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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 국회의원회관에 전시돼 있던 작품 '더러운 잠'이 보수단체 회원들에 의해 훼손됐다. 논란이 일자 국회 측에서 작품을 내렸고, 이구영 작가의 그 문제작은 훼손된 채 딴지 벙커1에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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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걸어놓고 방송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 물정에 어두운 딴지 기자들은 평온한 사무실에 앉아 명절 증후군(이라 쓰고 낮잠이라 읽는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잡았다 루팡놈들).


바로 그때, 곧 벙커1에 보수단체 회원들이 들이닥칠 거라는 소문이 들렸다. 멋진 사장님을 둔덕에 항의 응대를 주요 업무 중 하나로 생각하는 기자들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번에는 누굴까, 손님들이니까 차라도 대접하는 게 좋겠지? 아무래도 커피보단 홍차가 좋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창밖을 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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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앞에 막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다.


경찰? 무슨 일이지. 일렬로 서서 군기라도 잡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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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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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지나지 않아 꽤 많은 경찰이 모였다. 이거 아무래도 찾아오시는 손님들이 보통이 아닌가 보다. 손님들이랑 오손오손 이야기하기는 글렀다. 오늘의 깜짝 방문객들도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한다.


분위기를 감지한 경찰이 이때부터 벙커로 진입하는 모든 출입문을 지킨다. 덕분에 회사원이지만 회사원 같지 않은 모습의 딴지그룹 일동 역시 출입이 어렵다. 출입문을 지키던 경찰이 본 기자에게 '딴지 사람들 구분법'을 물어와 '후줄근한 사람들'이라고 답하니 빵터짐만 돌아온다. 죄송하지만 그 대답은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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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방문 행사가 시작되기 전, 벙커1 깜짝 방문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분도 있다. 다른 방문객은 이 나라 공권력이 죽었다고 소리치다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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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1 카페에 들어가겠다는 깜짝 방문객들과 이를 막으려는 경찰이 대치한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들께서는 벙커1 카페에 가서 '더러운 잠'을 보고 싶으시다. 경찰이 손님들을 필사적으로 막는다.


'더러운 잠' 관람이 어려워지자 대신 딴지그룹 일동을 보고 싶어 하시는 분도 있다. 2층으로 올라가려던 방문객과 경찰의 실랑이가 한동안 이어진다. 문을 지키던 경찰 2명이 4명이 될 때까지 실랑이가 계속되다 손님은 결국 기다리던 일행에게로 돌아온다.


"아 들어갈라니까 왜 막고 난리야"


깜짝 방문 실패로 속상한 기색이 역력하다.






손님들께서는 못 믿으시겠지만, 오늘은 정말로 벙커1 카페 영업을 쉬는 날이었다. 하필 찾아오셔도 이런 날에. 그러게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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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진입을 저지당하신 손님들께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켓을 차곡차곡 꺼내오셨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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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대포? 


벙커1에 대포라도 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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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릏치. 설마 그냥 놀러 온 분들이 대포를 쏠 리가. 애국단체 집회이니만큼 태극기가 빠질 수 없다. 물론 국기 게양대를 가져올 거라는 상상을 했던 건 아니다. 이런 대왕 태극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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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여야 하는데 나뭇가지에 자꾸만 걸렸다. 손님들께서 갑자기 찾아오신 탓에 미처 가지를 정리하지 못한 탓이다. 못돼먹은 벙커1의 나뭇가지들이 태극기를 찌를 때마다 내 마음이 따끔했다.


오늘 깜짝 방문한 손님들께서는 급하게 오시느라 집회신고를 할 수 없으셨기에, 기자회견 형식으로 행사를 진행하셨다. 급조된 행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국민의례-애국가-애국선열에 묵념으로 이어지는 진행이 안정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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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모두발언이 시작되었다. 요즘 테레비전을 보면 기가 막혀서 화가 나온다는 방문객께서는 6.25와 보릿고개 이야기로 시작해, 요즘 젊은거뜰이 말이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비극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조금 살만하고 고생하기 싫어서, 이런 나라에서 배부르고 등따시니까는 엉뚱한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와서 얘기하는 사람들 보면은 언제 그렇게 변했는지, 국가와 국민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다 그편에 서서 종알종알하는 걸 보면 때려죽이고 싶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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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서는 기자회견문 낭독. 왕년에 웅변으로 대회를 휩쓰셨을 것 같은 손님께서 유려한 웅변 솜씨를 뽐내셨다.


