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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14. 화요일

아외로워


 


우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팍팍해진다. 월급쟁이 짓이 힘들어 진 것은 물론이요, 월급쟁이가 되는 것 자체도 쉽지 않다. 재벌과 재벌짓 하는 떨거지들의 전횡속에 자기 사업을 해서 살아남기는 월급쟁이가 되기보다도 어렵다. 도전의 기회가 많기라도 하면 모를까, 한번 망하면 영원히 망해서 ‘재기(再起)’ 란 명절날 발로 차며 노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지경이다. 이제 부동산 시장에도 망조가 들고 있으니 제 2의 IMF도 멀지 않았나보다.


 


어쩌다 이 나라가 이모냥이 됐을까. 우리가 사는 삶이란 본디 이렇게 힘들고 진빠지는 것이란 말인가. 세상이란 원래 이렇게 점진적으로 안 좋은 곳이 되어가는 것이란 말인가. 이명박 정부가 출범 이후 국정운영에 대한 비판이 있을 때마다 했던 말처럼, 참여정부 시절부터 이랬고, 세계적인 추세 역시 이런 것인가?


 


이러한 거국적이고 홍익인간스러운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영상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가카의 용안이다.


 


 


또다시 가카


 


아마도 가카께옵서 서울시장을 하고 계시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 가카께서 오시어 친히 연설을 하시었드랬다. 일종의 성공담을 통한 비전 나누기 뭐 그런 것이었다. 나는 안타깝게도 그 분의 음성을 라이브로 듣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 하였고, 한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가카의 복음 녹화한 것을 틀어주시어 읍(揖)하고 감상 하였다.


 


가카의 말씀은 주로 “내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봤는데...” 라는 내용이었다. 각각의 ‘해봤는데’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여서, ‘내가 짱 잘났어’ 라는, 대학에서 학생들 앉혀놓고 왜 지 자랑만 하고 가는지 이해 할 수 없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었다.


 


[caption id="attachment_99912" align="aligncenter" width="364" caption="가카가 BBK를 언급한 광운대 특강 동영상 화면. 아쉽게도 우리 학교에서는 BBK를 언급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caption]


 


하도 옛날 일이라 아주 자세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대체로 유사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가카 이야기의 서사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간단히 적어보겠다. 그중 하나는 지하철 파업꾼들과 영웅적으로 싸우신 무용담이고, 또 하나는 청계천 떼쟁이 상인들을 물리치고 청계천 대운하 사업의 위업을 이룬 무용담이었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지하철 에피소드의 경우, 지하철 노조가 파업을 했다. 왜 파업을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으신다. 큰 그림을 보는 가카께서는 그따위 사소한 문제는 관심도 없으신 듯 했다. 어쨌든 무도한 파업꾼들이 일을 팽개친다.(나쁜 놈 등장) 그러자 어리석은 서울시 공무원들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멍청한 우리편 등장) 가카께서 어리석은 서울시 공무원들을 꾸짖으며 대책을 내놓으신다. 그 대책이란, 서울시 공무원을 지하철 운행에 투입하는 것이다.(가카의 불도저식 해결책 등장) 그러자 처음에는 지하철 운행 경험이 없는 공무원들이 지하철 운행에 버벅거리지만 마침내 서울 메트로 직원을 능가하는 실력을 순식간에 갖추어 파업꾼 빨갱이들을 현장에 복귀시킨다.(나쁜 놈에 승리) 서울시 공무원들도 만족한다.


 


이 이야기의 백미는, 처음 공무원들이 지하철에 투입되자 시민들이 지하철이 정확한 위치에 서지 않는다고 불평하였으나, 가카께서는 본인의 계획을 밀어붙여 결국 시민들이 만족하더라는 시퀀스다. 즉 ‘늬들이 안 좋다고 하지만 내가 말한대로 밀어붙이면 결국 다 좋아한다.’ 라는 서사구조가 보인다.


