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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갖고 있는 최초의 독서 기억은 '광개토대왕' 위인전이었다.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는 지명들이 수두룩 나오고 왠지 엄청나게 넓을 것만 같은 영토들을 킹왕짱 광개토대왕이 쳐부수는 이야기는 조금 더 자란 뒤에 '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이란 가사에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렇다. 고구려의 모든 이미지는 만주, 그중에서 요하 일대에서 만들어졌다. 필자가 자란 충주 야산의 골짜기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이 밭 갈고 절에 가고 죽으면 무덤 만들며 살았는데, 박지원이 '남자가 한번 시원하게 통곡해 볼 만한 땅'이라 칭한 요동벌판을 호쾌하게 말 달리는 고구려인의 모습은 우리 국민에게 일종의 '히스토리 판타지'를 만들었다. 여러 교과서에 실린 바 있는 아래 고구려 최대강역 지도는 역덕후들이라면 눈 감고도 대강은 그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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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릴 때부터 겉으로는 순종적이었지만 뇌 속엔 온갖 반동분자적 망상을 하던 필자는 위의 지도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단은 <환단고기>였다. 역덕후치고 그 악마의 책에 관심갖지 않은 이, 어디 있으랴. 아버지 서재에 잠들어 있던 <규원사화> 역시 그러하다. 이후 필자의 고딩 시절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환빠와 반환빠서적에 탐독하며 한 없이 잉여로워졌고, 철썩같이 믿던 교과서를 뜯어보게 되었다. <환단고기>로 인해 실증적 역사관을 키웠으니, 참 감사할 따름이다.

그것은 비단 필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웃국가들이 누가 더 킹왕짱이냐를 겨루기 위해 역사 병림픽을 벌일 때 우리나라는, 다행스럽게도 동북아역사재단을 설립하고 다른 방향으로 연구를 지속해왔다. 물론 학계는 급진적인 주장에 조심스러워졌고, 이덕일 같은 이는 반사이익을 졸라 처먹으며 일당백이 되어갔다. 디씨 역갤은 환빠와 식민빠의 소굴이 되었다. 지난 10년간 인터넷 공간에서의 역사적 논쟁은 미시사, 경제사, 사회사, 고려사 등 연구가 미진한 부분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환빠/식민빠와의 대결로 흘러갔다. 

어쨌건 필자는 '기록보다 중요한 것은 고고학적 증거다'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몇 가지 중요한 발굴에서 영향을 받았다. 첫째는 <사택지적비>이었고, 둘째는 <중원고구려비>였다. 첫째야 유명하니 넘어가기로 하고, 둘째에 관한 개인적 경험담을 적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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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택지적비와 중원고구려비


초등학교 때 충주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담임의 연으로 학예사님의 특별 해설을 듣는 귀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학예사님이 <중원고구려비> 발굴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는데, 비문 해석을 하는 참여 학자 대부분이 충주 지역이 고구려 영토였음을 상상할 수 없어 '고려'라는 희미한 글자에 모두 '신라'를 대입해 해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제대로 해석이 안 될 수밖에. 이렇듯 고정관념은 무서운 법이다. 위의 고구려 지도 중 남쪽 부분은 순전히 <중원고구려비>를 필두로 이어진 고구려 유물 유적 덕에 그려질 수 있었다.

잡소리는 그만두고, 지도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고구려 최대강역 지도는 저 형태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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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를 살짝 넘은 요서 쪽에 고구려 국경선을 그린 것은 다소 치사해 보이지만 교과서니까 그냥 넘어가자.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북동쪽으로 뻗은 자그마한 화살표에 있다. 저 노란 경계 끝과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는 매우 가깝다. 그것이 필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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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라.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극동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이다. 지금의 한반도와는 현저히 다른 문화양식과 생활방식, 언어와 종교를 가지고 있다. 집단과 집단을 구별 짓는 개체로 크게 '민족'과 '국가'를 든다고 하면, 블라디보스토크는 두 가지 모두가 다르다. 물론, 충주에서 서울가는 거리나 나진,선봉에서 블라디보스토크가는 거리나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필자의 시대적 한계(북한이라는 단절된 땅)가 주는 거리감은 보다 컸다. 모스크바나 블라디보스토크나 필자에겐 춥고 먼 불곰국의 도시다. 이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무지의 소치임을 인정한다.

