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재미로 사냐는 질문에 취미가 독서라는 말을 한다. 가끔은 짬을 내어 잡문도 쓴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속살을 너무 까 놓아서 행여 몇 안 되는 아는 사람들이 읽고 불편하지 않았으면 한다. 눈 덮인 두엄더미처럼 겉모습이나마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다.
글을 읽는 습관은 오래되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던 어린 시절엔 티비 만화를 좋아했다. <아이젠버그 특공대>라는 공룡과 싸우는 전대물을 기억한다. 그 프로가 할 시간에는 옆집에 놀러 가서 학교에 다니는 형들과 함께 봤다. 매일 출현하던 악당 공룡들이 다 죽고 마지막 하나 남은 공룡이 출전할 때 왕과 여왕공룡이 동굴 밖으로 싸우라고 밀어내는 장면에서 방구를 끼는 공룡이 우스웠다. 가끔 티비화면이 안 나올 때는 누군가 나가서 장대에 묶어둔 안테나를 돌려야 했다.
왕 공룡이 죽는 마지막 회는 보지 못했다. 옆집 형들이 학교에 간 사이에 농사일을 시키느라 학교를 보내지 않는 아빠가 없는 집의 딸들과 놀지 말라는 말을 어겼기 때문에 티비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했다. 입성도 허름하고 낫질을 하다 엄지손톱이 빠졌다. 어린 나보다 키가 두 배는 큰 누이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보다 어린 형들에게 무시와 경멸을 당했다.
나에게 술빵을 처음 먹여주고 어린 누이동생과 함께 진흙을 파서 찰흙 놀이를 해 주었다. 산속에 있는 커다란 개살구나무에 데려가서 살구를 주워주기도 했다. 배가 터지게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보다 겨우 몇 살 더 먹은 어린애였다. 누이도 배가 고팠다. 땅에 떨어진 살구를 폭식하고 속이 부대껴서 토했다. 그 무렵의 나는 사람이 입으로도 똥을 쌀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누런 살구가 엉켜진 토사물을 보고 누이가 똥을 누고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옆집 형들이 학교에 가면 놀 사람이 없었다. 집이 몇 채 없는 충북 영동의 가파른 산골 마을 초가집이었다. 부여를 떠나 그 집으로 이사 들어가던 날 처마 모서리 아래 통나무 벌통의 벌들이 붕붕거렸다. 황금빛으로 비치는 초가집 지붕에 매료된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노상 어울리며 친구인 줄 알았던 동생 누이가 어느 날부터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며 앞으로 누나라고 부르라던 기억이 분하고 서운했다. 이사를 나오고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갔으니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 섞였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 형들이 학교 간 사이에 누이들과 놀았으므로 티비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티비 소리를 들으며 차마 형들을 원망하지 못하고 울적했다. 아이젠버그 특공대가 왕 공룡을 무찌르는 마지막 편을 보지 못했다.
구정물을 휘저었을 때 떠오르는 건더기처럼 뭉그러져 정확하지는 않은 기억이다.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라도 강렬했던 첫 경험들은 지워지지 않았다. 논산의 할아버지 댁에 가면 닭장에서 계란을 꺼내는 일이 즐거웠다. 닭 우는 소리에 닭장에 가서 둥지를 품고 있는 암탉의 배아래 손을 넣으면 따스하고 둥글둥글한 달걀이 만져졌다. 그 느낌이 좋아서 닭장에 들어섰다가 수탉에게 쪼이면서 울면서 달아나던 일이 있다. 나를 쫓던 닭은 할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고 저녁 식탁에 올라왔다. 보호받고 있다는 든든함이 느껴졌다.
부여에서 세워진 쌀 자전거의 페달을 돌리다 넘어진 자전거에 깔려서 울었다. 아프기보다는 넘어진 자전거가 서운했다. 부여에 살던 네 살 무렵엔 세워져 있는 자전거만 보면 바퀴를 돌리는 일이 좋았다. 바퀴살이 돌아가는 모습과 소리가 중독성이 있었다. 함께 즐거웠다고 생각했는데 자전거에는 다른 사정이 있었다. 쌀이 실려 있던 자전거에 깔리고 나서는 세워진 자전거를 보아도 바퀴를 돌리지 않게 되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지네에 앞에 쭈그려 앉아 손을 내미는 어린 나를 경악해서 달려오던 지금의 나보다 어리던 부모님의 모습이 기억난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가 어른의 부속물이 아니라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임을 선언한 방정환 선생도 유년 시절의 기억이 남들보다 선명했을 성싶다.
