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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새벽 1시경 23세의 여성이 강남역 인근 술집 화장실에서 흉기에 찔린 채 발견된다. 발견자는 그녀의 남자 친구였다. CCTV를 통해 확인된 범인은 범행 장소 근처 식당에서 일하던 34세의 남성이었다. 범인은 여성들에게 자주 무시를 당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으며 (당 정보에 대해서는 경찰 공식 발표 없이 일부 언론이 오보를 낸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사건장소에 1시간 가량 숨어있다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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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잡혔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날 것 같지 않다. 범인이 밝힌 동기 때문인지 강남역 10번 출구 구조물에 포스트잇으로 조문, 헌화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고 인터넷 상에서 이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혐범죄다", "아니다. 정신병자에 의한 우발적 살인이다", "1시간을 기다렸다니 묻지마 살인은 아니다", "왜 죽은 사람을 이용해서 자기 논리를 펼치려 그러나"


초상집 조문객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걸 종종 봤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일 수 있다. 죽음만큼 명징한 것도 없다. 범인도 잡혔다. 범인을 향해 분노하고 희생자를 애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누가 그걸 굳이 상기시키지 않아도 한 마음으로 공감(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할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갈라졌다. 사건을 둘러싼 감정에는 애도와 범인에 대한 분노만이 아닌 공포와 혼란, 혐오가 더해졌다. 왜 이렇게 된걸까? 다각도로 분석해봤다. 




1. 첫 번째 논란 - 이것은 '묻지마 살인'인가


그동안 언론이나 전문가들은 '묻지마 살인'이라는 용어를 원한 관계나 금전적 관계가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행에 포괄적으로 사용해왔다. 보통 용의자를 추적할 때는 피해자의 원한 관계나 채무 관계 등을 살피는데 소위 '묻지마'라고 불리는 사건은 일반적인 추적 방식으로는 용의자를 특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 역시 피해자와 가해자를 잇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다. 범인은 CCTV에 찍혔던 범행 당시의 옷을 그대로 입고서 사건 현장에 나타난 덕에 잡아낼 수 있었을 뿐이다. 범인에게는 피해자를 살해함으로써 얻어지는 아무런 이익도 없었기에 그 대상은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그 시간 그 자리에 지금의 피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도 범인은 '묻지 않고'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기에 언론은 별 생각 없이 '묻지마 살인'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런데 이후 범인이 "한 시간을 숨어있으면서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는 것", "평소 여자들에게 무시 당해서 라는 범행 동기" 등이 보도되면서 문제가 생긴다. 이제 피해자는 '누구라도'가 아니라 '나보다 약한 여자'로 한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즉 개인으로는 직접적인 원한은 없지만 여성이라는 젠더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 한 명을 살해하였으므로 젠더사이드(Gendercide, 특정 성별자에 대한 살해)라고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묻지마 살인'이라는 용어가 사건의 본질을 가릴 수 있다는 논쟁까지 나아간 것이다. 


그럼 이 논쟁은 그냥 '묻지마'라는 용어의 어감과 실제 사용례가 보다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생기는 괴리 때문에 생긴 것일까? 


1차적으로는 그렇겠지만 들어가보면 좀 더 복잡하다. 여전히 '묻지마 살인'이라는 용어를 고수해야 한다는 쪽은 이 사건이 젠더사이드라는 주장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고 나서기 때문이다. '과연 범인이 젠더 의식(?)을 갖고서 범행을 저지른 걸까?' 여기서 두 번째 논란이 등장한다. 




