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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좋지 않은 음식은 왜 이리도 매력적일까? 위험한 사랑은 더 달콤하고, 고수익의 유혹엔 늘 탈법과 불법의 굴레가 있지. 때로 그런 선택이 몸에 좋다던 것보다 유익한 경우도 있고 상식을 파괴하는 시너지가 발생하기도 해. 치명적인 단점만 극복해내면 커다란 이익이 생기니까.


정치적인 선택도 때로 그런 성향이 강하지. 멀쩡하고 멋진 사람보단 굴곡도 있고 결격사유도 있으나 흠결을 넘어 강렬한 매력을 내뿜는 사람을 지지하기 쉬워. 특히나 세상이 평준화되어 그놈이 그놈 같은 지금 시대라면. 학력이나 사회적 위치가 고만고만할 때엔 더더욱 위험하고 투박한 야성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지.


미지의 꼴통력을 품은 사람이 도련님들을 쉽게 꺾어버리는 게 정치판인거 같어. 엘 고어가 부시에게 깨진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싶고. 알콜중독을 극복한 찌질이가 승리한 거니깐. 엘리트 정치인들이 경선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졌던 이유에도 거친 야성에 있지 않을까?


요즘 세계 여러 국가들의 선거결과가 평범함과 상식적인 것을 넘어서고 있어. 업적이나 사회적 평판을 한 번에 뒤집고 승자로 올라선 꼴통들이 대중의 마음을 뺏고 있지.


10일(현지시간), 그런 꼴통 하나가 이웃나라에서 승자가 되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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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두테르테 다바오 대통령 당선인


필리핀 다바오의 왕, 로드리고 두테르테 다바오 시장. 파격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지지를 얻은 그가 어떤 꼴통력을 가졌는지 살펴보자.



망이 스민 부패한 대지를 뚫고 올라온 마지막 싹. 독초인가? 약초인가?


필리핀은 부패한 공무원, 지방 토호세력을 가진 나라야. 한국보다 서민이 살기 어렵고, 수도권 외에는 농업기반의 사회라서 대형지주들이 왕처럼 군림하고 있지. 봉건시대에 가까운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어. 대를 이어 공직에 오르고 주요 권력을 몇 집안이 나누어 갖지. 민주주의 체제고 선거를 통해 공직자를 선출하지만, 늘 같은 집안의 사람이 상원, 하원, 주지사, 시장, 면장 급까지 당선 돼. 아주 적은 비율의 예외를 뺀다면 호족들의 나라라고 보는 게 쉬울 정도로.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대중들의 개혁을 향한 바람(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현재 집권하고 있는 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의 치세동안 극단적으로 흐를 만큼 악화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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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그노 노이노이 아키노 대통령


부의 편중이 더욱 심해지고 경제적 무능과 물가상승으로 생활고가 더해졌거든. 고작 작은 다리 하나 만드는 예산이 열배쯤 들어가야 하는 상태인 채로 수십 년째 고통을 받다보니 부패척결에 대한 바람이 터질 지경이 됐어. 하지만 그걸 해내리라 생각할 정치인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된 거야.


초창기의 위대한 대통령 막사이사이는 토지개혁을 추진하며 대지주의 기득권을 침해한 탓에 수상한 비행기 사고에 의해 실질적인 암살을 당했지. 주요 집안이 거머쥔 정치판에서의 작은 변화를 꿈꾸며 선출되었던 서민출신인 조지프 에스트라다는 미심쩍게 조기실각을 했고, 사람들이 열망하는 개혁의 가능성은 예전에 물거품이 되었지.


이런 부패의 대지, 경고한 기득권 체제에서의 ‘개혁’은 역사에서도 보여주듯 기득권 내에서 개혁인사가 튀어나와야만 기대할 수 있지. 하지만 기득권이 자기 스스로의 편의를 포기하리란 것은 돼지가 다이어트하고 닭이 아침에 울지 않길 바라는 것과 같거든.


