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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아파트에 일장기가 걸리고, 광복절 광장에서는 욱일기가 휘날리며, 선출직 공무원이 당당하게 친일파가 되겠다고 목청을 높이는 작금의 현실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었다. 그 기시감이 고려사 연재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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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온라인 커뮤니티>

 

‘오래된 미래’라고도 하는 ‘역사’를 살펴보면, 진부한 소수의 권력자를 깨우치게 하는 이는 진보한 다수의 민중이었다. 우리가 공부하고 익혀 무식한 권력자들을 골라내고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투표권이 없진 않잖나. 흠흠! 혹시 나만 없는 거면 죄송하다....

 

소수의 권력자들을 골라냄과 동시에 깨우치게 해야 하지만 먹고사니즘에 지쳐 각 잡고 역사 공부에 시간을 내기 힘든 분들을 위해, 우리 역사를 재밌고 쉬우면서도 짧은 소설 형식으로 풀어보았다. 

 

사실, 몇 달 전 이미 일부 고려사에 대한 연재를 했었다. 고려 34명의 왕 중 12대 순종부터 17대 인종까지 60여 년의 시기를 다뤘다. 우리가 조선사에는 관심이 많은 데 비해 고려사에 대해선 관심이 별로 없는데, 그중에서도 그 60여 년의 기간을 특히 모르고 관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타 정도 관심만 받아도 좋겠다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고려사를 모두 다뤄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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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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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재는 몇 달 전 다뤘던 역사의 앞부분이다. 후삼국시대부터 고려 건국, 그리고 11대 왕 문종까지 이어지는 스토리다. 본 연재가 끝나면 또 저번 연재의 뒷부분을 다룰 것이다. 무신정권부터 몽골 침략, 원간섭기, 고려 멸망까지 이어지는 역사 말이다.

 

 

지난 연재

 

여동생이 왕비가 됐는데... 바람을 폈다네?(feat.이자겸)

 

고려 12대 순종 – 17대 인종까지 다룬

연재 첫 이야기

  

본 연재를 다 읽으면 주변 지인에게 역사 자랑도 함 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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풉! 이걸 모른다규?

 

단, 인간관계 파탄은 내 책임 아니다...!

 

그럼, 바쁘디 바쁜 현대사회에서 언능 역사 이야기를 출발하겠다! 

 

 

연재 목차

 

1.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2. 송악의 잠룡 왕건

3. 궁예의 관심법과 왕건의 결심

4. 패강의 눈물

5. 삼국통일

6. 광종의 히든카드

7. 고려판 사법고시

8. 고려의 노스트라다무스 최지몽

9. 전쟁의 신 서희

10. 천추태후와 강조의 변

11. 거란의 2차 침입과 몽진

12. 양규와 하공진

13. 강감찬과 귀주대첩

 

 


 

1.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견훤과 궁예

 

서기 676년, 신라의 30대 문무왕이 나당전쟁에서 승리하며 삼국통일을 달성했다. 통일신라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36대 혜공왕부터 150여 년간 스무 명의 왕이 교체될 만큼 진골 귀족 간 왕좌의 게임은 치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골품제를 기반으로 한 신분제는 더욱 공고해졌고, 빈부의 격차도 커져만 갔다. 수도 서라벌에는 금입택, 즉, 황금을 씌운 집이 서른 채가 넘었다. 다른 지역, 다른 신분들과는 완전한 다른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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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KBS 드라마 태조 왕건>

 

통일신라 말기는 망조가 든 왕조의 전형적인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었다. 고려 말, 조선 말과도 소름 끼칠 정도로 닮은 모습이었다. 서라벌 일부 특권층을 제외한 대다수 백성이 각자도생했다. 민생이 무너졌고, 도적이 들끓었다. 중앙 정부에서 하는 게 없으니 각 지역의 유지들은 지역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자치 방어를 시작했다. 당연히 지역에서 중앙 정부의 영향력도 흐려져 갔다. 각 유지는 자신들의 지역에서 왕처럼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호족 세력이 생겨났다.

 

썩고 부패하여 역겨운 냄새를 풍기던 고름은 51대 진성여왕 때 이르러 터지고 만다. 신라 전역의 군과 주에서 세금이 걷히지 않아 왕실의 창고가 텅 비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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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내일 연회를 열어야 하는데 왕실 창고가 비었다니 말이 되느냐? 지금 당장 각 고을에 관리들을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도록 하라.”

 

서라벌은 민심을 전혀 읽지 못했다. 아니,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 줄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신라는 스스로 난세로 기어들어 갔다. 난세로 인해 열린 문에서는 호걸들이 쏟아져 나왔다. 상인, 몰락한 귀족, 농민, 도적 등 다양한 출신의 호족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서로 정복 전쟁을 하며 세력을 넓혀갔는데, 그중 두 인물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후삼국 시대'를 열었다. 견훤과 궁예였다.