2. 두 번째 논란 - 이것은 '여혐범죄'인가


(별로 가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 사건이 연쇄 살인이었다면 보다 범인의 정체성은 분명해졌을 것이다. 연쇄 살인은 계획적, 의식적으로 일어나고 그만큼 피해자들의 공통적 성격 또한 분명해진다. 이를 테면 혼자 사는, 젊은, 백인, 여자 같이. (실제 미국에서 일어난 연쇄적 젠더사이드의 95%는 백인 여성이 피해자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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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 사건은 계획적이나 의식적인 것이라고 보기엔 많은 부분이 어설프다. 범인이 한 시간을 숨어 기다렸다고 하지만 이 정도의 준비는 여러 유형의 범죄로 봤을 때 우발적인 것에 속할 수밖에 없다. 범행을 저지른 후에 급하게 계단을 뛰어내려가긴 했지만 이후에 범행 도구를 은닉하려는 시도도 없었고 다음 날 범행 장소 인근인 자신의 아르바이트 장소로 출근하기까지 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현병(정신분열) 환자란다. 과연 이런 사람이 자신의 젠더(남성)를 대표해 다른 집단(여성)을 파괴하겠다는 의식을 갖고 행동했겠느냐는 주장.


이에 대한 반박은 이렇다. 일단 정신병자라도 '약자'를 선별할 수는 있으니 애초에 여자를 목표로 잡은 이상 범행 대상은 여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때문에 범인에게 대표성이 없더라도 사건을 젠더사이드로 보기에는 무리가 없다. 


여기까지 듣고나면 얼핏 사건이 '여혐범죄'라는 쪽으로 결론이 나는 게 맞아 보인다. 그러나 '여혐범죄가 아니라 주장하는 측'은 물러서지 않는다.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절대다수가 약자이다", "정신병자가 약자를 살해한 사건을 여혐이라는 개념 아래만 가둬놓고 볼 수 있는가"


이를 부연하기 위해 많이 등장하는 비유가 범행 대상을 "여성 중 아무나"를 다른 약자, 즉, "흑인 중 아무나", "(외국에 나갔을 때)한국인 중 아무나" 같은 다른 집단으로 대체해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또 "미국에서 한국인이 총기 난사를 했다고 한국 교민 전체가 잠재적 범죄자 취급 받는 것이 온당한가"와 같은 반대 진영의 비유가 들이밀어진다. 


여기부터는 그야말로 개싸움이다. 여성을 노렸고 여성이 피해자가 되었고 여성이 공포에 떤다. 범인 개인의 감정만 놓고 본다면 이 범죄는 '여성혐오' 범죄라 불리기 충분하고 이에 대해 논란이 일 여지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범인 개인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 남성에게 여성 혐오가 만연해있는가', '이 사건이 그 보편적 감정의 결과인가'로 논의가 확장되면 대화는 꼬이기 시작한다. 


이 대화가 가능하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 '어디까지 여혐으로 볼 것인가'의 경계선이다. 아니, 그 전에 과연 '현재 대한민국에 퍼져 있는 여혐의 정체는 무엇인가'부터 정의를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체를 모르는 것, 규정되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지목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서는 아직 이 지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한 번도.


아무런 객관적 기준 없이 "나 이거 불편한데 여혐 아님?"하고 들이밀어지는 사건이 있으면, 그때 그때 개개인이 판단할 뿐이다. 이러는데 싸움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하다.




3. 세 번째 논란 - 너무 일반화하는 거 아닌가 


본 기레기는 과거 무리한 표현을 남발하다 여혐종자로 찍힌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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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기사 캡처

(링크는 해드리지만 별로 읽어보실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망한 글이라.)


이제와 변명을 하자면 당시에 썼던 표현은 대한민국의 여성혐오가 일반적인 차별/혐오의 정서와는 좀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차별의 스테레오 타입은 이런 것이다. '흑인이 한 백인에게 악수를 요청했더니 화를 낸다', '한 동성애자가 커밍아웃을 하자 에이즈 옮을 것 같다며 떨어지라 그런다',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가 일을 하다 실수를 하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간다' 이러한 차별들에는 대상에 대한 동경이 없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계급이라도 존재하는 양, 혐오의 상대를 아예 급이 다른 존재로 인식을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여성혐오'라 불리는 것에는 그런 게 없다. 걸그룹 뮤비를 보며 환호하다가 돌아서서는 "김치녀는 삼일에 한 번씩 때려야 말을 들으니 스시녀나 서양녀를 만나야 한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린다. 그리고는 일방적으로 병역을 부담하는 등의 예를 들며 "대한민국의 남성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편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여성혐오라기보다는 '한국 여성 혐오'에 가까워 보인다. 가까이에 있는 여성, 동족의 여성만이 배척의 대상이다. 남성이 우월하다는 인식에 기반해 있기는커녕 한국 남성이 여성에게 갑질을 당하고 있다 착각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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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예전의 여성 차별이 여성의 행동을 멋대로 규정하는 선을 긋고 이 밖으로 나가지 말라며 제한하는 식이었지만 지금의 여성 차별은 지침조차 없다. 그냥 "김치녀라 안 된다"는 식이다. 이러니 기성세대에서 우리가 목격해온 여성 차별을 연상하면 뭔가 이질감이 느껴질 수밖에. 


