안 되지만,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더더욱 멀리해야 한다. 수단으로써 자살의 파괴력은 인정하나, 닭 잡는 데 핵폭탄을 쓸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차라리 죽음을 각오한 에너지로 ‘한시적인 초인’으로 살아보란 소리다.


 


2장에서 당신의 생명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순간 당신은 초인이 되어 엄청난 에너지를 폭발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 에너지를 폭발시킬 때가 왔다! 당신은 죽음을 각오한 상태다. 내 이야기를 계속 듣고 따라오겠다면 얼마간(그 기간은 당신 마음이다) 유예기간을 둔 ‘예비 자살자’가 된다. 그 뒤에는 자살을 하거나, 일상으로 돌아오거나 당신의 판단이고 결정이다. 나는 그 판단과 결정을 존중할 것이고, 그 판단과 결정에는 충분한 사유와 목적, 확실한 검증이 뒷받침되었다고 보증하겠다. 이제 시작해보자.


 


당신은 지금 죽음을 잠시 유예하고, 당신의 시위성을 다른 방향으로 터뜨릴 수 있는 준비 지점에 서 있다. 당신은 이제까지 검증을 통해서 무엇을 확인했는가.


 



당신 생명의 생물학적?사회학적 가치를 확인했다(대학 4학년을 갓 졸업한 남녀의 몸값은 2억 6204만 4000원이다). 당신이 경제적 문제로 자살을 고려한다면, 2억 6204만 4000원이 넘는 문제라야 한다. 적어도 당신에게 투입된 비용은 건져야 수지타산이 맞으니까.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 사건(상황)을 최대한 객관화해서 확인했다.


당신이 이 사건(상황)으로 누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당신의 행복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당신이 행복할 것이라고 예상한 일 중 사흘 안에 할 수 있는 행복을 누려봤다.


당신이 죽을 이유를 정리했고, 이걸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통해 검증했다.


당신의 이야기를 100퍼센트 경청해주는 사람에게 연락해서 당신의 상황을 설명했고, 이해와 조언을 구했다.


당신의 분노의 정체를 확인했고, 당신의 자살에 시위성이 섞여 있다는 걸 알았다.


마지막으로 자살의 목적이 무엇인지, 자살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인지 확인했다.


(지금까지 데스 노트를 충실히 작성했다면, 페이지를 넘기면서 자신의 감정을 확인했을 것이다.)



 


이제 당신은 초인의 힘을 가진 상태가 됐다. 비록 한시적이지만 당신은 이제껏 가져보지 못한 엄청난 능력이 생겼다. 이제 이 능력을 이용해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보자(해결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 노력은 당신이 ‘자살’을 선택했을 경우 ‘시위성’을 극대화하는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시작하기 전에 두 가지 사실을 말해야겠다. 지부상소를 쓴 유생들은 두 가지 전제 조건을 충족한 다음 도끼와 상소를 가지고 대궐 앞으로 향했다. 두 가지가 뭐냐고?


 


첫째, 각오다. 지부상소를 올렸다고 해서 그 유생을 죽이지는 않았다. 죽였다간 옹졸한 왕이 되지 않겠는가? 일종의 정치적 퍼포먼스 정도로 받아들였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자칫 잘못해 왕과 실권을 쥔 정치 세력의 눈 밖에 나는 순간, 선비의 필생의 꿈이라 할 입신양명의 길은 사라지고 만다. 이들은 사회적인 목숨을 걸고 지부상소를 올리는 것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이 각오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했다지만, 어느 순간 당신은 일상에 매몰된 모습을 보일 것이다. “난 안 돼. 이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속 편하게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스스로 발목을 잡는 것이다. 자기 힘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얘기다. 그때마다 자신에게 주문을 걸어라. “난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부탁한다. 당신은 죽으려고 결심한 사람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얼마간 그 목숨을 나에게 빌려주기 바란다. 절대 헛되이 쓰지 않겠다. 한시적으로 당신의 죽음을 유예하라. 유예한 기간만큼 당신을 위해 쓰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따라오면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힘들 때마다, 주저할 때마다 “난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라는 말을 되새겨라.


 


둘째, 논리 정연함이다. 선비의 목숨을 걸고 올리는 상소다. 감정에 치우친 ‘주장’만 담긴 상소를 올렸다간 그대로 사장될 것이 뻔하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논리와 근거를 탄탄하게 준비해 상소문을 작성했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당장 죽겠다고 생각하면 감정에 치우쳐 자기주장만 내세우기 쉬운데, 이 경우 당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도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당신은 지금 불특정 다수에게 자기주장을 말하려고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줄 만한 논리와 객관성이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당신이 지금 죽음을 담보로 지부상소를 올린다고 치자. 죽음을 각오한 건 당신도 알고, 나도 아는 일이니 그 조건은 충족했다고 치자. 남은 건 객관성과 논리성인데, 당신이 죽기 전에 그동안 억울한 일을 당한 내용을 유서 혹은 문건을 만들고(그에 합당한 증거를 확보한 뒤에), 이를 각 언론사 사회부 기자와 방송, 인터넷, 관공서 등에 뿌리는 방법이 있다. 인류 역사 이래 수없이 사용된 방법이다. 죽음을 전제로 한 이야기이기에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당신의 주장에 수긍할 것이다.


 


이 정도면 당신은 만족할 수 있을까? 물론 해볼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본 상황에서 현실 앞에 절망하고, 이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할 수도 있다. 그 마음 잘 안다. 그런데 이로 인해 당신이 얻는 게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당신의 ‘생명’이다. 휴머니즘이나 생명 존중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지극히 경제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당신의 생명을 돈 주고 살 수 있을까? 당신의 생명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레어 아이템이다. 그리고 그 소유주는 당신이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이 소중한 아이템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그냥 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버려야 할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죽음의 힘은 ‘한시적인 초인’이 되어 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아무도 모른다. 이 귀중한 힘을 그냥 땅바닥에 버릴 생각인가?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죽음을 각오한 시위성의 주장


① 목적

당신은 분노의 대상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외침도 들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가? 이 분노의 대상을 ‘응징’하고 싶은가, 아니면 고통을 중단시켜 단순히 이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은가? 두 가지가 섞여서 모호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때는 방점을 어디에 찍을지 고민하는데, 먼저 해야 할 것은 당신의 고통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복수고 응징이고 다 떠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당신을 고통에서 빠져나오게 하거나, 고통을 완화하는 일이 시급하다. 당장 보기에는 사방이 막힌 암흑천지고,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느낌이다. 입바른 소리 같지만, 용기를 내라. 어차피 당신은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기 전에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도 되지 않는가? 우선 당신의 고통을 완화하고, 당신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른 이에게 터뜨리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서 당신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


 


② 객관성

당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가 당신의 망상이나 착각인지, 객관적으로 봐도 부당한 대우인지 최종 점검에 들어가라. 일전에 작성한 자살 사유서를 찬찬히 훑어보고, 당시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반응, 자살 예방 핫라인이나 기타 전화 상담을 통해서 객관성을 확인해본다. 이 대목이 중요한 것이 감정에 매몰된 당신만의 주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황 자체에 집중하라. 당신을 고통에 빠지게 만든 상황에 집중하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물론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단계를 거치면 ‘목숨이 걸린 문제’가 ‘당신 인생의 최대 고난 중 하나’로 격하될 것이다.