그런 미약한 가능성, 불가능해 보였던 것이 가능하리란 희망으로 다가온 것이 이번 선출된 새로운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야.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 섬, 유명한 대도시 다바오 지역의 왕이라고 해야 이해가 빠를 거야. 태생부터가 그 지역 주지사 아들이지. 성격이 원체 난폭해서 권력자의 아들임에도 학교에서 여러 번 쫒겨 날 정도였다고 해. 선출직인 시장으로 시작한 이래 다바오의 권력을 독점하고 권력을 완성했지만, 다른 권력자들처럼 부패에 취해버린 게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와 같은 다바오를 필리핀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만들었어.


필리핀에서 거리흡연이 금지된 도시이고, 마약관련 범죄자가 죽어야하는 곳이며, 관광객을 상대로 벌어지는 바가지 요금 등을 단속하는 유일한 도시를 만들었지. 개인 사병단을 가지고 있으며, 범죄자이거나 범죄자로 추정된다면 경고와 추방, 처형 등을 통해 해결해버리는 과단성. 물론 본인이 이런 일을 시인했다가 부정했고.


공식적으론,


“나는 절대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라고 하지. 대중들은 그에게 초법적인 방식을 기대하는 것 같고, 기득권은 “이제 미친놈이 되었으니 큰일”이라며 대책을 세우고 있겠지. 주요 지배자 그룹인 ‘하시엔대로’라 불리는 대지주들의 안정적인 기득권을 어떻게 부숴나갈지 다들 기대할 테고. 초법적인 처형으로 한 도시는 일궜지만 과연 여러 욕망이 복잡하게 공존하는 국가의 운영을 자신의 의지만으로 해나갈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해. 대중은 무능한 정치권과 부패한 공무원을 해치우라며 그의 손에 정글도를 쥐어줬는데, 그 칼의 방향이 기득권을 향할 지 대중의 자유에 향할 지 알 수 없고.


두테르테의 임기 시작은 7월 취임일부터가 될 거야. 그 때부터 본인의 공약을 수행하겠지.



<Mayor Rody Duterte's Promise to Filipino People When He Becomes President>

(편집자 주- 아래 내용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힘)


공약이 좀 과격한데,


“대통령이 되면 모든 범죄자를 처형하겠다.”


“범죄자 10만 명을 죽여 물고기 밥이 되도록 마닐라 만(灣)에 버리겠다.”


“마약상을 수용할 장례식장이 더 필요할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대통령 자리가 될 것.”


“자식이라도 마약을 하면 죽이겠다.”


이런 공약을 하다니 진정 ‘맙소사’지. 다바오 시장은 그의 딸이 이어받거나 할 거야. 이게 필리핀 정치의 전형이거든. 연임제한을 피해 가족이 번갈아가며 다스리는 왕국의 형태.


필리핀에 8년 거주한 나는 이런 대통령을 뽑은 필리핀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이해되지만, 기사 제목을 보면 한국 언론들은 이해를 못하는 듯 해.


'필리핀의 트럼프' 大選 70년만의 최대 파란  <프리미엄조선>
필리핀 대선 투표…'트럼프식 막말' 주자 대권 손에 쥐나  <연합뉴스>
필리핀 오늘 대통령 선거, '필리핀판 트럼프' 유력?  <MBC NEWS>


뭐, 우리나라 기자들에게 큰 기대가 없기도 하지만, 오픈된 정보로 볼 때 제목이 무리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이렇게 필리핀 사람들은 수십 년의 분노, 열망을 담아 이제 쉽게 꺾이지 않을 지방 호족 출신의 기득권 안의 반항아를 뽑아 올렸어. 그 기대를 6년간 확인하겠지. 기대감만으로도 몇 년 쯤 행복할 수도 있고, 실망감으로 인해 나락에 잠길 수도 있겠지.