이 이상한 혐오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 여성혐오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일간베스트에 대한 분석을 여럿 읽었다. 그 중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시사인의 것이었다. 일베의 여성혐오는 연애를 하기 어려운 이들의 파괴적인 가격 흥정 전략이라는 것이다. 포도를 사고 싶은데 돈이 없다. 그래서 상인한테 이 포도는 형편 없는 포도라며 가격을 깎으려 드는 것이 일베의 여성혐오 심리라고 한다. 데이터에 기반해 공들인 분석인 만큼 의미있는 결론이 나온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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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시사인


인터넷으로는 끊임 없이 여성 혐오 글을 남기며 감정을 키우지만 최종적으로 원하는 건 내 말을 잘 듣는 여자친구다. 그래서 현실세계에서 이 감정은 드러낼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렇게 신종 여성혐오(그냥 신종이라 부르겠다)는 감지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고 여성들의 공포로 연결된다.


'왜 동경하는 대상을 욕하지?' 여성들은 이러한 대한민국 신종 여성혐오 속에 숨어있는 막장 전략을 이해하지 못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은 두려움을 유발한다. 그래서 신종 여성혐오의 은밀함은 여성을 원하면서도 여성을 혐오하는 이중적 감정에 의한 것(소위 말하는 쪽팔림)이 아닌 '교묘한 전략'으로 인식된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여혐일지 모른다'


대한민국 여자들은 지금 캡틴 아메리카 영화에 나오는 프로젝트 인사이트(잠재적 범죄자를 미리 제거하는 프로그램)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역시 잠재적 범죄자를 미리 잡아들이는 소재의 영화)에 등장하는 시스템을 소망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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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에 등장한 프로젝트 인사이트(위)와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프리크라임 시스템(아래)


메갈리안의 소라넷 폐지 운동의 주요 수단이 디도스 공격이나 해킹이 아닌 개인을 향해 '너 소라넷 하지?'하고 찔러보는 방식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심리를 드러내는 사례 아니었을까? 누가 여혐인지 알고 싶고 특정하고 싶은 욕망.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옳은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도 드러났 듯 어떤 이들의 안전을 위해 다른 누군가의 인권을 누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편견 없는 관점을 지향하지만 편견이 100%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 대상은 인종이 될 수도 있고 장애인이 될 수도, 어쩌면 여성이 될 수도 있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편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드러낼 가능성을 갖고 있다. 현실이 이런 데 어디까지 '여혐을 하는 사람'이고 어디까지가 '여혐을 하지 않는 사람'인지를 규정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SNS 등에는 이것을 규정하려는 시도가 너무도 쉽게 이루어진다. 당연하다.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데 식을 모른다면 일단 보이는 수마다 무식하게 다 때려박는 수밖에 없다.


남성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불가해한 시도를 남성들은 '왜 무리한 일반화로 불특정 다수의 남성을 두려워 하는가' 반문하는 것을 넘어 여성 인권을 빌미로 남성 인권을 해하려는 성향, 즉 '남성혐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은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남편에게 얻어 맞는 아내가 이상하지 않았던 사회다. 지금의 2~30대는 그것을 보고 자랐으며 은연 중 여성을 남성의 밑에 두고 있는 인식이 존재함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뭔가 좀 나아지나 싶었다. 실제로 나아지기도 했다. 이제는 남편에게 아내가 얻어 맞는 일이 잘못 되었다 말할 수 있는 사회니까. 그런데 비교적 평등 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10대와 20대 초반에서 신종 여성혐오가 퍼진다. 상황이 이러니 여성들 입장에서는 모든 연령대의 남성에게 여혐 심리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속 편하다. 