그치만, 지도대로라면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지역에 고구려 유물 유적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현대의 주요 도시들은 고대에도 주요 도시였던 케이스가 많다. 흔히들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라 하는데, 그 말은 고대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 살기 좋은 곳이 번영한다'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연적 환경일 것이고, 그 외에 인위적으로 설정된 군사적 환경과 모든 요소를 고려한 경제적 환경 등이 있을 터이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는 현대에나, 독립운동의 거점이였던 일제강점기나, 청나라와의 국경분쟁을 야기했던 조선시대에 그랬듯이, 고대에도 분명 주요도시였을 것이다. 물론, 부동항을 애타게 찾던 러시아인들이 점유했을 때 보다는 그 중요성이 감소하겠지만 그래도 틈만 나면 성을 짓던 고구려 성덕후들이 연해주 인근의 땅을 무시했겠는가? 아니면 절이라도! 아니, 씨바 그 수 많은 고분들 중 하나라도!!

이 장고한 연유로 쓸모없고 무익한 '고구려 동진의 역사'를 탐닉하게 된 것이다. 이제서야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용이 워낙 빈약하고 허접한 까닭이다. 얼마나 유익한 글이 될지는 모르겠다. 왜냐! 조또 모르니까. 

 



연대를 쭈욱~ 올려서, 초기 고구려 시절로 되돌아가 보자. 현도의 영향력 아래서 야금야금 빨대를 꽂던 고구려는 반한사군을 국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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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가 위만조선을 합병한 후 세웠다는 한사군과 그 몰락과정


고구려의 존재는 현도군 입장에선 목에 가시였기에 B.C. 75년, 현도군의 치소를 옮겼으나 약 300여년 뒤, 미천왕이 313년에 낙랑군을, 314년에 대방군을, 315년에 현도군을 공격하며 한사군 레이드를 뛸 때 졸라 박살 난 것으로 보인다. 100여 년 뒤 광개토대왕이 후연과 맞다이 뜰 때엔 이미 안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사이 고구려가 냉큼 먹었겠지.


그러나 한사군과 고구려 입장을 다시 보자. 한사군 입장에서 사방이 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글쎄다. 비록 지형의 험준함으로 현도-낙랑-대방-임둔끼리의 군사적 연대는 쉽지 않았을 테고, 또 추측컨대 각 군의 대빵끼리도 초기엔 한나라와의 관계에서 오는 각자 간 권력다툼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엔 미네랄 많은 낙랑이 이겼지만. 결과야 어쨌든 이 한사군은 서로의 등을 맞대고 있는 형국인데 반해, 고구려야말로 사방이 적이였다. 고조선이라는 느슨한 연합체, 그것도 중심지역이 졸본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느슨했던 지방에서 아직 부여라는 강력한 지역패권자가 있기에 고구려의 상황이 더욱 안습이었을 것이다. 졸본부여에서 고구려로 바뀌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권력자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친한족패권주의 철폐! 친부여패권주의 타도!" 

옥저, 동예, 한사군, 고구려 등이 지금 북한이 핵실험 한 번 잘못하면 다 거덜나는 땅을 두고 시대에 따라 조금씩 아웅다웅했으니 이거야 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런데 한사군이라는 하이테크놀로지 세력은 결국 공동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에서 북방민족들의 경제 상황은 현도라는 먹잇감을 가만 놔둘 리 없었다. 

