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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6.목요일

 

 

너클볼러

 

 

 

 

 

 

 

 

 

 

 

 

 

 

 

 

 

 

 

역할 모델(Role model)은 어떤 한 사람을 정해, 그 사람을 표본으로 정하여 성숙할 때 까지 모델로 삼는 것을 말한다. - 위키백과

 

 

 

 

 

 

 

 

 

 

 

 

 

 

불우한 유년기.

 

 

 

 

 

 

 

 

 

지난 편(제인 앤 메리 상(上)) 찍고 오믄 좋고 귀찮으믄 그냥 가자. 헨리 8세의 첫번째 아내는 캐서린이었다. 사실 캐서린은 헨리 8세의 형인 헨리 7세의 아내였지만, 헨리 7세가 사망하자 동생인 헨리 8세와 재혼해 그리 됐다. 나이도 헨리 8세보다 6살 많았지만 캐서린은 아내의 역할도, 왕비의 역할도 모두 흠 없이 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일하게 딸 하나만 낳은 캐서린은 단지 왕자를 잉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혼당하고 쫓겨난다. 하지만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이미 헨리 8세는 프랑스 출신 시녀 앤 불린에게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준' 상태였다.

 

 

 

 

 

 

 

 

 

 

 

 

 

인정사정 볼 것 없던 헨리 8세

 

 

 

 

 

 

 

 

 

하지만 앤 불린 역시 아들을 낳지 못했고, 헨리 8세는 그녀에게 간통과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참수시킨다. '훌륭한 왕비(캐서린)를 쫓아낸 꽃뱀'이라는 백성들의 반감을 무릅쓰고 결혼한지 3년 만에 단두대에 목을 올린 앤 불린에겐 딸이 하나 있었다. 그녀가 바로 엘리자베스 1세(본명 엘리자베스 튜더). 절대권력의 파트너였던 어머니가 간통과 반란죄(무고하게)로 처형당하고 남은 딸. 위로는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쫓겨났던 전부인(캐서린)의 딸 메리 1세가 아래로는 헨리 8세가 앤 불린을 처형시킨 뒤 얻은 4명의 아내와 그들이 나은 자식, 그 중 그토록 바라던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유년기의 불우함은 바로 '권력의 틈바구니'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른 뒤 역모에 가담했다는 의혹으로 조땔 뻔 했으며, 에드워드 6세에 이어 이복 언니 메리 1세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반란에 혐의를 뒤집어 쓰고 함 들어가믄 조때고 마는 런던탑에 구금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실재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늘 감시와 견제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어미가 참수당하면서 '공주'라는 직위도 털린 터였다.

 

 

 

 

 

 

 

 

 

 

 

 

 

 

권력과의 조우.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이 필요했으나 교황이 허락하지 않았다. 지 꼴리는 대로 이혼도 못한다는 사실에 헨리 8세는 빡쳤고 이를 안 측근 크롬웰은 오토매틱셀프한 계획을 제안한다 즉 종교의 허락을 못 받을 바엔 종교개혁이란 이름아래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그 종교의 수장에 헨리 8세를 셀프 임명, 이혼을 스스로 셀프 허가한다는 게 바로 그것. 그렇게 신교가 만들어지고, 영국의회가 승인(사실 영국의회는 종교개혁 이런 게 잘 될 리도 없다고 생각했고, 관심도 없었다), 헨리 8세가 수장이 된 뒤, 캐서린 왕비와 이혼 후 앤 불린과 결혼을 하고 엘리자베스 1세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 화려한 득녀의 일대기를 종교개혁이라고도 부른다. 종.교.개.혁. 아마 이러한 연유로 엘리자베스 1세는 태생적으로 신교도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앤 불린과 헨리 8세(미드 튜더스 중)

 

 

 

 

 

 

 

 

 

헨리 8세의 사망 후 에드워드 6세, 제인 그레이에 이어 앤 불린에 의해 이혼당하고 쫓겨났던 캐서린 왕비의 딸 메리 1세가 여왕이 되자, 메리의 이름 앞에는 'Bloody(피의)'란 닉이 붙게 된다. 신교도들을 닥치는 대로 골로 보냈기 때문이다. 메리에겐 신교도는 자신의 어머니를 소박 맞게 한, 동시에 잠시나마 자신을 서자로 낙인 찍은 '나쁜 넘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 때 엘리자베스 1세도 역적으로 몰려 함 들어가믄 피를 보는 런던탑에 구금되었지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신교도들이 때론 무고하게 탄압받고 죽어가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아니 언니 메리 1세 앞에서 개종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 남았다.