 


③ 분류

당신의 문제가 법적인 문제인지, 도덕적인 문제인지 혹은 구조적인 사회 모순에 기인한 문제인지, 개인적인 문제인지 분류하라. 힘들겠지만 이는 당신의 문제, 당신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체화하는 방법이다. 당신이 어떤 고통과 고난에 처해 있는지 모르지만, 그 고통과 고난이 지금 이 세상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걸 담당하고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줄 사람이나 단체가 분명 존재한다. 우선 당신의 고통과 고난이 어떤 카테고리에 들어가는지 찾아야 한다.


 


④ 정리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정리하라. A4 용지에 깔끔하게 정리해보자. 당신이 억울한 이유, 죽음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이유를 명확히 적어라. 당신 스스로 이해할 정도로 정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데스 노트를 펼쳐들고 바라보면 쉬울 것이다. 이렇게 작성한 문건을 당신의 ‘울분록(鬱憤錄)’이라고 부르자. 울분은 터뜨려야 한다.


 


⑤ 판단

당신의 ‘시위성’이 어떤 ‘영역’에 속해 있는지 주제를 확실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을 고통에 이르게 한 ‘어떤 것’은 분명 당신 인생 최대의 고난이며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객관적으로 내보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떤 일(혹은 인물)에 의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이 때문에 나는 죽음을 고민할 정도로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문제는 당신을 죽음으로 내몬 ‘어떤 고통(혹은 상황)’을 대중이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점이다. 당신이 지금 처한 상황은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고민일 것이고, 사회적으로도 유의미한 이야기일 확률이 높다(개인적인 사유도 있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당신의 고민이나 고통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이야기를 내포하는가?”


 


난감할 것이다. 죽는 순간에도 당신의 이야기를 줄 세우고, 중요도를 체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잘 생각해보라.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몰라도, 일반인은 자신의 ‘상식’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타인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상식은 대부분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된 판단 기준일 확률이 높다. 예를 들어보자.


 


고등학생이 극심한 학교 폭력에 시달려 자살을 선택했다고 치자. 이 경우 사람들은 분노하고, 이 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오늘 아침 비가 왔어. 난 우울해. 나 죽을 거야”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사람이 어떤 질병을 앓거나, 비에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지 관심도 없을 것이다(이 경우 비가 아니라 비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와 현재 건강 상태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건 죽어선 안 되는 이유다. 시위성의 요건에도 부합되지 않는다. 그 고통이 당신에게는 생명을 포기할 정도로 심각할 수 있지만, 죽음을 판돈으로 내건 다음 시위성을 표출하려면 타인의 일반 상식에 어느 정도 부합되어야 한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당신이 죽음의 무게를 정확히 인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죽음은 가벼운 마음과 즉흥적인 감정으로 선택할 만큼 가볍지 않다. 사람들은 최소한 상식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이유가 있어야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자세를 취한다. 그럼 어떻게 이걸 확인할 수 있을까?


 


⑥ 검증

무조건 당신 편을 들어줄 것 같은 사람, 당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것 같은 사람, 당신에게 냉정하게 충고해줄 것 같은 사람에게 당신이 고민하고 정리한 ‘울분록’을 보여줘라(민망하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여줘도 상관없다). 세 사람이 없으면 한 사람이라도 좋다.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지 마라. 없으면 최대한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보여주기 바란다. 당신의 성격과 인간관계의 두께가 드러날 수 있는 일이다. 후회할 수도 있고, 자기 인생을 돌아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당신이 당신으로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른단 사실이다.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라. 그들의 말은 당신 인생의 마지막 안전장치이자 구원이 될지도 모른다. 안다,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 당신은 문제를 혼자서 해결할 처지가 아니다. 좋다. 백번 양보해서 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면 인터넷 게시판에라도 이야기를 올리고,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라. 당신의 이야기가 일반 상식과 얼마나 부합되는지, 당신의 시위성이 타인의 기준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지 확인해보기 바란다.


 


[caption id="attachment_98144"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경청하는 자세 (사진 : 이투데이)"][/caption]


 


⑦ 질문

당신이 작성하고 검증한 울분록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뭔가 울컥하고 올라오면 잠시 울어도 좋다. 다 울었는가? 이제 감정을 다스리고 울분록을 보며 자신에게 질문하라.


 



“내가 담고 싶은 이야기를 다 담았는가?”


“내 감정에 휘둘려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이 이야기를 내 목숨과 바꿔 세상에 공개할 정도로 값어치가 있는가?”



 


담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다면 추가하고, 감정에 휘둘린 내용이 있다면 덜어낸다. 그러나 당신의 생명과 맞바꿀 정도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면……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라. 이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그럼 이걸 보여주자.


 


⑧ 도우미 확인


당신에게 기쁜 소식을 말해주겠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지금 당신의 기준으로는 이 세상에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팔을 뻗으면 무조건 당신 편이 되어줄 부모님과 친구, 지인들이 있다(어떤 사람이든지 이들 중 최소한 한 명은 있을 것이다). 또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대한민국 정부는 당신이 법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경우 당신을 도와줄 의무가 있다. 법적으로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모순이나 법적으로 심판하기 어려운 부당한 대우는 사회 전 분야에 있는 ‘시민 단체’를 이용하면 된다. 하나씩 단계별로 살펴보자.