 

후백제의 창업 군주 ‘견훤’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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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867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호족 간 본격적인 정복 전쟁이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다. 신라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각 지역에서 옅어져가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아버지 아자개는 농부였지만, 훗날 호족으로 성장했다. 견훤은 여느 영웅호걸처럼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탄생 설화와 호랑이에 얽힌 어린 시절 설화가 전해진다. 내용은 대략 이랬다.

 

농부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을 하는 동안 견훤은 보자기에 싸여 나무 그늘에 뉘어져 있었다. 새참을 먹기 위해 나무 아래 아들을 보러 간 간 부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게... 뭐람? 호랑이가 우리 아가를?”

 

“가만! 부인! 그게 아니요. 우리 아들이 호랑이 젖을 빨고 있소!”

 

호랑이의 젖까지 먹고 자란 소년의 키는 6척(약 182cm)에 이르렀으며, 굉장히 용맹했다. 그러나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견훤은 서라벌의 중앙정부에서 출세하고 싶었으나,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 개인의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타고난 신분이었다.

 

“서라벌로 입성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군인으로 가야겠다. 군인으로 가서 공을 세우는 것만이 내 신분에서 출세할 수 있는 길이다.”

 

견훤은 이때까지 사이가 좋았던 아버지에게 신라군 자원입대를 허락받았다.

 

“아버지 제가 군인으로 공을 세워 우리 집안을 일으키겠습니다.”

 

“그래. 나도 농사만 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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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은 전라도 해안지방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이는 훗날 후백제 건국의 지지기반을 구축하는 초석이 된다. 견훤은 일반 사병으로 입대했지만, 뛰어난 신체조건과 비상한 머리를 바탕으로 승승장구한다. 서남해 방수군의 비장까지 됨으로써 출세의 길이 멀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20대 초반에 들어서자, 부조리한 세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왕실과 진골 귀족들은 유희에 탐닉했고, 백성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랑했다. 

 

“왜 열심히 사는 백성들은 늘 가난한가? 똑똑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은 귀족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합당한가?”

 

세상에 대한 의문과 불만이 쌓여 갈 때쯤 도처에서 호족들이 일어났다. 아버지 아자개도 고향 상주에서 이 대열에 합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견훤은 신라 군대를 뛰쳐나와 아버지를 찾아갔다. 얼마 후, 견훤은 상주를 떠나 전라도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견훤이 옛 백제 지역인 전라도로 향한 이유에는 견훤을 시조로 하는 집안의 흥미로운 주장이 전해진다. 이 주장에 기반하면, 부자의 대화는 대략 이랬을 거다.

 

“견훤아! 너는 옛 백제 지역으로 가서 대의를 도모하거라.”

 

“어째서입니까?” 

 

“우리 집안은 사실 옛 백제 왕족의 피를 물려받았다. 백제가 폐망하고 많은 왕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각지로 흩어졌고, 우리 집안은 여기 상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제 신라는 끝났다. 네가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견훤은 옛 백제 지역으로 돌아갔고, 군 생활을 함께한 동료들을 위시하여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구호는 명확했고, 백성들의 아픈 곳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타도 신라, 백제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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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세금과 관리들의 횡포로 집도 없이 떠돌던 사람들까지 견훤 아래 모여들었다. 견훤은 몇 년 만에 5천에 이르는 군사를 모을 수 있었고,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다. 

 

그리고 서기 900년, 오늘날 전주인 완산주에 큰 어려움 없이 입성한다. 견훤의 기세와 명성이 드높아 완산주의 호족과 백성들이 두 손 들어 그를 맞이한 것이다.

 

“견훤 만세! 견훤 만세”

 

완산주 호족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인 견훤은 가슴 속에 품어왔던 말을 입 밖으로 내며 현실화한다.

 

“여기 완산주가 후백제의 도읍이다. 옛 백제의 원수를 갚자! 서라벌을 반드시 내 손으로 멸하겠다.”

 

통일신라 말기 전국시대에서 견훤은 초반 주도권을 장악했다. 필생의 맞수인 궁예와 왕건이 그 뒤를 쫓는 형국이었다

 

다음으로, 후고구려 ‘태봉’의 창업 군주 궁예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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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신라 47대 헌안왕 또는 48대 경문왕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어머니는 후궁이었다. 왕가의 핏줄로 태어났지만, 궁예의 운명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견훤보다 못했다. 궁예가 태어난 날로 돌아가 보자.

