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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은 스페인, 미국 그리고 일본, 3개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필리핀은 1935년 미국의 독립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기 전까지의 32년간은 미국인 총독의 지배를 받는 명백한 식민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인들은 미국에 대한 한 올의 부정적 인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400년 간 지배했고, 미국은 40년 간 지배했고, 일본은 단 4년 간 지배했는데 식민지배에 대한 증오심은 일본에 집중되어있고 스페인에게 조금 남아 있을 뿐이다.


필리핀의 문화적 정체성은 미국에 더 몰려있다. 필리핀의 공식 언어 중 하나인 ‘타갈로그어’는 지리적으로 인접한 인도네시아와 스페인어가 이종 결합된 언어다. 스페인은 400년 동안 통치했음에도 스페인어를 필리핀의 공용어로 만들지 못했다. 반면 40년 동안 통치한 미국은 별다른 강제 없이 영어와 미국문화를 지배적인 언어와 문화로 만들었다.


언어는 민족의 정체성이고 문화의 기본이다. 그것이 변한다는 것은 민족이 변화하는 것만큼 힘들다. 그러나 필리핀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자신들의 문화를 버리고 미국에게 종속되었다. 필리핀이란 민족의 복잡성과 특징은 이에 있을 것이다.



일본의 필리핀 침공과 맥아더의 방어계획


1935년 11월 15일, 공식적으로 필리핀의 통치권이 필리핀 의회에 넘어간다. 미국의 참모총장이었던 맥아더(우리가 아는 더글라스 맥아더 맞다)는 필리핀 의회에 의해 유례없는 직위인 필리핀 총원수로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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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가 필리핀 점령군의 사령관이었던 터라 필리핀에서 자랐고, 이전에도 필리핀에서 군사 보좌역을 했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 이전 루즈벨트와의 마찰을 볼 때 식민지에서의 총원수라는 지위가 가진 의미는 분명 단순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맥아더는 필리핀 군 전체를 통솔하는 직위를 얻어 일본의 침공에 대비한다.


맥아더는 일본에 위협에 대비하여 전투기 250대 어뢰정 125대를 비롯한 10만의 병력으로 필리핀을 방어하겠다는 야심찬 방위계획을 짜지만 본국의 거부로 무산된다. 차선책으로 소수의 미국 정예군과 다수의 식민지 현지 민병대로 방어계획을 세웠지만 이 또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필리핀인들은 자발적으로 맥아더에 협조하여 미군의 방침을 따랐지만, 미국 정부의 생각은 따로 있었다. 미 정부에 있어서 필리핀에 대한 군사전략은 단순했다. ‘가능한 방어를 하지만 본토의 지원은 없으며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미군을 철수시킨다’는 것이다.


필리핀은 미국 본토와는 너무 멀리 있어 필리핀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일본의 점령 수역을 지나거나 지구 한 바퀴를 돌아야 했다. 어떻게 보면 이성적이지만 유사시 필리핀 민중들을 총알받이로 쓰고 버리겠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필리핀 자치정부와 맥아더 사이에 불화가 생긴다. 맥아더의 대규모 모병계획은 미국의 지원이 있어야 했지만 필리핀의 현지정부의 비용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오만했다. 당시 자치정부의 수반이었던 마누엘 퀘손(Manuel L. Quezon)은 자치권에 증대에 대한 요청이 묵살되자 다른 방안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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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퀘손


퀘손은 필리핀-미국 전쟁에서 명성을 얻었다.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항복한 후, 미국통치기인 1907년 자치의회에 진출해서 민족주의 정당을 이끌었으며,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필리핀 독립약속을 받아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필리핀의 민족주의자로서 미국에서 필리핀의 점진적 독립을 주장하며 성장한 사람이고 누구보다 필리핀 민족을 사랑했던 정치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민족주의자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필리핀 민족주의의 복잡성은 여기에 있다.


퀘손은 일본에 비밀특사를 보내어 필리핀의 중립국화를 약속받았고 필리핀군을 통제하려했다. 전쟁 바로 전인 1940년과 1941년의 필리핀의 국방예산은 급격히 축소되었으며 맥아더가 세운 방어계획은 무력화되었다. 전쟁 발발 당시 필리핀엔 25,550명의 방어 병력이 있었고, 문서상 예비대로는 76,000여 명이 있었다. 하지만 문서상의 병력은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지원과 보급은 빈약했다.