 



■가족 : 당신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모른다. 어떤 협박이나 위압, 신체적인 위협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위협이나 압박 속에서도 당신에게 무조건적인 헌신과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줄 사람들이 있다. 바로 가족이다. 설사 문제를 해결해줄 능력이 없다 해도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당신의 선택을 지지해줄 사람들이 가족이다. 부끄럽고 힘들다고? 가족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게 과연 옳은 모습일까? 당신의 울분록을 보고 가장 가슴 아파하고, 감정이입 할 사람은 가족밖에 없다. 어떤 위협이나 고통인지 모르지만, 일단 가족에게 말하라. 당신이 말하지 않으면 모를 수 있다. 말하라. 사람은 고립되는 게 아니라, 고립을 자처하는 것이다. 이제 나올 때가 됐다(친구나 지인들도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당신 편이 되어줄 것이다).


국가 :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다. 명목상의 이야기일 수 있으나, 최소한 겉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은 법치주의 국가다. 이 나라는 법을 기반으로 돌아가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 무던히 애쓴다.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은 행복추구권, 평등권, 자유권, 청원권, 참정권, 사회권 등이다. 대한민국에서 헌법으로 보장된 당신의 권리를 침해받았을 경우 이에 대한 부당함을 말할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를 듣고 부당함을 해소해줄 의무가 있다. 느낌이 오지 않는가?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고등학생인데, 학교 폭력 때문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공식적으로 당신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고, 당신을 괴롭힌 학생들은 법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때 당신을 보호하라고 있는 것이 경찰이다. 학교 폭력뿐만 아니다. 당신이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그 부당한 대우가 법 조항을 위배한 것 같다면 당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국가는 당신 옆에 있다. 문제는 이 국가가 당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당신이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울기만 하면 당신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울어라. 울면 당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당신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시민 단체나 각종 비영리단체 : 국가가 들어주지 못하는 이야기는 사회 개혁, 환경, 교육, 국방, 경제, 문화, 복지 등 시민 단체와 각종 단체들이 들어준다. 인터넷 검색창에 ‘시민 단체’라고 입력하면 수많은 단체들이 나올 것이다. 그 단체들을 찬찬히 살펴보라. 당신의 고통과 고난, 위기 상황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같이 모색해줄 단체가 있을까? 있다. 찾아보면 반드시 나온다. 찾아서 울어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간단하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컴퓨터와 당신의 의지만 있으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당신의 상황을 정리하고, 그 상황을 해결하거나 완화해줄 만한 곳을 찾아 울면 된다. 당신의 시위성을 받아줄 곳이 분명 존재한다. 당신의 억울함을 들어줄 ‘의무’가 있는 곳이 있다는 얘기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좋지만, 하나는 꼭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이 찾기만 하면, 이 나라에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혹은 단체가 널려 있다.


 


⑨ 결정

지금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다.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신에게는 정말 많은 선택지가 있다.


 


첫째, 죽음을 전제로 당신의 지금 상황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죽음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당신에게 고통을 준 ‘대상’을 직접적으로 응징하기 위해 관련 증거를 모으고, 관공서를 비롯해 언론과 인터넷에 관련 자료를 뿌리고 죽는 방법이 있다. 최대한 꼼꼼하게 유서를 작성하고, 그에 대한 증거를 첨부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당신의 시위성은 극대화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해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마련이다. 당신은 시위성은 만족시키겠지만, 목숨을 잃는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줄 것이다. 결정적으로 당신이 말하고자 한 시위성을 ‘유추’할 뿐, 이를 실제로 바라보지는 못한다.


둘째, 당신의 문제가 의외로 손쉽게 해결되거나 완화될 수 있다. 마음속에 담아놓은 울분을 ‘울분록’으로 작성했고, 이걸 타인에게 보여주는 순간 문제의 절반이 해결된다. 당신의 억울한 심정을 상대방과 공유했고, 더 나아가 이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찾게 된 것이다. 죽음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도피’다. 왜? 간단하다. 사건 당사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당신이 죽은 뒤의 사건 해결이란 ‘수습과 처리’일 뿐, 해결이 아니다. 물론 여기에도 응분의 대가(?)가 필요하다. 용기 내서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이 대가는 커다란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편안해질 것이다.


 


누가 봐도 뭘 선택해야 할지는 명백하다. 바로 후자다. 왜? ‘자살’은 언제든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선택을 한 다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때 가서 자살을 고민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봤는데도 고통이 경감되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죽음을 고민해도 된다. 자살은 언제 어느 때고 할 수 있는 선택이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두 가지를 꼭 기억하기 바란다.


 


①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② 자살은 언제 어느 때고 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여기까지다. 당신은 죽음을 담보로 한 울분록을 손에 쥐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면 된다(타인에게 보여줬다면 그 충고를 듣고 움직이고, 당신의 억울함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다면 울어야 할 곳을 찾아가 상황을 이야기하라). 이걸 만들면서 혹은 다 만들고 나서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들었는가?


 


‘이따위 게 내 마음을 어떻게 다 담아낼 수 있어?’ ‘이건 말장난이다! 이걸 어떻게 쓸 수 있겠어?’ 이런 생각을 하는가? 당신은 방금 전까지 죽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이 목숨을 걸고 말하려고 한 걸 확인했고, 당신이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인지했다. 한 발 더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말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울분록을 꼭 끌어안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차분해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짧지만 울림이 있는 ‘차분해졌다’란 말이 나올 수도 있다. 강요하는 건 아니다.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아도 좋다. 자신을 불안하고 초조하고 흥분되게 만들던 감정의 실체를 확인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묘한 안정감이 들었을 것이다. 답이 보이지 않는 절망 앞에 있다가 당신이 소리치려고 한 것이 무엇이며, 소리칠 곳을 발견하고, 그 방법까지 알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아무것도 모를 때, 아니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울 때 두려움에 빠진다. 당신은 두려움에서 한 발 물러났고, 더 나아가 두려움에 맞설 카드 한 장을 쥔 것이다(죽음을 각오한 ‘최강의 카드’다).


 


[caption id="attachment_98145" align="aligncenter" width="271" caption="최강의? (와일드) 카드"][/caption]


 


이 카드가 불발할지, 제대로 폭발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중요치 않다. 무력감에 빠져 있던 당신이 스스로 탈출구를 찾아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만든 울분록이 아무 효용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죽음을 각오한 상태에서 이걸 터뜨려도 좋고, 죽음을 추가해서 사용해도 좋다(증거 자료를 더 모으고 다듬어서 죽음과 함께 사용하는 방법). 그러나 그 사용을 잠시 유예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영화 〈스파이더맨〉에 나오는 명대사다. 당신의 힘에 책임감을 느끼라는 뜻이 아니다. 당신의 시선으로 이 사회와 세상은 당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괴로움과 고통만 준 곳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 인생에 대한 책임감이다. 인생이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러웠다면, 당신은 이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물어보는 것이다. 이제까지 수많은 시도와 노력을 해왔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주저앉아 무력감에 빠진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당신들이 노력하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들은 노력을 위한 첫발을 떼는 용기가 부족했을 뿐이다. 이제 그 용기를 가동한 당신에게 조심스레 당신의 인생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자기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가?”