 

 

 

 

 

 

 

 

 

다행히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임기는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권력을 이양할 후세도 없었고, 더욱이 2선 퇴진이 아닌 암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다행히 아버지 헨리 8세가 눈을 감으면서 자신의 후계자 드래프트에서 1지명 아들 에드워드 6세, 2지명 이복 어니 메리 1세, 3지명으로 자신을 픽업한 터, 어렵지 않게 여왕이 될 수 있었다. 우드스톡에서 조용히 가택연금 중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언니 메리 1세의 사망과 함께 런던에 무혈입성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여왕이 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순식간에 서자가 되어 그 어떤 권력을 쥐고 있지 못했지만 뒤이어 권력을 잡은 형제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게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영국과의 결혼.

 

 

 

 

 

 

 

 

 

'과인은 국가와 결혼 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식 날 2개의 여왕인증 레어템을 손에 넣는다. 하나는 무게가 3kg에 달하는 왕실 왕관이 그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백성(국가)와의 결혼을 뜻하는 반지'가 그것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반지를 넷째 손가락에 끼었다.

 

 

 

 

 

 

 

 

 

 

 

 

 

 소식. 마른 체형. 5개 국어 구사. 명석했다고 함.

 

 

 

 

 

 

 

 

 

 그녀의 어머니 앤 불린은 무고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백성들에게 캐서린 왕비를 쫓아낸 요물이라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달랐다. 게다가 (피의)메리 1세의 폭압을 겪은 백성들에게 엘리자베스 1세는 누이에게 구박받는 여린 공주의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는 백성하고만 결혼한 '처녀왕'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강력한 '왕권 굳히기'를 시전한다. 에스파냐 왕인 펠리페 2세, 스웨덴 왕, 프랑스 왕자들로부터 청혼을 받았으나 거부했다. 이러한 에피소드가 모여 '처녀왕'이라는 닉을 더욱 뽐뿌. 게다가 명석한 엘리자베스 1세는 (엘리자베스 1세는 매우 명석했다고 알려져 있다. 생각과 고민이 하도 많아 대머리였단 말도 있고) 청혼과 거부라는 밀당의 과정을 외교카드로 이용하기도 했다. 의회가 나서 결혼을 요청(후세가 있어야 권력이 안정된다는 이유로)하기도 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는 거부했다. 이렇게 엘리자베스 1세는 백성과 결혼한 처녀왕. 요정여왕이란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부탄가스, 아니 조강지처는 아니었다.

 

 

 

 

 

 

 

 

 

헨리 8세의 마지막(여섯번째) 부인인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죽고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하자 토마스 시모어와 재혼한다. 캐서린 파는 어미를 잃은 어린 엘리자베스 1세를 가엾게 여겨 자신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년 뒤 캐서린 파는 토머스와 이혼, 엘리자베스 1세는 집에서 쫓겨난다. 이유는 캐서린 파가 토머스와 엘리자베스 1세의 다정스런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다.정.스.런.모.습.