아이젠버그 특공대와 시간의 선후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마징가 제트>의 마지막 편은 보았다. 너덜너덜해진 비너스 로봇과 마징가 제트가 쓰러질 때 그레이트 마징가가 출격해서 간단하게 악당들을 물리쳤다. 다음 시간부터 그레이트 마징가가 악당들을 무찌를 줄 알았는데 <그레이트 마징가> 시리즈를 방영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몇 해 전 다시 가본 마을은 구불구불하지만 포장된 도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마음속에 어슴푸레 남아있던 기억보다 가파른 산은 척박해 보였다. 손가락을 감으면 손가락이 잘린다고 해서 실뱀이라 부르며 무서워하던 연가시가 떠 내려와 뭉쳐있던 계곡은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넓어만 보이던 저수지는 작고 물도 얕았다. 저수지 가장자리에서 처음 물장구를 배웠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글도 배우지 못해 투명인간처럼 힘든 삶을 살아갔을 어린 시절의 큰누이가 살던 집이 있던 방향은 과수원이 들어서 있었다.
학교가 있는 마을로 이사를 나왔다. 새마을 운동이 잘 되어서 초가집이 아니라 스레트 지붕이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한글을 배웠다. 사람이 배우는 다른 많은 것들처럼 말과 글을 배우기에 적합한 시기가 있다. 말은 생각을 음절 기호로 표현하고 글은 말을 다시 형상화한다. 배열된 문자기호를 음절로 치환하고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작업이 훈련된 무의식으로 지금은 자연스럽다. 글을 배우고 더듬거리며 교과서를 읽었다.
창틀에 학급 임원 어머니들이 사 보낸 작은 화분과 어항이 있었다. 어항의 금붕어는 한 마리씩 죽어 나가고 개울에서 잡아온 버들붕어와 올챙이들이 헤엄쳤다. 그 옆에 작은 한 칸 짜리 작은 책꽂이에 학급문고라는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어느 순간 학급문고의 책을 읽는데 재미를 붙였다. 위인전과 모험소설을 읽으며 즐거웠다. 언젠가 나도 하는 꿈을 가졌다.
소년 간첩이 귀순해서 간첩단들과 싸우는 내용만 기억나는 책이 있다. 연잎을 밝고 물 위를 달리고 한달음에 벽을 넘어다니는 일지매 같았다. 수련법이 의외로 단순했다. 물 위에 판자를 띄워놓고 빠르게 달음박질을 하면 물에 빠지지 않고 못을 건널 수 있다. 익숙해지면 판자를 얇은 것으로 바꾸고 나중에는 신문지 한 장을 밟고도 물을 건넌다. 도약력을 키우기 위해 옥수수 대를 심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백번씩 넘다 보면 어느 순간 지붕만큼 커진 옥수수를 넘어다니게 된다.
무공비급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마당에 세숫대야를 가져다 놓고 물을 받고 신문지를 여러 장 펼쳤다. 양은 세숫대야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물먹은 신문지에 발이 빠지고 세숫대야에 걸려 엎어졌다. 원래 연못에서 하는 수련인데 세숫대야로는 잘 안되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옥수숫대 대신 비슷한 키로 자라는 해바라기를 넘기로 했다. 무릎 높이의 해바라기를 몇 번 뛰어넘었다. 비가 며칠 오고 해바라기가 키만큼 자랐다. 비 오는 동안에도 꾸준히 했었으면 저걸 넘어다닐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못내 아쉬워했다. 훗날 조정래의 <아리랑>에서 비슷한 대목을 발견했다. '어라 이 양반도 약을 파시네.'
글을 읽는 건 즐거운 일이다. 책을 여는 순간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티비 만화가 더 좋지만 티비가 없었고 티비가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가더라도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을 듣지 않으면 만화를 볼 수 없었다. 저녁을 준비하는 굴뚝 연기 앞에서 마음을 졸이며 어린 나이에도 구차함을 느꼈다. 티비가 생겼다. 어떤 인연으로 중고 티비가 집으로 왔다.