 


당신은 이제까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가? 절망과 고통, 고난 앞에서 잠시 혼란을 겪고, 감정 과잉 상태가 되어 사고가 정지됐다는 건 인정한다. 이 경우 사람은 충분히 자살을 고민할 수 있다. 당연한 수순이며,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고’다. 그러나 당신은 이제 감정을 배제한 상태에서 고난을 확인했고, 분노의 실체를 확인했고, 말할 대상과 이 대상에게 분노를 터뜨릴 수단도 생겼다. 이제 ‘투정’은 안 된다. 다시 묻겠다.


 


“당신은 자기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가?”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식의 투정은 안 된다. 당신이 잘 알 것이다. 이 책을 지금까지 읽었고, 이 책에서 말하는 단계를 밟아왔다면 당신도 알 것이다. 그동안 당신을 괴롭혀온 고통과 고난, 절망이 상당 부분 당신의 생각으로 만들어졌고, 감정을 객관화하는 순간 고통의 실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고통과 당신 내면에서 울리는 ‘감정의 소리’에 반응할 무기도 손에 쥐었다. 당신은 핑계 댈 위치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당신의 행동에, 아니 당신의 인생에 책임을 물을 시기가 온 것이다. 변명도, 핑계도 필요 없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부분이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내 인생에 책임졌는가? 아니 앞으로 내 인생에 책임질 수 있는가?”


 


그 대답을 들을 시간이다.


 










Tip 자살은 사회의 책임이다?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3명은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이들 3명 중 40퍼센트는 구체적인 자살 방법을 고민했고, 이들 중 30퍼센트 정도는 이 고민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겼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이렇게 올라갔을까? 경찰청 보고에 따르면 1997년 외환 위기 직전에 9190명으로 9000명대를 유지했으나, 1998년 IMF 경제 위기가 본격화되면서 1만 2458명으로 비약적 증가를 보인다. 이후 꾸준히 1만 명 수준을 유지하고, 평균적으로 1만 2000~1만 3000명대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게 우리나라만의 문제일까? 2009년 WHO의 통계 보고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세계인의 자살률은 60퍼센트나 증가했다. 이를 수치로 환산하면 매년 100만 명, 매일 3000명, 40초당 1명이 자살한다는 의미다. 다른 통계를 보면 전 세계 자살자 수는 전쟁에 따른 사망이나 살인에 따른 죽음보다 많다. 전 세계의 연간 살인 피해자 수가 평균 50만 명, 전쟁 중 전사자 수가 23만 명인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살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왜 이렇게 많이 죽을까? WHO의 통계를 보면 그 실마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자살 통계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나라가 한국, 일본, 중국, 인도다. 이들 나라의 특징이라면 최근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공통점이 있다. 급격한 경제 발전, 이어지는 경제 위기와 가치 기준 상실, 물질문명 발달과 정신문명 쇠퇴로 사회 전체가 가치 판단의 기준이 붕괴됐다. 이 빈자리를 채운 것이 돈에 대한 집착이다. 모든 가치 기준이 ‘돈’이 되고, 인간은 서열화?물질화됐다. IMF 직후 6만여 개 중소기업이 문을 닫았고, 그 여파로 중소기업 사장 365명이 자살한 것이 대표적인 증거다. 돈이 가치 기준이 되고 급격하게 돌아가는 현대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 앞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한번 떨어지면 그걸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라 판단하기에 이르렀다(실제로 사회가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삶이란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들의 발버둥과 기력이 빠진 개미들의 죽음,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는 검투기장이다.”


 


대한민국을 이처럼 적확하게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급격하게 발전하는 경제 규모에 반비례해서 구성원들의 행복도가 떨어지는 원인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통계는 자살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임을 방증한다. 즉 사회적인 합의와 노력으로 자살률을 낮출 수 있다는 의미다. 그 증거가 바로 헝가리다. 한때 세계적인 ‘자살 대국’이라 불리던 헝가리(1984년 헝가리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44.9명)는 사회적인 합의와 노력으로 자살률을 상당 부분 낮출 수 있었다. 자살은 사회적 타살임이 다시 한 번 증명된 사례다.




 


 


 


VI. 삶의 의지


 


1.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TV에서 자살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두 학자를 떠올린다. 한 명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고, 나머지 한 명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신경정신과 교수 빅터 프랭클(Viktor Emile Fankl)이다. 여기부터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좀 난감하다. 두 사람이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 파편적으로 생각하던 이야기라 제대로 정리하기가 힘에 부친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는 이들의 생각과 행동에서 내가 생각하는 ‘자살’의 의미를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따라오기 바란다.


 


자크 라캉은 철학이나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음 직한 이름이다. 물론 인문학적인 지식이 있거나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나가다가 한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이 사람을 나름대로 정의하면, 말 참 어렵게 하는 사람이다.


 


말을 어렵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텐데, 라캉의 저작물이나 발언을 읽다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프로이트나 융 같은 학자들이 하는 말을 읽다 보면 머리를 쥐어뜯는데, 라캉은 이들보다 한 수 위의 내공을 보여준다. 머리를 아예 내리찍고 싶어진다고 할까? 라캉의 저작물과 발언은 그 정도로 모호하고 심오하다. 그런데 라캉의 말 중에 단순 명쾌하면서도 핵심을 짚어낸 명제가 있다(진리는 언제나 단순하다던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caption id="attachment_98148"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Jacques-Marie-Émile Lacan"][/caption]


 


라캉의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낀 충격은 지금도 날 두근거리게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라캉이 한 말의 의미는 말 그대로다. 쉽게 말해 ‘사람은 타인의 욕구와 기대에 맞춰 자신의 욕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운가? 그렇다면 당신의 기억을 더듬어보라.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하나씩 복기해보자.


 



당신이 칭찬을 받은 기억 속에서 당신은 왜 칭찬 받는 행동을 했는가?


당신이 열심히 공부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고등학교, 대학교에 간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영어에 목숨을 건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좋은 직장과 거주환경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자아와 사고가 형성된다. 앞에서 질문한 것 중에서 진정 당신이 원한 것, 그러니까 당신이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해서 내린 결정이 과연 몇 개나 될까? 자기 생각이라고 믿는 것도 잘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자신의 생각인지 타인이 당신에게 주입한 생각인지 헷갈린다. 더듬어 가보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인생의 낙오자가 되지 않는다.


