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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9. 목요일

펜더


 


VII. 결단의 시간


 


 


1. 아직도 ‘울분록’을 보여주지 않았나?


 


길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지금까지 읽느라 고생이 많았다.

이제 조금만 더 읽으면 끝이 보인다.


 


무미건조하게 말하면 10층 이상 되는 아무 건물 옥상이나 올라가 떨어지면 되는 아주 간단한 결정을 위해 당신은 이 글을 읽고, 내가 말하는 대로 종이를 꺼내 당신의 인생을 하나씩 더듬어갔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일 수도 있고, 마음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 자살에 대한 두려움이 당신을 붙잡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흥미 위주의 단순한 접근일 수도 있다. 어떤 마음이든 당신은 이 글을 읽고, 팔꿈치에 혀를 대는 것처럼 내가 말한 방법을 따라 해봤을 것이다. 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 당신을 책망하진 않는다. 내가 말한 대로 했다면 분명 뭔가 변했거나, 어떤 울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도 당신의 팔자고 운명일 것이다. 이제 정리의 시간, 결단의 시간이다. 슬슬 끝을 향해 움직여보자. 이 글의 5장 마지막에서 당신은 두 가지 선택지를 확인했다.


 



 


첫째, 당신에게 ‘부당한 대우’를 대상에 대한 복수와 응징, 당신의 시위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든 관련 자료와 증거를 모아서 언론과 인터넷, 공공 기관에 터뜨리는 방법. 이는 죽음을 전제로 한 경우다.


둘째, 당신의 분노와 그 분노의 대상, 당신에게 가해진 ‘부당한 대우’를 확인한 ‘울분록’을 작성하고, 이걸 당신의 주변 혹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은 단체나 개인에게 보여주는 방법. 이는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하다.


 


당신은 그저 이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솔직히 선택이라고 할 것도 없다. 두 번째 선택을 하고, 그게 먹히지 않을 때 첫 번째 선택을 하면 되니까. ‘자살’은 언제 어느 때고 쓸 수 있는 카드 아닌가. 문제는 당신의 의지다. 물론 두렵고 힘들고 막막할 것이다. 이제까지 당신은 세상에 당신 혼자만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잠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보자.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한 원인을 더듬어 올라가보라.


 


‘이 세상에 혼자 떨어져 있고, 아무도 날 도와줄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한 ‘근거’가 있을 것이다. 십중팔구 당신 아니면 당신에게 고통과 고난을 안겨준 대상이 심어준 ‘망상’일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잘 생각해보라. 당신은 정말 혼자일까? 정말 혼자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까마득한 어린 날을 떠올려라. 아직 말도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시절. 뭔가 필요할 때 당신은 어떤 행동을 했나? 당신은 울었다. 세상을 향해 울었고, 그 결과 젖이든 기저귀든 뭔가를 얻어냈다. 그 이후를 보자. 용돈이 필요하면 부모님에게 용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나? 좀더 자라서 돈이 필요하면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지 않았나? 당신은 필요한 걸 얻기 위한 방법을 찾았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그걸 얻었다. 포기한 기억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나름의 합리화 과정이 있었다. 예컨대 그 물건 혹은 상황, 사람에 대한 단점을 찾거나, 다음 기회를 노려본다거나, 다른 대체재를 찾거나 자기 합리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죽음을 택하는 자기 합리화 과정을 거치라는 말이 아니다. 그 전 단계, 그러니까 합리화 이전의 의사소통을 했는지 묻는 것이다(이 글에서 도대체 몇 번을 물었는가). 왜 일을 어렵게 만드는가. 아주 쉽다. 울어라. 울고 나서 생각해보자. 의사를 표현하고, 그래도 안 되면 나머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물론 관성 때문에, 이제까지 당신이 느낀 상실감과 절망감 때문에 힘든 거 안다. 그러나 극복해야 한다. 다음은 1950년대 벌어진 일이다.


 


영국의 컨테이너 운반선 한 척이 화물을 양륙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항구에 닻을 내렸다. 한 선원이 짐을 다 부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컨테이너 안을 검사하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다른 선원이 컨테이너의 문을 닫고 말았다(선원이 갇힌 컨테이너는 냉동 컨테이너다). 갇힌 선원은 컨테이너 안에 있는 쇳조각으로 있는 힘껏 벽을 두드리기도 하고, 소리도 질러봤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선원은 절망했다. ‘내 인생은 끝났다. 조만간 냉동 컨테이너 안에서 얼어 죽을 거야.’