개구리 왕눈이와 <미래 소년 코난>을 보고 학교 친구들과의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만화영화를 보지 않고 뉴스를 보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플란더스의 개> 마지막 편을 보고 엄청나게 울었다. 마을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네로가 불쌍하고 파트라슈가 가여웠다. 초가집 지붕 색이던 유년 시절은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대덕군의 작은 산자락 마을로 이사를 했다. 수도는 없었지만, 전기는 있었다. 만화영화 할 시간이 되어 티비를 콘센트에 꽂았다. 좋아하던 프로가 있었던 것 같다. 티비 전원이 들어오길 기다리던 순간의 흥분과 설렘은 모니터에 섬광과 퍽 하는 소리와 고무 타는 냄새로 부서졌다. 전압이 달라서 가전제품을 사용하려면 도란스를 사용해야 했다. 티비를 날려버린 후회와 자책감에 괴로워했다. 다음 티비를 자력으로 구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어쩌면 꽤 많이 걸린 것 같기도 하다.
아직 국민 학생이었다. 아이답게 전학 간 학교에서 금방 적응했다. 예전 학교의 친구들이 기억이나지만 인상적인 친구 몇 말고는 잊혀졌다. 장난을 치다가 약이 오른 친구에게서 “너 네 엄마 미쳤다며” 라는 말을 듣고 얼음이 되었다. 가슴 언저리에서 얼굴로 싸하게 얼음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 엄마가 너네 엄마 미쳤다고 너랑 놀지 말래” 퍼석하는 얼음 깨지는 소리가 내 귀에만 들렸다.
엄마가 서울로 돈 벌러 가서 할머니랑 사는 친구랑 어울렸다. 책가방의 어깨끈이 끊어졌다. 다행이 손잡이가 있었다. 학교 가는 시간. 왼손. 오른손. 손이 아플 때마다 팔을 바꿨다. 비 오는 날은 학교에 우산을 쓰고 가도 풀잎에 맺힌 물방울 신발을 적셔서 걸을 때마다 신발 속에서 뿌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매번 엄지발톱에 흙물이 에스자로 그려진 것이 태극기의 태극무늬 같았다.
기찻길을 따라 등교하다 레일을 침목에 고정시키는 커다란 철 못을 숨겨둔 무더기를 발견했다. 가방이 더 무거워졌지만 쇳덩이를 매번 가방에 넣어서 집에 왔다. 엿장수가 마을에 오는 날 엿을 먹고 싶었지만 빨래비누로 바꿨다. 그즈음에 복돌이가 죽었다. 네로는 파트라슈랑 죽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미안했다.
현실은 우울했고 탈출구가 필요했다. 책을 열면 펼쳐지는 이야기는 몰입하면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그 시절엔 책을 구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읽을 책이 없을 때는 언젠가 학교에서 상으로 받은 작은 국어사전을 읽었다. 아무 곳이나 펼쳐지는 대로 읽기도 하고 부록으로 정리된 속담과 사자성어의 뜻풀이를 읽기도 했다. '개 씹에 보리알' 같은 속담 풀이를 읽으며 키득거렸다. 어떤 현상이든 사람이든 어떻게든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자 하는 버릇이 이때 생겼지 싶다.
불안정하게 삐걱이던 가족이 해체되었다. 중학교는 학년마다 학교를 달리 다녔다. 어느 곳에서는 조금이나마 사랑을 받았고, 어느 곳에서는 학급의 일부에게 이지메를 당했다. 단둘이 있게 될 때는 개인적으로는 악감정이 없음을 말하면서 다수가 되면 웃는 얼굴로 샤프심을 등에 찔렀다. 그 애들끼리는 유대감을 돈독해지는 것 같았다. 반항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응징은 더욱 가혹했다. 보호막이 없다는 심리적 위축감은 고통을 감내하도록 했다.
외가 쪽 친척 형이 자취하는 집에 몇 달간 신세를 지기도 하고, 친구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갈 곳이 없으면 잠기지 않은 학교 창문을 열고 들어가서 책상을 붙여놓고 잤다. 학교에 다니지 않은 시기에는 다리 밑에서 자거나 역전을 배회했다. 어떤 경찰은 방범 초소 같은 곳에서 바지를 벗기고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렸다. 아픔보다는 모욕감이 컸다.
