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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20. 월요일

춘심애비


 


트로트 유감 유감 ? 너클볼러에게 날리는 힛바이피치드볼


 


 


"악덕한 너클볼러는 들으라."

문제의 너클볼러 글 보러가기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누가 한말인지도 모르겠고, 이 말 때문에 괜히 문학이론에서의 반영이론과 생산이론 이런거 떠올리지 마시라. 그냥 저 말 자체만 보면 된다. 각각의 예술작품과 한 시기의 예술사조는 그 시대의 특성 안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특성을 그대로 담아내기도 하고, 시대의 특성을 바꾸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어쨌든 간에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트로트 얘기를 하다가 '예술'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이 자체에서 아마도 어색함을 느끼는 분덜도 있을거다. 그 이유는 아마 이런거겠다. 대중문화는 예술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대중문화도 예술의 범주에는 들어가지만 트로트는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보는 것. 좀 더 디테일하게 생각하는 분덜은, 일반적으로 2012년 현재의 트로트 가요들은 노골적인 상품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개별 상품으로 봐야지 예술이라고 볼 수 없다, 는 식의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생각 자체가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사실의 증거다.


 


[caption id="attachment_100882" align="aligncenter" width="385" caption="애플 파워맥 G4 큐브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caption]


 


음악에 있어서 예술임에 틀림없는 사례를 든다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들, 소위 클래식음악을 들 수 있겠다. 이 클래식씬이 민요나 구전가요, 혹은 광대씬과 구분되게 된 것은 귀족을 타겟으로 하는가, 평민 민중을 타겟으로 하는가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귀족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는 뭔가 대단한게 필요하다. 그 대단함이 음악적 역량일 수도 있고 그저 꾸며댄 말장난일수도 있다. 대단히 감동적이거나, 아니면 졸라 뭔지도 모르겠는 소음에 가까운데 그에 대한 해석이 대단하거나. 반면 평민 민중들에게는 직관적으로 그 음율이 심금을 울리거나, 노래의 가사에서 공감이 존나게 되거나, 뭐 이런, 보다 직접적으로 그 작품이 어필하는 정도에 따라 인기가 나뉜다.


 


프랑스혁명 이후에 명시적인 작위나 계급은 없어졌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있다. 이 세상엔 아직 계급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일반적으로 돈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즉, 클래식씬은 과거의 명시적 계급에서 현재의 암묵적 계급으로 그 기반을 옮겨탔을 뿐이다. 즉, 클래식 음악이 대중음악보다 고상하다는 인식 자체가, 귀족이 평민보다 실제로 다방면에서 뛰어난 계급이라는 사회적 무의식 주입의 잔재에 가깝다. 클럽음악 만드는 뮤지션들이 톤잡을때 쓰는 기술이 어려운 클래식 이론보다 기술적으로 더 낮은 수준인건 존나 아니거든.


 


 


씨바 트로트얘기 하는데 왜 이 얘기를 하냐면


 


 


궁극적으로 모든 음악은, 서로 다를 뿐, 그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는거다.


 



 


한껏 사치를 떨어야만하는 귀족들에게는, 그 사치에 맞는 뭔가가 필요하다. 그게 클래식이었고, 졸라게 화려한 옷이었고, 목 디스크가 생길 정도의 가발이었다. 그게 그들의 욕망이고, 그 욕망을 더 잘 채워주는 작곡가가 인기를 얻는다. 이러한 전제 하에 발달되어온 것이 클래식음악이다. 그러므로 클래식 음악의 이론에 얼마나 부합하는가가 그 음악의 고상함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의도치 않게도, 중세/근대의 귀족들이 실제로 귀(貴)했다고 보는 것과 유사한 전근대적 생각이다.


 


그냥, 내가 듣기 좋은 음악과 그렇지 않은 음악의 스펙트럼이 있는거고,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과 더 적은 사람들만이 좋아하는 음악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더 새로운 시도와 더욱 어려운 기술적 적용이 사용된 음악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만, 그 음악조차도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면 되는거다. 우리 모두가 존 케이지의 4분33초라던가,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을 좋아해야하는 압박감에 시달릴 필요는 존나 없다. 시바 그게 그냥 소음이지. 라고 해도 쪽팔릴거 없다.