그럼에도 현도군이 거점을 첫 번째로 옮긴 후 미천왕의 공격이 있기까지 무려 300여 년이란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한사군을 마치 한반도에 잠깐 다녀가신 뜨내기 손님 정도로 이미지메이킹을 해 온 역사 교과 덕에 그 존재감이 공기 같아졌지만, 18세기 정조 대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고대라고 다를쏘냐. 단지 기록을 안 했을 뿐이지. 아무튼, 고구려 및 기타 등등이 300여 년간 투쟁해야 했을 정도로 현도는 졸라 쎘을 것으로 추정하는 게 정확할 듯하다. 낙랑은 슈퍼- 하게 쎘다. 고구려의 대한사군 투쟁의 역사에 비하면 영-프의 백년전쟁은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자, 당신이 2층 침대에서 자는 노비라고 하자. 1층에는 당신이, 2층에는 당신이 호시탐탐 복수의 칼을 가는 졸라 쎈 주인이 있다. 그런데 마침 칼이 옆 침대에 떨어져 있다. 아무리 주인이 잘 때까지 기다렸대도 옆 침대의 칼을 가져와야만 복수의 성공확률이 수직상승한다. 고구려의 동진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윗 문단이 고구려의 입장이라면, 좀 더 대국적으로다가 정세를 살펴보자. 통일제국 한이 흉노 문제로 골치 아프고, 고조선을 꺾고 한사군 설치로 이제 어느 정도 갈무리를 한 줄 알았지만, 북방민족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동북아시아의 한랭건조현상이 주요한 작용을 했다. 가뜩이나 추운데 더 추워지니 북방민족은 자꾸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이것이야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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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ter is coming이다. 한도 박살 나고 삼국지와 진을 거쳐 결국엔 남북조로 분화하고 말았는데, 한사군쯤이야. 그중 최북방 현도는 이래저래 샌드위치가 되었다. 바로 옆집 고구려도 칼춤 추는 마당에 윗동네 김 서방도 옆동네 이 서방도 현도네 집에 가득한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고야 말겠다며 난리법석이다. 평양 일대 낙랑의 번영은 고구려가 신라의 방패막이였고 동로마가 서유럽의 방패막이였듯, 어그로란 어그로는 현도가 다 끌어갔던 것도 주요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본다.

요태까지 그래 왔고 아패로도 계속, 요동과 요서는 북방 민족에게 있어 황금의 땅 엘도라도라 여겨졌을 것이다. 현도도 요동을 포기 못 하니 자꾸 서쪽으로 옮겨가고, 지리적으로 고립당하기 딱 좋은 임둔은 애초에 크게 자라지 못하니 이 지역에 독자적 세력이 성립할 수 있었다. 바로 두만강 중 하류의 북옥저와 원산 지역의 동옥저다.

국가 태동기에 동북아에 불어닥친 한랭건조현상. 머리 위에 있는 한사군의 존재. 그리고 북옥저 동옥저. 고구려는 그래서 동쪽으로 간다. 남들보다 한 박자 빠른 뒷마당 멀티를 까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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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대략적으로 배경을 써 보았다. 이제부터는 보다 상세히 사료를 뒤적거리며 진행해 나가겠다.

 

한반도 동북부 지역에서 문헌 기록으로 전해지는 두 존재가 '옥저'와 '읍루'이다. <후한서>에서 읍루에 대한 기술을 보면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 동북쪽 천여 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닷가에 임하고 남으로는 북옥저에 접하며 가히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땅은 산이 많고 험하며, 사람의 형상은 부여인과 닮았으나 그 말은 각각 다르다. 오곡과 베가 있고 붉은 옥이 나오고 담비가 좋으며 군장은 없으나 읍락 각각에 대인(大人)이 있다.


한나라가 흥한 이후로 부여에 속하고, 무리는 비록 적으나 용력이 많고 산세가 험한 곳에 살고 또한 활을 잘 쏘니 능히 사람의 눈을 맞추었다. 활의 길이는 네 척이고 노와 같은 힘이 들고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그 길이는 일척팔촌이다. 푸른 돌을 화살촉으로 하고 촉에는 모두 독을 발라 보통 사람은 즉사하였다. 편안히 배를 타고 도둑질을 좋아하니 이웃 나라에서 두려워하고 근심하였으나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동이와 부여는 음식의 종류를 모두 조두그릇을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만은 그렇지 않아 법과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


남으로 북옥저와 접하고, 부여 동북쪽에 있으며, 졸라게 와일드하고, 무엇보다 '동이 부여와 풍속이 다르다'고 대략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북옥저는 어떨까? 같은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이 되고 있다.


또한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置溝婁)이다.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습이 모두 남옥저와 같다.


읍루 사람이 배 타는 것과 노략질을 즐기니, 북옥저가 이를 두려워하여 늘 여름에는 바위구멍에 숨어있다가 겨울에 이르러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아래로 내려와 읍락에서 살았다. 

 

읍루의 빵셔틀이었던 북옥저. 이렇게 읍루와 북옥저는 뚜렷한 집단적 차이가 있었던 것이 문헌상으로 확인된다. 