대학 4년 동안 스펙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취직할 수 없다.


남들 다 하는 어학연수를 해야 하고, 봉사 활동도 해야 한다.


대기업에 정규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다.


대기업에 입사했으니 이제 결혼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남들 다 하는 결혼을 해야 한다. 결혼하기 위해서는 차와 집이 있어야 한다.


남들처럼 아파트에 살아야 하기에 대출을 받아 집을 사거나 전세를 구한다.


결혼했으니 자식을 낳아야 한다. 두 명은 무리지만, 적어도 한 명은 낳아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30대 초반에 사춘기가 온다고 한다. 10대에는 “무조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해! 사춘기? 인생의 고민? 그런 건 대학 가서 하면 돼!”라고 들었다. 그 말을 믿고 죽어라 공부해 ‘in서울’에 성공한다. 대학에 들어가니 등록금 전쟁과 스펙 관리 전쟁에 내몰린다. 청년 실업 앞에서 너나 할 거 없이 스펙 관리에 뛰어든다. 어렵게 취직하고 직장 생활에 적응하는 입사 1~2년 차, 서른 살 내외가 되면 공허감이 물밀 듯이 들이닥친다.


 


“난 뭐지?”


 


서른의 위기다. 툭 까놓고 말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명제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이 욕망의 강도가 특히 강하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100점 만점의 시험지다. 우리는 너무나 익숙한 100점 만점의 시험지. 그러나 외국에선 이게 오히려 이상하다(프랑스의 대학 입학 자격시험 ‘바칼로레아’의 문제를 보라). 왜 우리는 100점 만점의 시험지를 받아들였을까? 간단하다.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사람은 많고 자리는 한정적이니, 걸러내는 수밖에 없다. 이게 우리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용되는 논리다. ‘이해찬 세대’가 학력이 떨어졌다며 개탄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면서 창의력 교육에 중점을 둬야 한다, 스티브 잡스 같은 천재를 배출해야 한다며 광분한다.


 


우리는 언제나 이 사회가 내놓는 ‘체’에 걸러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 체 밑으로 떨어지는 순간 ‘낙오자’라는 낙인이 찍혀 살아야 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차…… 우리는 어느새 이런 분류 체계에 익숙해졌다. 이 책 앞부분에서 대한민국은 ‘정답이 있는 나라’라는 말을 했다. 사람들은 ‘정답’을 정해놓았다. 그리고 그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밀어낸다. 그래, 인정한다.


 


대한민국은 우회적인 신분제 국가다.


 


신분제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대충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럼 우리는? 당신은? 나는? 그건 각자 판단해야 할 문제지만, 대부분 그리 높은 위치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좋은 대학에 가거나(아니면 학벌 세탁을 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신의 신분을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면 올라가려는 마음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는 마음이 강해진다. 왜? 살아남기 위해서다. 자신의 위치에서 밀려나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정답이 있는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건 이래저래 괴롭다.


 


재미있는 건 아직 대한민국에서 확실히 그 ‘정답’을 아는 사람도, 맞힌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정답의 근사치에 왔다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그들이 행복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제는 사회구조가 은연중에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중요한 목표, 인생을 걸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뭘까?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행복’일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설사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발견했어도 하지 못한다 해도 자기 삶에 만족하고, 행복을 찾아 묵묵히 걸어간다면 행복한 인생일 것이다. 우리는 혹시 잘못된 ‘행복의 방향’ 앞에서 좌절한 게 아닐까?


 


거듭 강조하지만, 나는 자살을 인정한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자살이 없는 시절이 있었을까? 사람들은 수많은 이유로 자살한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죽음 앞에서 ‘베르테르 효과’에 의해 따라 죽는 경우도 있고,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자살도 있다. 어느 순간 사는 게 지겨워져서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을 보면 인간적으로 좀 많이 죽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죽을 이유가 있고, 이해할 만한 조건이 갖춰진 상황이라면 “이해는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지……”라며 동정하겠지만, 최근 우리나라에 부는 ‘자살 광풍’은 이해의 범주를 벗어났다. 상당수 자살이 라캉의 말처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다 굴러떨어진 모습이다. 이런 이유로 자살을 생각한다면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정도가 심하다. 우리나라에서 기준이 되는 ‘정답’이 진짜 인생의 정답인지 자신할 수 있는가? 확실치도 않은 정답에서 밀려났다고 당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정답 밖에도 인생은 있고, 그 인생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경우도 많다. 인생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이다.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100점짜리 인생 시험지를 만들어서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는 대한민국의 ‘정답 인생’을 거부(혹은 퇴출)했다고 해서 당신의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다. 살아 있다면 인생은 이어지고, 당신이 원한다면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이 내놓은 정답 인생에 도전할 기회도 있다.”


 


도덕 교과서 같은 말이다. 그러나 이게 진리인 걸 어쩌겠는가? 그냥 말하는 수밖에. 잘 생각해보라. 당신의 자살은 타인의 욕망에 휘둘린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인가? 인생은 당신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의 목숨을 결정할 권리는 당신 손에 있다. 그 결정에 뭐라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타인의 욕망과 논리에 당신의 목숨을 걸지는 말았으면 한다. 당신의 목숨이라면 당신의 욕망과 논리로 결정해야 한다.


 


 


2. 삶의 의미


 


신경정신과 교수 빅터 프랭클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빈대학교에서 의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전도유망한 학자지만, 태생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는 유대인이다.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시작된 유대인 박해와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빅터 프랭클이 있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3년 동안 아우슈비츠에 갇혔다. 그는 이곳에서 경험을 기반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집필하고, ‘로고 테라피(logo therapy, 의미 요법)’라는 심리 치료 요법을 개발한다.


 


[caption id="attachment_98150"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Viktor Emil Frankl"][/caption]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그가 얻은 교훈은 간단하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는 극한 상황이라도 우리에게서 실존의 의지와 자유를 박탈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최악의 조건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과 습자지 한 장 차이로 붙어 있는 강제수용소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확인했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가진 사람의 힘을 확인한다. 그가 생각하는 자살이란 어떤 의미일까?


 


한 작곡가가 희망찬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한 달 뒤면 모든 게 끝날 거야. 꿈을 꿨는데, 다음 달 30일에 독일군이 항복했거든.” 3월 30일이 되었지만,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시름시름 앓던 작곡가는 이튿날(1945년 3월 31일) 숨을 거뒀고, 독일은 5월 1일에 항복했다. 나는 깊이 깨달았다.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은 자신의 목숨마저 쉽게 포기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살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나태한 방법이니까.