 


청계천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청계천 수로를 뚫으려는 가카의 신성한 책무를 방해하는 한 무리의 협잡꾼들이 나타나니, 그들의 이름은 바로 청계천 상가 상인들이었다.(나쁜 놈 등장) 이 극악무도한 무리가 불법, 폭력 시위를 하자 서울시 공무원들과 건설사 직원들은 허둥지둥 했다.(멍청한 우리편 등장) 청계천 상인들은 공사를 하면 먼지가 날리고 소음이 나서 장사가 안될 거라며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식하게 데모를 해댔다. 가카께서는 이 상인들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하며 먼지가 나지 않고 소음도 적은 신공법으로 공사를 강행한다.(가카의 불도저식 해결책 등장) 그러자 할 말이 없어진 청계천 상인들은 조용해 졌다.(나쁜 놈에 승리)


 


물론 청계천 상인들이 반발했던 진짜 이유는 소음과 먼지가 아니라 상권이 죽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 상인들의 우려는 사실이 됐고, 가든파이브까지 돈 내고 쫓겨가 사실상 망해버린 상인들은 서울시로부터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내가 지금 사실관계를 파헤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일단 접어두자.


 


[caption id="attachment_99916" align="aligncenter" width="370" caption="출처 : http://emptydream.tistory.com/2923"][/caption]


 


중요한 것은 청계천 에피소드에서도 가카의 주요한 서사도구가 반복해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즉, 앙탈을 부리며 가카에게 반대하던 무지랭이들이, 가카의 불도저식 밀어붙이기에 만족, 닥치고 잠잠해진다는 줄거리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늬들이 안 좋다고 하지만 내가 말한대로 밀어붙이면 결국 다 좋아한다’ 시퀀스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에피소드들도 결국 다 비슷한 이야기였다.


 


가카의 이야기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공무원과 실무자들은 멍청하고 우유부단한 것으로 그려지며, 그딴거 상관 없이 일단 밀어붙여서 만인의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한 사람이(즉 가카가) 실은 모든 이해관계자를 만족시키고 있다. 처음에 반항하던 자들은 하나같이 만족하여 나긋나긋해진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런 일련의 서사구조가 강간범들이 피해자들을 대하는 방식과 무척이나 닮아있다고 느꼈다. ‘체포왕’ 이라는 영화에서 연쇄강간범이 강간피해자들에게 입버릇 처럼 하는 말도 ‘왜 그래, 너도 좋았잖아’ 인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카가 강간범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내가 가카에게 성범죄 사실이 없음을 입증 할 수는 없지만, 그 반대의 능력도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일단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르는 것이다.


 


 


여자들이 불쌍하다


 


나는 ‘내숭’을 싫어한다. 오해하면 안된다. ‘내숭 떠는 여자’ 가 아니라 ‘내숭’ 이라는 관념이 싫다. ‘내숭’ 이라는 단어에 대한 홍모씨(경기도 의정부시 거주)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소통에 있어서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하나 고의 내지는 미필에 의해 드러나고야 마는 뻔한 은폐’



 


즉 내숭이란 기본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며, 일반적으로 기만의 주체는 여성, 기만의 상대는 남성이다. 기만은 기만이지만, 싫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좋으면서 싫다고 얘기하는 것, 관심 있으면서 없는 척 하는 것이 내숭이다. 글쎄. 뭐 그럴 수 있다. 나도 좋은 거 싫다고 말 할 때 있고, 싫은 거 좋다고 말 할 때도 있으니까. 인간으로 태어나 어떻게 맨날 내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며 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좋으면서 싫다고 말하는 괜한 거짓말’ 이 여성의 정형화된 행동패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란 자고로 행동을 지배하는 법이다. ‘내숭’ 이라는 말이 존재함으로써 남자는 여성의 No가 사실은 Yes가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아주 속 편하게 여자의 No는 Yes라고 믿어버리는 남자들도 많다. 여자의 No를 No라고 받아들이는 남자를 숙맥으로 보는 태도는 매우 일반적이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사회적으로, 물리적으로 약자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상대적 강자의 입장에서 상대적 약자의 좋고 싫음을 파악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자들이 말하는 No는 기본적으로 의심받는다. 혹은 의심받는 수준을 넘어서 애초에 거짓 취급을 당한다.


 


나이 어린 남자들은 연장자 남자들로부터 여성을 대하는 위험천만한 원칙들을 전수받는다. ‘일단 덮쳐라’ 에서 시작하는 이런 가르침들은, 물론 모든 경우에 그렇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가카가 성 범죄자가 아니라고 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원리로) 여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범죄자가 될 수 있는 위험성도 매우 높다. 물론 이러한 잠재적 위험은 이 여자와 얻을 수 있는 잠재적 쾌락에 의해 합리화 된다.