다른 경찰에게 잡혔을 때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반찬용 소시지 몇 개가 나왔다. 경찰의 추궁에 범행을 실토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남의 집에 배달되는 우유를 훔치고 시장에서 소시지를 훔쳤다. 이번 경찰은 때리지 않았다. 가게 주인은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 소년원이나 복지원에 가는 대신 할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해 인계되었다. 좋은 경찰도 만났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다. 이제 할아버지 댁에는 내 편이던 할머니가 없었다. 농사일을 더 많이 하는 작은 아버지에게 집안의 권력이 넘어가는 중이었다. 어릴 적 기억엔 큰 나무 같던 할아버지는 작은아버지의 눈치를 봤다. 작은아버지는 내가 논산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나와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 직계 부양가족이 생긴 가장이 상속권자를 경계하는 듯했다.
몇 달을 눈칫밥을 먹었다. 어디선가 아버지가 나타났다. 경기도 시흥으로 따라 올라왔다. 어머니는 행방을 모르고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다. 갈 곳이 없어서 모르는 척했다. 어린 나이에 거리는 춥고 배고팠다. 운이 좋았다. 삼 형제 중 맏이라는 점이 이점으로 작용했다. 중학교를 다시 보내주었다. 그 사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어린 묘목이 옮겨 심어지면 새 땅에 뿌리를 내리는 데 3배의 힘이 필요하다. 따로 써레질이 되어있지 않아도 옮겨 심어지는 대로 빠른 적응을 해야 했다. 마음속에서 뭉쳐지는 독기를 함부로 표현하지 않는 영악함을 갖췄다. 피동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현실에 순응해야 했다. 아직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사람은 다른 유인원에 비해 미숙하게 태어나고 유년기가 길다. 유전자의 98%가 같은 침팬지와 비교하면 외형적인 모습은 늙어 죽을 때까지 유년기의 모습이다. 포유류는 유년기에 왕성한 호기심과 뛰어난 학습능력을 보이다. 살아가기 위해 배워야 할 일들을 유년기에 학습해야 한다.
한 학년에 한 반인 사립 중학교였다. 적당한 통과의례를 거친 후 비로소 함께 자랄 또래 친구가 생겼다. 일년에 한두 번 그중 몇몇과 연락을 하고 얼굴을 본다. 어머니가 나타나고 다시 아버지가 사라졌다. 월세 낼 돈이 없어져 집을 비워야 했다. 학교라는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 끈이 끊어지면 다시 차가운 거리로 가야 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는 신분이 보호막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뼈가 시리게 느꼈다.
돈이 생기는 일을 찾았다. 방학 때 구로공단 작은 수공업 공장에서 납땜 일을 하다 몸살에 걸려 며칠을 앓기도 했다. 한사람 몫을 하기 아직 버거운 건설 현장에서 자리를 얻은 건 절박한 이야기를 들은 친구 아버지의 호의였다. 일산 신도시 건설 현장에서 반생이를 묶고 파이프를 날랐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하우스에 살던 친구 집에서 발견하고 그때 읽었다.
그때 겨우 만진 목돈으로 다른 자취생에게 얹혀살던 처지를 벗어났다. 보증금 20만 원에 월 3만 원짜리 방을 외발산동에 얻었다. 강서 면허시험장 뒤에 있었다. 흙벽에 얇게 시멘트를 바르고 쓰레트를 올린 집이었다. 삶에서 나만큼의 행운을 얻지 못한 둘째 동생과 함께 살기로 했다. 막내는 강원도 어디쯤 가 있다고 들었다.
가족이 해체되고 혼자 '붕' 떠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제법 사는 집 아이들이 유학을 가는 것처럼 가난하고 사연 있는 집 아이들은 나이가 차면 본능적으로 가출을 한다. 비슷한 사연을 가진 아이들이 우리 보금자리를 쉼터로 삼았다. 들고양이 같은 아이들이 서로의 온기가 필요했다.
학생의 신분으로 어울리는 또래집단의 평온함에 이질감을 느낀 것처럼 내일이 없이 오늘만 사는 들고양이 같은 불량청소년 그룹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다. 삼국지를 다시 읽고 은하영웅전설을 읽었다. 비바람을 막는 거처에 책을 모으려는 욕심이 생겼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들고양이들이 지목되면서 그나마 소속감을 느끼던 하나의 그룹이 소멸했다. 훗날 알고 보니 그 시절에는 잡힌 범죄자만큼 만들어진 범인이 흔했다. 방범알바를 하던 고시생 형과 집 주인아저씨가 경찰에게 나에 대해서만 호의적인 증언을 해주었다.
