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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02. 목요일

Matti


 


- 운명공동체


 


* 운명공동체


지금까지 기술했던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NL 운동가들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갑니다. 그 안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은 대개 사회의 일반적인 조직에서 나타나는 것들과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생깁니다.


 



 


전편까지는 학생운동의 사이클과 쟁점 등을 짚어가며 주로 운동가의 성장과 그 내면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탄압'과 '투쟁'입니다. 그리고 그 "탄압"과" 투쟁"이 NL이라는 집단을 특수한 성격의 공동체로 만듭니다. 90년대 중반의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에 맞서 싸우는 학생운동가들 역시 정파를 가리지 않고 강력한 탄압을 받습니다. 학생운동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구속되며, 집회는 늘 경찰의 진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구성원들의 과대망상이나 지도부의 의도적인 '적' 만들기가 아닙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외부의 탄압과 그에 맞선 투쟁은 내부를 단단하게 만듭니다. 동료가 구속이 되고, 나 역시도 언제든 잡혀갈 수 있다는 현실은 구성원들을 특정 이념의 결사체를 넘어 운명을 함께 하는 공동체로 만듭니다. 생활, 사상, 투쟁 등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의 조직체계, 사상, 의사결정문화 등 많은 것에 동의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종교에서 교단에 들어가는 것과 유사한 행위입니다. 개개인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보면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개인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돌아갑니다.


 


그렇지만 외부의 탄압이 거셀수록 내부는 그만큼 비정상적으로 돌아갑니다. NL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위와 같은 현실들은 NL 집단을 사회의 일반적 분위기와 멀어지게 만듭니다. 당연합니다. 투쟁하는 조직이 사회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성원에게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올라도 내부에서 그것을 개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운동가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생각들은 '엄혹한 정세'라는 현실 앞에서 무력화됩니다. 내부의 문제들은 일단 탄압을 이겨낸 뒤에 고민해야 하는 것이며, 지금은 일단 지도부를 믿고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게 최선이라는 동료들의 논리를 꺾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부민주주의 등 나이브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감옥에 끌려간 동지들을 욕되게 하는 짓입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이해하기 힘든 논리들이 내부 구성원에게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합니다. 감옥에 간 동지들의 문제는 구성원 모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운명공동체고, 탄압 받는 동지들은 공동체 차원의 책임을 개인이 짊어진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일반적 조직의 속성 역시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목표로 조직을 만들어도 어느 시기가 지나면 최초의 목표는 마음 속에서 티미해집니다. 반면에 조직 그 자체를 보위하는 것은 언제나 피부로 와닿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민주주의나 일반적 상식을 거스를 지라도 조직의 보위가 최우선이 됩니다. 외부 인사들이 우리 안의 문제점들에 대해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해도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우리 조직의 보존이라는 생각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보진영에서는 내부에서 문제가 터지면 일반 상식과는 다른 방향으로 문제해결이 진행됩니다. 만약 진실과 조직의 보존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일단 조직입니다.


 


이렇듯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없는 폐쇄적 분위기가 내부를 압도하다보니 강경한 목소리들이 힘을 얻고 지도부를 차지합니다. 공동체를 떠나지 않는 이상 이런 분위기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탄압 받는 공동체 내부에서 계속 생활하다 보면, 결국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직의 비민주성, 폭력성 등을 목도하면서도 어떻게든 이해를 하고 싶어합니다. 좋은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데에는 반드시 사정이 있을 것이고, 혹여나 그게 아무리 큰 잘못이라 한들 일단 동지애로 감싸주고 공동체를 건사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동지들을 적들에게 헌납해야 하는 상황이 해결책으로 제시된다면 그건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과정들이 몇차례 반복되면 구성원들 스스로가 반민주, 폭력 등에 무감각해집니다.


