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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은 1922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1940년 그는 악명 높은 일본 육군 하사관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파푸아뉴기니 전투, 필리핀 전투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1기를 수료하고 육군 제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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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성격이 난폭하기로 유명했다. 파푸아뉴기니 전투 당시 인육을 먹었던 얘기를 태연히 하고 다녔으며, 육군 장교가 되기 전 잠시 경찰로 있으면서 하급자를 마구 폭행하는 등 여러 차례 말썽을 일으켰다. 군에 들어간 뒤에도 병사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등 말이 많았고 파면이 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송호성 당시 육군총사령관이 그를 비호해서 넘어갔다고 한다.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마산에 제5연대 1대대장(대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진압군으로 출동했으나 그의 작전 능력은 형편없었다. 여수 시내로 진입하면서 아군 머리 위로 박격포를 날려 미군 군사고문관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들었다(씨바, 얘가 진짜 고문관이여). 


아무튼 여수 시내에 들어가자 이미 반란을 일으킨 14연대는 지리산 인근으로 퇴각한 뒤였다. 하지만 김종원의 '진가'는 여기서부터 드러난다. 그는 분풀이를 하듯이 사람을 죽였다.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그는 당시 여수중앙국민학교 한켠 나무 밑에서 끌고 온 사람을 마구 죽였다. 일본도로 사람 목을 치고, 목을 치다 지치면 권총으로 사격하고, 그러다 지치면 소총으로 사람을 사격시험 하듯이 죽였다. 당시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 '인간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짓'이라며 주변을 경악하게 했다. 


이뿐만 아니었다. 여수 시내 골목길에서 마주친 청년을 모두 일본도로 베어 죽이는가 하면 안도 등 여수 외곽지역을 돌면서도 많은 사람을 죽였다. 어쨌든 명분은 빨갱이를 죽인다고 하면 그만이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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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진압 후 부역자 처벌을 위해 시민을 집결시킨 모습


여순사건 진압에서 두각을 드러내면서 그의 이름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 귀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1949년 두 번의 승진을 거쳐 1949년 8월 23연대장(중령)을 맡게 됐다. 


그는 23연대를 이끌고 영남지역을 돌면서 빨치산을 토벌했다(고 쓰고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읽어야 한다). 그러나 장교로서 가장 중요한 전투수행능력은 개판이었다.


그의 실력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은 바로 1950년 한국전쟁이다. 육사 8기생들의 증언집인 <노병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종원을 가리켜 "학살에는 귀신, 전투에는 등신"이라고 했으며, 미국 군사고문단 보고서에는 "부하에게 가혹하였고 전투에 비겁했던, 전술적 두뇌가 없었고 부하장병들로부터 원성이 높았다"고 적혀 있다. 그가 지키고 있던 영덕은 한국전쟁 후 허무하게 북한군에게 빼앗겼다. 이후 미군의 지원으로 잠시 탈환했지만 다시 빼앗겼고 결국 대구에 있던 22연대의 지원으로 간신히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덕전투에서 김종원은 부대 책임자이지만 전투에서 수차례 이탈했다. 미국 군사고문단 보고서에는 "김종원이 끝없이 후퇴하여 전투 때마다 사라진 연대장을 찾느라 힘들었다"고 했을 정도다. 물론 한국전쟁 초기 고위장교들의 무능과 전투이탈은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종원은 정도가 심했다.


또한 김종원이 낸 작전도 황당한 것이 많았다. 일본군식 '반자이 돌격'을 명령하자 작전장교였던 중위가 이를 반대하고 우회돌격을 제안했다. 그러자 김종원은 옆에 있던 헌병에게 바로 중위를 총살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작전장교는 바로 권총을 뽑아 들고 헌병과 대치했다. 부하들끼리 총을 겨누게 한 무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무능했지만 또 포악했다. 미군 군사고문단이 보는 앞에서 장교와 사병을 죽이기도 했다.


김종원이 자신의 부하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있다. 어젯밤에는 미군 전초기지에서 총질을 했다. 총 개머리판으로 부하를 구타하고 영덕에서 후퇴하는 사이 실종됐던 장교를 사살했다. 부하들이 김종원을 제거하지 않는 한 다시 총질할 것으로 보인다.


-1950년 7월 26일 미군 군사고문단 에머릭 대령 보고서


그는 차를 타고 다니다 자신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혹하게 부하를 폭행하고, 영덕 남방 고지탈환에 실패하자 소대장과 사병을 즉결처분 하는 등의 행동을 일삼는 것으로 유명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김종원을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설득해 1950년 7월 말 김종원은 23연대장에서 해임됐다. 그러나 1950년 8월, 이승만은 김종원을 대령으로 승진시키고 헌병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의 나이 고작 28살이었다.