 


 


게다가 거듭 말하듯,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똑같은 음악이 서로 다른시대에 등장했다면 그 평가나 영향은 달라질 수 있고, 또한 서로 다른 시대의 음악을 동일한 기준으로 비교하는건 의미가 없다. 예컨데, ASCII코드로 그림을 그리는 아스키아트를, 수백년전에 고려에서 누가 손으로 그렸다고 쳐보자. 그 시대에는 ASCII코드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각각의 기호들이 모두 하나의 획일 뿐이고, 그러므로 졸라게 그림 어렵게 그리는 새끼 정도였을거다. 하지만 현대에서는 전혀 다른 용도였던 ASCII코드를 회화의 영역에 접목시킨 그 시도 자체에도 가치를 둔다.


 



[caption id="attachment_100888" align="aligncenter" width="540" caption="이런 게 바로 아스키 아트"][/caption]


 


그러면 이제 비로소 트로트를 보자.


 


 


트로트라는 장르는, 역사적으로 존나게 복잡하다. 특히 초기 트로트는 이걸 하나의 음악장르로 봐야할지, 하나의 씬으로 봐야할지, 창법으로 봐야할지 애매하다. 단적으로 한명숙의 '노란샤쓰의 사나이'를 현대의 기준으로 들으면 이건 졸라게 컨트리풍의 편곡에 정통 스윙재즈 보컬의 노래다. 우리는 이걸 트로트라고 부르지만 말이다.


 


왜 컨트리풍에 스윙재즈스타일이었을까. 60년대 당시에,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들은 컨트리와 스윙을 그리워했을테니까, 한국에서 음악을 하던 사람들은 그 장르들을 잘 연주해야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테고, 그러니까 새로이 곡을 만들어도 그 스타일이 베어났을게다.


 


이렇게 트로트는, 근대를 거치면서 유입된 미국과 일본의 대중음악이 한국식으로 재해석되면서 발생한 큰 흐름에서, 보다 더 외국의 본류를 따르려는 후배들과 이전 전통을 잇는 선배 사이의 분리에서 발생한 파생적 장르이다. 파생적이라는 말에 괜히 기분나빠할 필요 없다. 락앤롤도 블루스, 컨트리, 재즈, 가스펠의 파생적 장르니까. 원래 예술이란 계속 파생되는거다.


 


이렇게, 트로트라는 장르는 아주 거대한 흐름에서 점차 좁혀져온 장르이기 때문에 시기별로 양상이 존나게 다르다. 시기에 따라 이미자처럼 그냥 편하게 부르는 가수가 있는가하면, 주현미, 현철처럼 졸라게 잘 꺾는 창법을 구사하는 가수도 있다. 창법 뿐만 아니라 편곡의 특성도 마찬가지. 세계적으로 밴드사운드가 대세였던 70~80년대에는 트로트도 밴드편성으로 가지만, 전자악기들이 보급되기 시작한 8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의 팝에서도 신디싸이저가 졸라게 사용되고, 역시 트로트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트로트에서 최신 일렉트로닉 음악의 편곡법이 적용되기도 한다.


 


 


창법과 편곡에 그칠리 없다. 가사 또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갈대의 순정' 가사를 보면 시적인 은유가 사용된다.


 


[youtube]http://www.youtube.com/watch?v=MpqyOnkv3nY[/youtube]

박일남 '갈대의 순정'


 


그런데 이 시대의 다른 문화예술은 어땠을까. 일상어가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장르인 영화의 대사에도


 


 



"내 입술은 작은 술잔이에요."


"오랜만에 함께 누워보는군."



 


 


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때는 뉴스를 봐도, 다찌마와리에나 나올법한 졸라 오글거리는 말을 쓴다. 즉, 이 시대는 시대 자체가 '공적 사회'에서는 졸라게 문어체적인 말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대. 군대간 친구한테 편지를 써도 소설책에 나올법한 있어보이는 표현을 쓰는 시대 말이다. 한번보고 두번보고 자꾸만 보고싶네라는 가사가 존나게 노골적이고 도발적이라는 말을 들었던 시대.