 

 

 

 

 

 

 

 

 

'백성과의 결혼'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임기 내내 달고 산 여왕이었지만 그녀에겐 백성 말고 또 다른 애인이 여럿 있었으니 그 중 '갑'은 바로 당대를 호령한 섹시 유부남 로버트 더들리였다. 더들리에겐 부인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엘리자베스 1세에겐 애인이 필요했고, 더들리에겐 권력이 필요했다. 그들의 사이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아이가 있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엘리자베스 1세 즉위 다음해인 1559년 더들리의 부인이 사망했다. 계단에서 사고사한 것으로 최종 결론 났지만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목격자가 없었으며, 사망 직후 더들리가 전혀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와 그의 측근이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엘리자베스 1세는 더들리와 결혼하지 않는 것으로 루머를 잠재웠다. 자신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게 된 더들리는 엘리자베스 1세 몰래 비밀결혼을 했고, 이를 안 엘리자베스는 폭풍 격노했지만 곧이어 새로운 남자 월터 롤리와의 외도를 통해 안정을 되찾았다. 월터 롤리는 엘리자베스 1세를 위해 저 먼 아메리카대륙에 '버지니아주'를 건설해 헌정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말년에 더들리의 의붓아들 에식스 백작과도 살짝 연분이 있었으나 에식스 백작이 반란에 가담하여 관계는 끝나고 처형당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더들리가 사망했을 때 너무나 슬퍼했다고 한다. 마치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처럼...

 

 

 

 

 

 

 

 

 

 

 

 

 

 Dancing with 더들리

 

 

 

 

 

 

 

 

 

2006년, 영국에선 엘리자베스 1세를 주인공으로 한 두개의 드라마가 방영되었는데, 하나는 엘리자베스 1세를 평생 처녀로 묘사한 BBC의 '처녀 여왕'과 로버트 더들리와, 월터 롤리와의 끈적한 사랑을 다룬 채널4의 '엘리자베스'가 바로 그것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사실 이 말은 '나의 영토에는 결코 해가 지지 않는다'는 에스파냐의 황제 펠리페 2세의 것이지만 후세들은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을 두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었다 칭송한다. 하긴 그럴 만도 한 것이 델 보스케의 무적함대, 아니 펠리페 2세의 스페인 무적함대가 폭망하게 된 계기가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해적 + 해군 조합이었기 때문이다. 암튼 후세가 그렇다고 하니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비로소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치자. 일단...

 

 

 

 

 

 

 

 

 

 

 

 

 

 델 보스케의 스페인 무적함대

 

 

 

 

 

 

 

 

 

 영국이라는 유럽 변방의 섬나라가 해가 지지 않게 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꼽는다. 경제성장과 해상장악이 바로 그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즉위 후 인플레이션과 국가재정'거덜'이라는 2가지 위험에 직면했다. 인플레이션은 심각했다.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었고, 재화는 인구증가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아부지인 헨리 8세가 '닥치고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화폐가치를 낮추어 졸라게 발행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화폐의 가치를 원상태로 복귀시키는 방법으로 인플레이션을 극복하려 했다. 나름의 성과는 있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국가재정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는 의회를 장악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점차 신교도의 영향력이 커진 의회는 재정지원을 거부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회의 협조를 요청한다거나, 과세 정책을 통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고 왕령지 등을 매각하는 방식을 통해 정부재정을 조달했다. 그리고 그녀에겐 재정의 빵꾸를 메꿔 줄 왕차관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해적이었다.

 

 

 

 

 

 

 

 

 

