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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절규하며 스스로 불덩이가 됐던 전태일은 꽤 솜씨 있는 재단사였다. 크게 행세하지는 못하더라도 청계천 바닥에선 사장들도 무시하지 못하고 시다들에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처지였다. 또 그렇게 살다가 기회가 닿으면 사장 명함을 파는 일도 흔했다. 전태일도 사업을 꿈꾸었다. 하지만 그 목표와 목적은 여느 사장지망생들과 달랐다.

 

“정당한 세금을 내고, 기계와 다른 인간적으로, 배움의 적령기에 있는 소년 소녀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고도 사업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경제인, 특히 평화시장 사업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전태일 ‘열사’가 역사적으로 입에 배었고, 전투적 노동운동의 상징처럼 돼 있다 보니 전태일 하면 과격 투쟁을 도모한 사람으로 오해받고 있지만 기실 전태일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적 양심과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시다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럴 수는 없다’는 기본적인 믿음으로 무장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구상한 사업의 ‘목적’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전태일은 꽤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사업자금만 준비되면 일의 80% 이상을 행한 거나 다름없다”라고 자신할 만큼. 하지만 그에게 사업자금이란 꿈속의 진수성찬 같은 존재였다. 그를 믿고 투자해야 할 전주들은 전태일과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여기서 전태일은 이런 결심을 토로한다. “나의 가진 것 중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즉 한쪽 눈을 사회에 봉사할 것이다. 눈을 사회에 봉사하고 나는 사회의 자금주를 소개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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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정당하게 내고 어린 노동자들에게 인간적이고 정당한 대우를 해주면서도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를 위한 기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한쪽 눈을 기꺼이 내주겠다는 각오였다. 그냥 말에 그친 것이 아니다. 전태일은 1970년 3월 24일 중앙일보에 실린 실명자(失明者) 기사를 보고 자신의 눈을 기증하겠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전태일은 대체 얼마나 다급했기에, 얼마나 절박했기에 내 한쪽 눈을 팔아서라도 ‘기계가 아닌 인간, 소년 소녀들에게 대한 합당한 대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눈에 담겼던 풍경이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했으면 그가 ‘사람 몸이 100냥이면 90냥’ 가치가 있는 눈 절반을 도려내서라도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까. 가끔 전태일의 사진을 보면서 그를 두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가려서도 보고, 보고도 잊어버릴 줄 알고,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먼산 바라보며 딴전 피울 줄 아는 재능이 지지리도 없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전태일은 자신이 ‘국부’(國父)라고 부른 대통령에게 호소했다. “공무원의 평균 근무시간 1주 45시간에 비해 15세의 어린 시다공들은 1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이 고통을 폭로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눈을 팔아서라도 자기 눈으로 보았던 것을 고치고 싶었던 사람. 1970년 11월 그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 숨을 거두었다.

 

 

 

2.

1988년 당시 15세 소년 문송면(1973년생)이 공장으로 들어온다. “집안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갈 수 없다. 하지만 친구들처럼 나도 공부하고 싶다.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뼈 빠지게 고생만 하시는 부모님. 자식 공부 못 시키는 부모님 맘이 오죽할까. 서울에는 고등학교 공부시켜주는 공장이 있다는데….”(1987년 문송면의 일기 중)

 

문송면은 기숙사가 있어서 낮에 일하고 밤엔 공부할 수 있다는 온도계 제조 회사를 택했다. 날이 차면 ‘수은주가 내려갔다’는 표현을 쓰듯 온도계에는 수은이 주요한 재료로 쓰였다. 문송면은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일을 했고, 기숙사 텃세 때문에 5평 남짓한 작업장에서 잠을 잤다. 수은이 널려 있고 겨울이라 문까지 꼭꼭 닫혀 환기도 되지 않는 작업장에서 말이다.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건장했던 문송면은 취직한 지 두 달도 안 돼서 이상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두통과 가려움증, 불면 등을 호소했고 몸에 좋다는 한약도 먹었지만 점점 상태는 악화됐다. 1988년 설날, 고향에 내려온 문송면은 눈이 뒤집힌 채 경기를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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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지들은 문송면을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병명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순박한 가족들은 의사도 모른다는 괴질을 물리치기 위해 굿판까지 벌였어도 송면이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경으로 서울대병원에 들렀을 때에야 병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수은 및 중금속 중독이었다. 서울대 병원 주치의가 온도계 공장에서 일했다는 말을 듣고 모발을 채취하여 검사한 결과 거기서 수은과 구리가 듬뿍 검출된 것이다.