 


빅터 프랭클의 경험과 다짐이다. 그는 지옥과도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지내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인간이 생각만큼 약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확인했고, 삶이 던져주는 현실적이며 고통스런 질문들을 회피하지 않고 책임감 있게 해결해나감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내 삶에서 의미를 찾으란 소린가?” 이렇게 반문한다면 되묻겠다. 그럼 이제까지 당신은 의미 없이 살아왔다는 소린가? (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이 살고 있다. 아니 사는 게 아니라 버텨내고 있다.) 자신을 돌아보라. 당신의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자살까지 고민할 정도면 삶의 의미가 없거나, 상당 부분 축소되었을 것이다.


 


“내 삶은 의미를 찾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지금 내 삶은 존재 자체가 부정된 상황이다. 의미 같은 거창한 것을 찾기에는 너무 힘든 상황이다.” 이는 자기 삶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의미 요법의 기본 원리’를 살펴보자.


 


1. 어떤 조건에서도 삶은 의미가 있다.


2. 사람에게는 의미를 찾는 의지가 있고, 행복은 그것을 성취함으로써 오는 것이다.


3. 인간에게는 한정된 상황에서도 의미를 구현하는 자유가 있다.


 


간단하지 않은가? 당신이 어떻게 살든지 그 삶은 의미가 있다. 당신 삶을 돌아보기 바란다.


 


“난 서른 살이 다 됐는데도, 부모님 곁에서 생활비만 축내는 밥버러지다.”


 


이게 당신의 모습인가? 그렇지만 부모님에게 당신은 ‘소중한 자식’이다. 당신을 아는 이들에게는 ‘친구 ○○○’이다. 당신의 삶이 시궁창이라고? 당신이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될까? 당신은 아직 3분의 1도 살지 않았다. 나머지 3분의 2 인생에 어떤 행복과 축복이 남아 있는지 당신은 모른다. 아니 지금의 삶에서도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당신이 ‘삶의 의미’를 고민하고, 찾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는 충분히 성취되는 것이다. 억압적인 삶과 한정된 선택 앞에서 고민된다고?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미를 구현하는 자유가 있다. 빅터 프랭클이 그 증거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것처럼 매일 반복되는 것이 내 삶이다. 이런 삶에서 의미를 어떻게 찾는가?” 당신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한다면 바코드를 찍는 단순한 행위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시간이 모여 내 알바비가 된다. 이 돈을 모아서 휴대폰 사용료를 낼 수 있고, 내 생활의 질을 유지하거나 높일 수 있다. 시급이 부족한 것 같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닌가? 이 알바가 나쁘게 보면 한도 끝도 없이 나쁘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나름 괜찮은 직업이다. 폐기물 상품을 무한정 먹을 수 있고, 시간대만 잘 선택하면 내 시간을 활용할 수도 있다. 어차피 하는 알바라면 힘들고 짜증스럽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내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좀더 빨리 시간을 보내고, 근로 의욕을 높이는 방법이 아닐까? 어차피 할 일이라면 말이다.


 


의미를 부여하기로 마음먹으면 당신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할 것이 없다. 처음에는 사소한 생활 속의 행동이나 행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다가, 점차 그 영역을 넓혀보라. 궁극적으로 당신 인생이 추구하는 목적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못 할 거라고? 당신의 상황 앞에서는 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거라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물어보자.


 


“행복해지려고 노력한 적이 있는가?”


 


당신은 지금 행복하지 않아서 혹은 불행해서 죽으려 한다. 이승에서 더 이상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지 못했고, 지금의 고통과 고난을 피하는 것이 훨씬 편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제에는 분명히 이 말이 필요하다.


 


“나 자신이 행복해지려고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 시도가 다 무너졌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것 같은가? 행복은 별거 아니다. 찾으려고 노력하면 더 오지 않는 게 행복일 수 있다. 그 반대 개념도 성립될 수 있다. 당신이 거창하게 생각해낸(대부분 타인이 주입한 개념이겠지만) 행복의 기준을 세워두고,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과 환경을 탓하는 게 지금 당신의 모습일 수도 있다. 피나는 노력과 의지로 난관을 극복하고, 자제해서 자신이 세운 기준을 통과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기준을 통과했다고 100퍼센트 행복하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차라리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것이 행복에 훨씬 가까워지는 방법이다. 당신 삶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바란다. 작은 것이라도 좋다. 영화 본 게 행복했다면, 당신은 상영 시간 내내 행복했을 것이다.


 


“영화를 볼 수 있는 경제적 여유와 시력에 감사한다. 영화관까지 올 수 있는 두 다리에 감사한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력에 감사한다.”


 


의미를 부여하고, 그 하나하나에 감사해보라. 행복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이 행복한 시간이 늘어날수록 당신은 ‘행복한 삶’에 가까워진다. 당신은 이런 노력을 해봤는가? 행복은 어디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힘들여 찾아가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의식적으로 변하려는 만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찾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만큼 멀어지는 존재다(타인의 욕망을 기준으로 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지금 있는 자리에 멈춰서 행복이 찾아오도록 끌어당겨라. 이런 말을 하는 나도 낯간지럽지만, 이게 진리다. 손발이 오글거리는 걸 참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번 시도해보고 말하라. 행복하지 않다고 투덜거리기 전에 나 자신이 행복해지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 되짚어보라. 그런 다음 욕을 하든, 세상을 원망하든, 자살을 고민하든 하라.


 


 


3. 인생이란?


 


나는 기본적으로 35세 이전에 자살하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그 이유는 ‘미국 대통령 피선거권’을 기준에 뒀기 때문이다(이를 두고 종미니, 친미니 하지 않기 바란다).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조건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통령의 피선거권을 갖기 위해서는 최소 35세 이상이어야 하며, 미국에서 자연적으로 태어나 최소 14년 동안 거주해야 한다.


 


[caption id="attachment_98152"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George Walker Bush"][/caption]


 


내가 주목한 것은 35세를 기점으로 한 인간의 ‘지능’에 관한 문제다. 인간은 나이 들수록 지능이 떨어질까, 아니면 높아질까? 나이가 들면 지능이 떨어진다는 쪽에 무게가 실릴 것이다. 나이 들수록 기억력이 떨어지고 기민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인데, 과연 그럴까? 인간의 지능은 크게 유동성 지능(fluid intelligence)과 결정형 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으로 나눌 수 있다.