선원은 쇳조각으로 자신이 얼어 죽어가는 과정을 컨테이너 벽에 꼼꼼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날짜와 시간대별로 찬 공기에 동상이 걸린 피부가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몸이 어떤 식으로 마비되는지 자신의 몸 상태를 자세히 기록했다. 마침내 배가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하고, 선장은 냉동 컨테이너의 문을 열었다. 그의 눈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선원의 시체가 들어왔다. 뒤이어 컨테이너 벽에 적힌 선원의 일지를 확인했다.


선장은 온도계를 가져와 냉동 컨테이너 안의 온도를 재봤다. 영상 19도였다. 스코틀랜드에서 돌아오는 동안 이 냉동 컨테이너에는 화물이 싣지 않아 냉동장치를 꺼놓은 것이다. 그럼 굶어 죽은 것일까? 아니었다. 냉동 컨테이너 안에는 충분한 식료품이 있었다. 이 선원은 상상, 아니 망상만으로 얼어 죽은 것이다.


 


당신은 지금 냉동 컨테이너에 갇힌 선원과 같은 입장이 아닐까?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인데, 혼자만의 망상으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닐까? 당신 손에 있는 데스 노트를 펼쳐보라. 그리고 잘 생각해보라.


 


 


2. 죽음을 선택한 경우


 



 


여기까지 읽고 그 내용을 충실히 쫓아왔는데도 자살을 선택했다면, 그 신념과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당신만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내 이야기가 부족했을 수도 있고, 내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판단하기에 자살이 유일한 탈출구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혹은 우울증과 같은 질병 때문에 일방통행으로 자살을 생각할 수도 있다(자신이 우울증이라고 판단되면 즉시 병원에 가는 것이 좋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로 가볍게 앓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삶의 독약’이 돼 죽음으로 달려갈 수도 있다. 감기 정도로 죽는다는 게 너무 아깝지 않은가). 아니면 당신이 만든 울분록을 폭발시키기 위해서는 죽음이 전제돼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애초에 자살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지상에서 내가 이룬 모든 것을 지키는 방법은 죽음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인정한다. 자살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절대 빈곤과 신체적 고통이 있을 수 있고, 가족과 지인의 죽음 앞에서 절망할 수도 있다.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도 있고, 자존감이 한없이 무너진 상황일 수도 있다. 당사자가 아니면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고, 자살에 이른 감정과 생각을 확인할 수도 없다. 자살은 당사자만 알고 통제할 수 있는 문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신들의 ‘선택’이 과연 옳은지 검증하고, 후회가 남지 않도록 점검해주는 정도일 것이다. 자살은 어디까지나 당신 개인의 문제다. 물론 당신을 자살로 몰아간 ‘무언가’가 사회적인 문제거나 공동체 구성원과 관계가 됐다면, 남아 있는 우리는 그 문제나 공동체 구성원에게 위협이 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할 의무가 있다. 이 경우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공동체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묻겠다.


 


“당신을 자살로 몰아간 ‘무언가’가 당신 내부의 문제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문제인가?”


 


당신을 자살로 몰아간 ‘무언가’가 사회적인 문제라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길 바란다. 사회적인 문제라면 그 죽음에는 이 사회가 절반, 아니 절반 이상 책임을 진다. 당신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한, 이 사회는 당신을 돌보고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다. 아울러 당신에게도 의무가 있는데, ‘울어야’ 하는 의무다. 당신의 아픔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 이 사회가 당신의 고통을 알고, 그에 상응할 만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죽음으로 내 아픔을 말하겠다”고 주장한다면, 그 죽음을 통해 당신이 취하는 이득이 뭐냐고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이 사회를 위해 카나리아(유독가스에 민감한 카나리아는 광부들의 영원한 파트너다. 광산에 들어갈 때는 카나리아를 꼭 데려간다)가 되려는 것인가? 당신이 죽으려는 이유를 확인하고, 그런 이유로 죽은 이가 있는지 인터넷에 검색해보기 바란다. 그 이유가 여러 개 검색된다면 자살을 재검토하라. 카나리아는 많다. 너무 많아서 탈이다. 거기에 당신의 이름까지 추가할 이유가 있을까? 울어도 소용없다는 판단이 섰는가? 개인적인 상실감과 무력감 때문에 자살을 선택해야겠는가? 당신의 울분록을 터뜨리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뇌관이 필요한가? 마지막으로 묻겠다.


 


“당신의 결심은 확고부동하며, 타협의 여지가 없는가?”


