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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민주주의 재건 위해, 고인을 밟고서



2009.6.5.금요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가 마무리 되고 또 일주일 가까이 흘렀다. 첫날의 충격, 그리고는 이어진 정신 없는 날들. 진실과 책임에 대한 갑론을박에서부터 감정적인 부침의 반복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노무현에서 시작해서 노무현으로 끝난 시간이었다.


도무지 엉덩이를 떼지 않는 평소와 달리 필자도 봉하마을에도 다녀오고 영결식장도 가면서 기자 비슷하게 뛰어다녔다. 남들과 마찬가지의 광경을 봤고, 비슷한 감정도 겪었다.


이제 상도 끝나고 했으니 이 감정들을 모두 접고 냉철한 머리로 돌아가서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가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말, 이쯤에서 흔히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그것도 맞는 이야기고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그래야 하지만, 필자는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소위 말하는 냉철한 머리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실은 철저한 계산이다. 그러나 대개 계산은 우리들에게, 당장의 이익을 쫓으라는 답을 내 놓는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좁은 시야와 짧은 식견을 통해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그런 극단적인 예가 지난 선거에서 우리 국민들이 이명박을 선택한 일이다.


가슴이 없는 냉철함은, 아무리 그럴싸해 보여도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실수와 실패를 이끌어내고 만다. 사람은 머리로만 살게 만들어진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계기로든 뜨거운 가슴을 일단 얻었다면 그것을 쉽사리 버려선 곤란하다. 그것을 그냥 감정의 오바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우리 스스로가 가진 가슴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짓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그 감정을 죽이고 삭히고 잊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의 진실이 무엇이냐는 점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기초해 이성적인 행동으로 가슴의 느낀 바를 현실화 해 나가는 거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변해가고 발전한다. 자본주의가 아무리 이윤추구의 가치를 문명의 원동력으로 내세운다 한들, 그 역시 부분적인 힘에 불과하다. 인간의 정신을 각성, 고양시키고 현상유지의 유혹과 나아가 불의의 압박에 항거하도록 하는 것은 결국 언제나 인간의 가슴이었다.


 



먼저 생각해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체 우리가 왜 이토록 비통해 했을까. 500만 명이나 되는 조문객들이 다녀갈 정도로 큰 감정적 파장을 일으킨 이유는 뭐냐.


봉화마을이나 분향소를 갔던 사람들은 다 느낀 것처럼, 거기에 온 사람들의 슬픔은 분명히 진짜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문객의 대부분은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로 분향소를 찾았다. 금세기 초 고종 황제의 서거 이후, 슬픔과 억울함과 한이 곁들여진 이런 범국민적 애도의 분위기가 이 땅에 연출된 적이 또 있을까.


그런 속에서 우리가 공유했던 가장 굵은 정서는 다들 느꼈듯이 죄책감이었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죄책감은 슬픔을 넘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마음아픔을 끌어낸다. 특히 그것이 상대의 죽음, 즉 내 ‘죄‘를 영원히 만회할 수 없는 상황과 결부되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럼 노무현과 관련되어 우리가 느꼈던 이 죄책감의 정체는 뭐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진정성을 의심한 것에 대한 후회, 고인이 말미에 겪었을 고통과 외로움에 대한 무관심, 나아가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라고 하고, 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꿰뚫는 정서적 핵심은, 바로 ‘사랑’이라는 한 단어였다. 폭발에 가까운 이런 반응은 사랑이나 증오와 같은 원초적인 감정 없이는 절대 생겨나지 않는 탓이다.



…애초에 노무현이 사랑을 받은 것은 그가 사심 없이 목표를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순진한 이상주의자였가 때문이다. 노사모 회장이었던 노혜경은 그에 대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꿈꾸게 한 분’ 이라고 표현했다.


정치판은 가식과 이전투구의 장이다. 자신을 철저히 포장하고 또 숨기고, 한편으로는 남을 물어 뜯고 모략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와 위치를 만든다. 그리고 그것으로 선거에 이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건 사실 비밀도 아니다. 정치인과 국민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려니 하는 곳, 속는 줄 알면서도 속아 주는 이율배반의 장이 바로 정치판이며 다들 정치는 그런 게 당연한 줄 알고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소위 선진국도 마찬가지이고, 우리들은 이 문제를 해결 못한 채 어정쩡하게 살면서 이런 사기극을 민주주의라고 믿고 산다.


