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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진출은 13세기부터 시작되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던 유럽 르네상스의 결정적 사건이다.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약 200년에 걸쳐 자행된 십자군 원정으로 중동에서 약탈한 막대한 부, 그리고 이질적인 문화와의 접촉은 유럽인들에게 커다란 지적 충격을 주었다. 여기에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진출은 유럽인들에게 또 한 번의 엄청난 충격이었다. 두 번에 걸친 대규모 원정은 유럽인들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으며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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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원정의 결과로 유럽인들은 유럽이라는 좁은 세계를 벗어나 전 지구적 차원의 사고를 하게 되었다. 그의 아메리카 진출은 ‘원시문명’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적 상상력을 자극했다. 유럽인들은 콜럼버스를 통해 막 싹트고 있던 중상주의를 세계적인 차원에서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비유럽 세계의 자원을 약탈해 경제성장을 하는 식민경제체제의 발판을 마련했다. 콜럼버스 이후 유럽적인 가치는 세계 모든 곳에서 유일한 규범적인 가치로 탈바꿈해 세계는 유럽의 기준으로 재단되고 규정되었다.


콜럼버스 이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실제 발견하거나 상상으로 만들어낸 원주민들의 삶의 양식은 유럽인들에게는 낯설고 경이로운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철저한 종교적 규범과 봉건제도라는 가혹한 수탈체제에 짓눌려 살아오던 유럽인들에게 자연 속에서의 원시적인 삶은 창세기의 천지창조 시대를 연상케 하였다.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의 삶의 방식에서 문명의 온갖 굴레를 벗어던진 인간들의 건강한 삶의 모습을 보았다. 원시적 삶의 양식은 유럽인들에게 자연 상태의 인간에 대한 지적 논쟁을 일으켰으며, 때로는 유럽적 문명의 대안으로서, 때로는 파괴하고 문명화해야 할 야만적인 가치로써 그들의 상상력을 어지럽혔다.


<항해록>에 나타난 아메리카는 비유럽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콜럼버스의 첫 눈에 비친 그곳은 지상낙원이었으며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선의 결정체였다. 그들은 하나 같이 용모와 자태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몸매도 훌륭하고 얼굴도 잘생겼다. 콜럼버스가 그들에게 유리구슬, 붉은색 모자 따위를 선물로 주자 그들은 열렬히 환영하며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그들은 어떤 악에도 물들어 있지 않은 순수한 인간으로 전쟁이나 무기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성격이 온순하여 살인이나 범죄라는 개념조차 지니고 있지 않다. 또한 무기도 없으며 콜럼버스 일행의 사소한 장난에도 놀라 벌벌 떨거나 도망칠 정도로 겁이 많다. 그들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살아간다. 그것이 콜럼버스의 눈에 비친 아메리카의 모습이다. 그는 항해 도중 한 섬에서 주선인 산타마리아호가 난파되었을 때, 그들을 도와준 원주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들은 사랑이 넘치고, 탐욕도 없고 친절하며 뭐든지 마음을 다해 하려고 합니다. 저는 두 분 폐하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이들처럼 선량한 사람은 없고, 이곳처럼 좋은 땅은 없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합니다. 그리고 항상 미소를 지으면서 온순하고 상냥하게 말합니다.


이 글에서 떠오르는 원주민들의 이미지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다. 기독교 천지창조의 신화는 그곳에 현실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는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아메리카의 자연에 수없이 경탄과 찬사를 보낸다. “이 아름다움을 두 분 폐하께 설명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진실을 말하기에는 제 혀가 너무 짧고, 기록하기에는 제 손이 모자랍니다”라는 말은 그가 아메리카의 자연에 얼마나 도취되어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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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관찰 속에는 지독한 역설이 숨어 있다. 아메리카를 바라보며 그가 느낀 첫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영리하고 훌륭한 노예로 적격이다.”였다. 이미 원시적인 삶은 파괴하고 착취해야 할 대상이라는 제국주의적 인식이 깊이 잠재되어 있다. 기독교 성경의 이상이 구현된 그 세계는 그가 지키고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니라 파괴해야 할 존재였다.


아메리카에 대한 그의 도취는 미에 대한 예술적 도취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아메리카의 풍요한 자연을 접하는 순간부터 그곳의 동물과 식물을 소금에 절이거나 껍질을 벗기고, 줄기에 칼로 생채기를 내 즙을 짜내고, 견본을 하나하나 채집한다. 미래에 유용하게 쓰기 위함이었다. 철저하게 중상주의자의 모습을 한 그에게 아메리카의 자연은 경탄의 대상에서 즉시 약탈하고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바뀐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바라볼 때도 그는 노예상인이나 식민주의자의 시선을 버리지 않는다. 그는 그곳에서 만나는 원주민들의 벌거벗은 상태를 강조하고, 그들의 순수성을 찬양하며, 특히 여성의 육체적 아름다움을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그런 시선에서 원주민들은 번번이 유럽인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노동력으로 전환된다. 그는 원주민들을 유럽으로 잡아가 옷 입는 법을 가르치고 복종시켜 유럽의 생활방식을 따르게 할 생각을 한다. 또한 그들을 이용해 작물을 재배하고 촌락을 건설하려고 한다. 그에게는 아메리카는 유럽의 대척점에 있으며, 단지 유럽적인 가치관을 주입해야 할 대상이다. 원주민들은 기독교도가 되고, 문명화되고, 백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원주민들을 바라보는 그의 ‘유럽적’인 시각은 견고하다. 그는 벌거벗은 원주민 남성들의 나약하고 수동적이고 겁에 질린 모습을 반복해서 강조하면서 원주민 남성들을 겁쟁이로 묘사한다. 자연스럽게 원주민 남성들의 ‘남성다움’을 부정하고, 자율적인 존재로서의 그들의 가치를 부정하며, 은연중에 유럽 남성이 나약한 원주민 남성들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여성에 대한 반복된 관능적인 묘사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유럽 남성의 관음증적인 욕망마저 보여준다. 원주민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자연에 대한 관음증적인 시선과 묘하게 얽혀 아메리카를 여성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에게 아메리카는 처음부터 남성적인 유럽에 대비되는 여성적인 대륙이었다.