가출을 단행 할만큼 여물기 전에 제도권의 사각지대로 사라지는 아이들에게 새겨지는 상처는 보통 비극이 된다. 다른 몇몇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동생에게도 비극이 자랐다. 결핵에 걸렸다. 각혈을 하고 보건소에서 준 약을 한 주먹 먹고 헛구역질을 했다. 고 3이 되도록 버텼지만, 학업을 포기하기로 했다. 학교에서 만난 인연들에게도 온전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제법 괜찮은 성적을 받았던 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모자란 출석일 수에도 불구하고 제적당하지 않고 졸업장이 나왔다. 출석체크에 빈자리를 가리고 대답을 하던 아이들의 거짓말과 알고도 속아주시던 선생님들과 관심이 없어서 몰랐던 선생님들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최종 학력이 고졸이 되었다.
영등포역 앞의 불법 성인 오락실에서 일했다. 그때쯤엔 에스에프 소설에 빠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독한 척을 해야 버틸 수 있었다. 책은 독기가 스스로를 갉아먹는 것을 막아주고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 피부의 색과 패턴의 변화로 대화하는 외계 지성 생명체의 설정에 감탄했다.
생각지도 못하던 군대에 가게 됐다. 막연하게 당연하게 군대에 안 가게 될 줄 알았다. 무얼 어떻게 할지 가르쳐주는 어른이 없었다. 아직 동생이 완전히 낫질 않았다. 논산에 할아버지가 아버지 이름으로 남겨놓은 논이 있었다. 그때 시가로 700만 원쯤 되기 때문에 군대에 가야 한다고 했다. 이사를 자주 다닌 만큼 주소변동이 많아 입영통지서를 삼 일 전에 받았다.
병무담당자는 헌병대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102보에 입소해서 사정을 이야기하면 잘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다시 만나고 2년 남짓 함께 살았던 동생에게 통장과 막도장을 주고 군대에 갔다. 나의 성장 과정과 가치관 애로사항을 시키는 대로 수십 통은 썼다. 관심 사병이 되었다. 포기하기로 했다.
105 주특기를 받았다. 자대에 도착하고 혹한기 훈련을 받았다. 발이 맞지 않는 군화는 물집이 터져 피범벅이 되고 안에서 질퍽거렸다. 박격포 포판을 결속했던 끈이 끊어졌다. 제일 큰 문제는 체격과 체력이었다. 행군대열에서 조금씩 처지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백양치 고개에서 심리적으로 무너졌다.
고개만 넘으면 숙영지였다. 분대장급 고참병 하나가 나를 책임지기로 하고 남았다. 대열에서 점점 멀어졌다. 간부들이 보이지 않자 겨냥대를 들어 때렸다. 소처럼 맞으면서 욕설과 푸념과 그 사람 나름의 인생 철학을 들어야 했다. 그 일로 눈 밖에 났는지 내무반 생활에서 몇 번 더 맞았다. 전역하기 전날 불편한 표정으로 다가와 자신에게 할 말이 없냐고 물어 왔다. 끌려오지 않았으면 만나지 않았으면 사람이었고 짓눌리지 않았으면 서로를 미워할 일도 없었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처음 겪어보는 서열과 위계 문화에 적응했다. 입대한 날짜가 빠르면 상위 서열이 되고 하위서열에 스트레스를 발산할 수 있었다. 잠들기 전에 한 시간 동안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욕을 하는 놈도 있었고, 만원이 안 되는 월급을 모아 두었던 걸 훔쳐가는 놈도 있었다. 동기가 잠을 못 자게 하던 다른 고참병의 머리를 돌로 찍었다. 잠자리에서 한 시간 동안 귓가에 욕을 하는 일은 사라졌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관등성명을 대고 복명복창을 했다. 사소한 명령에도 헐떡거리며 뛰어 명령 수행에 열심인 모습을 보여주고 하위서열의 충성심을 입증해야 했다. 짬이 안 돼서 책을 읽을 수는 없었다. 화장실에서 <좋은 생각>을 읽었다.