김종원은 피난 수도 부산에서 헌병부사령관이자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을 맡았다. 김종원은 언론사에도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언론에 보도된 자신의 부대 기사를 반드시 챙겨보고 자신을 '타이거 김, 백두산 호랑이'로 쓰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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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계엄사령부 민사부장을 할 때 당시 부산 언론은 김종원 관련 기사를 항상 1면에 전진 배치해주었다. 반면 서울에서 피난 온 중앙언론들은 김종원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당시 연합통신(연합뉴스 전신의 전신 쯤 되는 언론)은 되레 김종원이 병사 단속을 못 해 부산시내에서 말썽을 저지른다고 비판 기사를 썼다. 분개한 김종원은 연합통신 부국장과 기자를 불러 중태에 이르도록 폭행했다. 


당시 부산에는 우리나라 기자뿐 아니라 일본, 미국 등 각국의 기자들이 있었다. 김종원이 기자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이 사건은 예사 사건이 아니었다. 결국 이승만이 직접 나섰다. 이승만은 자신이 아끼는 김종원을 위해 사과성명을 내고 언론을 달래야 했다.


이런 말썽쟁이가 학살할 때만큼은 달인이 되었다니 얼핏 연상이 안 되실 거다.


김종원은 1950년 3월 14일 영덕 중곡동에서 36명 학살, 이후 영덕에 주둔하면서 1950년 7월 15일 영덕읍 화개리 뫼골에서 보도연맹원 160여 명을 집단학살 하는 등 영덕에서 많은 이들을 죽였다. 영덕에서는 "김종원이 수천 명을 죽였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1950년 5월 30일 김종원 부대는 빨치산 토벌을 마치고 퇴각하다 거제시 마전동 공동묘지에서 43명을 학살했다. 


1950년 8월 24일 김종원 부대와 경찰 연합병력에 의해 양산 동면, 원동면, 물금면, 웅상면, 북면, 양산면, 하북면 등 7개 면 주민 약 700여 명이 학살당했다. 


1951년에는 지리산 인근에서 빨치산 토벌을 하고 있었다는데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1951년 3월 김종원 부대는 피난민 약 500여 명을 버스 11대에 태우고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점동 사이에 있는 소정 골짜기에 내리게 한 뒤 모두 사살해 버렸다고 한다. 이를 산청 외공리 학살이라고 한다. 오랜 빨치산 활동과 토벌 과정에서 당시 피난민 중에는 성인남성은 거의 없고 아녀자와 어린이 등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함양군 마천면 일대에서도 좌익으로 몰린 52명 가운데 51명을 학살하는 등 지리산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숱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지금도 지리산 인근에는 '김종원'을 언급하면 치를 떠는 어르신이 있을 정도다.


지금까지 드러난 수만 해도 상당하지만 전문가들은 아직 '김종원의 학살 가운데 극히 일부'라 추정할 정도로 그의 학살은 광범위했다. 그의 손길이 미친 여수, 제주도, 지리산 일대, 거제, 양산, 포항, 영덕, 경주, 울산, 고령 등에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죽었으리라 짐작된다. 게다가 김종원은 1950년 7~9월 사이 있었던 부산·마산·진주 형무소(교도소) 재소자 3,500명을 죽여야 한다고 적극 주장해 결국 관철시켰고, 재소자 약 3,400명이 학살당했다.


그는 학살 외에도 학살 은폐에 적극 나섰다. 1951년 2월 9~11일 사이 거창 신원면 주민 719명이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장 한동석 부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는 11사단장 최덕신이 입안한 '견벽청야' 작전의 일환으로 빨치산 배후지역을 말살하는 것이 목표였다.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 피해자 가운데 절반가량은 0~16세 아이 어린이였고, 나머지 절반도 부녀자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전쟁 중 일어난 수많은 민간인학살 가운데 거창 민간인학살사건은 용케 생존자가 있었고 군인들 가운데서도 증언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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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

(이미지 출처 - 전쟁기념관)


결국 국회 진상조사단이 꾸려졌다. 국회 진상조사단은 거창 사건 현장을 직접 방문해 진상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에 당시 경남지구 계엄사령관이었던 김종원은 여러 차례 국회의원들의 현장조사를 신변안전을 이유로 들며 방해했다. 그럼에도 국회 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진행하자 김종원은 시신 일부를 다른 곳에 치워놓고, 1개 소대를 빨치산으로 위장한 뒤 국회 조사단을 향해 위협사격을 했다. 이 황당한 작전은 곧 들통이 났다. 김종원은 무슨 작전을 했다 하면 다 실패했다. 