 


그렇다면 남성들이 ‘여자들은 좋으면서 괜히 그런다’ 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여자들의 어떤 면이 남자들에게 저런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일까. 물론 좋으면서 싫다고 말하는 여자도 존재할 것이고, 싫다는 것을 억지로 하는 남자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변태 여자도 존재할 수 있으나, 그 수가 ‘내숭’ 이라는 일반적 원칙을 도출시킬 만큼 많은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보기에는 다음과 같다.


 


남자 입장에서야 No를 No로 받아들일지, Yes로 받아들일지 고민하는 것 뿐이지만, No를 No라고 했을 뿐인 여자 입장에서는 보다 복잡하다. 우선 자신이 심각한 범죄의 피해자가 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인간이라는 게 원래 사랑이 떠나가도 가슴에 멍이 들어도 밥만 잘 먹고 똥도 잘 싸는 그런 존재다. 고통스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내 상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는 법이다. 흔히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엄청난 고통과 전투력 상승이 동반되리라 생각하지만, 실은 당황스럽고 창피하다. 어떻게든 사태를 확산시키지 않고 수습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데이트강간 피해자의 상당수는 ‘저 남자가 날 이만큼 사랑하는 거겠지’ 라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학교 선배, 아는 오빠, 직장 상사인 저 사람을 경찰에 신고하고, 자기가 어떻게 당했는지 시시콜콜 설명하고, 소문이 퍼지고, 내 삶이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자는 선택을 한다. 나를 비참한 성범죄 피해자라고 생각하거나, 철 없는 남자의 과격한 사랑을 받는 나름대로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한다.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더 훌륭한 방어기제임은 굳이 설명 할 필요도 없다.


 


물론 남자는 여자의 이러한 심경 변화를 ‘이 여자가 좋으면서 싫다고 했구만’ 이라고 이해해 버린다. 결국 좋아하고 나긋나긋해 질 거면서 뭐하러 처음엔 싫다고 했는가 의아해 하는 것이다. 결국 ‘여자들이란’ 으로 시작되는 지 맘대로의 생각을 하게 되고, 이 생각은 더 어린 남성들에게 ‘일단 덮쳐’ 로 시작되는 도시전설스러운 구전으로 전해진다.


 


남자에게 ‘내숭’ 은 자신이 저지른(어쩌면 얼떨결에 저지른) 엄청난 사태를 받아들이는 방어기제로 쓰이기도 하는 것 같다. 저 여자는 싫다고 했고, 나는 이러저러한 짓을 했고, 저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강간범이 되는 건데... 아니야. 저 여자가 처음에 내숭을 떨었겠지. 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남자들은 ‘내숭’ 원리에 의해 행동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행했던 끔찍한 행위를 ‘내숭’ 으로 합리화 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범죄행위의 증거, 즉 고통받는 피해자가 사실은 진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좋지만 고통스러운 척 ‘내숭’ 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쨌든,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거다. 여자의 No는 남성에게 ‘내숭’ 으로 취급되어 Yes로 해석되기 쉬우며, 이로 인해 여성을 상대로한 범죄지만 범죄가 아닌 것 처럼 여겨지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여자는 약자임과 동시에 생활인이므로, 이런 사건에 처했을 때 의외로 피해자 행세를 하지 못 한다. 이런 경험은 남자 입장에서 누적되고 ‘여자의 No가 사실 Yes’라는 최초 가설을 뒷받침하게 만든다.


 


 


그리고 또다시 가카


 


위에서 말한 것들이 모든 상황에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내숭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으로 정립된 사건에 대한 일반론에 불과하다.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은 그만의 파란만장한 사연과 변수로 인해 사실상 예측이나 일반화가 불가능하다. 가카가 성범죄자가 아니라고 단언 할 수 만은 없는 것과 같은 원리다.


 


또한 여성과 내숭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이 글이 페미니즘 비스무레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연어가 강으로 돌아오듯, 개가 똥을 먹듯, 또다시 가카로 회귀한다.


 


[caption id="attachment_99914"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사진 : 내셔널지오그래픽"][/caption]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범죄행위를 하는 자의 자기 합리화(결국 피해자도 자신의 범죄를 좋아하게 된다는)와 피해자의 방어기제(문제 크게 만들지 말고 조용히 덮자, 혹은 저 나쁜놈이 사실 날 좋아해서 저러는 걸꺼야)에 관한 문제다.