 


그러다 90년대 가요씬을 흔들었던 박주연 작사가의 시적이면서도 일상어적 가사풍이 인기를 얻는다. 윤종신의 <너의 결혼식>이나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같은 곡은, 분명 비속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매우 일상적인 표현이나 발상이 적용돼서 젊은이들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다가갔다. 이러한 사조가 발생하면서 가요에는 보다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하며,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비속어까지 사용된다.


 


[caption id="attachment_100896" align="aligncenter" width="300" caption="우디앨런은 '미드나잇 인 파리' 에서 시대와 예술에 대한 고찰을 보여준다"][/caption]


 


이에 더해 인터넷의 보급과 휴대폰 문자메시지 문화의 보편화, 최근 스마트폰의 보편화에 힘입어 2010년대의 일상어는 불과 10~20년전의 언어에 비해 졸라게 빠른속도로 변화한다. 문자 타이핑 속도를 줄이는 목적으로 시작된 줄임말은 그 줄임말 자체의 오락성으로 인해 졸라게 확산돼서, 몇몇 줄임말들은 방송에서도 쓰인다. 디씨와 딴지에서 하오체와 같은 문체 자체가 유행을 하면서, 디씨의 각종 갤러들은 나영체, 근영체 같은 자신들의 문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렇게 언어의 '변형'과 '창조'까지 일상화가 된다면, 기존의 비일상적 문어체는 대중들에게 '고상한 언어'와 같은 느낌을 준다. 즉, 하나의 벽이 생긴다. 70년대에는 '그대 사랑하오'라는 편지를 보냈다면 그냥 평범한 사랑고백이지만, 2012년에는 허세부리거나, 복고풍으로 연출을 했거나, 약간의 유머를 부리는 것이 된다.


 


[caption id="attachment_100890" align="aligncenter" width="334" caption="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의 감수성"][/caption]


 


이런 일상언어의 변천 과정에서, 가요의 가사가 영향을 안받을 수는 없다. 바로 그, 변천된 일상언어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가사를 쓰고, 그 사람들이 듣는 음악이기 때문에. 발라드에서 총맞은 것 처럼이라는 가사가 들어가고, 심장이 없어, 뭐 이런 가사도 들어간다. 하물며, 더 젊은 사람들을 타겟으로 하는 댄스가요들은 말할 것도 없다. 가사를 놓고 보면 그냥 누구 카톡 내용 복사붙이기 한듯한 졸라게 직접적인 일상어가 사용된다.


 


게다가 최근 몇년간 아이돌이 음악시장을 점령하면서, 이 직접적 일상어는 그 아이돌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용도로 활용된다. 존나게 귀엽게 생긴 남자애들이 메이크업 빡세게 하고, 가슴 풀어해치고, 졸라 건들거리면서 '내가 그렇게 만만하니' 이런걸 하면 그 가사의 도발성이 그 그룹의 지향점을 드러낸다. 소녀시대가 오오오오 오빠를 사랑해 하는 것도 소녀시대의 사랑을 받고싶은 삼촌들의, 삼촌이라고는 불리기는 싫은 마음을 후벼파고 말이다.


 


악덕한 너클볼러가 졸라 폄하한 대성의 '날 봐 귀순'도 마찬가지다. 빅뱅에서 구수함과 친근함을 맡고 있는, GD에 이어 2번째로 멤버 확정이 됐던 대성의 캐릭터상, 다른 아이돌들이 솔로활동을 하듯 멋부리는 것 보다는 보다 친근하게 여성팬들에게 다가가야한다는 전략. 그 전략의 일환으로 클리셰적인 트로트에 직접적으로 한 여성에게 구애하는 가사를 극히 일상적인 문체로 풀어넣었다. 대성이 구성지게 '날봐 날봐 귀순'을 부르는 건, 그가 애매하게 멋부리고 나와서 '룩앳미 마이 걸'하는거랑 때깔이 졸라게 다르다. 그러니까, 대성의 날봐 귀순은, 태양이 내가 바람펴도 너는 절대 피지 말라는 망언을 하는 것과 유사한, 전략적 포지셔닝이다.