얼굴이 까맣게 타고 목이 쉬었고 체력이 붙었다. 정답은 없지만, 다수가 말하는 군인의 모습에 가까워졌다. 누군가는 좋아했고 누군가는 가식적이라며 싫어했다. 상병진급을 하도록 면회기록이 없어 계속 관심 사병이었다. 교육파견에서 사단장표창을 받았다. 가끔 모범사병이기도 했다.
국회의원 선거 때문에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실을 알았다. 벌금을 내고 주민등록을 살렸다. 그간의 시간에 대한민국 군인이 아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임병에게서 소원 수리가 들어갔다. 비오큐로 나를 부른 소대장은 자신이 취해야 할 조치를 설명했다. 자신의 입장을 납득시키려하는지 나의 잘못을 인정시키려 하는지가 모호했다. 후임병의 소원 수리는 과장되었지만 아주 없는 내용은 아니었다. 응당한 징계야 받겠지만, 별일 아닌 거로 소란을 떠는 모습이 서운했다. 내심 정이 들었었다.
입대 후 처음으로 짚차에 탔다. 포승줄에 묶여 헌병대에 끌려갔다. 영창 생활 후에 전출을 갔다. 새로운 부대의 대대장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용히 있다 전역을 하라' 했다. 독기가 아직 덜 빠지고 악이 남아있었다. 병사들과는 잘 어울렸지만, 간부들은 거리를 두는 것이 느껴졌다. 상황에 적응했다.
소대장이 전출 간 부대로 면회를 왔다. 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면회였다. 자신도 군과 맞지 않아서 연장하지 않고 제대를 할 거라고 했다. 유학을 갈지도 모르겠지만, 전역 후에 연락하라고 연락처를 받았다. 허세를 부렸지만, 각자의 위치와 처지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군 생활에 새삼 염증이 느껴졌다. <진중문고>를 읽었다. 막사마다 돌아다니며 안 읽은 책을 찾으면 빌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남은 날을 책을 읽다 제대할 줄 알았다. 비상이 터졌다. 강릉에 잠수함이 좌초하고 무장공비가 강원도에 풀렸다.
소총 실탄 140발과 수류탄 하나를 배급받았다. 수류탄과 실탄을 배급받은 모습을 내 모습을 보고 중대장은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별말은 없었다. 진급욕심이 과한 사람이었다. 간첩이 지난다는 첩보가 있는 길목을 노리기 위해 타 부대의 총구 앞으로 부대원들의 전진 배치시켰다.
저녁엔 배치받은 자리에 참호를 팠다. 어슴푸레한 시간에 중대장이 참호상태 점검을 나왔다. 암구호를 물었다. '중대장이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탄약을 약실에 소리 나게 장전하고 다시 암구호를 물었다. 무게를 잡던 목소리가 급하게 바뀌고 암구호가 튀어나왔다. 무전병과 어색한 표정으로 올라온 중대장은 경계 자세와 참호의 위장상태를 칭찬했다. 49일의 대간첩작전이 끝나는 날까지 중대장은 참호순찰을 하지 않았다.
작전이 끝나고 부대에 복귀하는 날 겨울비가 내렸다. 부대원들은 연병장에서 속옷 하나만 남기고 옷과 군화를 벗었다. 중대장은 비를 피해 사라지고 불편한 표정의 소대장과 부소대장들은 알몸으로 겨울비를 맞는 부대원들에게서 꽤 오랫동안 은닉탄을 찾았다.
전역을 했다.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돈을 받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팔아야 한다. 누군가는 자존심을 팔고 누군가는 양심을 판다. 가진 재주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팩키지로 묶어서도 판다. 노동력을 파는 삶이 그나마 몇 안 되는 친구들에게 당당할 것 같았다. 경기도 안산에서 염색공장에 다니기로 했다.
법적으로 성년이 된 동생은 함께 살자는 말을 거절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막냇동생이 함께 살기로 했다. 훗날 머리가 굵어지고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된 뒤에야 막내가 그 시절 내가 많이 불편하고 어려웠다고 고백을 했다. 약해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날이 서 있었다.
쉬는 날이 거의 없이 주야 2교대 근무를 하며 만성피로와 근육통으로 시달렸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노동으로 조금씩 가중되는 근육통은 가난하지만, 당당하게 살기 위해 지불하는 댓가 였다. 도서대여점에서 장르소설을 빌려 읽고 월급을 받으면 서점에서 대하소설들을 한 권씩 사 모았다.