1950년 7~8월경 현재 김해 진영지역에서 토호들과 우익단체가 전쟁 통에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민간인 700명 이상을 보도연맹원·좌익으로 몰아 죽이는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몇몇 유지들은 사형과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에 이들 유지들은 당시 돈으로 3,500만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김종원에게 '먹이고' 풀려났다고 한다. 이 사실은 1960년 6월 국회 증언으로 드러났다.


아무튼 김종원은 국회 진상조사를 방해한 혐의로 1951년 12월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다.


김종원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에 이승만 대통령이 그를 구명하기 위해 즉시 나섰지만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의 반대가 심했다. 이에 이승만은 직접 성명을 발표하기로 했다. 성명서 초안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하다"는 내용이었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이 내용을 듣자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는 생각에 김종원 석방에 동의해줬다.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김종원은 경찰로 이직했다. 이어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전북 경찰국장(전북지방경찰청장 격), 경북 경찰국장, 경남 경찰국장 등을 거쳤다.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김종원은 자신을 구명해 준 이승만을 위해 적극적으로 부정선거에 임했다.


1956년 조봉암과 맞붙은 대통령선거의 '백미'는 바로 부정 개표였다. 당시 100표 단위로 표 뭉치를 묶었다. 표 뭉치 100장 가운데 제일 첫 장과 제일 마지막 장이 이승만 표라면 나머지 98표는 상관없이 표 뭉치를 이승만 표로 간주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부정 개표 참가자 증언에 따르면 "100표 중 2표만 있으면 되는데, 그 2표를 찾기가 힘들었다"고 할 정도로 이승만에 대한 지지는 바닥이었다. 어쨌든 이승만은 3선에 성공했고 김종원은 치안국장(경찰청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그해 8월 열린 지방선거에서도 적극 활약했다. 당시 자유당은 정치깡패를 동원해 야당 후보의 등록을 방해하거나 선관위 직원을 납치하거나 총을 들고 후보나 유지를 협박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에 일부 야당 후보들도 깡패를 동원하는 등 선거는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한 선거가 됐다. 김종원은 이런 문제를 바로잡아야 할 치안국장이지만 되레 부정선거를 독려해 야당과 언론의 반발을 샀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김종원에게 먹구름이 끼인 것은 과도한 충성 때문이었다. 1956년 9월 28일 오후, 장면 부통령이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다가 피습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장면 부통령은 총탄에 왼손을 다쳤다. 부통령을 피습한 범인들은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쳤다. 김종원은 민주당 내 분란으로 몰고 사건이 수습되는 듯했다. 그러던 중 구속된 주범 이덕신이 '치안국장 김종원이 배후다'고 폭로했다. 김종원은 이를 극구 부인했으나 정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그는 1년 만에 치안국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래도 당시 이승만 정권이 공고하던 시절이어서 김종원은 따로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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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부통령 피습 사건으로 소환되는 김종원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그를 아끼던 이승만이 망명하자 김종원이 저지른 장면 부통령(당시 국무총리) 피습사건에 대해 재조사가 이뤄졌다. 김종원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나왔고 결국 김종원이 피습사건을 배후에서 지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김종원은 4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1961년 12월 당뇨병으로 병보석을 받아 출감했고, 1964년 1월 30일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42살이었다.


이 밖에도 김종원은 온갖 이야기를 남겼다. 경남 경찰국장 시절 인플레 때문에 시민이 힘들다는 보고에 "수사과장, 당장 가서 인플레 잡아와"라고 지시를 내린 일. 치안국장 시절 경찰서 순방을 하다 경찰서장을 개 패듯이 패고 경찰서장 배지를 떼어 안면이 있는 말단 경찰에게 달아준 일. 사람 목을 잘라서 상자에 담아 주변장교에게 '선물'로 주고 잘 받았냐고 농담을 건넨 일 등 그가 남긴 황당한 짓은 다 정리하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천박하고 잔인했으며 자신이 입안한 작전이나 공작은 제대로 성공시켜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무능했던 사람. 그러면서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장로님이 되고 개신교 신문에 짐짓 점잖은 글을 썼던 사람. 황당한 인사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권력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 땅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김종원처럼 비상식적으로 날뛰는 사람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참고자료


임종금, <대한민국 악인열전>, 피플파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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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금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