 


NL운동가들 하나하나를 만나보면 다들 나름의 불만들과 합리적인 문제의식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인들은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합리적 NL들이 조만간 내부에서 개혁의 돌풍을 일으키리라 기대를 합니다. 그렇지만 조직의 결정이 내려지면 그 모든 논의들은 정말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들로 사그라듭니다. 그 모든 고민들은 어딘가로 던져버리고 지도부의 의사대로 일사불란해집니다. 이런 걸 몇 번 목도하게 되면 내부 구성원들의 자정 능력에 대한 신뢰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NL에게는 결국 아래로부터 이뤄져야 하는 혁신마저도 지도부의 몫이 됩니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며 믿고 가는 것도 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이들이 지도부에 포진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고 딴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죄의식을 갖게 합니다. 동시에 지속적인 무뎌짐을 통해 자율적 판단 능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도 한 몫을 합니다. 그래서 설사 불만이 있더라도 결국 지도부가 올바른 혁신의 길을 제시해줄 것이라며 메시아를 바라는 사고가 강해집니다.


 


그래서 NL이 개신교회와 종종 비교가 됩니다. 생활과 이념을 강하게 공유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선악의 세계관이 분명하고, 내부구성원들 간의 신뢰가 굉장히 강합니다. 그리고 외부(세속)의 잣대로 내부를 재단하는 것은 안 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부에서 아무리 나쁜 짓들이 벌어져도 그건 조직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해결되어야 하며, 외부의 개입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금기시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거룩한 조직이라 하더라도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대부분은 결국 사회의 다른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똑같은 것들입니다. 성직자의 강간과 신앙공동체 간에는 사실 그 어떠한 연관도 없습니다. 사회 조직에서 벌어지는 온갖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미 오랜 역사와 케이스 연구들을 통해 가장 적절한 해결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그건 상식일 수도 있고, 공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거부하기 때문에 조직이 내적으로 썩어들어갑니다. 내부에서의 해결이란 결국 가장 힘 센 자들의 의지에 불과합니다.


 


 


* 침묵


90년대 학생운동가들의 내면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고립'이었다면, NL 운동가들의 행동양태를 규정하는 키워드는 '침묵'입니다. 대중성이 강하고 활달해보이는 NL 운동가들이지만, 민감하거나 준비되지 않은 주제가 대화거리로 떠오르면 철저하게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아무리 운명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위의 소주제에서 거론하는 조직문화나 거기에서 나오는 획일화된 지침들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의문을 가진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공동체를 떠나거나 깨려고 들지 않는 이상 유일한 선택은 '침묵'입니다. 마음 속으로 이것저것 타협하고 정리한 후 그 선을 지키며 생활합니다. 정반대로 조직을 절대적으로 믿고 내부 문화에 잘 적응하는 운동가들에게는 다른 면에서의 '침묵'이 있습니다. 이런 운동가들의 경우 절대 스스로 생각하고 발언하지 않습니다. 내부토론에서는 늘 정해진 정답만을 이야기합니다. 외부 인사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이미 조직의 방침으로 정해진 것들만 거론하고 만약 미리 나와 있는 정답이 없는 경우 침묵하거나 회피합니다.


 


NL 운동가들 대부분이 자기검열 기제를 갖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건 굉장히 강력하게 만들어진 습관이라 운동을 정리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보진영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동안 이런 문제들에 대해 침묵해왔던 게 바로 자기검열의 아픈 모습들입니다.


 