"표창원이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국회의원회관 1층에서 주최한 시국 풍자 전시회 곧바이전 현장에 전시한 박근혜 대통령 누드화가 여성 대통령에 대한 성적 희롱과 여성들의 성적 비하가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들끓는 여성들의 분노가 하늘을 꿰뚫고 있다. 이로 인해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의 대권 가도마저도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표창원이여.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이기 이전에 결혼도 하지 않은 여성이고, 여성으로서 사생활은 보호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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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발언은 선글라스를 쓴 호쾌한 방문객이 맡아주셨다.


"이 카페에 그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희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다가 이곳으로 갑자기 기자회견 장소를 바꾸게 됐습니다."

"이것을 다시 얄팍하게 이 카페에 걸어놓고 이걸 전시하는 이 수작이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바로 박근혜 대통령 망신주기요, 대한민국 망신주기를 하자는 거 아닙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얼굴입니다. 대한민국의 얼굴에 이렇게 먹칠을 해도 됩니까."



'이 카페'


발언 내내 딴지일보, 김어준, 벙커1 등의 딴지그룹 연관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 카페'라고 지칭하는 것으로 볼 때 손님들은 이곳이 딴지일보 사무실인 걸 모르는 듯했다.


창간한 지 내년으로 20주년을 맞는 딴지일보는 그렇게 한낱 '이 카페'가 되었다.

 

손님들이 한 번만 뒤돌아봐주었다면, 저 펄럭이는 현수막을 봐주었다면, 이름을 불러주고 우리는 꽃이 되었을 텐데. 한 걸음 뒤에 항상 내가 있었는데 그대 영원히 내 모습 볼 수 없나요 워어



"여기 경찰관들도 이 전시회 못하게 막으시고 그렇지 않으면 저희가 이곳에 와서 그 그림, 다 불태울 것을 오늘 강력하게 선언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저화 함께 그 그림 반드시 불태워 버립시다. 버립시다!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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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오늘의 깜짝 방문을 주최한 월드피스자유연합(참으로 아방가르드한 이름입니다) 대표께서 마무리 발언 겸 공산주의 스킬을 시전하시었다. 


"남을 비아냥거리고 씹고, 그리고 이 사진을 없앴다고 하는 얘기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 공산화 목표를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것과 똑같은 얘깁니다. 이들은 이 사진을 없앤다고 말만 하고 여기 스며들어서 전시를 하고, 사회 불만 세력을 대한민국을 전복하는 전위대로 양성하고 교육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대한민국의 여성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부모 나이이기도 하고, 우리의 딸 나이이기도 하고, 누나나 동생 나이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이 당한 이런 수모와 수치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손님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더불어민주당의 표창원 의원, 문재인 전 대표, 추미애 대표, 우윤근 국회사무총장, 우상호 원내대표, 정세균 국회의장을 언급했다. 모든 책임을 지고 즉각 정계를 떠날 것. 이름이 언급된 횟수와 관계없이 이들에 대한 요구는 일관성 있었다. 


다만, 이분들에게 뭘 경고하고 촉구하기에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많이 잘못 찾아오셨다. 우리는 그런 거 할 수 없다.


'이 카페'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벙커1에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친히 본지 앞까지 찾아와 카메라를 들이댄 <MBC> 기자는 월드피스자유연합 대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 2개를 던지고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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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이 국회에서 치워졌는데도 지금 여기서 보시니까 어떠세요?"


 "표창원 의원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참 중요한 거 물어본다.



영하의 날씨 속에 집회가 끝났다. 몰래 온 손님들과 비슷한 연배의 시민 세 명이 벙커1 앞 버스정류소에서 박수를 보냈다.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 바로 귀가한 일부를 제외하고,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에 참석했던 손님의 대부분은 보오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시고 벙커1 뒷골목에 있는 한 백반집으로 떠났다. '이 카페' 주변에 음식 잘하는 백반집이 있다는 걸 아시는 듯했다.


이 엄동설한에 차 한 잔 대접하지 못해 송구스러웠던 본지는 설날의 분위기를 되살려 어르신들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오고 가는 반찬 속에서 정을 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손님들이 본지를 상당히 경계하는 탓에 겸상하지 못하고 쓸쓸히 돌아서야 했다.


다행히 내일 재방문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있어 어쩌면 곧 손님들께 차 한 잔 대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뜨신 밥에 찌개를 나눠 먹으며 정을 다질 가능성도 열려있다. 그러니 기자 회견 때 밝힌 의지처럼 내일도 모레도 부디 벙커를 찾아주시길 바란다. 덕분에 당분간 딴지 그룹 누구도 혼밥하지 않게 됐다.






인지니어스,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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