 


유동성 지능이란 추리 능력, 연산 능력, 기억력, 도형 지각 능력 등 경험과 무관한 지능을 의미한다. 우리가 젊은 시절 예민하게 반응하는 기억력과 명민한 두뇌 회전 등을 의미한다. “나이 들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게 유동성 지능 때문입니까?” 이렇게 질문한다면 맞다고 대답할 수 있다. 유동성 지능은 나이가 들수록 떨어진다. 그럼 결정형 지능이란? 어휘, 일반 상식, 언어 이해, 판단과 같이 경험, 훈련, 교육 등 환경적 요인에 따라 발달?축척되는 문화적 지능을 의미한다. “노인들에게는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지혜’가 있다.” 이때 사용되는 말인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는 경험이 결정형 지능을 향상한다.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결정형 지능은 나이가 들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


 


유동성 지능과 결정형 지능은 반비례 관계다. 나이가 들수록 유동성 지능은 떨어지고, 결정형 지능은 올라간다. 우리가 일반 상식처럼 나이 들수록 지능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절반의 진실일 수도 있다. 같은 나이라도 경험이 많고 자기 관리를 잘한 사람은 유동성 지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결정형 지능이 이를 보완하고도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동성 지능의 기억력 부분도 크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기 기억은 젊은이가 나이 든 사람보다 뛰어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기억은 나이 든 사람이 더 오래, 또렷하게 기억한다.


 


여기에 더해 중요한 지능이 바로 통괄성(統括性) 지능이다. 이건 나이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상승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이는 오로지 개인의 역량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며, 현상을 파악하는 능력과 기획력, 의사 결정력, 관리 능력 등 많은 정보를 통합하고 통괄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통괄성 지능은 다른 지능과 달리 40세가 지나면서 더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젊은 뇌는 정보 처리 속도가 빠르고, 세부 사항을 기억하는 정확도와 주의력 등이 뛰어나다. 그러나 우리 뇌가 그 능력을 120퍼센트 활용하며 정점을 찍는 때는 40~65세에 이르는 중?장년기다.


 


심리학자 셰리 윌리스(Sherry Willis)는 1956년부터 무려 40년간 나이에 따른 뇌의 인지능력을 조사했다. 연구 결과 40~65세, 즉 중년의 뇌가 ‘언어 기억’ ‘공간 정향’ ‘귀납적 추리’에서 최고 수행 능력을 보였다. 보통 머리가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하는 20대의 뇌는 ‘반응 속도’ ‘계산 능력’에서만 중년의 뇌를 앞질렀을 뿐이다. 인지능력과 통찰력의 발달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얻는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단순히 경험 때문일까?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가볍게 무시했지만, 여기에는 우리 몸의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달립 제스트 박사는 연구를 통해 종전의 상식을 뒤집는 주장을 한다. “나이 들수록 뇌에서 도파민(충동적 감정을 일으키는 호르몬)의 양이 줄어들기 때문에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결정을 덜하게 된다.”


 


우리 몸이 뇌의 지능에 민감한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다. 이 정도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짐작할 것이다. 당신들에게 질문한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나 꿈, 형이상학적인 가치관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말 그대로 당신의 인생을 구성하는 ‘요소’가 뭐냐는 것이다. 이제까지 당신의 인생을 만들어온 요소가 뭔가 하는 질문이다. 다시 묻겠다. “지금의 당신 인생을 만든 것은 무엇인가?” 생뚱맞은 질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라.


 


“인생을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나. 수없는 시행착오와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인생 아닌가.” 이런 대답은 사양한다. 복잡하기도 하지만, 단순하게 정리하다 보면 한없이 단순한 것이 인생이다. 물론 인생에는 정답은 없고, 각자의 ‘의견’이 있을 뿐이다.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고민과 경험이 묻어난 것이라면 그 의견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같은 의미로 내가 생각하는 인생이란, 가중치에 따른 선택의 총합이다.


 


‘인생은 선택의 총합’이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선택’을 강조한 이와 유사한 말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지금 당신의 인생은 예전에 당신이 한 ‘선택’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잘 생각해보라. 인생에서 당신의 선택이 빠진 순간이 있었나? 하다못해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덜 나쁜 차악을 고르기 위해 고민한 것이 당신이다. 최선과 차선 중에서 선택할 권리를 얻지 못해도 선택을 통해서 인생을 꾸려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여기에 당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선택의 ‘기준’이 가중치 혹은 가치관이다. A와 B라는 선택이 있다. 당신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C라는 제3의 길은 없다. 당신은 A와 B 중 어느 것이 좋은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가중치다.


 


커피는 3000원, 녹차는 4500원이다.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면 커피지만, 난 녹차를 좋아하고 녹차가 건강에 도움이 될 거 같아. 1500원 정도는 내 건강과 비교하면 껌 값이다. 그래, 녹차를 선택하자. (이건 의학적 판단이 배제된 설정 상황이다. 오해 말기 바란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건강이라는 가중치에 따라 녹차를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반대 상황도 성립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선택에는 가중치란 기준이 알게 모르게 작용한다. 이걸 지금 당신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해보면,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는 선택을 하려는 중이다. 따로 떼어놓고 바라보자. 선택은 당신의 결정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다른 선택이라면 결과가 어찌 됐든 그걸 만회할 기회가 있다. 시간과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죽음은 한번 선택하면 되돌릴 수 없다. 여기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가중치다. 당신은 삶과 죽음, 아니 더 들어가서 죽음에 이른 원인을 두고 이런 고통(혹은 상황)은 참아내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가중치의 잘못된 활용이 나온다. 당신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상황과 죽음을 통해 이 상황을 끝내겠다는 ‘고통의 종결’을 비교한 것이다. 계산 착오, 상황 오판이다.


 


고통과 고통의 종식이라는 선택지를 놓고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면 당연히 죽는 게 낫다. 다시 계산해보자.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A : 외부의 도움 요청을 비롯한 수많은 방법론.


B : 죽음(단순한 고통 탈출. 이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자살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거니와,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건 미지의 영역이 아닌가).


 


현재의 삶을 유지하면 내가 얻는 효익은 무엇인가?


A : 수많은 쾌락 혹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쾌락과 자아완성의 기회?


B : 잠깐의 물리적 고통, 정서적 억압, 사회적인 불명예 등.


 


이는 사안을 단순화한 것이고, 계산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지구에는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자기만의 생각과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이 생각과 가치관이 결정적인 순간 그 사람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의 가중치를 가지고 뭐라 하는 것은 아니다. 묻고 싶은 건 간단하다.