경험담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NL운동가는 학년이 올라가고 일정 정도의 위치가 되면 북한 한민전방송(한국민족민주전선 방송, 대남방송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녹취록을 문건으로 보게 됩니다. (이건 무슨 폭로도 아니고 네이버에 검색만 해도 다 나오는 사실입니다. 사실 제가 이 시리즈에 소개하고 있는 내용들 모두가 아는 사람들은 다들 아는 것들입니다. 남들도 잘 모르는 것들을 폭로하고 싶어도 아는 게 없습니다.) 저는 사실 그 이전까지는 주체사상은 그저 사상일 뿐이고 실제 NL 운동은 NLPDR 노선 정도에서 자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문건들의 관련 내용들이 모두 한총련 지침으로 그대로 내려오는 것을 보며 그동안 굉장히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사실을 안 이후에는 북과 한총련의 관계에 대한 비판이 있으면 저 역시도 침묵과 회피를 했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일정 학번 이상이 되면 교내 강의실 등을 빌려 정기적으로 정세토론을 합니다. 물론 위에서 이야기하는 문건들이 토론자료입니다. 당시의 토론 쟁점은 북미관계였는데 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군사력이 미국을 압도하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정세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부분에서부터 현실인식이 잘못되어 있으니 우리 운동이 상식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NL 내부의 토론 분위기는 늘 똑같습니다. 사회자가 발제를 하고 나서 토론을 하자고 하면 정말 다들 쥐죽은 듯 조용합니다. 그럼 사회자가 답답해하다가 몇몇 사람들을 찍어서 발언을 시킵니다. 그러면 정말 다들 판에 박은 듯, 적절한 발제였고, 역시 지도부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고, 우리가 열심히 해야겠다고 발언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사회자가 정리를 하고 토론을 끝냅니다.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왠 시간낭비인가 싶습니다. 그냥 그 시간에 문건을 읽으면 될텐데 말입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발제가 끝나고 사회자가 발언할 사람을 찾았지만 역시나 다들 조용했습니다. 어차피 다들 아무 이야기도 없겠다 싶어, 제가 손을 들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북한의 군사력이 미국을 압도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현실인식이다. 가장 전제가 되어야 할 현실인식이 잘못된다면 이후의 분석과 대책들도 당연히 잘못될 것 아닌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사회자가 제 동기 하나를 찍어서 이 질문에 답하라고 했습니다. 사상적으로 투철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는 일어나자마자 정해진 대답을 읊었습니다. "군사력을 분석할 때는 물리적 전력과 정신전력을 구분하는 게 올바른 법칙이다. 그리고 그 중 결정적인 것은 바로 정신전력이다. 올바른 지도와 사상으로 무장한 인민군의 정신전력이 제국주의 군대인 미군의 그것보다 월등한 것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북한이 미국을 군사적으로 압도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저 역시도 대충 선을 지켜가며 사는 평범한 운동가였기에 "실제 군사력은 차이가 나지만, 체제의 특성상 미사일 등 비대칭 전력을 통한 북한의 운신이 좀 더 넓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는 북한이 미국보다 군사적 우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정도의 대답만 나왔어도 늘 그랬듯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동기의 대답은 상식 밖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답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모두의 침묵이었습니다. 정말 다들 무표정했습니다. 동의가 되어서 그런 건지, 체념인 건지 알 수 없는 모습들. 정말 저 황당한 이야기에 동의한다는 것인지. 그리고 무언가 제 머리를 때렸습니다. 저 역시도 방금 전까지는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전에도 저처럼 문제제기를 했던 운동가들이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저는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봤을 겁니다.


 


 


* 학습


학년이 올라가면 선배들로부터 자연스레 학습 제의를 받습니다. 당연히 주체사상 학습입니다. 여기서 운동을 그만두지 않을 이상 대부분의 운동가들은 제의를 거절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운동의 근원으로 들어가보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2년차 이상의 운동가라면 비합법적 일들에 대해 두려움은 없습니다. 주체사상을 학습한다고 주사파가 되는 것도 아니기에 일단 한 번 공부해보자라는 생각으로 학습을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주체사상 학습은 운명공동체의 성원으로서 '성인식'과 같습니다.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수령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하게 하나만 떼어놓고 볼 수 없습니다. 만약 NL 운동가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판단해 주체사상으로 나아갈 확률은 제로입니다. 그래서 NL 비주사다, 주사파다라는 구분이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주체사상이 강력한 지도사상인 공동체 내에 속해 있고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선에서 정리하고 사회로 나갈 생각이 아니라면, 일단 학습을 하고 한 단계 올라서는 게 맞습니다. 학습의 방법은 역시 천차만별입니다. 외부의 안전한 장소에서 선후배끼리 서적을 읽고 토론하기도 하고, 학내의 공개된 카페 같은 곳에서 선배로부터 편하게 이야기를 들으며 학습을 하기도 합니다.