그런 곳에 노무현 같은 방식으로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영역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구체적인 가능성을 그는 오랜 세월 동안 행동으로 보여줬고, 여기에 많은 이들이 조금씩 눈을 떴다. 그것은 정치가 늘상 지저분하고 구린 모습이어야먄 하는 건 아니라는 각성, 그리고 그것이 현실 정치에 존재하는 노무현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그렇게 그는 바람을 일으켰고 결국 당선되어 이제 국가 경영이라는 현실에 직접 발을 들여 놓기에 이른다. 그러나 대통령 노무현이 맞닥드린 현실은 그가 가졌던 이상과는 전적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비록 대통령이었지만 여전히 비주류였고, 이끌고 변화시켜야 하는 지점에는 뜻도 이해관계도 달리하는 거대한 조직과 집단들이 공룡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와중에 이런저런 실수도 하면서 지지도도 떨어지고, 결국 국민의 사랑도 냉랭하게 식어갔다. 우리도, 노무현 본인도 다들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얄궂어서, 사랑하면서 그런지 모르고 평생을 살기도 한다. 우리에게 노무현은 이를테면, 비록 이혼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사랑하고 있던 전남편 같은 존재였다 흉도 보고 놀리고 멸시하기도 했던, 그저 만만하고 우습게 봤던 대상. 그래서 헤어져 버린.


하지만 나처럼 멀쩡할 줄만 알았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내게는 전화 한 통화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가 그와 이혼하게 된 이유는 그의 ‘무능’과 ‘무권위’였다. 아 남자가 돈 팍팍 벌어오는 능력이 있던가, 높은 사람들한테 인정이라도 받던가, 아니면 집안에서 나름 권위라도 있어야지 말야... 그것도 내 자신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주변에서 하도 그렇게 욕을 해 대니 물들어 버린 것이다. 끝없이 남의 남편과 비교하고, 남의 월급봉투하고 비교하고, 그때 누구랑 결혼했으면 더 잘 살았을 텐데. 네 남편은 왜 그러니.


일단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더 어설프고 바보 같고 한심해 보인다. 아유 저 인간… 집안에 뭐가 하나 깨져도 저 인간 때문, 애들이 공부 못하는 것도 실은 저 인간 탓, 지붕에 비가 새도 저 인간이 못 고쳐서, 이래도 놈현 때문, 저래도 놈현 때문.


그러는데도 화 한번 제대로 못 내는 별볼일 없는 넘. 헤어지길 잘했지.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그 바보 남편이 자살한 순간 뒤집어지는 거다. 이게 아닌데. 이런 걸 바랬던 건 아니었는데… 이제 옛날 연애할 때, 신혼 초부터의 추억이 한꺼번에 밀려 온다. 착한 사람이었는데. 많이 노력하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조금만 더 도와줬어도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리고는 절절히 깨닫기 시작한다. 젠장할. 그가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했던 거구나. 그래서 그렇게 혼자 죽게 내버려 뒀구나. 언젠가부터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못해 줬구나. 그리고 이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구나.


그런 때늦은 각성과 후회는 사람의 가슴을 찢어지게 한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떠나고 나서야, 죽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진정으로 알게 된다. 우리 국민들은 비록 5년 내내 그를 욕하고 놀리고, 또 이명박을 대통령에 뽑음으로써 결과적으로 관 뚜껑에 못질마저 해 버렸지만, 실은 바보 노무현을 그토록 마음 깊이 사랑했던 거다.


 



 


사랑하던 사람이 죽고 나면 우리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그것은 극히 인간적이기 때문에 억지로 참거나 눌러 놓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마냥 냉정해 지거나 잊어버리자는 뜻이 아니다. 극단적인 감정과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뜨거운 가슴과 정돈된 머리로 다듬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건지 스스로 찾아가는 거다.


그런 맥락에서, 고인의 죽음과 관련된 세부 사항들에 너무 집착하는 일은 이제 별 의미가 없다.


사실 검찰의 저인망식 과잉 수사는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긴 하다. 야당으로서는 이명박에게 사과 요청 하고 장관이나 책임자 해임 요구하는 것, 그 외 정치 단체와 시민 단체, 대학 교수 등은 입장 표명하고 성명서 내고 시국선언 하고, 삭발이나 단식농성 하고 이런 것들은 지금 벌이지고 있거나 앞으로 벌어질 수순들이다.


하지만 이명박의 사과를 얻어 내고 관리 몇 명 옷 벗게 하고, 또 말단의 몇 명을 감옥에 넣는다고 해서 실제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이 상황을 풀어 내려 한다면 그건 결국 서로 체면치레나 하는 뻔한 가식에 불과하다.