그로 인해 서양인들에게 아메리카는 여성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화려한 문명의 옷을 차려 입고 당당하게 서 있는 힘센 남성인 서양인들 앞에 완전히 나체로 서 있는 무기력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남성에게 굴복하기를 기다리는 순수하고 순결한 여성의 이미지가 되었다. 그들이 ‘남성에게 정복되기를 기다리는 처녀’라는 인식은 근대 서양의 문학과 예술에서 하나의 규범화된 시각으로 자리 잡는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은 다분히 관능적인 시 <잠자리에 들며(To His Mistress Going to Bed)>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내 손이 더듬는 것을 허락하시오. 그리고 그것들이
뒤로, 앞으로, 위로, 사이로, 아래로 가게 해주오.

오, 나의 아메리카여! 나의 새로 발견한 땅이여,
나의 왕국이여, 남자가 하나뿐일 때 가장 안전한 곳,
나의 보석 광산이여, 나의 제국이여,
그대를 발견한 나는 더 없는 축복을 받았구나!


화자에게 애인은 아메리카와 동일시된다. 잠자리에 드는 여성은 발가벗은 몸으로 애인인 남성의 욕망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다. 여인의 몸을 ‘뒤로, 앞으로, 위로, 사이로, 아래로’ 더듬는 남성의 손길은 아메리카를 구석구석 탐험하는 백인의 발길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여성이 남성의 욕망을 위해 존재하듯이 아메리카는 유럽인의 탐욕을 위해 존재한다. 아메리카는 아직 남성을 알지 못하는 처녀 같은 순결한 ‘처녀지’다. 아메리카의 순수성은 오로지 백인들이 정복해야 할 처녀성이다. 그러므로 백인 남성들의 사명은 아메리카를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정복하고 식민화하는 것이다. 아메리카는 힘센 백인의 문명에 굴복하고 백인의 노예가 되어야만 문명화될 수 있다. 아메리카의 ‘발견’ 이후 이 순수성에 대한 찬양과 그것을 파괴하려는 모순적인 욕망은 처음부터 서양인들의 의식 속에 혼재하고 있었다.


콜럼버스와 이후의 많은 탐험가들의 원주민에 대한 묘사는 서양인들에게 ‘고결한 야만인(noble savages)’의 신화를 만들어냈으며, 그 신화는 문학과 예술과 사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용되고 있다. 자연 속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에게는 문명인인 자신들이 잃어버린 역사 이전의 순수했던 원형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원형으로 복귀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것을 파괴해 지배하려 한다. 그들은 유럽 문명을 위해 성경을 독점적으로 해석해 그들의 해석을 절대적인 진리로 만들었듯이 이제 아메리카를 독점적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아메리카에 적용한다.


유럽인들에게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살과 뼈를 가진 실존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이 동경하는 어떤 미적 가치를 대변하는 관념적 존재가 됐다. 원시적인 자연 상태의 인간은 악을 모르고 과학과 문명에 더렵혀지지 않은 채 온갖 고결한 미덕을 지녔다. 18세기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인간론>을 보자.


보라! 저 가난한 아메리카 인디언을, 그의 소박한 마음은
구름 속에서 신을 보며, 바람결에서 신의 음성을 듣는다.
그의 영혼은 오만한 과학의 가르침을 받고 빗나가
항성의 궤도와 은하수 멀리까지 헤매지 않는다.
소박한 천성은 그에게 구름 낀 산 뒤의
좀 더 조촐한 천국을 소망하게 했다


그의 인디언은 이상화되고 관념화되어 있다. 유럽인들이 ‘오만’과 ‘과학’과 ‘항성의 궤도’로 대변된다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소박한 마음’과 ‘조촐한 천국’으로 도식화된다. 원주민에 대한 그의 찬양에는 역설적으로 유럽의 과학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자만이 깔려 있다. 그의 시선에 비친 원주민들은 실제적인 존재가 아니라 유럽의 문명에 지친 피로한 지식인이 만들어낸 하나의 허상이다.


콜럼버스 이후 유럽인들은 세계를 문명과 자연으로 도식화하는데 익숙해졌으며, 항상 유럽 문명의 관점에서 비유럽 세계의 자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연은 흔히 통제되지 않은 힘을 지닌 야만과 동일시되었다. 이 두 세계는 유럽적인 시각에서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자연은 항상 문명에 굴복해야 한다. 자연은 문명이라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백지에 불과하다. 유럽인들은 백지에 그림을 그릴 유일한 특권을 지녔다. 특권 의식을 바탕에 두고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를 재단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모든 원주민적 가치를 야만이라고 규정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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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로의 스페인 군대에게 살해당하는 잉카 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

아메리카에 대한 서구인들의 최악의 잔악행위로 일컬어진다


야만은 이내 파괴하고 착취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런 인식은 이후 유럽인들이 모든 비유럽 세계를 접할 때 꼭 같이 적용된다. 유럽인들에게는 제3세계 원주민들의 야만과 고결함은 같다. 욕망에 가득 찬 그들의 눈에 원주민들은 언제든지 고결한 야만인에서 더럽고 추악하고 교활하고 잔인한 야만인으로 전락한다. 그들의 식민주의적 의식이 완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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