일본의 파생공세로 필리핀과 미국군은 방어 5개월 만에 말 그대로 몰살을 당한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선견지명 덕분인지, 군 몰락 직전에 맥아더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배치되어 떠난다. 그는 떠나면서 필리핀인들에게 “I shall return(언젠간 돌아오겠다).”이라는 역사적인 워딩을 남기는데, 이로 인하여 이후에 맥아더가 일본 저항운동의 상징이자 반신반인이 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식민통치가 온정주의적이었던 건 미국이 특별히 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20세기 미국에 있어서 필리핀 식민지의 경제적 가치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필리핀 경제근간은 지방에서 상업작물을 재배하는 대농장들과 도시의 동아시아 무역거점에 있었다. 이 동아시아 무역거점은 중국과의 유럽을 잇는 무역 거점으로, 유럽에 있어서는 유용했지만 지구를 반대로 돌아야 하는 미국에게는 그리 유용하지 못했다. 필리핀 대농장의 토지라고 해도 미국 본토의 남아도는 토지가 더 유용했고, 자국 내의 이민자와 제조 산업만 해도 과잉인데 물류비도 많이 드는 필리핀에 공장을 또 만들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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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일본 / 필리핀-미국

물리적인 거리부터가 이만큼이나 차이나 버린다


반대로 일본이나 스페인에게 필리핀은 매우 유용한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스페인에 있어서는 아시아 무역과 진출의 거점이었고, 일본에 있어서는 고무 등의 천연자원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패권을 방어하는 군사적 의미도 있었다.


미국에게 필리핀은 직접통치하여 이익을 짜내기에는 매력적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내버려두거나 남에게 주기에는 경쟁국들이 그 땅을 가졌을 때 얻는 이익이 너무 컸다. 그런 결과 나온 것이 온정주의적 식민지배 정책이었다.


미국은 필리핀과의 전쟁이 끝난 후 필리핀에 대중 교육과 의료체계를 세우고 그를 위한 막대한 양의 원조를 한다. 그리고 시장 확대라는 목적에서 필리핀 경제를 미국에 묶어 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배가 필리핀인들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킨다. 이것이 필리핀인들이 미국에 그토록 충성적인 이유다.



일본 지배와 바탄에서의 죽음의 행렬


필리핀인들에게 있어서 일본은 먼 나라였다.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일본의 프로파간다에 일부의 정치인들이 끌리긴 했고, 미국의 오만함에 대한 반감도 있었지만, 그것이 친일협조자들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식민지배에 대한 필리인들의 잘못된 생각이 더 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40년의 미국 식민지배기간 동안 필리핀인들에겐 강제적으로 자학적인 역사관이 주입되었다. 식민지배가 필리핀인들의 경제적 정신적 수준을 높였고, 미국의 보호 하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의존적 사고가 팽배했다. 아마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안에 들어가는 것도 크게 다를 것이 있을까’ 하는 게 친일파들의 지배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1941년 12월 26일, 맥아더는 마닐라에서의 포기를 선언하고 바탄에서 최종 방어선을 짜겠다고 한다. 1942년 1월 2일, 일본인이 마닐라에 저항 없이 진주한다. 다음날 3일, 일본군 사령관의 미국점령과 미국에 의한 계엄령 철폐가 선언되었고, 필리핀인에 의한 필리핀 지배를 선전하는 선전물이 배포되었다. 하지만 군사장교들에 대한 복종이 요구되었고, 일본군의 요구는 무엇이든 들어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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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2/31 <Minneapolis morning tribune>

"일본인(Japs)이 마닐라를 궁지로 몰아넣다"


필리핀 자치정부의 엘리트들은 일본이 마닐라를 점령한 직후부터 일본군과 접촉했다. 여기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 호르헤 B. 바르가스(Jorge B. vargas)였다. 그는 마닐라 시장이었으며 맥아더가 방어계획을 짜던 1941년도에는 국방장관을 지내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사태를 만들어 낸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다른 이들도 다를 게 없었다. 호세 라우렐(Jose P. Laurel), Claro M.Recto, Quintin Paredes, Jose Yulo 모두 미국의 식민통치 아래서 유명 정치인으로서 한자리씩 했던 이들이지만, 일본에 식민통치에 기꺼이 협력한다. 미국 식민통치 하에서의 자치정부와 일본 통치 하에서의 자치정부는 서로 직위가 바뀌거나 했어도 사실상 차이가 없었다. 이들은 1946년 이후에도 직위 등에 차이는 있을지라도 동일하게 지배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1942년 4월 9일, 미군과 필리핀 징병군으로 이루어진 약 7만의 군대가 바탄에서의 조직적 저항을 마치고 항복한다. 사실상 7만은 숫자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무기나 보급이 없이 미군 사령관의 계엄령 아래 징병된 필리핀 민중들에 불과했다.


일본군에 의한 대규모 포로수송은 잔혹했다. 일본에게 포로란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지는 대상이라기보다는 가축이나 물건에 불과했다. 굶주림과 학대, 97km에 이르는 행군은 2만 이상의 포로의 목숨을 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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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탄에서의 죽음의 행렬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의 야만성은 필리핀 민중들에 각인된다.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의 야만성을 선전했고 필리핀인들은 일본의 아시아적 가치를 야만과 동일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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