 

옥저와 읍루의 관계를 기술한 문헌을 뒷받침하듯, 동북한 지역과 연해주 지역의 철기 문화는 달랐다. 학계에서 분류하는 문화권을 기준으로 보면 동북한 지역은 '단결-크로노프카'라는 문화가, 연해주는 '뽈체'라는 문화가 확인된다고 한다. 단결-크로노프카 문화가 곧바로 북옥저를 상징한다기 보다는, 삼국지의 기록을 참조했을 때 옥저의 발생 시기 상한선이 기원전 2세기이므로 단결-크로노프카는 기원전 7세기 경 발생해 해안가로 점차 진출하면서, 2기에 북옥저라는 집단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기원 후 1세기 중반에서 2세기까지 정도에서 단절된다.


한편 '뽈체 문화'는 굉장히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러시아 아무르 지역의 '뽈체 문화'는 기원전 1,000년부터 거의 전 시기에 걸쳐서 분포하고 있는데, 주로 무기와 관련된 출토물이 많다. 기원 전후한 시기에 돌연히 남쪽의 연해주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크로노프카 문화의 중심지와 합류하는 양상을 보인다. 러시아 학계에서는 호전적인 뽈체 문화가 남하하며 크로노프카 문화를 공격하며 점점 쳐묵쳐묵한 것으로 이해하는데, 군사 충돌의 고고학적 근거가 아직은 미약해서 한국학계에서는 소규모의 국지적인 군사 충돌과 함께 변화하는 사회 양상에 따라 점차 크로노프카 문화를 흡수해 간 것으로 파악한다. 어쨌건, 결론은 쳐묵했다는 것.


크로노프카는 왜 해안가로 갔고, 뽈체는 왜 남하했을까? 이는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동북아에 불어닥친 winter is coming에 기원한다고 위에서 밝힌 바 있다. 크로노프카의 문화 양식은 보다 농경을 중시하고, 해안가로 가며 도시규모가 커질수록 무역이 발달한다. 중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동전의 출토는 북옥저의 다양한 해상 무역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즉, 땅 넓고 장사하기 좋은 곳으로 이동해나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뽈체는 추우니까 남하하고, 남하하니 먹잇감이 요기잉네? 하고 털었겠지 뭐. 읍루와 옥저의 관계란 대략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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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옥저(연해주) 지역에서 출토된 위나라 화폐 철원일근

 

크로노프카 문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기후의 급격한 변화가 꼭 엑소더스를 유발하는 것만은 아님을 확인할 수도 있다. 어떤 케이스에서는 사회 내부를 결속하고 좀 더 복잡하게 변화하며 규모가 커지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크로노프카 문화는 이 양상을 보였는데, 100기 이상의 집단 거주지가 그것을 반증한다. 필자는 이것을 철기 문화의 발달과 같이 묶어 이해하는데, 날이 추워지니 불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고 이것이 철기 문화의 발달을 야기함과 동시에 농업기술의 발전과 무역의 필요성을 증가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흐름에 따라 크로노프카 문화는 '온돌'을 낳게 된다. 학계에서는 크로노프카 문화, 즉 북옥저의 온돌이 이후 한반도로 퍼지게 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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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불로 치카치카(?)하는 유적에서는 뽈체와 크로노프카 문화가 혼재된 양식을 보인다. 즉, 연해주 남부의 크로노프카 인들은 읍루의 압박에 몇몇은 이탈했다 볼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크로노프카 문화 중심지, 연변은 점자 크로노프카 문화가 사라진다. 어디로 갔냐고? 고구려가 먹었다. 아주 맛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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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카페 역개루에서 퍼온 태조왕기 고구려 강역

 

고구려의 옥저 정벌 관련 기사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1.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성읍으로 삼다 ( 기원전 28년 11월 )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2. 동옥저를 정벌하고 영토를 넓히다 ( 56년 07월(음) )


4년(56) 가을 7월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았다. 국경을 넓혀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까지 이르렀다. 


 

3. 책성을 순수하고 돌아오다 ( 98년 03월(음) )


46년(98) 봄 3월에 왕이 동쪽으로 책성(柵城)을 돌아보았다. 책성의 서쪽 계산(罽山)에 이르러서는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와 더불어 잔치를 열어 마시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물건을 하사했는데 차등이 있었다. 마침내 바위에 공적을 기록하고 돌아왔다. 

