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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03. 수요일

김현진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나를 스쳐 간 당신의 몸, 

당신의 이마를 한때 어루만졌던 누군가의 손, 

아스팔트 위에서 사정없이 깎여나가던 누군가의 피와 살,

철탑에서 얼거나 타들어 가는 몸들, 

당신이 나를 낚아채 주길 바라면서 

숨죽여 뺨을 대 보았던 당신의 쇄골.


몸은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은밀한 삶을 알고 있다.

이것은 그 '몸'에 대한 이야기다.

 




이건 지금까지 내가 봤던 남자의 육체 중 가장 잘 빠졌던 몸에 대한 이야기다.


김 실장이랬나 이 실장이랬나. 그는 우리 집에 윽박지르러 찾아온 용역깡패였다. 벌써 3년 전인가, 조그마한 교회의 담임목사를 하시던 아버지가 급성 간암으로 황망하게 돌아가시고 난 후의 일이다. 김 실장은 빨리 안 나가면 재미없어, 뭐 이런 이야기를 하던 사람으로, 나에게는 아니지만 엄마에게는 두어 번 윽박을 지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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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폭 마누라'의 한 장면)



생전에 백 원 한 푼 줄 여유가 없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나서 ‘경매최고서’라는 엄청난 유산을 남겼다. 아버지의 동생 부부와 돈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경매최고서라니.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니 생전에 아버지가 교회 건물 등기를 잘못 해 놓아 건물은 경매에 넘어가고 우리는 보탰던 8,000만 원을 받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8,000만 원 중에는 3년 동안 실수령 1800만 원 정도 되는 연봉을 받으면서 모았던 내 전세보증금 2,300만 원이 있었다. 교회 형편이 어려우니 돈 좀 꿔 달라는 부모님의 부탁에 흔쾌히 드렸던 돈이었다. 자식 된 도리라서 드린 건 아니었고 그냥 그 돈에 별 미련이 없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당연히 전업 시나리오 작가의 길을 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단계 때문에 부모님이 카드 빚을 지고는 계에서 탄 돈으로 바로 그 빚을 갚아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도 좀 독했던 것 같다. 그 계를 끝까지 하게 해주고 저 돈을 모아서 산동네 전셋집에 살았으니까. 전업 시나리오 작가의 꿈을 접었지만 안 되는 교회를 붙잡고 있는 아버지를 보고 그래도 우리가 남이 아니구나 싶었다. 내가 작가 일 놓으면서도 아버지가 꿈을 놓지 않는 걸 보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게 내가 아니었지만, 아버지라도 꿈을 계속 잡고 있게 해 주고 싶었다. 결국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목사이고 싶다는 꿈을 이룬 셈이었다.


그 돈을 빌려가면서 부모님은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이건 네가 하늘에 복을 쌓는 거고, 하나님이 알아주신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이 그걸 알아주시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에게야 과부의 두 렙돈(편집자 주- 과부가 헌금으로 유대 화폐의 가장 작은 단위인 '렙돈' 두 개 냈다. 적은 액수임에도 불구하고 가진 모든 것을 냈기 때문에 예수가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라고 말함)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그건 너무 껌 값일 테니까. 어머니는 이 돈을 놔뒀다가 시집갈 때 줄 거라고 했지만, 경험상 그분들한테 내드린 돈이 돌아온 기억은 없었고, 시집은 갈 수나 있을까 생각했다. 예상대로 그 돈은 어이없이 사라졌는데, 그 이유가 잘못한 등기 때문이라뇨, 아버지.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참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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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먹고 잃어버린 신발 한 짝처럼 어이없이 사라졌다.



경매가 유찰될 때마다 갈 곳 없는 우리는 유예기간을 받았지만, 그래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형수 같은 기분이었다. 마침내 경매가 성사되었고 낙찰자는 이 건물을 이 상태 그대로 사용하려는 교회였다.


그 교회는 우리를 나가게 하려고 깡패를 보냈는데, 집에 혼자 있던 어머니가 그 깡패를 만난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전화로 거의 울면서 집에 무서운 사람이 찾아왔다고, 아주 시비조로 나가라고 한다고, 네 전화번호 달라고 해서 가르쳐 줬다고 말했다. 그에 나는 “잘하셨어요. 집에 있어도 그냥 없는 척 하세요. 우리 집에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어요.”라고 말했고, 좀 있다 전화가 걸려왔다.


“김현진 씨죠? 여기 ○○○ 회삽니다. 어머님이 말씀이 영 안 통하시네요.”


<과이언맨>이 시즌2를 맞으면서 하차하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내가 거기서 귀여운 척 옹알옹알 댈 수 있었던 건 다 녹즙 배달을 하면서 익힌 인생의 기술이다. 그 전에 나는 누구와 눈도 잘 못 맞추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수줍기보다는 머쓱함을 많이 타는 여자였다. 그러다 풀무원녹즙 서울지부 유일한 미혼 녹즙 배달자로 여사님들에게 호된 교육을 받았더니, 안면인식장애는 여전하지만 모르는 사람이라도 눈이 마주치면 ‘안녕하세요’하며 눈으로 웃는 버릇이 생겼다. 입으로 웃는 건 잘못하면 썩소가 되니 눈으로 웃어야 한다. 누가 클레임을 걸라치면 정말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불편하셔서 어떡해요, 너무 힘드시죠, 선수를 칠 줄 알아야 한다. 거기서 배웠던 기술을 최대로 써먹었던 게 그 남자였다. “저기, 집을 비워 주셔야 하는데 자꾸 이러시면...” 나는 중간에 그의 말을 끊고 <과이언맨>진행자처럼 말투를 바꾸었다.