그러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은 모두의 진을 빠지게 한다.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하면 안 된다는 전제에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의심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결국 이 사회에서 논의를 통해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상대를 옳고 그름의 잣대 조차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면서 어느 누가 대화로 해결할 의지를 갖겠는가?


지금 우리는 '우리 사회의 여혐은 어디까지 왔는가'를 얘기하기 전에 '우리는 어디까지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부터 얘기해야 하는 처지일지도 모르겠다.




4. 네 번째 논란 - 강남역 추모는 삐뚤어진 것인가


분명 이 추모 열기는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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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현상이 이미 일어났을 때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평이나 분석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헬조선'이란 단어가 유행하는데 이제와 이 나라가 진짜로 헬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코미디이듯. 헬조선이란 유행의 저변에 이 나라가 살기 고달프다는 공감대가 있듯이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에는 '저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공감대가 존재한다. 그러니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것은 이 공감대가 명백히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런데 여기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말이 곧 모든 동참자의 생각이 같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내면 그 중 나 보기 불편한 것은 자연스레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왜 강남역 추모 포스트잇의 내용에 대해 단순히 표현의 다양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판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추모를 위해 강남역에 남겨지는 메시지 중 일부 튀는 것들이 뚜렷한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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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바로 이번 논쟁에서 반대 논리를 편 사람들이다. 


추모 메시지라면 당연히 상주나 죽은 사람에게 남기는 말이 되어야 보통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에는 범인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까지도 추모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진의 메시지들은 전혀 다른 대상을 향해 말하고 있고 이것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억울한 사람의 죽음을 이용한다'는 비판을 가하고 있는 상황.


사진의 메시지들이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비판 받아 마땅하겠다. 하지만 앞서 밝혔던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공감대 형성의 원인 분석이 중요하다'는 잣대를 나는 여기에도 들이대고 싶다. 


불과 1개월 전 송파구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남성이 여성을 칼로 찌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피해자의 남자 친구였다. 명백한 데이트 폭력(이별 통보 후 다시 만나 달라고 찾아간 상황이라고 하나), 더구나 백주 대낮에 도망가는 피해자를 쫓아가서 아파트 주민들이 보고 있는 상황임에도 범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 때는 아무도 포스트잇을 붙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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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죽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거나 여성혐오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걸까? 아니다. 다만 이번 사건에서는 '여자들에게 무시 당해서'라는 범인의 동기에 대한 보도가 뇌관을 건드린 면이 있다. 뇌관에 비해 폭발이 너무 컸다고?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이 사회의 스트레스가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동물 농장'이나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종종 사나운 개가 다뤄진다. 마지막에는 언제나 전문가가 나와 개가 주인을 물거나 짓는 행동을 하는 원인을 찾아주는데 정답은 한결 같다. '스트레스'다. 해결책도 한결 같다. '스트레스를 풀어주면 여유가 생기고 다소 무례한 행동도 잘 받아주게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라고 들면 어리둥절 하실 수도 있겠지만 얼마 전 AOA의 멤버 설현과 지민이 안중근을 긴또깡이라고 (정말로 헷갈려서 그런 게 아니라 틀린 줄 알면서도 막 던져본 것이라지만) 했다가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나는 이러한 사과를 이끌어낸 대한민국 국민의 성토가 우리 무의식에 자리잡은 '바로 잡히지 않은 역사'에 대한 컴플렉스, 즉 역사 스트레스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쌓이고 압축된 화약은 작은 불꽃에도 큰 폭발을 일으킨다. 위의 메시지들에서는 죽은 자에 대한 무례만이 아닌 두려움과 원망과 억압받은 경험이 읽힌다. 내가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이미 죽은 이의 기분을 헤아리기란 어렵다. 동시에 (약자의 목소리엔 귀 기울이지 않는 사회라는 스트레스에 평소 시달려온 입장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조차 흔치 않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문제를 급히 해결하지 않는 이상 제 2의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고로 이 무례한 추모는 필요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스트레스는 저 메시지를 읽게 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똑같이 스트레스 받고 있는 입장에서 이들의 무례한 추모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죽음 또한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자라난다. 고로 저 메시지는 이 사회가 지금껏 질리도록 보여준 비인간성의 또다른 예로 여겨질 뿐이다. 