 


모두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그런데, 맨 위의 기사는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 대에, 아래 두 개는 장수왕 뺨치는 불로장생의 신화를 이룩한 태조왕 대의 기사다. 즉,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좀 거시기하다는 말. 어떤 이는 1의 기사를 아예 무시하고, 3번째 기사인 책성 순수 기사를 북옥저 공략의 기사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3번째 기사는 분명히 순수의 의미이므로, 기원전 28년에서 기원후 56년 사이 시점에 이미 북옥저는 고구려가 냉큼 먹었다는 것이 합리적이다. 동옥저 정벌 기사는 당시 동옥저가 한군현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므로, 동옥저를 먹는 동시에 한나라의 군현과 본격 다이다이 뜨기 전 오른팔을 끊어 놓는 전략적 이득을 취하기에 시기적으로 적절하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동옥저 정벌 기사에 신뢰도를 가장 높이 주고, 나머지 기사를 파악한다. 이 얘기는 다른 말로, 동옥저를 먹는 것이 북옥저보다 부담스러웠다는 이야기와도 동일하다.

 

그런데, 동명왕 대의 북옥저 정벌 기사 전에 행인국이라는 곳을 먹는 기사가 있다. 압록강 상류의 행인국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고구려 초기 고분이 밀집해 있는데, 행인국을 북옥저 정벌의 전초기지라고 이해한다면 조금 더 용이하게 사료를 살필 수 있다. 고구려와 동옥저 사이에는 개마고원이 있고, 고구려와 북옥저 사이에는 백두산이 있다. 그런데 행인국을 먹으면, 아직 현도군의 영향력이 강한 개마고원의 중심지에서 벗어나 동옥저 루트가 뚫리는 동시에 백두산 북쪽을 경유하는 압록-연변-두만 북옥저 수원 루트가 뚫린다. 동명왕이 제일 처음 행인국을 먹은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이 행인국 공격을 전초기지 확보라고 생각한다면, 고구려의 초기 국력을 고려할 때 북옥저 정벌은 동명왕이 졸라 쎄서 원샷 원킬 하였다기보다는 점차적으로 '경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무엇보다 고구려는 북옥저를 한 순간에 쓱싹할 이유도 없었다. 읍루의 압박을 받는 북옥저는 문화적으로 보다 유대감이 강한 예맥계로써 고구려에게 의지하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옥저의 크로노프카 문화 양식의 특징은 방어시설의 부재 또는 최소화에 있다. 즉, 평화를 사랑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전적이던 읍루에 비해 농사짓고 무역하는 사회로 발전해 나갔던 거다. 그런데 똑같이 호전적인 고구려가 옆에 덜컥 생기니, 북옥저로써는 가뭄의 단비였을지도 모르겠다. 고구려는 북옥저를 먹어서 좋고, 북옥저는 고구려의 비호를 받아서 좋고. 


물론 북옥저 내부의 이탈도 있었겠지만 그것까지는 알 길이 없고. 추가적으로, 고구려 '노남리 문화' 유적지에서는 이미 크로노프카 문화의 온돌을 받아들이는 흔적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예맥계로써 북옥저와 고구려의 관계가 국가 초기, 어쩌면 고구려 건국 이전부터 집단 간 커뮤니케이션이 어느 정도 있었다 할 수 있다. 결국, 이 둘의 퓨-전은 굉장히 순조로운 절차를 밟아 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세력이 더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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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도 무섭지 않다고 뻥카를 날리던 부여는 지속적으로 남하하는 유목민족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동부여의 출현으로 그 사태가 악화되는데, 고구려가 북옥저를 노리던 무렵 부여 역시 읍루의 땅을 탐내고 있었다. 또한 초기 부여-고구려의 관계를 적대적이라고 설정한다면 고구려의 북옥저 방향 진출은 배후기지 확보와 동시에 부여의 동남방향 진출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백두산 지역은 고구려 특산품인 모피와 인삼의 노다지이며 연변지역은 졸본에 비해 풍부한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고 두만강 너머의 지역은 동북아 최대의 무산철광이 있는 곳이라는 점에 있다. 교역에 필요한 자원, 인민을 멕이는 자원, 그리고 전략 자원의 보급지역 확보는 고구려에게 있어 이 지역을 초기에 먹은 당위성을 설명해준다. 정리하자면 고구려의 북옥저 정벌은 미네랄도 풍부하고 가스도 풍부한 곳에 멀티를 까는 동시에, 1시 지역의 읍루와 11시 지역의 부여까지 견제할 수 있으며, 6시 지역의 동옥저도 읍루, 부여의 방해 없이 먹고 나서 7시의 한군현을 고립시킬 수 있는, 센터로의 진출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동옥저 방향으로의 진출 역시 한 번에 몽땅 먹은 것이 아니라 일단 고구려와의 복속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후에도 고구려와 옥저를 구별해서 기술하는 것을 보면 북옥저를 고구려가 이미 먹었다는 상황을 고려할 때 동옥저는 여전히 국체는 보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태조왕의 나이 11살이라는 점은 무시하자.