트럼프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트럼프는 ‘아가리 파이터’고 두테르테는 행동대장 타입이라서 적합한 비교는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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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l our country's representatives can figure out what is going on."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의 정치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낼 때까지

무슬림에 대한 완전하고 완벽한 입국 금지를 요구한다"

(출처: <CNN>)



한국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필리핀 선거결과를 듣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한국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필리핀에서 8년을 살았다지만 난 두테르테가 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 2등을 한 로하스 내무장관과 3등을 한 그레이스 포는 같은 당 출신이고, 정치적 배후가 현 대통령인 노이노이 아키노였으니, 막판이라도 둘이 손 잡을 줄 알았거든. 역시 권력의 펌프질로 허파에 바람 빵빵하게 가득찬 두 사람은 끝끝내 그냥 승부를 해버렸고 내 예상은 틀렸지. 한국에 나와 있느라 세세한 관심을 두기도 어려웠고, 내 생활권이 한국으로 바뀌니 마음도 조금 멀어진 게 사실이지만.


이런 결과에 어쩌면 이게 시대의 조류일지 모른단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 대중의 적체된 답답함이 시원시원한 해결책을 보여주는 ‘야성’에 끌리는 시대인건가 하고.


한국의 야당 후보가 나와서,
 

“친일파와 그 후손의 재산을 박탈하고 직접적인 범죄사실이 있는 자는 공개처형하겠다.”


“부패한 공무원과 군 조직을 개혁하겠다.”


“법은 공정하게 부와 권력 여부와 관계없이 집행하겠다.”


“기득권의 시녀인 사법부를 바닥부터 개혁하겠다.”


“지난 정부 모두에 대해서 정치적 보복을 포함한 모든 응징을 하겠다.”


등 야성 넘치는 공약을 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난 과연 찍지 않을 온건함 쪽일까? 지지할 과격함 쪽일까?


스스로도 단정할 수 없어. 선거철이 주는 마력의 버프효과가 발동한다면 생각할 틈 없이 헌법이 유린되든, 소급불가원칙이 묵살되든, 사람이 사람을 죽여 처벌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지지하고 싶기도 하거든.


트럼프가 이대로 대통령까지 향한다면 미국은 자국을 우선시하는 내셔널리즘으로, 일본은 아베를 통해 헌법수정을 이끌어내고 정상국가를 표방하며 다시 영광을 바라보고 싶어 하는 전체주의로, 필리핀은 과격할지라도 현재를 소각해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 인물에게 기대는 전제 왕정의 시대로 가겠지.


내년의 한국은 어떤 방향으로 향할까? 세상은 기묘하게 변해가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지난 두 번의 선택으로 여러 고통을 견뎌가는 중이지. 그 고통이 다음 선택에 어떤 지장을 줄지, 우리의 선택은 앞서 선택을 끝낸 이웃 국가들과 얼마나 다르거나 닮을까.


필리핀의 선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공한다면 수십 년을 격하고 막사이사이 대통령 시대로 리셋 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거의 왕과도 같은 새로운 형태의 대통령제가 구축되겠지.


꽤 닮은 시대의 사건을 만든 필리핀이 한국에게 선행학습의 효과를 줄 수 있길 바라.


궁금해지는군. 1년 6개월 후의 대한민국 선거전, 기대만발 개봉작이야.
 



* 참고기사 및 자료

- "피비린내" 예고한 필리핀 새 대통령 두테르테의 놀라운 전력  <허핑턴포스트>

- [Cover Story] [아시아 민주주의 왜 흔들리나-필리핀] 뿌리깊은 부패 '피플파워'악순환  <한국경제신문-생글생글>
- 필리핀 대통령 선거, 두테르테 '모든 범죄자 처형' 공약 실천할까  <머니위크>
- 위키백과 '조지프 에스트라다'
- 필베이 '마마사빠노 사태와 로하스'



메이비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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