이런 싸움 좀 그만 하려면


지금까지 싸움이 왜 일어나는가 정리하며 나름의 분석을 더해봤다. 이 논쟁은 사건을 칭하는 용어를 둘러싼 논란에서 촉발되었다. 그러더니 어디까지를 여혐으로 보아야 하는가의 모호함을 재확인하였고 그것이 얼마나 일반적으로 퍼져있는가의 문제를 지나 각자 행동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합의가 없이 들어간 행동은 당연히 논란의 대상이 된다. 결국 물리적 충돌로 악화되고 말았다. 자신에게 불편한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집단 린치가 이어진다. 앞으로도 몇 번의 린치가 오갈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한 사람들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며 이 글이 끝나길 바라셨다면 조금 실망이실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말해 이 논쟁의 승리자는 없을 거라 본다. 여성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의견도 있지만 파리 테러를 일으킨 이들이 프랑스에서 차별 받던 이슬람 계 이주민들이었음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엄밀히 말해 사회적 약자이다. 그러나 테러 같은 극단적 움직임으로 그들이 얻은 것은 프랑스 극우 세력의 득세라는 결과였다. 모든 이슬람 계 프랑스인들이 테러리스트는 아님에도 그들은 이제 정당화된 차별을 받을 위기에 놓였다. '이 녀석들은 폭력적인 놈들이니 잡아족쳐도 돼.' 이건 정말 위험하다. 정당화된 차별은 또다시 소수 피해자들의 극단적 행동을 정당화 시킨다. '니네들이 먼저 우리 차별했잖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을 거야.'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인데 지금 어느 쪽이 더 잘 하고 있다는 걸 따져 무엇할까? '거봐, 내가 맞았잖아' 우쭐하기 밖에 더할까? 


논쟁의 성공여부는 사회적 합의점의 도출에 따른다. 아무것도 합의해내지 못 한다면 승자는 없게 된다. 물론 우리 사회는 '차별이 나쁜가요?'하고 물어보면 절대 다수가 '네, 나쁩니다'라고 답하는 사회다. 하지만 이 정도를 합의라고 생각해서는 아래 질문에 답하시기 힘들 것이다. 


어째서 '여성 인권이 존중받지 못해서 이런 살인이 났으니 여성 인권을 보장합시다'라는 목소리에 '아, 그래. 정말 문제네. 해결하자'라는 반응이 쉬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그냥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그런 식이었으니까? 자기 문제가 아닌 만큼 도무지 공감해주질 않으니까? 이런 식으로 특정 대상의 성격을 아예 못 박아 버리는 답은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남성에게 여성은 연인이기도 하고 어머니이기도 하고 형제이기도 하다. 이해관계가 없는 것도 아닌데 여성이 안전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서 쪼잔하게 굴 이유가 뭐란 말인가?


반대로 여자들은 왜 과격하게라도 여성인권의 절박함을 말할 수밖에 없을까? 


답이 안 나오는 문제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풀어야 한다. 그렇다면 최초의 합의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어디?


바로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인권에 대해서는 졸라 초보라는 점이다.


인정하자. 대한민국은 남녀, 노동자, 학생, 성소수자, 장애인을 막론하고 (극소수를 제외한) 모두의 인권이 후지다. 인권을 보장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지극히 소수인, 인권후진국. 아니, 인정하기 전에 이미 모두가 은연 중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아니라고. 그런데 나는 씨바 한 게 없다고. 틈만 나면 갑질 욕구를 느끼는 게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존중 받지 못 한다. 그러나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찔리는 부분이 있으니 이런 소재의 이슈가 확산될 때마다 날카로워지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우리는 인권에 대해 공통적으로 배워온 것조차 없다. 이 나라는 국민의 의무를 외우게 한 적은 있어도 국민의 권리를 외우게 한 적은 없다. 문제의 처음이 여기에 있다. 최소한 대한민국 사람들의 머리 속에 인권 문제에 대해 '상식'이라 불릴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 적도 없다는 데에. 