 


당신의 의지와 결심을 존중한다. 이제 당신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3. 내 인생에 결코 없을 사치를 위한 경험


 


〈13인의 자객〉이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일본의 국민 배우 야쿠쇼 코지(役所?司)가 주연한 이 작품은 에도(江戶)시대 쇼군(將軍)의 동생이자 포악한 영주 ‘나리츠구’를 암살하기 위해 ‘신자에몬’(야쿠쇼 코지)을 중심으로 한 자객 13명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야기다. 생뚱맞게 갑자기 왜 일본 영화냐고? ‘사하라 헤이조’라는 낭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다.


 


13인 중 11번째로 신자에몬에게 합류한 낭인 사하라 헤이조는 선금 200료를 요구한다. 다른 무사들이 대의를 말할 때 그는 돈을 요구한 것이다. 신자에몬은 묻는다.


“돈은 어떻게 쓸 생각인가?”


“오랫동안 져온 빚과 친척들을 위한 120료, 나 때문에 고생하다 죽은 아내의 묘를 위한 30료, 그리고 나의 죽음을 위한 준비 20료.”


“남은 30료는?”


“내 인생에 결코 없을 사치를 위한 경험에 쓸 것입니다.”


 


[caption id="attachment_99120"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세상에 결코 없을 사치스러운 함대"][/caption]


 


이 자리에서 일본 봉건시대 무사의 사생관(死生觀)을 설파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사하라 헤이조가 말한 ‘내 인생에 결코 없을 사치를 위한 경험’은 커다란 울림으로 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경험의 축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경험 가운데 삶에 찌들었기에 감히 엄두도 못 내던 것들…… 아마 그건 ‘사치’란 의미의 소비 행위일 확률이 높다. 당신의 인생을 더듬어보라. 이제껏 ‘생계’ 때문에 구질구질하게 살아오지 않았나?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게, 나름 쓰면서 살았다 해도 변명일 뿐이다. 인간의 사치에는 한계가 없다. 쓰겠다고 작정하면 다 쓸데가 나오고, 누릴 수 있는 사치나 쾌락은 한정 없이 늘어날 것이다. 아니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지 그 이상을 당신 앞에 내놓는 것이 그쪽 세계다. 당신의 빈곤한 금전 감각으로 감히 측량할 수 없는 것이 사치라는 세계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힘들고 어려울 때가 바로 사치할 때다.”


어떤 만화에서 나온 대사인데, 이 말을 자주 하는 선배가 있다. 선배는 본인이 힘들거나 후배가 인생 문제로 힘들어할 때면 조용히 후배를 불러내 함께 드라이브를 한다. 야경이 멋있는 곳을 찾아 달리다가 돌아오는 길, 지갑에 있는 돈보다 10배 비싼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저녁이나 술을 사준다. 선배는 밥 먹는 내내 음식 칭찬과 함께 자신의 인생철학을 말해준다(동석한 후배의 고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인생에 바닥은 없어. 바닥은 내가 말한 곳이 바닥이야. 내가 ‘바닥이야’라고 선언하면, 거기가 바닥이지. 난 힘들 때마다 제일 좋은 음식점이나 레스토랑에 가서 제일 비싼 음식을 먹지. 왜? 이 맛을 기억하기 위해서야. 우리 몸은 정직하거든. 옷이나 물건은 내 눈에서 벗어나거나 좀 사용하면 익숙해지고 당연해지거든. 그런데 미각은 달라. 기억하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사치하면서 먹은 때의 맛을 떠올리고, 그걸 끊임없이 각인시키지. 우리 혀가 비교하고 김치찌개 대신 스테이크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거야. 그 감각을 되살리는 셈이지. 나는 지금 힘들고 어렵지만, 아직까지 사치를 부릴 여유가 있다. 지금 힘든 게 내 바닥이다. 이제 기어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언제고 이게 일상이 되는 날을 위해 오늘 내 바닥을 다지자. 오늘의 이 감각을 느끼기 위해 살아가자.”


 


어떤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말이다. 〈13인의 자객〉에서 사하라 헤이조가 한 말이 맞는지, 내 선배의 개똥철학이 맞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 둘은 ‘사치’해야 할 때를 알고 있다. 당신은 사치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 사치해야 할 때를 아는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일생에 딱 한 번 사치해야 할 때가 있다면 언제인가”라고 말이다. 십중팔구는 죽기 직전이라고 말할 것이다(인생 최대의 소비 행위인 결혼을 사치의 범주에 넣기는 무리가 있다. 결혼은 틀에 박힌 관성이 아닌가). 이유는 천차만별이지만, 그 행위의 목적은 비슷할 것이다.


 


“당신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를 경험해보고 가라!”