 


학습을 시작하면 여러가지 기분이 듭니다. 이제는 정말 뭔가 깊숙이 들어가는구나 싶기도 하고, 정말 운동가가 되어가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그동안은 '아래'에 있었는데 이제는 '위'로 올라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NL이론의 틀 정도에서 합의되었다고 생각한 우리의 운동이 실제로는 훨씬 더 큰 그림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보통 학습의 시작은 김정일의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부터 시작합니다. (다른 책들도 있는데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기억 나는 만큼만 쓰겠습니다.) 그런데 학습을 시작하고 조금씩 들어갈수록 그동안 공부해왔던 철학이라는 체계와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부터 아예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체사상은 물질과 정신의 대립이라는 세계관을 사람과 세계의 대립이라는 사람 중심의 세계관으로 바꿨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왜 맑스에서 주체사상으로 넘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없습니다. 이후에는 계속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됩니다. 철학이라기보다 경전에 가깝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학습 때마다 선배와 토론을 벌였는데, 결국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지 못했습니다. 계속 물어보자니 마치 선배에게 따지는 것 같아 어느 정도 선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예전에 NL쪽에서 운동을 했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저만 그랬던 건 아니었습니다.)


 


시리즈의 앞 부분에서 설명드렸다시피, 주제사상의 전반적인 내용은 특별할 게 없습니다. 당연하고 좋은 이야기들이 딱딱한 용어로 쓰여져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창시했기에 엄청나게 대단한 인물이라고 하는데 상식적인 의문들이 꼬리를 뭅니다.


 


사람이 사회적 존재이고,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이야기인데 이게 굳이 주체사상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의 독창적인 내용인가 싶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들은 정말 김일성이 창시한 것인가. 그리고 일단 김일성을 수령으로 모셔야 한다고 치자. 대단한 건 김일성인데 왜 그 아들인 김정일이 김일성의 권력과 존경을 이어받아야 하는가. 이에 대해 NL 관련 단체에서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아들이어서 권력을 물려 받은 게 아니라, 마침 북한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 김정일이었기에 그런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들이 풀리지 않는 이들은 그냥 나름대로 좋은 이야기들만 받아들이는 선에서 이해를 하고 넘어 갑니다. 물론 그걸 입 밖에 내지는 않습니다. 뭔가 대단한 것들을 기대하시는 분들에게는 허무한 결론이지만 그렇습니다. 수령론으로 넘어가지 않는 이들은 대개 이 믿음의 단계에서 좌절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분께서 제 시리즈에 나오는 '점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하셨지만,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믿고 넘어가야 하는 단계들입니다.


 


그리고 주체사상 학습에 들어가서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민주주의'란 양립 불가임을 깨닫게 됩니다. 꼭 수령론만이 독재를 정당화시키지 않습니다. 주체사상이라는 것 자체가 유일한 진리며, 다른 사상들은 모두 사변적인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래서 NL은 좌파들을 비롯한 다른 견해들에 대해 '잡사상'으로 간단하게 규정합니다. 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것들도 '서구식' 사상의 한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전 민노당의 어느 교수가 인권은 가장 저급한 수준의 진보라고 명명한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민주집중제라던가, 우리식 사회주의를 한반도라는 특수한 지정학적 조건의, 미국과의 대결이라는 특수한 시기에만 해당하는 한시적 이론으로 이해하던 논리가 붕괴됩니다. 조직 내부를 짓누르던 반민주, 독재의 기제들이 사실은 가장 완벽한 사상이라는 주장 앞에서 다들 멈칫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의문들과 부딪치는 지점들을 놓아두고 마지막 단계인 수령론으로 다가갑니다.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는, 현실적 필요성으로 나아가는, 이왕 시작한 것 뭔지는 알아야겠다는 지적 호기심으로 나아가는, 수령론까지 다가가면 기존의 의문들이 한 번에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다양한 생각들을 가지고 가장 금기시되는 곳으로 많은 운동가들이 한 발자욱을 내딛습니다.


 


 


- 혁명의 문턱


 


* 의문들


앞 편에서 언급했듯 주체사상은 그 도입부에서부터 많은 의문들을 갖게 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의문들은 바로 '수령론'이라는 부분에서 부딪칩니다. 이건 세계관이라는 추상적 차원이라던가, 급박한 시기의 지도부 인정이라는 현실적 필요성을 넘어 실존하는 인물에 대한 신격화입니다. 타협이나 선별적 수용이 불가능한 지점입니다. 지금까지가 종교에서의 교리공부 단계였다면 수령론은 "세례"를 받는 단계입니다.