고인의 죽음에 대한 각종 의혹이나 음모론도 같은 맥락에서 의미 없다. 진실이 무엇이든, 심지어 누군가가 그를 바위에서 밀어 살해한 거라고 한들, 그게 카메라 영상으로 찍혀서 100% 증명될 수 없는 한 이 상황은 번복될 수 없는 거다. 그러니 ‘썰’ 로 시작해서 ‘썰’ 로 끝날 이야기에 힘과 열정을 지나치게 쏟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제 뭐에 집중해야 한다는 거냐?


그건 바로 노무현이 보여주고 우리가 공유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성, 그것이다.


그가 뛰어내린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들이 있지만, 검찰 수사가 조여 오는 스트레스 같은 것이 주된 원인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 볼 때 검찰에 수사를 당하고 감옥에 가는 게 무서워서, 검찰 조사 받은 게 망신스럽다고 죽을 인간 노무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토리를 그렇게 몰고 가고 싶은 자들도 많은 것 같은데, 뭐 눈엔 뭐만 보이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재인 전 비서실장의 다음 인터뷰가 가장 실제에 근접한 것이 아닌가 본다.


“첫 사과 글을 올릴 때는 노 전 대통령은 정 비서관이 받았다는 3억 원과 100만 달러의 성격을 제대로 몰랐다. 하지만 이후에 돈의 성격이라든지 점점 사실관계를 알게 되었다"


“권 여사가 처음에 유학비용 정도로 이야기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에 집 사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알고 (대통령이) 더욱 충격을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이 도덕적 책임을 통렬하게 느끼면서 법적 책임을 놓고 다퉈야 할 상황을 참으로 구차하게 여겼고, ‘차라리 내가 다 받았다고 인정하는 게 낫지 않냐’는 생각을 여러 번 말했다”


"그런데도 홈페이지에는 수사를 정치적 음모로 보고 대통령을 일방적으로 비호하는 글들이 올라오니까 그건 아니다, 책임져야 할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한겨레 신문 6월 1일자 인터뷰 인용)


이 맥락으로 본다면,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갈등은 그 자신의 도덕적 순결주의와 실제 현실간의 간극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처자식을 포함한 측근들에게 마냥 책임을 돌릴 수도 없고(돈 받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하면 모든 화살이 그쪽으로 돌아가게 되니), 그렇다고 스스로가 실은 수억, 수십억을 수뢰한 부패한 정치인임을 인정할 수는 더더욱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그는 놓여 있었다.


전자를 선택하면 자칫 구차하고 치사해지고, 그렇다고 후자를 선택하면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 다시 말해 전자는 주변 사람에 대한 의리의 문제고 후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의 문제다. 이건 사실 크던 작던 누구나 살면서 한번씩은 겪는 갈등이고, 가장 풀기 어려운 갈등이기도 하다.


그래도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무엇이 되었던 둘 중 하나를 택하고 어떻게든 살 길을 모색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소멸이라는, 독하지만 모순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해결책을 찾았다. 주변에 대한 의리도 지키고 스스로에 대한 진실도 지키는 대신에 자기의 생명을 그 값으로 치르는 방법.


필자는, 그렇게 노무현이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가며 그 바위 위에서 자신의 마지막 진정성을 온 세상에 증명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조문 행렬에서 보듯 그 진정성은 분명히 많은 국민들에게 그 느낌 그대로 전달됐다.


그러나 이제 그가 세상에 없는 만큼 개인 노무현의 진정성은 민주주의를 이끌어가는 실제적인 힘으로 작용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 그만 울고, 그가 추구했던 세상을 함께 원했던 우리 스스로의 진정성을 향해 고개를 돌려야 한다.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준 선물은 우리 자신이 그 진정성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이를 잃으면, 특히 그가 자살을 택한 경우라면, 그 사람의 이후의 생은 큰 고통 속에서 어떻게든 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고통을 딛고 일어서서 내적인 성장을 이룬다. 비록 상처는 사라지지 않지만, 내면의 깊은 죄책감은 결국 같은 죄를,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깊은 각성으로 변해 간다. 그리고 오히려 주변을 위로하고 밝히는 사람으로 성숙해진다. 그것만이 먼저 간 사람에게 보답하고 사죄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우리가 이 비극을 딛고 더 나은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고 또 이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무현을 통해 얻은 스스로의 진정성을 품에 안고 노무현을 밟고 가는 것이다.