 


“당신은 자신의 선택에 영향을 준 가중치를 지금 말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당신이 뭔가 선택하는 기준을 보여달란 소리다. A와 B라는 단순한 선택 앞에서(간단하지 않은가. A는 삶, B는 죽음이라면?) 선택의 기준이 있을 게 아닌가. 당신이 어디에 더 무게중심을 뒀는지 삶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답할 수 있는가? 당신은 인생의 기준에 따라 죽음을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감정에 휩쓸려서 당장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무턱대고 선택한 것인가?


 


[caption id="attachment_98154" align="aligncenter" width="461" caption="선택의 순간"][/caption]


 


내가 35세 이전의 자살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생의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기의……’라고 시작되는 교육학이나 발달심리학적 관점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묻는 것이다.


 


“당신의 죽음은 온전히 당신의 가중치(가치관)에 따라 심사숙고해서 내려진 결론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최소한 당신 인생의 가중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그 기준을 엄정한 잣대로 적용할 수 있는 판단력과 자제력도 있어야 한다. 좋다. 판단력, 자제력 다 필요 없다. 기준만 있어도 좋다. 기준이 있는가?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말을 처음 들었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있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동물적 반응’으로 죽음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 동물이라면 생존을 위한 방법을 선택했을 테니 압박감이나 다른 ‘힘’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당신 인생의 마지막 선택이 될지도 모르는 자살을 결심하는 데 당신의 기준은 무엇인가?”


 


대답할 수 있는가? 인생의 기준이나 가치관, 가중치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기준이라 하면 수많은 경험과 비교함으로써 당신에게 가장 알맞은, 그러니까 당신이 살아가는 데 판단의 근거가 되는 잣대 아닌가. 그 잣대를 30세 이전에 가질 수 있을까? 물론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경험과 선인들의 지혜를 공부하는 노력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아닐 확률이 높다. 35세가 넘은 사람들도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바뀌는 것이 삶의 가치관이다. 빠르게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가치관이 맞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험이 부족한 30세 이전의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에 따라 자살을 선택할 수 있을까?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게 아니다. 앞에서 미국 대통령 피선거권과 통괄성 지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는가(밑밥을 던져놓은 것이다. 생각 같아선 대한민국 대통령 피선거권에 있는 40세 나이 제한을 말하고 싶지만, 양보해서 35세라는 최저 기준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면, 한국 사회의 ‘30대 사춘기’ 이야기다. 대한민국에서는 인생에 대한 고민을 30대 언저리에서 시작한다. 사회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이 부분도 앞에서 잠깐 언급했다). 사춘기를 30대에 시작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인생의 기준을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어설프지 않는가. 더구나 그 기준에 따라 죽음을 결정하라면? 내가 35세 이전의 자살에 부정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긴말하지 않겠다. 자신에게 질문해보라.


 


“나는 어떤 가중치에 따라 자살을 선택했나?”


“혹시 내가 잘못된 가중치 비교로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나는 내 가중치를 100퍼센트 이해하는가?”


 


대답할 수 있는가? 아니라면 당신의 선택을 잠시 보류하는 게 좋다. 당신은 잘못된 가중치로 인생을 날려버리려 하는 것이다. 올바른 가치관이 형성된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선택한 자살은 개죽음일 뿐이기 때문이다. 죽고 싶다면 당신 인생의 기준부터 세워라. 자살은 그다음 문제다.


 










Tip 당신의 유전자는 250만 년 동안 살아남았다


 


“인간은 유전자의 복제 욕구를 수행하는 이기적인 생존 기계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은 어찌 보면 유전자의 단순한 ‘탈것’인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진화의 주체는 집단도, 개체도 아닌 유전자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에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진화의 핵심인 ‘유전자’다. 사람의 유전자는 꾸준히 다음 세대를 향해 전달돼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인류의 역사를 250만 년으로 봤을 때(400만∼500만 년 전 고인류 단계는 제외하고, 구석기시대만 한정한다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15만 세대를 거슬러온 ‘유전자 덩어리’란 소리다. 250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우리 조상이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똑같다. 그 의미는 뭘까? 당신 몸속에 있는 유전자는 구석기, 신석기, 농업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정보화 혁명 시대까지 살아남았다는 의미다. 15만 세대를 계승해온, 250만 년의 역사가 당신 몸속에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그 기간 동안 지구적인 재앙도 있었을 테고, 역사 이래 이어지는 인간들의 사건도 있었을 것이다. 당신들의 역사 기억 속에 있는 커다란 전쟁만 꼽아도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쟁 상황과 통일 전쟁


나당전쟁


후삼국 시대의 혼란기


고려 시대 대몽 항쟁


조선 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의 혼란


한국전쟁



 


이 기간 동안 당신의 조상은 살아남아서 자기 유전자를 당신에게 전달해준 것이다. 경이로운 생명력이 아닌가. 더 대단한 건 당신이 탄생한 순간이다. 과학적으로 남자가 일생 동안 뽑아내는 정액이 2ℓ짜리 페트병 2개 분량이라는데, 이중 여성의 질에 들어가는 양은 3분의 1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다. 또 여자의 임신 확률은 배란일 기준 앞으로 5일, 뒤로 3일이다. 이 확률이 맞아떨어지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필요할까? 당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정상적으로 관계하더라도 임신 확률은 상당히 낮다.


 


1회 사정 시 정자는 1억 5000만 마리 정도가 나오는데, 일단 여자의 질 안으로 들어간 정자들은 산성으로 된 질 안을 헤엄쳐나가야 한다. 이때 질 안을 감싸는 산(酸)이 정자를 죽인다. 섹스하고 15분 뒤에는 어머니 몸속에 있는 백혈구들이 결집하고, 4시간 뒤에는 10억 개에 이르는 백혈구가 몰려들어 정자를 학살한다. 이 사선을 넘어 자궁경관까지 올라가는 동안 정자는 90퍼센트가 죽는다. 살아남은 정자도 점막으로 된 자궁경관을 넘어가는 동안 다시 90퍼센트가 죽는다. 그렇게 사선을 넘어 나팔관 근처까지 도달하면 정자는 수백 마리까지 줄어든다. 이들 중 선택받은 한 마리가 당신이다. 이 지난한 과정이 15만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 것이 바로 당신이라는 얘기다.


 


15만 번이나 되는 계승을 지금 끝내려 하는가?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사를 합쳐야 하니 무려 30만 번의 계승, 500만 년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계속)


 


 



 


 


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