 

티 없이 건강하던 15세 소년이, 무당도 곡을 할 병에 걸려 시들고, 그 원인까지 과학적으로 규명되었지만, 노동부 서울남부지방 노동사무소는 산재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관련 서류에 사업주의 날인이 없고 ‘서울대학교 병원’이 산재보험 미지정 의료기관이라는 것이다. 사업주는 “다 멀쩡한데 왜 걔만 수은중독이냐. 시골서 큰 녀석이니 농약 중독 아니냐”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온갖 우여곡절을 거친 뒤에야 직업병이 인정되지만, 그 보람도 없이, 1988년 7월 2일 순박한 소년 송면이는 형이 깜박 잠든 사이, 아무도 모르게 외로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공부하고 싶으나 공부할 수 없었던 소년은 열심히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 열성 때문에 어린 몸을 갉아 먹히고 말았다. 영안실 바닥을 치며 통곡하던 문송면의 아버지도 끝내 가슴에 판 자식의 무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다음 해 세상을 뜨셨다. 그분이 남긴 말은 “우리 송면이 학교 가야지…”였다.

 

 

 

3.

사람을 처음 대할 때 어디를 먼저 보느냐 하는 시시한 질문이 있다. 그 답은 제각각일지언정 정답은 하나다. 사람은 사람을 대할 때 눈부터 본다. 눈은 세상으로 열린 통로이자 자신의 내면으로 난 창이다.

 

전태일과 문송면의 눈을 다시 본다. 노동자들의 건강을 지키며 사업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으니 내 한쪽 눈을 가져가라던 전태일의 핏발 서린 눈매, 경기를 일으키며 허옇게 뒤집혔다는 문송면의 눈. 그리고 요 며칠 툭하면 또 한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게 된다. 김용균. 발전소 비정규직. 랜턴 잃어버려 그 책임 추궁당할까 두려워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여 살벌한 기계 쓍쓍대는 현장을 혼자 누비다가 참혹하게 죽어간 청년.

 

그가 대통령 좀 만나자고, 얘기 좀 들어달라고 손팻말을 든 사진이 좀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농담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웃고 까불다가도 그 얼굴이, 특히 그 눈이 시야를 엄습한다. 피곤에 지친 듯하나 그에 굴하지 않고 크게 치뜬 듯한 눈, 채 앳됨을 지우지 못했으나 내가 든 팻말을 보아 달라는 듯 결연함이 묻어나는 저 눈은 이제 영원히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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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이 눈을 팔아서라도 하고 싶어 했던 일과 이상을, 그의 죽음 이후 반세기가 지나고서도 우리는 이뤄내지 못했고 또 다른 노동자가 두 눈  치뜨고 내 이야기 좀 들어달라고 호소하다가 그 며칠 뒤 아무도 없는 어두운 현장에서, 그 임종을 누구도 지켜보지 못한 문송면처럼 외롭게 죽어갔다.

 

카메라로 피사체를 끌어당겨서 가까이 보는 것을 줌인(zoom in)이라 한다. 문득 세 노동자의 눈으로 내 스스로가 ‘줌인’되는 상상을 한다. 저 검고도 슬픈 하늘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한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으로 소름이 돋는다. 각박한 세상에 아파하고 모진 꿈에 소스라치다가 끝내 그 눈동자의 생기를 빼앗기고 말았던 노동자들의 눈, 눈빛들 속에서 나는 티끌보다 작아지고 먼지보다 가벼워진다.

 

“더 이상 이런 일이 없기를” 되뇌는 주문은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막연하게 ‘비정규직 철폐’를 부르짖어서 될 것 같지도 않다. “가라 자본가 세상” 구호는 고장난 녹음기 같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 봐도 소용없겠지” 싶다. 하지만 전태일, 문송면, 김용균 이 십 년, 삼 십 년 상간을 두고 세상과 이별한 노동자들의 눈을 다시 들여다보면 어떻게든 무엇이든 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끝이 없는 말들 속에 나와 너는 지쳐가고 또 다른 행동으로 또 다른 말들로 스스로를 안심시키지” 말고. 무슨 구원자가 나와서 우리를 구원하리라 여기지 않고. 아프더라도 해야 할 말을 하고, 상처받더라도 드러낼 건 드러내면서 이런 모순들을 끝장내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줄여라도 가야 하지 않겠나. 저 셋의 눈동자에 대고 그런 약속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