 

천문을 해석하는 천문관은 궁예의 탄생 소식을 알리기 위해 왕 앞에 섰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폐하! 지난밤 왕자 아기씨가 태어나셨습니다. 하오나….”

 

“무슨 일이냐? 보태지도 빼지도 말고 소상히 말하거라.”

 

“예로부터 숫자 5는 양기를 뜻하옵니다. 어제는 그 5가 두 번이나 겹치는 5월 5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자 아기씨가 태어난 집 주위로 기묘한 빛이 감돌았습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제가 알아보니, 왕자 아기씨가 나면서부터 이가 나 있다고 하옵니다. 그 뜻은 이 왕자 아기씨가 필시 나라의 큰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징조입니다.”

 

“큰 혼란이라 함은?’

 

“왕의 기운을 타고났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겠다. 알아서 잘 처리하거라.”

 

왕권 다툼이 빈번한 신라 왕실에서 후궁의 아이가 왕의 기운을 타고난 것은 거추장스러운 일이었다. 왕명을 받은 궁녀가 아기를 누각 위에서 던졌다. 그러나 아기의 타고난 운명은 어른들의 욕심을 뛰어넘었다. 왕명을 어긴 다른 궁예의 유모가 몰래 떨어지는 아이를 받았다. 

 

“왕자님! 서라벌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저를 어미로 여기시고 일단 목숨을 부지하셔야 합니다... 흑흑.... 어?!!”

 

유모는 당황했다. 아기를 감싼 비단 포대기가 금세 피로 물들었기 때문이다. 유모가 아기를 받는 도중 손가락으로 한쪽 눈을 찔러 버린 것이다. 다행인 것은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라벌을 벗어나 강원도 산골에서 숨어 살았다. 한쪽 눈이 없는 소년 궁예는 그야말로 ‘낭중지추’였다. 출중함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가 없었다. 유모는 더 이상 자신이 궁예를 품고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 잠시 앉아보거라. 너는 내 아들이 아니라 왕이 버린 아들이다.”

 

궁예는 십 대의 나이에도 유모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닐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어머니! 저와 함께 있다면 어머니마저 위험해질 것입니다. 길러주신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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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집을 나섰지만, 궁예는 갈 곳이 없었다. 세상을 등지거나 종교에 위탁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발길은 자연스레 절로 향했다. 그 후로 선종이라는 법명 뒤에서 세월을 억누르며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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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음은 늘 어지러운 세상을 향해 있었다. 자신을 버린 신라 왕실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현실을 무시하며 살아가기에 궁예의 감각은 예민했고, 가슴은 뜨거웠다. 

 

밥을 먹는 듯 마는 둥 하고 탑 옆을 지나던 어느 날, 까마귀 한 마리가 궁예의 머리 위로 지나가며 무언가를 떨어뜨렸다. 발우 그릇에 떨어진 대나무 조각에는 “왕’ 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서기 891년, 궁예는 절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견훤 같은 경력도 부모도 없었다. 새 세상을 열기 위해 썩은 세상으로 나온 시기는 견훤과 비슷했으나 출발선이 달랐다. 궁예는 호족에 자신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기훤을 거쳐 양길에게 자신의 재능을 가져갔다.

 

“한쪽 눈은 없지만 사력을 다해 공을 세우겠나이다.”

 

궁예는 양길의 휘하에서 치악산을 중심으로 성장해 나갔다. 궁예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군사는 육백 명 남짓이었으나, 몇 년 사이 삼 천명을 넘었다. 궁예의 리더십은 양길의 영향권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양길은 불안함을 느꼈지만, 아직은 궁예를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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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군사를 이끌고 서쪽의 패서 지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송악의 호족 왕륭과 일전을 앞두게 된다. 왕륭은 아들 왕건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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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아! 궁예가 오고 있다.”

 

궁예와 왕건의 첫 만남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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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 역사의 빈틈은 개연성을 고려하여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꿨음을 알린다.

 

<오늘의 역사, 한 줄 요약>

 

1. 통일신라 말 권력투쟁은 심해지고, 귀족들의 사치는 늘어갔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2. 서라벌 중앙 정부가 제 할 일을 못 하여 지방 영향력이 약해졌다. 이는 곧 지방 유지, 즉 호족 세력의 성장을 뜻했다.

 

3. 호족 중 가장 선두에 서서 세력을 넓혀가던 두 인물이 있었으니, 견훤과 궁예였다.  

 

4. 견훤은 전라도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꾸렸고, 궁예는 양길 밑에서 치악산 지방(강원도 원주)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5. 세력을 키우던 궁예는 송악의 왕륭(왕건의 아버지)과 일전을 앞두게 된다.

 

6. 궁예와 왕건의 만남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