 


빈곤한 금전 감각으로, 당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마라. 지금 서점으로 달려가서 음식 잡지, 패션 잡지, 남성지와 여성지 등을 사라. 설마 인생 최고의 사치 앞에서 책값을 아끼진 않겠지? 그리고 당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를 살짝 엿보고, 그곳을 찾아가 사치를 즐겨라. 이때 기준이 되는 것은 당신의 ‘쾌락’을 중심으로 사치를 즐겨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3대 욕망이 뭘까? 식욕, 성욕, 수면욕이다. 본능에 충실한 쾌락을 추구하라! 머리는 잊더라도 당신 몸에는 각인될 것이다.


 


“앞에서 당신이 말한 사흘 안에 해치울 수 있는 행복과 무슨 차이가 있나?”


 


이런 질문 나올 거 같은데, 다르다. 사흘 안에 해치울 수 있는 행복의 목록을 살펴보라. 당신이라는 사람의 세계관 안쪽의 것들이다. 구체적인 듯하면서도 막연한, 하면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들이다. 어디로 여행하면 좋을 것 같고, 뭘 먹으면 좋을 것 같고, 어떤 행위를 하면 좋을 것 같다는 느낌으로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쾌락은 다르다. 당신의 세계관을 완전히 부숴버린 뒤에 찾아오는 것, 아니 당신의 가치관을 뛰어넘어 저 먼 곳에 있는 세상을 잠깐 엿보고 오는 것이 쾌락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쾌락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오라. 인간으로 태어나 느낄 수 있는 육체적 쾌락의 끝(당신의 지금 위치와 경제 수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을 느껴보라. 그 안에서 뭔가를 깨닫고, 인생을 반추해보겠다는 시답잖은 생각은 버려라. 그냥 순수한 쾌락, 본능에 충실한 얼마간을 보내면 된다. 태어났으면 이 세상이 보여주는 다양한 빛깔을 다 느껴보고 가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


 


묻겠다. 당신은 조금 뒤 죽을 사람이다. 왜 돈 걱정을 하나? 다시 말하지만 죽음은 인생사의 모든 문제를 단순화하는 마력이 있다. 당신이 끌어올 수 있는 모든 돈을 끌어와라.


 


“그럼 그 뒤는 어떻게 하나? 난 그걸 갚을 능력도 없는데…….”


 


당신 조금 전만 해도 죽으려고 하던 사람 아닌가. 죽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이승의 문제에 연연하면 구질구질하다. 화려하게 가라! 살아 있는 동안에는 당신이 주인공으로 살 수 없지만, 죽는 그 순간과 그 순간이 가기까지 한시적인 얼마간은 당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주인공으로서 얼마간을 즐겨라.


 


 


4. 정리


 


쾌락은 본능이다. 인간의 뇌는 크게 전두엽과 편도체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다. 편도체는 본능적 욕구를 담당하는 곳이고, 전두엽은 이성을 말하는 곳이다. 방금 전까지 당신은 편도체를 달래줬다. 당신의 편도체가 느껴보지 못한 쾌락을 극한까지 추구했다. 남은 건 전두엽, 이성을 달래줄 시간이다. 이성을 달래줄 첫 번째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라.


 


“내가 죽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당신이 죽는다고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회사 수익의 3분의 1을 수주하는 영업부의 에이스가 회사를 빠져나간다고 해서 그 회사가 흔들릴까? 아니다. 조직원 한 명이 빠져나간다고 흔들릴 회사라면 애초에 거기까지 가지 못한다. 다 살 방도가 있고, 대체할 방법이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빠져나간 사람을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그 몫을 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 개인과 주변 사람들을 기준으로 바라봤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죽음은 당신이라는 ‘우주’를 기준으로 보면 ‘종말’이다. 당신의 세상이 종말을 구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종말이 떠나는 당신과 남아 있는 자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남기지 않도록 잘 끝내야 한다는 점이다. 불편한 감정? 당신의 기억과 생각을 잘 더듬어보라.


 


“죽기 전에 내 인생에서 정리해야 할 것이 있을까?”


 


‘정리’에는 수많은 사연과 당신이 사는 동안 얽혀 있던 인간관계 혹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걸려 있을 것이다. 하나씩 따져보면 이런 것들이 무수히 나오지만, 정리해보면 의외로 쉬울 수 있다.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보자.


 



첫째, 당신의 인생을 정리할 부분.


둘째, 당신의 현실을 정리할 부분.


셋째, 남아 있는 사람의 기억을 정리할 부분.



 


하나씩 설명해볼까? 데스 노트를 꺼내고, 종이 석 장을 준비하라.