공정거래. 무역 뭐 이런걸 하는 이들을 해적이라 부르진 않는다. 해적 하믄 바로 '약탈'이다. 그것도 순도 백뿌로짜리 진짜 '약탈'. 당시 바다를 장악한 무적함대 소유국 에스파냐의 주 수입원 중 하나는 바로 멕시코, 페루 등지에서 생산되어 넘어오는 금과 은이었다. 영국 해적의 페이버륏 메뉴는 바로 금과 은을 잔뜩 실은 에스파냐의 상선이었다. 고 수익을 눈치 깐 엘리자베스 1세는 공식적으로 해적에게 출자했고, 이익을 졸라게 배당 받았다. 국가가 뒤를 봐주는 해적은 무서울 게 없었고, 금과 은을 잔뜩 실은 에스파냐 선박은 빈배로 돌아가기 일수 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공식적인 약탈허가증(Letter of Marque)을 발행해 주었고, 약탈을 통한 엄청난 배당을 통해 국가재정의 일부를 충당하고 동시에 자신의 부를 축적했다. 이처럼 될만한 사업의 허가, 혹은 독점권 등을 귀족이나 의원에게 파는 것이 엘리자베스 1세의 주특기 중 하나였다. 이러한 주특기로 얼마 전 포브스에서 발표한 '인류역사상 최강 부자 BEST' 15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그녀의 재산은 빌 게이츠보다 400억달러 많은 1429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그녀는 부자가 되었지만 그렇게 메워진 재정이 건강할 리 없었다. 이런 편법을 통한 조달로 인해 재정구조는 더욱 위태로워졌으며 엘리자베스 1세의 후계자였던 제임스 1세는 최악의 부채를 시원하게 물려받게 된다. 진정으로 해가 지지 않았던 건 영국이 아니라 엘리자베스 1세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1588년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자신의 함대에 출전을 명령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것에 기분이 상했고, 가톨릭의 핵심이었던 자신들의 식민지인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에게 영국이 지원을 하기 시작한 것에 분통이 터졌고, 시도 때도 없이 금,은을 가득 실은 자신들의 상선이 영국 해적들에게 '삥' 뜯기는 것에 빡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신교도들에게 쫓겨나 영국에 망명 와 있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반역죄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처형당하자 이를 계기로 가톨릭의 깃발을 들고 출전을 감행한 것이다. 출전한 에스파냐 함대가 플랑드르 해안의 칼레 항구에 잠시 정박한 틈을 타, 삥 뜯기의 달인 해적 드레이크의 가미가제(화공선) 공격을 선보이자 당황한 나머지 혼비백산 후 튀던 도중 침수되어 침몰되고, 암초에 부딛혀 침몰하고, 홀로 표류하다 영국군을 만나 교수형당하고, 거기에 폭풍우까지 만나 결국 조때고 만다. 영국은 지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훗날 펠리페 2세의 함대에 '무적함대'라 명명한다. 그렇게 영국은 해상을 장악했고, 영국은 물론 해적과 엘리자베스 1세도 돈을 벌었다. 펠리페 2세가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무적함대가 그렇게 허둥지둥 튀지만 않았더라면 엘리자베스 1세와 해적쉐이들이 조땠을지 모를 일이다.

 

 

 

 

 

 

 

 

 

 

 

 

 

 에불바디 세이 '조때따'

 

 

 

 

 

 

 

 

 

 

 

 

 

 

그녀는 장수했다.

 

 

 

 

 

 

 

 

 

단언하건대 나만큼 국민을 사랑하는 군주는 없을 것이다. 신께서 나를 여왕으로 만들어 주신데 감사하지만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영광은 백성의 사랑을 받으며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중략) 왕관은 남이 쓴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영광스러운 법이며 직접 써보면 그다지 즐겁지 않다...(중략) 나는 내가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날까지만 살아서 통치할 생각이다. 나보다 더 강하고 현명한 군주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말기의 엘리자베스 1세는 외로웠다.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이었다. 친구들도 다 떠난 뒤였고, 그나마 말년에 남은 힘을 불살라 사랑했던 에식스 백작은 나이차를 넘어선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닌 그녀의 등에 칼을 꽂으려 했다. 결혼은 하지 않았어도 연애에 자신 있었던 엘리자베스 1세에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601년 의회에서의 마지막 연설을 끝으로 그녀의 권력도, 건강도 모두 쇠퇴하였다. 2년 뒤인 1603년 당시 평균수명보다 훨씬 웃도는 나이인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절대왕조인 튜더 왕조의 막이 내린다. '그녀만큼 권력을 가졌던 이는 그 이후로 없었다'

 

 

 

 

 

 

 

 

 

 

 

 

 

 

2012년

 

 

 

 

 

 

 

 

 

2012년 6월 영국의 텔레그래프지가 여론조사업체 ICM에 의뢰해 벌인 최고의 영국왕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엘리자베스 1세는 1위 엘리자베스 2세(35%), 2위 빅토리아(24%)에 이어 3위(15%)에 올랐다.