 



 


주체사상은 맨 처음에 인간의 속성을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면서 사람 중심의 세계관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수령론으로 넘어가면 "사회적 주체인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역할을 다하자면 반드시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아야 하며 따라서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 주체 확립에서 핵이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애초에 물질 중심의 세계관에서 사람 중심으로 넘어갈 때도 논리적 과정 없이 뛰어넘었는데, 수령론에 들어서면 주체사상에서 내세운 전제마저 뛰어넘습니다. 자주적 인간이 왜 남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물론 이 부분에서 깊게 들어가면 복잡한 설명들과 함께 어떻게든 가교를 놓으려 노력합니다. 그렇지만 그 내용들은 믿으려 하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주체사상 안에서조차 가장 중요한 세계관과 수령론이 충돌을 일으킵니다.


 


여기까지도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나 혁명적 지도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돌파했다고 칩시다. 마지막 난관이 있습니다. 바로 그 수령이 왜 김일성이 되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인민대중은 그 아들인 김정일에 대를 이어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지 논리적 설명이 쉽지 않습니다. 사실 불가능합니다. 현존 인물을 신격화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걸 납득하기 위해서는 김일성, 김정일을 우상화한 저작들을 읽어야 합니다.


 


 


* 혁명의 문턱


이런 모든 의문들을 일소하고, 김일성, 김정일을 수령으로 받들고, 북한 정권을 대남혁명의 근거지로 인정하게 되는데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세가지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 운동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형성된 무비판적 "관성" 그리고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지도부만 바라보는 "열망"입니다. 이 "신뢰"와 "관성"과 "열망"이 지금까지의 모든 의문들을 일소하고 수령론으로 넘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이 그러하듯, 의문을 버리고 믿음으로 극복하고 넘어간 세계에는 일관된 체계가 존재합니다. 외부와는 소통할 수 없는 사상체계지만, 그 안에서는 모든 것들이 일관된 질서를 가지고 순환을 합니다. 그리고 세계가 명확히 보이기 시작합니다.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성적 사고로는 넘어가거나 타협할 수 없는 단계가 수령론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주체사상 학습까지는 무난하게 들어가면서도 결국에는 이 단계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서성이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이해를 하고 싶거나, 어떻게든 확신을 가지고 싶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해결책이 "혁명에 대한 관점"입니다. 그 모든 의문들이 있더라도 한반도에서 정말 "혁명"을 하고 싶다면 그 유일한 해결책은 수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합니다. 지금까지 밟아왔던 신념, 이론, 투쟁, 삶 등 모든 것들을 "혁명"이라는 과업에 몰아넣고 수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이 헛되다 이야기합니다.


 


결국 수령론으로 넘어가는 길은 "혁명의 문턱"입니다.


 


그 혁명의 문턱에서 자신을 마주 보게 됩니다. 근본적인 의문들이 꼬리를 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혁명이란 대체 무엇인가. 북한 사회주의가 과연 혁명의 이상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운동을 했는가. 내가 속한 이 공동체의 노선은 과연 내 삶을 바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집단주의'적 삶은 과연 개인에게 행복한 것인가. 어떻게 '당'은 언제나 옳은 수 있는가.


 


마지막 질문에 다다릅니다. "혁명"이란 반드시 이 길로만 가야 하는 것인가. 이게 핵심입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의 공동체로 사고가 돌아갑니다. "신뢰"와 "관성"과 "열망"으로 돌아갑니다. 지금까지의 운동을 진중하게 돌아보고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무게와 고민에 따라 각자 선택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는 문턱을 넘고, 누군가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누가 넘었고, 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밖으로의 신앙고백이 있기 전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에 관계 없이 우리의 조직은 여전히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브레이크를 걸기 전까지는 계속 반복되는 일정과 정해진 틀과 조직문화 속에서 운동가들은 살아갈 것이고, 학습과 투쟁을 반복할 것입니다.