친구 어머니에게 친구의 여동생이 결혼한다고 결혼식에서 일손을 거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달력을 보니 일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완고하고 융통성이 부족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들과 관혼상제의 의미에 대해 무지했다. 군에 있는 아들 대신 아들 친구에게 부탁하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읽고 있는 책들과 읽은 책들은 아직 지속되는 유년기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뿐 실생활에 적용하는 데에 무용했다.
섬유 쪽 경기가 안 좋아졌다. 회사에서 인력 구조조정을 했다. 직급과 나이로 서열 잡이를 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타인과의 눈 마주침을 피했다. 사직서를 쓰고 회사를 나왔다.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주고 여행이라도 해볼까 했다. 어린 시절 살던 마을을 찾아갔다. 황금빛 유년의 기억이 있던 마을은 기억에만 있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의 제제가 소리 내지 않고 머릿속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앞으로는 여행을 글로 떠나기로 했다.
친구에게 온라인 게임을 배웠다. 투입되는 노력만큼 돌아오는 보상에 중독되었다. 덕분에 눈으로 보고 쳐야 할망정 타자를 배웠다. 몇 달간 빠졌다가 현실과의 괴리감에 흥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읽을 책이 정 없을 때나 접속하게 됐다. 동생이 죽은 후부터 게임에 접속하지 않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을 피해 달아나고 싶지 않았다. 동생이 남긴 유품은 별것 없었다. 나침반 하나와 피다 말은 담배, 옷가지 몇 개와 신발. 타인을 통해 전해 준 미안하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이 적힌 메모장이 담긴 허름한 가방이 유품의 전부였다.
군대를 가지 않았으면, 막내 고모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으면 하고 죄책감을 돌리기 위해 변명을 찾았다. 유일한 사치로 조그만 책장에 탐나는 책을 모으던 것들이 미안했다. 모으던 책을 다른 이들에게 주어버리고 남 주기 뭐한 잡서들은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들에게 드렸다. 책은 버렸지만 글 읽는 습관은 버리지 않았다.
파카한일유압 사태가 터졌다.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1~2년 터울로 김진숙을 세 번 만났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이제 와서 노동자들이 승리한다고 말을 못 한다며 책을 많이 읽고 세상과 사람을 공부하라고 했다. 세 번째는 손이 시리다고 마이크를 맡겼다.
김진숙의 변호사였던 노무현이 죽었다. 공부가 덜된 사람은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 바닥을 보이기 쉽다. 정치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권력의 정점에서 오만하지도 천박하지도 않았다. 서열문화에 너무 익숙한 사람들은 약자에 대한 겸손과 강자에 대한 당당함을 이유로 싫어하는 것 같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죽기 전에 힘들고 괴롭다는 표현으로 책을 읽을 수도 없다는 말이 파고들었다. 글을 읽을 수도 없을 정도의 고통은 단 한 번 겪어보았다. 그의 글 읽기가 나의 글 읽기와 같지는 않겠지만 죽음이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코딱지만 할 때부터 자라는 것을 지켜보던 아이들의 바람막이가 되어주기로 했었다. 조용히 살다 조용히 간다고 생각했는데 인연이 그렇게 닿았다. 아이들을 어떻게든 건사하려는 여자가 세상을 너무 몰랐다. 집사람은 인연의 끈을 더욱 단단히 매고 싶었나 보다. 아이를 가지려고 몰래 노력했다. 잘 되지 않았다. 우는 모습이 애처롭지만 아이들 생각하면 잘된 일이다.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부족하지도 않으리라는 생각은 오만했다. 사람이 사람을 품는다는 건 부모와 자식 간에도 힘든 일이다. 서로 기대고 산다. 지나고 보니 힘든 시기에 오히려 가족이 된 그들이 모닥불 같은 존재였다.
묻는 이는 드물지만, 여전히 취미는 독서다. 독서를 현인들과의 대화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에게 독서는 여행이다. 읽는 순간이 즐거운 글이 있고 여운이 남는 글도 좋다. 아직 깊이는 부족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과 생각의 폭이 조금은 넓어졌다고 느낀다. 삶에 정답은 없다. 덕분에 가난이 그렇게 불편하거나 불행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범우
편집: 딴지일보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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