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의 시작은 OSS의 수장인 도노반(William J. Donovan) 때문이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1944년이 되면 OSS는 몰리게 된다.
“우리가 전쟁에 기여했다는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이미 유럽 전선은 종결돼 가는 상황이었고, 태평양 전선 쪽도 바다 쪽은 맥아더와 니미츠가 반씩 쪼개 진격하는 상황. OSS가 비벼볼 곳은 ‘중국’뿐이었다.
“중국 쪽에 몰빵해! 우리가 살 길은 중국이다!”
1944년 가을까지만 하더라도 OSS 중국 지부 요원은 106명에 불과했는데, 1945년 7월이 되면 1,891명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때 OSS워싱턴 본부에서는 냅코 프로젝트를 준비중인 상황.
“우리가 모든 작전을 진두지휘해야 한다!”
맞는 말인 거 같은데, 이때 툭 하니 문제가 터진다. 당시 OSS중국전구의 총사령관인 리차드 헤프너(Richard P. Heppner)대령이다.
“미군 자원이 가뜩이나 쪼개져서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게 중국 땅인데, 이걸 다시 본국이랑 왔다갔다 한다구요? 여기 일은 우리한테 맡겨 주시죠? 여기 미군이랑 힘 합쳐서 잘해보겠습니다.”
도노반은 헤프너를 신임하고 있었고, 확실히 밀어주겠단 의지가 있었다. 전쟁은 얼마 안 남았고, 어쨌든 중국에서 성과가 나와야 했다. 결국 도노반은 1945년 3월 29일 중국전구의 독자 작전을 허락하게 된다.
“야, 어쨌든 성과만 가져와!”
헤프너는 허락을 받자마자 일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한 것은 중국 서안에 OSS 북동사령부(OSS Northeastern Command)를 만드는 거였다.
“다른 거 필요없어! 북동사령부의 설립 목적은 딱 하나야! 한반도 침투야 알았지? 기어가든, 땅굴을 파든 무조건 한반도로 침투해!”
이 북동사령부에서 추진한 작전들 중 하나가 한반도 침투작전인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이다.
이 작전은 광복군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됐다.
1944년 10월 광복군 제2대장인 이범석이 OSS에게 제안을 한다.
“너네들 적 일본이지? 우리들 적도 일본이야. 우리 광복군을 너네가 훈련시켜서 조선에 우릴 침투시켜줘. 너네들 남는 게 장비잖아? 우리가 네들보다 조선에 대해선 잘 알 거든... 우리 고향이잖아. 너네들은 당장 침투해도 양키라고 바로 잡히겠지만, 우린 아니거든. 어때? 구미가 땡기지?”
OSS 애들은 바로 낚였어. 1945년 1월 클라이드 싸전트(Clyde B. Sargent)대위가 광복군 2지대 주둔지를 방문하지, 그리곤
“걔들 허접한 애들인지 알았는데, 나름 군기도 잡혀있고 군사지식도 있던데요? 좀만 다듬으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이게 중요한 게 클라이드 대위가 훗날 광복군 훈련과 지휘를 담당하게 된다. 광복군이 이렇게 움직이자, 임시정부도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되니 OSS와 주중 미군 사령부가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만나게 된다.
이야기는 급속도로 진행된다. 애초 계획은 광복군 60명을 선발해 3개월 간 정보수집, 통신훈련 등을 시켜서 45명을 추려내고, 이들을 1945년 여름에 한국의 5개 전략지점. 그러니까 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에 침투시킬 계획이었다.
이들은 해당 지역에서 일본 해군기지와 비행장을 비롯한 군사시설과 산업시설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혹시 모를 미군의 한반도 상륙 시에는 후방에서 한국인들의 봉기를 유도. 미군의 상륙을 측면지원하는 임무까지 맡게 됐다.
“한반도에 침투시키면 150일 안에 일본에 대한 정보를 보낼 수 있습니다.”
OSS중국전구는 꿈에 부풀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워싱턴에서 되도 않는 냅코니 뭐니 하지만, 이쪽은 군인이라고! 게다가 임시정부야! 나름 독립 운동하는 검증된 애들이라고!”
OSS 중국전구 비밀첩보과 주관하에 미군 교관들(장교와 하사관 7명이 동원됐다)이 붙었다. 이들은 첩보공작을 위한 훈련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광복군 2지대원 125명 중 50명이 선발 됐다(이들 중 최종수료 인원은 38명이다).
앞줄 가운데 이범석 장군
이 대목에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게 광복군 2지대 본부에,
“한미합동지휘본부(Korean-American Joint Command)”
가 설치된 거다. 광복군과 임시정부는 꿈에 부풀었다. 잘하면, 미국의 승인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섞인 예측들이 나오는 상황. 이걸 ‘설레발’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분위기는 충분히 설레발을 떨만 했다.
OSS국장인 도노반이 중국으로 달려온 거다. 1기생 훈련이 7월 말에 끝나고, 1945년 8월 4일 수료식을 하게 된다. 이때 1기 수료생 숫자는 38명이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게 이들의 훈련기간이다. 이들은 두 달 남짓 짧은 기간 동안에 모든 훈련을 마쳤다. 원래 광복군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특수작전을 위한 훈련인데 너무 짧다. 이건 이들의 임무가 ‘정보수집’에 한정 됐기 때문이다. 훈련내용도 정보수집과 통신연락에 집중했다)
그리고 대망의 1945년 8월 5일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비롯해 이청천 총사령관, 엄항섭, 이시영 등 10여명의 임정 시찰단이 서안에 도착했고, 8월 7일에는 OSS국장인 도노반과 회담을 가지게 된다.
이 당시 도노반도 독수리작전에 ‘꽤’ 관심이 많았다. 자기가 의욕적으로 밀어준 작전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온 마당에 뭔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함도 한 몫 했을 듯 하다. 미국의 정보수장과 만나게 된 김구는 흥분한다. 드디어 미국과 임시정부가 손을 잡고 공동의 적인 일본을 상대로 싸울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그리곤... 문제의 편지를 도노반에게 건넨다.
“귀국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 편지를 전해주십시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명의의 편지다. 이 편지를 미국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받는다면, 임시정부는 그 자체로 ‘반쯤’ 미국의 인정을 받는 셈이다.
도노반은 이 ‘역사적인 편지’를 트루먼에게 전해주게 된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다. 김구 주석은 한미간의 공동협력을 강조한 이 편지는 트루먼을 ‘빡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루먼 입장에서 대한민국. 그것도 ‘임시정부’ 꼬리표가 달린 이들은... 잘해봐야 ‘화적떼’에서 벗어난 정도의 존재였다.
전 지구적인 전략을 짜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나라. 소련과 영국과 함께 얄타에서 만나 전후의 국경선과 각자의 ‘몫’을 나누던 게 미국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일본에 핵폭탄도 떨어뜨린 게 미국이다. 그런데 아직 독립을 하지도 않았고, 3년 전의 카이로 회담에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겠다’고 합의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 난데 없이 한미간의 공동협력? 트루먼은 분노했다.
“미국정부가 승인하지 않았는데도 정부를 자칭하는 이들의 편지를 전달하다니, OSS는 뭐하는 이들인가?”
트루먼이 분노하던 그때, 일본은 항복의 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복군의 독수리 작전도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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