 


[caption id="attachment_99121"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이미지 출처 : http://sketchpan.com/?ssai=392215"][/caption]


 


첫째, ‘인생을 정리할 부분’이다. 첫 번째 종이에 이 제목을 써라. 인생을 정리할 부분은 당신이 살아오면서 아쉬웠던 부분과 떠난 뒤 후회가 남을 부분을 정리하는 것이다.


 



- 그때 그 애한테 고백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됐을까?


- 그때 그 녀석한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 용서를 구했어야 한다. 타이밍이 어긋나서 말도 제대로 못 했는데…….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실수와 아쉬움을 확인한다. 용기가 없었거나, 상황이 허락지 않았거나, 뒤늦게 깨달았거나, 자존심이 허락지 않은 경우 등 수많은 상황이 교차한다. 졸업 앨범을 꺼내도 좋고, 기억에 의지해도 좋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은밀한 이야기를 적어라. 용기가 필요한 부분이라면 용기를 내라. 죽기로 결심한 상황이 아닌가. 현실을 바라보라. 용기를 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라. 용서를 구하고 싶은 사람을 찾아라. 마음을 구하고 싶은 이를 찾아라. 기억 속에 괴로움으로 남아 있는 사람을 찾는 것도 방법이다. 가서 ‘소심한 복수’를 하겠다고 마음먹어도 된다. 인생을 정리할 부분의 핵심은 ‘당신 마음에 남아 있는 응어리를 지워가는 작업’이다. 쭉 적어가다 보면 당신의 인생이 보이고, 마음속에 숨겨진 응어리도 보일 것이다. 이걸 풀어보자는 것이다.


 


“그걸 굳이 들춰내서 어쩌자고? 어차피 난 죽을 게 아닌가.”


 


정말 그런가? 달리 생각해보자. 당신은 어차피 죽을 몸이다. 당신에게 주어진 ‘한시적인 초인’의 힘을 끌어내 살아 있는 동안 한이 된, 풀지 못한 소원 같은 일을 정리하는 것이 나쁜 일인가? 당신이 떠나는 길의 마지막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지상에 뿌려놓은 당신의 한 가운데 절반은 회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무슨 수로 그 사람들을 만난단 말인가? 연락이 끊긴 지 오랜데…….”


 


이것도 핑계일 뿐이다. 당신은 한시적 초인의 상태다. 아니 초인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다. 케빈 베이컨(Kevin Bacon)의 ‘6단계 법칙(small world theory)’이란 게 있다. 지구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6단계만 거치면 당신과 연결될 수 있다. 세상은 그만큼 좁다. 남은 건 당신의 의지다. 의지만 있으면 당신은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같은 국적, 같은 땅에 사는 경우 1~2단계만 거치면 그 사람의 연락처를 확보할 수 있다. 부끄러운가? 부끄러우면 좀 어떤가. 당신은 조금 있다 죽을 목숨이 아닌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내뱉어라.


 


둘째, ‘현실을 정리할 부분’은 간단하다. 당신이 생활하던 이 공간에서 빠져나갔을 때 벌어질 일을 떠올려라.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이(가) 죽었으니 유품을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 △△이(가) 다니던 학교에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지?


- 통장 문제는 어떻게 정리하지?


- 내가 죽고 나면 트위터 계정, 페이스북, 블로그, 미니홈피는 어떻게 되지? (이 경우는 언론에서도 많이 소개됐다. 떠난 사람을 겨우 잊으려고 하는데, 인터넷에서 그가 남긴 글을 확인하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잘 판단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기억할까? 잘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부끄러운 부분, 숨기고 싶은 부분, 떠난 뒤에 벌어질 여러 가지 혼란 등 당신이 살아 있을 때 정리가 가능한 부분은 정리하라! 특히 현실에서 당신이 감추고 싶은 부분은 깔끔하게 정리하고 떠나는 것이 좋다.


 


“어차피 죽을 목숨, 부끄러우면 어떻고 그렇지 않으면 어떠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텐데, 이 글을 읽은 이상 당신은 계속 이 생각이 날 것이다. 죽는 마당에 남아 있는 이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은가? 아울러 금융 거래 기록처럼 복잡한 행정절차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미리 정리하는 것이 남아 있는 이들을 위해 좋다. 당신이 남기고 싶은 물건이나 기억과 그렇지 않은 걸 분류해서 정리하자. 그걸 하나씩 적은 뒤 차근차근 정리하면 된다(취향에 따라 다 남기고 싶다면 그 또한 당신의 선택이다).


 


※가족이나 지인에게 뭔가 남겨주고 싶다면, 영화 〈수상한 고객들〉을 추천한다. 생명보험에 가입하고 2년이 지났을 때 자살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자세히 나온다. 참고하라.