그러면 이제 왜 상대가 상식 밖의 일을 하는지 불편해하기 전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풀이가 나왔다. 어디서부터 합의가 가능할지 선을 찾기 위해 상대가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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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남자가 역차별 당한다는 인식의 통계를 인용한 바 있는데 이런 남성의 피해의식을 '여자 때문'으로 받아들이면 당연히 인지부조화가 생긴다. 여자가 더 누려서 남자들 인권이 침해 받는다니 이게 어느 우주의 얘기란 말인가? 하지만 대한민국 전반의 인권으로 문제를 확대시켜보면 답은 나온다. 여성과 남성을 갈라놓으면 남성을 인권의 수혜자로 분류할 순 있겠지만 그렇게 수혜자로 분류된 이들의 대다수는 미칠 듯한 학습량에 시달리는 학생이거나 열악한 시설과 월급에 노동 착취를 당하며 군복무 중이거나 취준생이거나 비정규직이거나 야근에 시달리는 노동자다. 그런 와중에 여자들은 군대도 안 가고 전용 주차장에 편하게 차 대니 그 부스러기만한 혜택이 그렇게 커 보일 수 없는 거다. 이런데 '나'를 수혜자로 혹은 여성 차별의 원인제공자로 지목하니 억울하다 폭발부터 하고 보는 것이겠다. 


그렇다고 여성 인권 문제를 차치하고 다른 인권 문제부터 돌봐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어쨌든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권리를 보장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안전할 권리조차 말이다. 그렇게 해서 생기는 여성들의 스트레스에 사회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 이쯤 되면 겁에 질려 자신에게 다가오려 하는 모든 상대에게 이를 드러낸다 해도 이것은 공격적 행동이라기보단 자기방어적인 행동이라 보는 쪽이 정확하다. 


사회는 사나울 대로 사나워진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일에 한 없이 소극적이다. 남녀 모두가 상대를 물고 있는 이빨을 선뜻 놓기가 겁나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도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은 있다. 인권에는 누가 먼저라는 게 없다는 것이다. 나는 '파이를 나누기 전에 키워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비유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대한민국의 인권 논쟁은 '왜 너만 파이 부스러기 더 먹으려 해'의 차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 한다는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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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돈이나 빵과 다르게 실체가 없는 개념이다. 파이를 크게 만드는 동안 주변 사람은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란 얘기다. 어떤 사람의 인권을 보장하는 수준이 올라가면 다른 이들도 그 수준을 기대할 수가 있게 된다. 스탠다드가 달라지니까. 다시 말해 한 사회 내의 인권 문제에서 만큼은 너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가 된다. 예로부터 인권 운동에 생을 건 사람들이 연대를 중요시해 온 이유를 다시금 생각해본다면 편 갈라서 뭐가 더 중요한지 싸우는 게 인권 향상에 얼마나 무쓸모한 일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어느 쪽 행동이 옳고 그른가부터 따지고 들기엔 우리는 너무 기본기가 없다. 타인의 인권 문제에 지극히 소홀했고 그러는 사이 사회의 스트레스 완충 장치들 마저 망가졌으며 심리적 폭발 물질은 임계점까지 쌓여버리고 만 것이다.


끝으로 피해자가 여자라서 죽은 것이든 아니든, 사람들이 내 말에 동의하고 있든 아니든, 다 같이 인권을 침해 않는 선에서 안전장치를 고민해야 할 필요에 차이가 생기진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비극의 성격에 따라 심각성을 달리 인지하는 세상이라면 언제든 약자의 비극을 외면할 준비가 된 사회일 것이다. 


다시 합의할 때다. 기본부터.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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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그룹 마켓팀원. 편집부 일도 하고 왔다갔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