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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단순한 사건도 전모를 알고 보면 복잡하다. 몇 글자 내지 숫자 몇 개로 표현되는 역사적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건조한 몇 문장으로 너끈히 정리되는 사건이라 하더라도 조금만 그 속살을 비집고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빛깔의 조각들에 당황하기 일쑤다. 실로 오랜만에 망월동을 찾아 떠올린 5.18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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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많다 여겼는데 새삼 5.18 묘역을 찾아 세세한 설명을 듣다 보니 전혀, 생판, 완전히 그렇지 않았다. 하기야 교만의 죄도 분수가 있지 어찌 죽어간 사람이 수백 명이 넘는 항쟁의 피해자들의 면면 앞에서 “뭐 웬만큼은 알어.” 하면서 시건방을 떨었나 싶다.


그 중 한 경우로, 망월동 묘역에는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사연의 주인공 하나가 누워 계심을 알았다. 문용동 전도사. 그는 호남신학대학 4학년으로서 상무대교회에 시무하던 전도사였다. 5월 18일 계엄군의 짐승 같은 진압에 분노하여 시위대에 합류한 것은 여느 광주 시민과 다르지 않았고 5월 27일 도청의 마지막 날 다른 시민군과 함께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은 것 또한 같으나 그에게는 특이한 사연이 있었다.


항쟁 와중에서 많은 무기가 시민군의 손에 들어왔지만 가장 가공할 무기(?)는 도청 지하에 보관돼 있던 TNT였다. 그 양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모양이지만 광주 시내의 상당 부분을 날릴 양이었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 위력은 광주항쟁으로부터 3년 전이었던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가 잘 입증해 주고 있다. 폭발물을 실은 기차가 폭발하면서 사망자 59명, 부상자 1343명, 이재민 1만 명이라는 가공할 피해가 발생했던 것이다. 도청에 쌓인 폭발물의 양은 이리역 폭발 사고 때의 두 배였다고 한다.


계엄군이 진입을 강행하고 그들의 만행을 기억하는 이들이 ‘같이 죽자’고 누군가 불을 당긴다면 광주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일종의 ‘핵무기’로서 계엄군의 진입을 저지하거나 최소한 지연시킬 물리력일 수도 있었겠으나 이런 류의 ‘자위력’은 대개 자충수로 끝날 때가 많은 법이다. 


이 TNT의 뇌관을, 계엄군 요원을 끌어들여 가며 제거한 사람이 바로 문용동 전도사였다. 그는 툭하면 총을 쏴 대던 계엄군의 살벌한 포위망 앞으로 나아갔고 그의 손에는 사태를 설명할 만한 폭발물이 들려 있었다.



 “이런 게 도청 지하실에 쌓여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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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게엄군은 군 요원을 투입하여 지하의 뇌관을 제거한다. 이때 문용동 전도사와 함께 도청 지하에 잠입한 계엄사 요원은 공포로 초주검이 돼 있었다고 한다. 만약 시민군에게 발각된다면 자신들이 며칠 전 광주 거리에서 행했던 그대로 되갚음받으리라는 두려움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여기까지 하고 문용동 전도사가 사시나무 떨듯 하는 계엄사 요원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면 그는 역사를 바꾸고도 이름을 남기지 않은 프락치 정도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도청에 남는다. 아마도 계엄사 요원도 어안이 벙벙해서 설득했으리라. 



“아니 전도사님. 나랑 이런 거 알려지면 여기 있으면 맞아 죽어요. 아니 폭탄 제거하자고 할 때는 언제고 또 왜 여기 남겠다는 겁니까.” 



그러나 문용동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행동이 발각돼 흥분한 시민군들이 총을 겨누는 상황도 있었다는 전언도 있었다고 한다. 그 지경에서도 그는 도청을 나가지 않았다. 가족들이 와서 나가자고 붙들고 늘어져도 그는 이렇게 말하고 도청에 남았다고 한다.



“도청 앞 분수대에서 시체 서른 두 구를 보았습니다. 집에서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으면 태극기로 덮어 묻어 주세요.”



그리고 도청의 마지막 날, 폭발물 뇌관 제거를 함께했던 동료와 함께 계엄군 앞에 나서다가 조준 사격에 몸이 꿰뚫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껏 계엄군 비밀 요원이 광주 도청 지하실에 잠입하여 뇌관을 제거해 두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폭발물의 오용 위험을 절감한 시민군들이 개입돼 있는 줄은 몰랐다. 그들에 대한 끈질긴 프락치 의심도 이해는 간다. 뇌관 제거를 함께한 동료가 다행히 살아남아 문용동 전도사의 진심을 증언했지만 그래도 의심을 거두지 않는 사람이 있을 만큼 그의 행동은 문제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프락치가 아니라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결국 그 자신이었다. 프락치라면 도청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프락치라고 의심받아 마땅한 일을 감행하고 발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 길을 스스로 외면했다. 


그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까 상상해 본다. 계엄군에 두들겨 맞는 노인을 구하려 뛰어든 5.18의 거리. 눈 앞을 어지럽히고 코를 막게 했을 참혹한 시신들, “개인이건 사회건 국가건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문용동의 일기)라며 떨쳐 일어선 한 전도사. 그리고 그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폭발물들. 공의로운 분노와 전혀 다른 의미의 공포 사이에서 그는 얼마나 갈등했을까. 거침없이 쳐들어오는 계엄군의 M16 총탄 소리 앞에서 그는 스스로 제거해 버린 뇌관들이 아쉽지는 않았을까. 


오랜만에 5.18 묘역을 찾아 페친 배이상헌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되짚은 광주의 의미는 크다기보다는 복잡했다. 독재에 대한 항거, 불의에 대한 정의의 저항, 용기 있는 이들과 무고한 이들의 슬픈 희생 등등 몇몇 판박은 글자와 단조로운 수식어로 묘사하기에는 광주는 너무나도 넓고 깊은 사연들을 봉분으로 두르고 있었다. 광주로부터 36년. 일제 강점기보다도 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광주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고, 알아야 할 것이 허다하고, 고민해야 할 지점들이 숱하다. 문용동 전도사의 존재는 그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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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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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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