 


셋째, ‘남아 있는 사람의 기억을 정리’할 부분이다. 묻고 싶다. “당신은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인가?”


 


지금까지 작성한 데스 노트를 꺼내 한 장씩 넘겨보라. 당신 인생에서 이 정도로 자신과 대화해본 적은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당신이 진심으로 원한 게 무엇이고, 당신이 추구하는 행복이 무엇이며,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고통까지 일목요연하게 인생을 정리했다(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당신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얼추 그려질 것이다. 그 이미지를 데스 노트에 적어라.


 


여기까지 온 사람이라면 자신을 극단적으로 폄훼하고, 자존감이 무너진 상태일 수도 있는데, 자학하는 내용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인생의 당신이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욕해도 당신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객관화해보기 바란다. 키와 몸무게, 생김새 등 외형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고, 성격도 있을 것이다. 인간관계나 사회적인 성취, 이제까지 보여준 결과, 학력, 지적 수준 등을 정리한 사회적인 모습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걸 적어서 자신을 평가한 이미지를 만들어라. 완성됐는가?


 


혹시 “스스로 평가해보니 난 쓰레기였어” 이따위 결론이 나온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작성을 잘못했다. 어떤 인간이라도 잘하는 것 한 가지는 있고, 살아오면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경험이 한 가지씩은 있기 때문이다. 없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경험을 할 정도로 오래 살지 않았거나,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했거나, 그 장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있고, 그 이유에 걸맞은 능력을 타고났다(반대의 설명도 가능하다.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이유를 확인하기도 한다). 아니라고 판단되면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라. 분명 있다. 찾아내라! 그걸 찾아내고, 자신의 모습을 확실하게 그렸다면 잘 기억하라.


 


종이 한 장을 더 꺼내서 맨 위에 ‘내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 10명’이라고 적어라. 내일 내가 죽는다면 내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 10명을 적어라. 당장 떠오르는 인물 순서로 정리해보자. 당연히 가족은 참석할 것이다. 그리고 생전에 당신이 친하게 지낸 지인들이 있을 것이다(없다고 하지 마라. 습자지보다 얇은 인맥이라도 찾아보면 다 나온다). 10명에게 자신에 대해 물어보라(정말 사람이 없다면 최대한 많이 찾아서 물어보라).


 



- 당신이 보기엔 난 어떤 사람인가?


- 당신에게 나는 어떤 의미인가?


- 내가 당신을 서운하게 한 기억이 있는가?



 


장난으로 받아들인다면 다시 진지하게 말해보라. “딱 5분이야. 너의 24시간 중에서 딱 5분만 날 생각해줘.”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고(이 경우 제대로 된 답변이 어려울 수도 있다), 문자메시지나 메일로 답변을 받아도 좋다. 당신의 모습은 어떻게 보이고, 당신이 상대방에게 어떤 의미고, 당신이 상대방을 서운하게 만든 기억은 어떤 것이 있는지 들어보라(이런 경험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진지하게 접근하라). 그리고 그걸 출력해서 데스 노트에 넣어라. 그런 다음 데스 노트에 있는 당신의 기준과 비교해보라.


 


당신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어떤가? 당신의 생각과 차이가 많은가? 차이가 있다면 좋은 쪽인가, 나쁜 쪽인가? 두 가지 의견이 다 나왔을 수도 있다. 이런 점은 고치길 바라지만, 이런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는 의견이 있을 수도 있고, 전혀 의외의 의견이 나왔을 수도 있다. 당신을 옆에서 가장 많이 지켜본 이들의 평가다. 당신의 생각과 차이가 있어도 그게 당신의 모습이다. 당신은 선의로 한 일이지만, 타인은 다르게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서는 당신이 더 다가가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설명’해야 한다.


 


이를 통해 당신은 두 가지 기회를 얻는다.


 


첫째, 당신을 둘러싼 세계가 당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당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죽기 전에 당신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다. 당신이 본 자신의 모습과 타인이 본 당신의 모습, 그 중간에 당신이 있다. 현재 살아가는 당신의 본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이 모습을 바꾸고 싶다면, 당신 인생의 영점을 조정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둘째, 당신을 옆에서 지켜본 이들이 오해했거나 당신에게 불편한 감정이 있었다면, 수정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타인의 기억을 정리하고 싶은가? 우리에게는 영화 〈맨 인 블랙(Men In Black)〉에 나오는 ‘기억 소거 장치’가 없다. 그러나 기억 소거 장치가 없어도 타인의 기억을 지우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당신을 설명하고, 본모습을 보여주는 노력을 하면 된다. 당신이 ‘기준’으로 삼은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면 된다. 타인의 기억 속에 지금 당신의 모습을 덧씌우면 되는 것이다.