 

 

 

 

 

 

 

 

 

 

 

 

 

 좌측부터 1등, 2등... 그리고 3등.

 

 

 

 

 

 

 

 

 

두 달쯤 뒤 동아일보에는 멋진 기사가 하나 걸린다. (동아일보기사 링크). 두 달 전 버젓이 나와있는 설문을 캐무시하고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설문조사에서 늘 1위를 하는 엘리자베스 1세라는 당찬 '지조때로식'의 선포로부터 시작되는 이 기사는 엘리자베스 1세와 박근혜의 공통점을 역설한다. 둘 다 부모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었고, 어려움을 이겨냈고, 독신이고... 등등. 그와 더불어 자질과 풍모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가 수백년 전 절대왕조시대의 여왕이라니.

 

 

 

 

 

 

 

 

 

중상주의, 중용, 무적함대 격파, 셰익스피어 등등 엘리자베스 1세를 이야기할 때 쉽게 등장하는 수식어들이다. 이런 수식어들만 아무렇지 않게 들이밀면서, 게다가 해적에게 제독 지위를 부여했다는 것을 '사고의 유연함'이란 듣보 칭송으로 치환하면서 내민 롤모델(엘리자베스 1세)과 같은 자질과 풍모를 갖추라는 바램에서는 지금의 우릴 절대 권력에 힘없고 무력한 500년 전의 백성과 싱크 후 포박하려는 수작酬酌의 스멜이 난다. 수작의 스멜이...

 

 

 

 

 

 

 

 

 

엘리자베스 1세는 말 그대로 절대 권력 시대의 절대 권력자였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그녀에게 절대 권력을 넘겨준 이복언니 메리 1세도 가톨릭에 반발하던 이들은 가볍게 보내버리는 '피의 메리'라는 섬뜩한 별명의 소유자였지만 종종 귀부인으로 변장해 저작거리에서 마주친 빈민들에게 돈을 쥐어주거나, 식탁에 앉아 시녀에게 직접 고기를 잘라주는 자상한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중앙일보의 누군가는 독재자 박정희를 '농민들과 함께 논일을 하고 막걸리를 함께 나누어 마셨던, '씨XX리X'와 같은 비교적 저렴한 위스키를 즐긴 친서민적 권력자로 아름답게 추억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히틀러도 똑똑하고 명석한 능력자일뿐이고, 후세인도 누군가에겐 친절한 옆 동네 털보 아재일 뿐이라고 꾸며댈 수 있다 그 어떤 독재자도 지 주뎅이로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하진 않는다.

 

 

 

 

 

 

 

 

 

 

 

 

 

 독재자와 막걸리.

 

 

 

 

 

 

 

 

 

스물 다섯의 나이에 여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 역사상 왕권이 가장 강력했던 튜더(절대)왕조 시대에 45년간 최고 권력자인 여왕의 자리에 앉자 있었다. 45년간의 절대권력을 위해 '런던탑'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50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동네에서 벌어지는 엘리자베스 1세의 소환이 혹 '오랜 기간 강력했던' 그 권력에 대한 욕망과 다름 아닌지 불편할 다름이다.

 

 

 

 

 

 

 

 

 

 

 

 

 

 

 

 

 

 

 

 

 

 

 

 

후기1) '어찌 엘리자베스 1세를 롤모델로 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으로 시작된 글은 '그래서 엘리자베스 1세를 롤모델로 삼겠다는 거였군'이란 생각으로 마무리 되었다.

 

 

 

 

 

 

 

 

 

후기2) 최초의 컨셉은 메리스튜어트의 처형을 통해 본 엘리자베스였지만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다. 궁금하지 않았겠지만... 암튼 이해해주시라.

 

 

 

 

 

 

 

 

 

 

 

 

 

 

 

 

 

 

 

 

 

 

 

 

 

 

 

 

 

 

 

 

 

너클볼러

트위터 : @Knuckleballer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