 


 




 


 


- 에필로그


 


* 이 글의 성격


대학에 입학해서 학생운동을 하는 동안, 그리고 졸업 이후에는 운동과 관련 없는 삶을 살면서도 늘 머리 속에 맴돌던 의문들이 있었습니다. 이 시리즈에는 그 의문들에 대한 제 나름의 고민들이 조금이나마 담겨 있습니다.이 글은 처음부터 말씀 드렸다시피 운동권 백서도 아니고, 90년대 학생운동 전체를 일반화시킬 수 있는 내용도아닙니다. 제 개인적 경험, 관찰, 전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뒤 각각의 쟁점들에 제 나름의 해석을 덧붙인 글입니다. 그래서 같은 경험을 했더라도 바라보는 입장의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90년대 중반과 후반, 서울 지역의 한 남자 대학생의 회고록 정도로 규정하시면 됩니다.


 


이런 글을 내어놓으면 보통 "왜 하필 지금과 같은 시기냐.", "몇몇 사실관계가 틀렸다. 그래서 전체적 신빙성이 떨어진다.", "왜 이런 부분만 다루는가. 편향적이고 정치적 의도가 있다." 등의 비판들이 따라붙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오류 없이, 모든 것을 다루라는 요구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는 지적은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는 압박이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서 권위를 가진 교과서가 아니라 평범한 운동가들의 다양한 기록들입니다. 제 글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바라시기보다, 진보진영 내부에서 좀 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하시는 게 사회적으로 훨씬 건강한 주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말씀을 드립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가 전대협 동우회가 펴낸 ‘불패의 신화’ 하나로 정리될 수 없듯 말이죠.


 


그리고 제 글은 선정적인 제목과는 달리 폭로나 고발이 목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제 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이미 폭로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의 이야기들입니다. 90년대 학생운동을 거론하기 위해서는 다루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기도 합니다. 진보언론이나 지식인들은 이미 대부분 알고 있는 일들입니다. 다만 다들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던 것 뿐인 거죠.


 


제가 그리고자 한 것은 '인간의 얼굴'이었습니다. 의도가 잘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계의 부속품처럼 비춰지는 무표정한 인간들이 아닌 살아있고 고민하는 운동가의 삶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통진당 사태에서 전면에 나섰던 대학생들. 사진과 영상에 비춰지는 그들의 모습은 홍위병이라 비판 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답답할 것입니다. 요즘 사회 분위기를 거스르며 '내'가 아닌 '남'의 문제에 고민하고, 그에 헌신해왔을 뿐인데 어느 샌가 사회의 암적 존재가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90년대의 운동가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시간을 쪼개가며 학우들을 만났고, 학생회 활동에 헌신했습니다. 옳다고 믿는 것들 앞에서는 구속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투쟁 현장으로,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한 삶 앞에 놓여있는 것은 저희들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들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던 걸까요. 우리를 바라보는 사회가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좀 더 열심히 살지 못해서 그랬던 걸까요. 그런데 우리는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말이죠. 다만 스스로를 돌아보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했어야 할 용기가 그때는 없었을 뿐입니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은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었습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부의 모순들에 대해서는 입바른 소리를 하던 우리들이, 정작 우리 안의 심각한 문제들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어느 정도 정해진 경로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대의 관성으로 모든 것을 묻어 두기에는 개인들의 책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분명 우리 자신들의 문제들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의무도 있었습니다. 우리 안의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무엇 때문인지 가장 정확하게 아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반드시 누군가 들춰보게 마련입니다. 조중동을 비난하기 전에 이 문제에 침묵해왔던 우리들의 모습에 아파해야 합니다.


 


이제 와서 지나버린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책임을 질 수는 있습니다. 그건 우리 안의 잘못들을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보가 진보인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진보가 보수에게 늘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비틀어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진보가 출발합니다. 그렇기에 진보에게 역사적 책무가 있다면 그건 남에게 세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 아닐까요.


 


 


* 왜 90년대였는가


이번 통진당 사태를 바라보면서 90년대 학생운동가 출신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청춘이 부정 당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고, 우리들에게 변함없는 신뢰를 보냈던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저 모습들에 대해 쓴 소리만 날릴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있을까요.