 


싫다고? 귀찮다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다 핑계일 뿐이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 지금 당신은 평생 이어질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현재의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방치한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당신은 남아 있는 이들에게 충분히 아름답게 기억될 만한 ‘추억’이나 ‘경험’을 건네줄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라. 판단은 당신 몫이다.


 


이렇게 당신 인생에 대한 ‘정리’가 끝났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거의 마지막이다. 조금만 힘내라.


 


 


5. 유서


 


우리가 말없이 눈감을 때


세계는 문자 없는 한 장의 유서가 된다.


―시마오카 아카쓰키(嶋岡晨)의 시 ‘유서’ 중


 


드디어 유서까지 왔다. 징글징글하다. 아직 포기하지 않고 죽음을 부여잡고 있는 당신들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유서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동서고금의 멋진 유서를 골라서 보여줄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접었다. 진지하게 죽음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절망의 밑바닥에 이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마오카 아카쓰키의 시는 그렇게 해서 당신들 앞에 나온 것이다. 이제 당신들이 유서를 써야 할 시간이다.


 


[caption id="attachment_99123" align="aligncenter" width="263" caption="문수스님의 유서"][/caption]


 


자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꽃! 인생을 결산하는 영수증, 바로 유서다. 인간이 지상에 남기는 마지막 의사 표현이 유서다. 살아 있을 때 하는 마지막 말이라고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그리 만만하지 않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모두 철학자가 된다고 하지 않는가. 죽음을 초월했다지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수록 머릿속은 상념으로 가득 차고, 생각지도 못한 형이상학적인 것들이 뇌를 파고들 것이다. 게다가 당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닌가.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아마 처음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암담할 것이다.


 


‘어떻게 써야 하지?’ 종이를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 심정 이해한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유서에는 형식이 없다. 좋은 예, 나쁜 예라고 말할 뭔가가 없다. 당신이 억만장자라 사후 유산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면(이 경우에도 변호사 부르면 알아서 작성하고 공증까지 해준다) 손 가는 대로 쓰면 된다. 망설여진다고? 그럼 유서에 들어갈 내용을 정리해보자. 어떤 순서로 써 내려갈지 감이 올 것이다.


 


첫째, ‘시위성’이다. 이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당신의 ‘데스 노트’ 한 권이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주고도 남는다. 당신에게는 ‘울분록’도 있지 않은가. 이걸 터뜨리면 당신이 말하고 싶은 모든 걸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당신은 지금까지 이 글을 읽으면서 인생을 정리하지 않았는가. 지상에 남은 아쉬움도, 말하지 못한 억울함도 없을 것이다. 유서 옆에 당신의 데스 노트를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아쉬움이 남는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라. 완벽해질 때까지).


 


둘째, ‘남아 있는 이들에 대한 인사 혹은 당부’다. 가족과 친구, 지인 등 지상에 살면서 인연을 맺은 이들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다. 그동안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하면 된다. 당신은 이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가까운 가족이나 지인의 자살은 주변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충격을 전해준다. 가족 가운데 자살자가 있으면 자살 가능성이 4.2배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언급했다. 당신의 죽음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지금 죄를 짓는 것이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고, 그 마음을 담아 남아 있는 이들에게 사죄의 말을 전해야 한다. 남아 있는 이들은 당신을 사랑하고, 아끼고, 위로한 죄밖에 없다. 영원히 당신 편에 서서 당신을 이해하려고 한 이들의 마음을 당신은 배신한 것이다. 용서를 빌어야 한다.


 


“내 심정을 이해해줘. 오죽하면 죽겠어?” 이렇게 항변할 수도 있을 텐데, 당신 옆에는 지금도 평생 당신 편이 되어줄 사람들이 서 있고, 앞으로도 서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고통을 설명한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있다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슬프지만, 최대한 당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이 경우라도 남아 있는 이들의 가슴에는 아픔이 있다). 그런데 아무런 말없이 죽는다면 남아 있는 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사과하기 전에 이들에게 제대로 울었는지 고민해보라.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늦은 감이 있지만, 남아 있는 이들에게 당신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 마음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전하라(아직까지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셋째, ‘지나온 인생에 대한 소회’다. 이건 당신을 위한 유서라 생각하고 가급적 따로 작성하기를 권한다. 죽음을 앞두면 어떤 사람이라도 철학자가 된다. 삶의 대한 진지한 고찰은 아니어도 자신의 삶에는 통달한다. 죽음 앞에서 당신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해답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만의 해답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 인생에서는 당신이 왕이다. 당신의 결론이 곧 당신의 운명을 결정짓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감정이 고양된 당신은 철학적인 상념과 지나온 인생에 대한 회한이 밀려올 것이다. 이 경우 하고 싶은 이야기,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담담히 쓰면 된다. 유서는 형식이나 틀이 없고,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써서 품안에 넣으면 그만이다. 죽기 전에 인생을 정리한다는 마음으로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모두 토해낸다고 생각하라.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냥 당신이 지금 하고픈 이야기를 써라.