 


가카가 일을 추진하시는 방법은 지난 5년간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가카께서 하시는 일의 시퀀스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미국산 쇠고기를 둘러싼 논쟁이다.


 


일단 가카께서, 지금가지 광우병 위험 및 국내 한우농가 보호 때문에 수입을 저지하고 있던 미국산 쇠고기를 시원하게 전면 수입하기로 지 조때로 결정해 버리신다. 백성들이 이게 무슨 개소리냐며 들고 일어난다. 그러자 가카께서는 거짓말도 해보시고, 속임수도 써보시며 시간을 끌다가 결국 ‘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어린 백셩들에게 먹이기 위한’ 특단의 조치임을 선언하시고 강경하게 밀어부치시었다.


 


그리고는 한우 축산농가를 친히 방문하시어 ‘이제 너네는 좃됐지만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야. 이런 기회 흔치 않아. 나 짱이지? 이왕 이렇게 된 거 편하게 생각하렴’ 이라고 말씀도 하신다.


 



 


결국 지가 이익을 얻기 위해 쇠고기 수입하면서(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다면 클릭)입으로는 국민들은 엄청 위하는 척 했던 거다. 게다가 결국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정말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작년에는 광우병 반대했던 사람들이 아직도(가카가 생각하기에 질 좋은 고기 싸게 먹는 지금도) 반성하지 않는다며 통탄하시기까지 했다.


 


가카의 비양심성이야 강에다 콘크리트를 때려붓고 배를 띄우면 생태가 복원된다는 주장을 하실 때부터 이미 알아봤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행을 저지르는 분이 아닌, 자기가 저지르는 악행으로 인해 그 피해자들 역시 행복해 질 것이라 생각하는 분이셨던 것이다.


 


게다가 ‘나도 해봐서 아는데’ 시리즈는 국민들이 받고 있는 고통의 책임을 고통받는 국민 스스로에게 돌린다. 나도 환경미화원 해봤고 노점상도 해봤는데 이렇게 부자가 됐으니, 지금 너네가 그모냥으로 사는 것은 니 탓이다라는 거다. 등록금이 비싸면 장학금 받으면 된다는 말은 되는데, 장학금 못 받은 것은 니탓이라는 말 아닌가. 강간사건 피해자한테 강간을 유도했다며 책임을 묻는 것과 과히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동현 필진은 ‘꼰대’ 를 ‘자신의 낭만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 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자신의 독선과 강압에 타인이 만족하는 그들만의 판타지 세계와, 그 세계의 낭만을 약자에게 강요하는 자들은 꼰대중의 꼰대다.


 


꼰대중의 꼰대중의 끝판왕 가카는 국민들을 농락하고 있다. 지속적인 농락과 학대로 인해 국민들은 ‘심리적 항거 불능상태’ 가 될 지경이다. 국민들이 잠잠해지면 가카는 ‘거봐 내 말대로 했으니 좋잖아’ 라고 생각하시겠지.


 


이제 가카치세 5년이 끝나간다. 사람에 따라서는 가카의 5년을 ‘해보겠다고 열심히 했지만 국제적인 경제위기와, 참여정부 5년간의 폭정으로 인해 고생한 시절’ 로 기악할지도 모르겠다. 하긴, IMF가 김대중 때문에 왔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할까. 그들은 그냥 그들만의 판타지 세계에 살라고 하자. 이들이 학대순응증후군에 걸렸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caption id="attachment_99919" align="aligncenter" width="520" caption="'설마' 싶은 초딩짓을 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번 정권의 종특이다."][/caption]


 


우리가 꼰대와 싸우는 방법은 성범죄 피해자들이 해야 할 일과 같다. 가해자에게 ‘싫다’는 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해야 하고 저항해야 한다.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해서는 응당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


 


가카의 악행에 무덤덤해지지 말자. ‘이제 이런 것이 놀랍지도 않다’ 라고 말하지 말자. 멀쩡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방법은 끊임 없이 때리고 학대하고 자존감은 짓밟는 것이다. 이런 야만적인 술책에 굴복하지 말자. 끝 없이 놀라고 저항해야 한다.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해야한다. 마땅히 처벌받아야 할 범죄를 저지르고 되려 피해자를 더 괴롭혀서 차마 대응을 못하게 만드는 수법. 이제 이런 수법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아외로워

Ddanzi.Lonely@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