 



 


90년대 학생운동에 있었던 많은 문제들 중 많은 것들이 80년대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해결했어야 할 내부의 문제들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 짐들을 2000년대로 넘겨버렸습니다. 역사의 발전이란 냉정합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저절로 극복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지금 외면하고 넘어가는 것들은 미래에 반드시 후과로 나타납니다. 지금 통진당 사태는 우리들의 동조와 방조, 그리고 침묵이 낳은 괴물입니다. 저 괴물이 사라져도 처절한 반성이 없는 한 우리 주변의 순수한 얼굴들이 다시 괴물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리운 시대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던 시간들이며, 그리운 동지들의 시절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만난 이들 중 가장 착하고 이타적이었던 사람들은 학생운동 시절의 동료들입니다. 이들은 졸업 이후에도 대부분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사회문제에도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진보정당에 후원을 하며, 촛불을 들어야 할 때는 기꺼이 광장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주변의 작은 문제들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좀 더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고자 고민하며 삽니다. 반성해야 하는 모습과 함께 그 순수의 기록들도 조금이나마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돌아보면 학생운동가들 중 많은 이들에게 마음의 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걸 우리는 운동가의 숙명 정도로 생각하며 견디고 넘어갔습니다. 조직이 개인들을 병들게 하고, 아픈 개인들이 다시 조직을 병들게 만듭니다. 악순환의 구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운동을 정리하고 사회에 나간 동료들을 보면 예전 그때보다 다들 정신적으로 건강해 보입니다. 편협하고 냉혹했던 운동가들도 어느 샌가 넉넉하고 인간적인 얼굴로 살아갑니다. 조직이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요.


 


"정신적 상처의 기록들". 어쩌면 이걸 정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 과연 NL만이 문제인가


NL만이 문제인가 하는 점도 은연 중에 짚고 싶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어디나 비슷합니다. NL이 진보진영에서 다수가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진보진영 내부도 일반 사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입 바른 소리를 하는 놈이 미움을 받고 소수가 되는 구조입니다.


 


진보진영은 주변의 모든 것들에 의심을 하고 비판을 가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에 대해서는 무한한 신뢰로 일관합니다. 진보진영은 아주 도덕적이고 정직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며, 그렇기에 문제해결의 방법도 달라야 한다고 착각을 합니다. 이 부분은 시리즈 중간에서도 짚었지만 굉장히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NL은 뭔가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집단이 아닙니다. 개개인만 따지면 사회의 평균적인 도덕과 상식의 수준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착하고 이타적인 사람들이 모여 조직을 이루면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집단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조직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다수를 차지합니다. 주변의 진보언론과 지식인들은 침묵합니다. 때로는 NL의 후원을 받아 명예욕을 채우고자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진보를 떠나 정상적인 사회라면 작동해야 할 많은 것들이 정지합니다. NL이 괴물이라면 그 괴물의 모습들을 다 알면서도 옹호하거나 침묵하던 이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한 편으로는 주사, 비주사의 구분도 무의미합니다. 조직은 조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수령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게 대체 NL 운동에서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운동조직이란 지도이념, 생활, 학습, 투쟁 등 모든 것들이 유기체처럼 돌아가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평범한 활동가들도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조직의 비민주성, 상대적 약자에 대한 폭력적 태도, 내부의 부정 등에 언제 한 번 자기 반성이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언제 한 번이라도 당당하게 조직을 비판하고 대세를 거스른 적이 있습니까.


 


조직의 관성이란 무섭습니다. 설사 이제 집단적으로 주체사상을 버렸다 해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고민하지 않고, 위만 바라보며, 자신들의 문제에 무감각한 습성들은 쉽게 버려지지 않습니다. 메시아가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은 이제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금송아지를 가져다 놓게 마련입니다.


 


 


* 바람


이 글은 90년대 중후반의 이야기만 짚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나타나는 문제점들은 당시의 그것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한총련이었지만, 이제는 통진당이라는 것 뿐입니다. 냉정하게 이야기해, NL이 바라보는 통진당은 성인판 한총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시스템의 결정적 문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치집단이 공식 정치기구를 장악하는 점입니다.