 


유서에 관한 이야기도 끝났다. 더는 당신에게 충고할 이야기가 없다. 남은 건 당신의 선택뿐이다. 아직도 울분록을 쥐고 있다면 이를 터뜨리고 같이 산화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조용히 당신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생을 마감하면 된다. 자살 카페 회원들과 옹기종기 모텔에 모여 자살하는 바보짓은 하지 말기 바란다. 타인의 용기에 묻어가는 바보 같은 자살, 치졸한 자살은 하지 말자. 기왕에 죽을 거라면 화려하고 멋있게 죽어라. 타인에 기댄 자살이 아니라 당당하게 당신의 의지로 죽을 곳을 선택하라! 왜 6성급 호텔에서는 죽지 못하는가. 당신의 인생은 마지막까지 구질구질해야 하는가? 그럴 바에는 악착같이 살아라. 6성급 호텔 스위트룸에 앉아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자살할 만한 경제적 부와 자존감을 쟁취한 뒤에 죽어라! 옹기종기 모여서 연탄불이나 때는 구질구질한 최후가 당신이 꿈꾸는 인생의 종착지인가? (미안하다, 흥분했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당신의 선택에 관련된 문제다. 나는 개입할 수 없다. 당신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그 선택에 후회가 묻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내게 자살하는 방법을 물어본다면 글쎄……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까?


 


사람이 목숨을 끊는 방법은 엄청나게 많다. 당장 숨을 쉬지 못해도, 피를 많이 흘려도, 뇌와 심장이 그 기능을 멈춰도 우리 몸은 생명을 잃는다. 당신이 원하는 답은 최대한 ‘덜’ 고통스러우며, 순간적으로 죽는 방법인데,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한다. 왜? 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죽으려고 노력도 했고, 그러기 위해 여러 방법론을 고민한 적은 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날 만족시키지 못했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또 다른 내가 ‘소생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자살하는 방법은 각자 알아서 판단하고 선택하기 바란다.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 건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이 방법을 쓰면 나중에 살아날지도 몰라.”


 


이런 방법에 손이 간다면 자살을 다시 생각해보라. 당신은 아직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소생 가능성이 높은 자살 방법은 실패한 뒤 후유증이 더 크다. 당신의 심신은 자살 시도 이전보다 황폐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란 말이 아니다. 마음이 말하는 걸 잘 들어보라는 뜻이다. 그 망설임이 어떤 의미인지 잘 생각해보라.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까지다. 뭔가 아쉽거나 시간이 남는다면, 이후에 털어놓는 내 이야기를 잠깐 들어줬으면 좋겠다. 푸념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당신들보다 먼저 자살을 고민한 선배의 체험담이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아니면 죽기 전에 여흥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당신들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그뿐이다.


 


 










Tip 유언의 종류


 


《프랑스의 윤리 통계(Essaide statistiques morales de la France)》라는 책에서 자살자의 최후 메시지를 분석했다. 빈도가 높은 순서로 확인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람들과 인생에 대한 불만.

2. 부모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작별의 말.

3. 장례에 대한 지시.

4. 신의 자비에 대한 믿음.

5. 내세에 대한 신앙.

6.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에 대한 유감의 말.

7. 죄를 속죄하고 싶다는 생각.

8. 자신을 그리워해주기 바라는 마음.

9. 자살에 이르기까지 괴로움에 대한 내용.

10. 자살을 알리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바람.

11. 정신적 고민.

12. 자식에게 자신이 죽은 방법을 가르쳐주고 싶지 않다는 바람.

13. 유품(초상, 사진, 반지)을 모두 묻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14. 용기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15. 머리카락을 한 움큼 남기고 싶다는 바람.

16. 사체 검안소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에 대한 두려움.

17. 성직자에 대한 모멸.

18.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


 


프랑스의 사례라 한국에 바로 대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편적인 인간이 마지막 순간에 어떤 말을 남기는지 그 단면을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펜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