물론 그의 노력과 업적을 무시하고 폄하함으로써 밟고 가자는 뜻이 아니다. 그에 대한 사랑과 죄책감만큼이나, 그가 부딪혔던 한계와 좌절이 무엇이었던지 절실히 느끼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사실 노무현의 접근은 그 참신성 만큼이나 한계도 뚜렷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혁명가의 이상을 가진 사람이 철저하게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정권을 잡고, 또 철저하게 민주적인 원칙을 통해 통치하려 했다는 점에 있었다. 이처럼 스스로 개혁의 정점이 되려 했으면서도 또한 수평적인 자세를 유지했던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는 기존의 기득권과 주류 세력을 실제로 개혁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노무현의 방법론은 도덕적으로, 원칙적으로 옳은 것이지만 그의 룰 아래에서 게임을 하지 않는 기득권층에게는 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비록 대선에서의 승리라는 성과를 올렸음에도 개혁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고 정권을 극우 기득권층에게 다시 빼앗기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게다가 이제 스스로 선택한 죽음으로 인해, 노혜경이 이야기했던 ‘불가능의 영역’은 정녕 불가능으로 다시금 증명된 것처럼 보인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이 깨진다는 것이 가장 비극적인 방법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렇게 모든 꿈이 깨져 버린 지금, 이번 사태의 최대 시혜자가 박근혜가 될 거라는 나름 근거 있는 지적들이 벌써부터 돌고 있다. 한나라당의 손에 나라가 또 한번 맡겨지는 상황을 방관할 수는 절대 없다. 하지만 그에 대적할 인물이 마땅찮은 민주당/진보 계열에서 과연 다음 정권 창출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관적이다.


그렇다면 이제 과연 어떤 방법으로 우리의 진정성을 실현할 수 있나. 어떻게 하여 이 땅에 민주주의를 되살려 올 것이며, 뻔뻔한 정부와 탐욕스러운 우익/기득권층/주류를 견제할 것이며, 가난한 사람, 힘없는 이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재건할 것이며,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되찾을 것이며, 대운하와 민영의료보험 같은 후안무치한 사업을 저지할 것인가.


이건 이명박에게 상처받은 국민을 끌어안아 달라고 울며 호소하고 공개 편지를 써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 분들의 순수성을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폭군의 금포 자락을 붙들고 비는 것도 아니고 그런 행위는 스스로의 무력함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을 볼 때, 이제 이 문제와 관련하여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우리들 사이에서 모든 걸 열어놓은 상태에서 범국민적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때라고 본다. 적어도 조문에 참여한 5백만은 이 논의에 어떤 식으로든, 술자리에서 궁시렁 거리는 방식으로라도, 참여해야 한다.


노태우 시절에 정립된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 정치구조의 틀 속에서 진행되었던 노무현의 실험은 처절한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이제 그 실험의 2막을 열어야 할 사람들은 살아있는 우리들이다. 그러나 이 2막은 고립된 선구자의 희생을 전제하지 않는 형태가 돼야 한다. 우리 모두가 같이 책임을 지고 나눌 수 있는 그런 형태여야 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대통령 단임제를 버리거나, 심지어 대통령제 자체를 버려야 할 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던 간에, 주류 기득권층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키고, 정치꾼들의 전횡과 민의를 빙자한 사기극을 저지하고, 권력의 독재와 압제를 막고, 국민의 뜻을 정확하게 반영하며, 국민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그런 판이 필요하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의례적인 비난이나 사과 요구, 탄핵 시도 같이 변화와 결과물을 얻어낼 수 없는 쪽으로 저항의 방향이 가는 것은 의미 없다. 위정자들의 거짓 위로를 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 스스로 진짜 나라의 주인이 되는 방향으로 세상을 고민해야 한다. 다스림 받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고, 무시 당하고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주권자로서 존중 받고 대우 받아야 한다.


대통령 노무현은 스스로를 낮춰 국민을 그렇게 대했었지만, 어리석은 우리는 그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인정하자. 세상이 이대로 가는 한 이제 다시 그런 대통령은 나오지 않는다. 나온다 해도 또다시 희생당할 뿐이다.


우리는 그 실수를 만회해야 한다.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자. 고인의 뜻을 살려내는 방법은 오직 하나, 이 나라에 진짜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뿐이다. 비록 당장의 현실은 어둡지만 나는 그것이 결국 가능하다고 믿는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꿈꾸는 것. 이제 다시 시작하자. 이번에는 아무도 죽지 말고. 힘을 내서. 



 


딴지 논설위원
파토 patoworld@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