“안 그래도 저희 때문에 힘드셔서 어떡해요? 많이 곤란하시죠? 저희도 아버님이 불시에 돌아가시고 나서 아직 황망해서... 어머님이랑 언쟁하셨으면 넓게 이해 부탁 드려요. 저희가 장례 치른 지 얼마 안 돼서... 빨리 집 정리해 드려야 되는데 너무 곤란하시죠? 저희도 할 수 있는 한 해보고 있어요. 너무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서 어떡하죠. 최대한 저희 할 수 있는 거 다 해 볼게요. 심려 끼쳐드려서 너무 죄송합니다.”


정말 미안해 죽겠다는 말투로 알랑거리자 그는 헛기침을 했다. 내일쯤 집에 한번 찾아 뵙고 따님이랑 이야기 좀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언제쯤 만날 수 있냐는 물음에 언제언제 있다고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손이 덜덜 떨려서 다른 손으로 눌러 진정시켰다. 역시 적은 일단 혼란시키고 봐야 하는구나. 녹즙 배달 22개월 한 것도 이럴 때는 써먹을 수 있구나. 그 때 손님들에게 친절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를 배워 놓지 않았더라면 이럴 때를 넘길 수 없었겠구나.



혼란.jpg

너를 혼란스럽게 해주겠다.



다음날도 녹즙 말투를 장착하고 나는 그가 오는 시간을 기다렸다. 화장도 살짝 하고 옷도 깔끔하게 입고, 그렇다고 형편 너무 좋아 보이지는 않게. 똑똑 소리가 나서 문을 열었더니 웬걸 엄청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들이 용역깡패를 상대해야 하는 나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이왕 깡패를 보내는 거 이병헌 닮은 깡패를 보내 준 것이었다. 인사하자마자 나는 다시 녹즙 기관총을 발사했다. 마침 그날 남은 녹즙도 하나 따서 건네며 힘들게 일하시는데 드시라고 치하까지 했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걸 꿀꺽 마시고 말했다.


“그러니까 집을... ”


“예, 저희 때문에 너무 곤란하시죠. 저희도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어요. 선생님 정말 죄송해서 어떡해요? 아버지가 등기를 잘못 하신 줄을 모르고 저희도 전세금 다 날렸는데... 그건 저희 사정이고 될 수 있는 대로 어머니랑 둘이 고시원이라도 얻을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녹즙을 마저 마신 그는 머쓱하게 말했다.


“그래도 여자 두 분이 고시원 사시기는 불편할 텐데... 어떡합니까.”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녹즙 빈 통을 받았다.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팔자려니 해야죠. 최대한 알아보고 있으니까 딱 며칠만이라도 여유를 더 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민망해서 드릴 말씀이 없어요. 안 그래도 일 바쁘실 텐데 이렇게밖에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저희도 최대한 노력해서 깔끔하게 비워드릴게요. 조금만 더 부탁 드려요 선생님.”


못할 게 뭐냐, 허리까지 꾸벅 숙여 보이자 그도 얼결에 같이 목례했다. 안녕히 가시란 나의 인사를 들으며 돌아서던 그는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기, 힘내십시오.”


나는 감사하다고 호들갑을 떨며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그 뒤로 용역깡패는 다시 오지 않았고, 어떻게 되어 가냐는 전화만 가끔 왔다. 그때마다 나는 “어머, 실장님~ 알아보는 중이에요. 심려가 많으시죠.”를 연발했고 그는 여자 두 분 사실 집인데 잘 고르시길 바란다며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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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보다 더 우스운 건, 번호 저장 후 카톡에 뜬 새 친구 ‘김 실장’이었다. 김 실장의 ‘프사’는 헬스장 거울에 자신의 벗은 상체를 비춘 사진이었다. 그것도 멋있게 찍은 게 아니라 주위에 사람이 있었는지 자기 상체 부분만 그림판으로 대강 조잡하게 오렸다. 김 실장,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는데 몸도 좋네?


유찰, 경매최고서, 등기, 날린 전셋값, 이런 것 때문에 골치가 아플 때마다 나는 카톡을 열고 김 실장의 ‘웃장’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그림판으로 배경을 대강 지운, 김 실장이 자랑스럽기 짝이 없어 하는 그 몸뚱아리를. 과연 좋은 몸이었다. 아마 내가 본 몸 중에 '베스트 3'에는 들 것이다. 누가 아버지를 잃고 집도 날리고 공중에 뜬 먼지만도 못한 존재가 된 나를 걱정할 때마다 나는 “내 남자친구 사진 볼래?” 하고 묻고는 김 실장의 그림판 사진을 보여주었다.


잘생겼다거나 몸 좋다는 반응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깔깔 웃었다. 웃지 않고야 견딜 수가 있나. 이게 말이야, 우리 아버지가 경매최고서라는 걸 남긴 게 미안하니까 천국에서 깡패를, 아주 잘생긴 깡패를 보내 주신 거야. 이 사람 용역깡패야. 그러면 보는 사람도 백발백중 웃었다. 김 실장은 설마 자기가 신경 써서 찍은 프사를 내가 남자친구 사진이라고 하고 다녔을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괜찮은 몸이었다. 이왕 나가라고 구박 당할 바에야 김 실장한테 당하는 게 나았다. 언제부터인가 내 카톡 친구목록에서 없어진 김 실장, 요즘도 몸 관리 잘 합니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야, 걔, 몸 좋지 않냐?”


김 실장이야말로, 뜻하지 않은 순간에 순식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내게 남긴 마지막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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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입니다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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