 


[caption id="attachment_100892" align="aligncenter" width="452" caption="빅뱅의 태양(Sun of Big Bang)"][/caption]


 


중요한건, 그래서 그 음악을 통해 많은 팬들이 즐거움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태양은 덤벨 졸라게 들고 나시 입고 나와서 슬라이딩 안무 졸라하는 동안, 대성은 빤짝이 입고 나와서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는게 양쪽 모두 팬들에게 졸라 큰 즐거움을 주는데 성공했다는 그 사실 말이다.


 


 


이렇게, 현대의 대중음악은 단지 멜로디와 가사의 조합이 아니라 복합적인 예술장르다. 이건 악덕한 너클볼러가 찬미한 최백호 선생의 '낭만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최백호 선생은 졸라게 노래 잘하시는 아티스트다. 그가 불렀던 이적의 '다행이다'는 작곡자인 이적이 불렀을 때 보다 더 감동적이다. 그런 최고의 보컬이, 오랜 공백을 뚫고 중년이 지나 컴백을 했는데, 그 노래가 '낭만에 대하여'일 때, 그 때 듣는이의 총체적 희열은 완성된다. 이건 그저 그 노래 멜로디와 가사가 좋고 깊이있어서만으로는 구현이 안된다. 딱 잘라서 장윤정이 데뷔곡으로 저 곡을 불렀어도 과연 악덕한 너클볼러는 저만치 감동했겠는가.


 


지금의 대중들은,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무조건 달려오는 남자의 순정을 원하고, 사랑의 빠떼리가 다 됐다고 앙탈부리는 아가씨의 애교를 원한다. 곱상한 얼굴로 오빠한번 믿어보라는 청년과, 기다림에 지친 땡벌을 자처하는 남정네를 원한다. 이건 신라의 달밤 풍경을 원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을 원했던 그 시절 그 사람들과 똑같은 대중적 욕구일 뿐이다. 그저 시대가 달라졌고, 구체적으로 원하는 바가 달라졌을 뿐이다.


 


 


악덕한 너클볼러의 걱정과는 달리, 필자는 확신한다.


 


분명 약 10년~20년 후 누군가는, 아버지 생각을 하며 술잔을 기울이며 박상철의 무조건을 흥얼거릴거다.


 




박상철, 무조건


 


물론, 시장의 구조적 문제 분명히 있고, 대중음악을 상품으로만 바라보는 기획사들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건 역사가 졸라게 오래된 문제다. 모차르트의 교향곡도 누군가에겐 상품이었고, 영원한 젊은이의 영웅 커트 코베인도 숱한 자본가들의 상품이었다.


 


그 사실들이, 이 땅의 트로트를 값싸게 만드는건 아니다. 어느시대, 어떤 사회에서든, 대중들의 인기를 얻는 작품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예술이다. 대중들이 원하는,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사실이 그 인기를 통해 증명된 것이니까. 당연히, 별로인 작품도 있다. 그리고 별로인 작품이 많아질 수도 있다. 그게 어때서. 계속해서 사랑받으려 노력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 예술가가 언젠가 좋은 작품을 만든다면, 대중이 그걸 즐기면 된다. 올림픽에서 메달 못딴 선수들에게도 박수를 보내자면서, 능력이 좀 떨어지는 예술가에게 혹독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악덕한 너클볼러는 들으라.


 


한없이 가벼워보이는 트로트 한소절도, 그 가벼움을 만들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예술가의 한 작품이다.


 


본인의 연배에서 기인하여, 취향이 올드하다는 이유로, 그 예술가의 진지함을 폄하하는 당신은


 


외로운 들판의 늑대 타입입니다.


 



 


졸라.


 


 


춘심애비

트위터 : @miir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