 


십 수 년 전의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80년대 주사파 출신들도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정상적인 시민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90년대라고 과거에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공당에 진입하고, 국회에 들어간 이상 본인들의 정치성향을 솔직하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건 시민들에 대한 의무일 뿐만 아니라 당원을 비롯한 지지세력에 대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대학생들의 운동 참여를 염려하는 글도 아닙니다. 통진당에서 좋지 않은 모습들을 보여줬던 대학생들도 어쩌면 이 사회에서 소중한 존재들일 수 있습니다.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직접 참여를 모색하는 대학생들의 숫자는 더 많아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대학생들 하나하나가 처음부터 내가 누구와 함께 무슨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지 알아야 하고 다양한 선택지들 중 하나를 자유롭게 골라야 합니다. 물론 예전의 모든 운동가들 역시 종국에는 모두 자발적 선택이었지만, 경로의 제한이 있었던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부의 운동가들도 침묵의 카르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침묵이 선의일 수 있는 것은 동지에 대한 신뢰와 스스로의 변화가능성이 존재할 때뿐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의 침묵은 내부의 많은 문제들에 대한 동조한다는 의미 아닐까요. 그리고 선의의 침묵이 조직 내에 아무런 변화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은 증명이 되었습니다. 내부 비판도 없고, 심판의 위험도 없는데 대체 누가 누구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변화란 누가 가져다 주는 게 아닙니다.


 


 


* 국가보안법


위의 요구들에 대해 NL은 늘 국가보안법을 들먹이며 대답을 회피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정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은 늘 자신들이 사회주의자임을 떳떳하게 밝힙니다. 그런데 북한 정권과도 관련이 없고, 사회주의자도 아니라는 사람들이 대체 왜 국가보안법을 방패 삼아 정치집단의 의무를 회피하는 걸까요. 상식적인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식적이지 못한 것을 옹호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레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은 진보가 아닌 보수의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이제 폐기하는 게 맞습니다. 주체사상이나 김정은 찬양 등은 사상의 자유시장 체제로 끌어내 국민적 평가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체제경쟁은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좀 더 완성시킬 수 있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체제에 대해 좀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진보진영 내부에서 친북적인 세력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광화문 앞에서 인공기를 흔들며 김일성 찬양을 외쳤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가보안법을 방패 삼아 공식기구를 장악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렇기에 자주민보와 같은 사이트의 클릭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많은 이들이 친북세력들의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알게 됩니다.


 


한 편으로는 국가보안법의 존재가 진보진영의 자정을 힘들게 합니다. 북한 정권에 대한 찬양은 우리 사회의 금기지만,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은 진보진영의 금기입니다. 친북 세력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려 하면 '동지를 적들에게 팔아넘길 셈이냐'는 내부의 공격이 거셉니다. 당장 진보진영 전체가 들고 일어납니다. 어떻게든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이런 내부비판은 반드시 보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동안 친북세력들을 비판했던 진보인사들 중에 정치적으로 순탄했던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감수하고 비판하려던 사람들도 국가보안법 때문에 차마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나의 비판이나 폭로가 그들을 감옥에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서 NL 문제에 대해 논쟁을 하다 보면 가장 비열한 공격들이 나옵니다. “정말 주사파 문제가 있다면 국가보안법이 있으니 경찰에 신고하라”는 역공입니다. 그런 비판을 날리는 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내부비판자들이 결코 신고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말이죠. 그러면서 내부비판자들의 주장을 색깔론이자 악의적 음해로 몰아 붙입니다. 그런데 동료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과 그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내부비판자들 모두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자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정말 신고한다면 어떨까요. 그들이 박수를 칠까요. 그때는 ‘동지의 등에 칼을 박은 자’로 낙인 찍고 사회적 매장을 시도할 겁니다.


 


물론 국가보안법을 폐지한다고 NL 핵심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를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다른 핑계를 대겠죠. 그렇지만 국가보안법이 없어지면 내부비판자들을 억누르던 강력한 고리 하나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듯,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걸맞지 않고, 진보진영 내부마저 썩어들어가게 하는 국가보안법은 폐지하는 게 사회 전반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건강한 진보가 있어야 건강한 보수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보진영에서는 종북 딱지가 억울하다고만 하지 말고, 내부의 많은 문제점들을 시민들 앞에 투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진보진영 내부의 건강한 운동가들이 힘을 얻고 떳떳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도 그런 맥락에서 조심스레 내어놓는 글입니다.


 



 


 


Ma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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