그렇지만,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소화시키는 것이다. 안 그럼 급체로 사망할 수도 있으니까. 연변 지역의 고구려 성들은 산성이 주류를 이루는 요동지역과는 달리 평지성이 많다. 2편에서 보다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요동지역의 고구려 산성들은 굉장히 견고하게 방어적 목적에 충실해서 축성되었다. 이에 반해 연변 지역의 고구려 성들은 평지성과 산성이 혼재되어 있다. 현재는 평지성의 특색 상 보존이 어렵고 대다수의 유적이 이미 경작지/주거지화 되어 흔적만 간신히 찾아 볼 수 있다.


평지성의 목적은 거점화에 있다. 인구가 밀집한 공간을 거점으로 삼아 원활한 통치와 함께 타 거점과의 명확한 관계를 설정하는 동시에 영토의 고유화를 노리는 것이다. 이처럼 다수의 평지성 축성은 고구려가 연변을 배후기지로 사용했다는 증거이다. 3번째 책성 순회 기사도 그 맥을 같이 한다. 진짜 태조왕이 한 건지 어쩐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건 고구려는 이 지역의 고구려화에 굉장히 공을 들였다. 그래야 꿀을 최대한으로 뽑아내니까. 


이후 고구려 말기에 당나라에 투항해버린 고질이라는 사람의 아버지는 고량이란 사람으로, 책성도독이자 위두대형이자 대상을 겸직하는 어마어마한 관직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로써 고구려 내의 권력관계에 있어 책성의 지배자가 가지는 영향력이란 실로 막대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북옥저 몽땅 소화시키기' 프로젝트는 관구검이 고구려를 개박살 낼 때 나타난다. 동천왕은 북옥저 지역으로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튀었는데, 이윽고 북옥저 지역에서 숨을 고르고 반격을 시작한다. 수도가 함락당해도 국가가 무너지지 않을 만큼 연변은 고구려의 최후방보급소라 볼 수 있었다. 임진왜란 때 다 털리고 전라도만 남았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책성은 광개토대왕이 동부여를 일격필살 할 때 동부여 지역으로 포함되었는지는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아 좀 아리송하지만, 어쨌거나 굉장히 중요한 군사행동이었을 것이다.


이상 삼국사기를 기초로 한 고구려의 동진을 문헌적으로 파악한 내용이다. 워낙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말이 많아서 검토의 여지가 매우 많지만 필자는 일단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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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을 덧붙이자면, 고구려 초기 기록에서 왕의 수명이 신선급인 이유는 그만큼 고구려의 초기가 좌충우돌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태조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태후가 수렴청정을 했다는 등으로 보아 왕권 역시 불안정했을 것이다. 그래서 태조왕 아닌 이가 사실 왕위에 앉았더라도 훗날 수도 불바다 사건 이후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을 통해 대강 갈무리하면서, 선조들을 '반인반신'급으로 올린 것이 아닐까. 라는 소설을 써드려 본다.믿거나 말거나.


다음 편엔 주로 고고학적 유물 유적을 논하며 이어가보겠다.

 

 

참고 및 출처


- <延邊地域으로의 高句麗 勢力 浸透 및 支配의 實相> 박경철 (동북아역사논총 38호)

- <고구려의 연변 지역 경영> 임기환 (동북아역사논총 38호)

- <고고학으로 본 옥저문화> 강인욱·김재윤·N. A. 클류예프·A. L. 수보티나 (동북아역사재단)

- <해외 유적과 연해주 조사> 국립문화재연구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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