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11.23.월
그 중 한 사람은 10대 초반부터 지방 어느 도시에서 중국집 철가방 활동을 시작, 10대 후반 즈음엔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상경하여 고생 끝에 중국집 조리장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검정고시를 파스하고 중국어를 독학하여 마침내 꿈에 그리던 중국 유학에 성공, 중국처녀까지 와이프로 데려와서 지금은 아무개 대학 중국요리 관련 교수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중국과 중국요리에 인생을 걸어온 그답게 방송국 스튜디오에 함께 온 자신의 와이프보다 더 중국인 냄새가 났다. 굳이 분위기 깨지게 방송국 제작 상의 의도까지 짚어본다면, 대통령의 중국방문을 기념하는데 이들 부부만큼 효과적인 선전물이 어디 있으랴, 뭐 이런 계산이겠다. 한의대에 서른 댓살 먹은 늦깎이 대학생들은 굴러다닌다고 표현하면 과장일지 몰라도 보기 드물지는 않다. 하바드 대학 박사 출신으로 한의대 학부에 진학했던 전 고려대 교수 김용옥의 영향을 비롯하여 그간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소위 한의대 붐이 일으켜낸 특이한 캠퍼스 풍경이다. 이들 늦깎이 대학생들의 지난 경력을 뒤져보면 위의 기자출신 학생에 뒤질 인물들을 오히려 찾아보기 힘들 게다. 방송국에서도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건마는 별 볼 일 없는 황 머시기라는 이 인물을 입지전적인 철가방 출신 교수와 나란히 소개하는 저의가 뭘까. 본 기자는 얼마 안 가서 해답을 찾아냈다. 요즘은 과외로만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말에, 출연진 중 한 사람이 혹시 고액과외 아니냐고 농담 반으로 묻자 갑자기 난처한 표정으로 고액이라고 말할 순 없다고 둘러대는 황 머시기의 모습이 본 기자의 사냥개같은 후각에 포착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이 말쑥하게 생긴 인간의 본색이 드러났다. 그는 자기가 쓴 책 선전을 위해 방송국에 나온 거다. 서른 여섯에 기자 생활마저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인생에 도통한 듯 만학의 길을 선택한 이 사람이 쓴 책은 이름하여, 수능 막판 뒤집기 옳아. 수능! 내일이 수능이었던 거다. 근데... 내일이 바로 수능인데 이 책 선전해봐야 무슨 효과가 있을까. 이 책의 선전내용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의리있는 한국일보 기자들이 아까운 서평 지면 활용해서 두 번이나 써준 수능 막판 뒤집기에 대한 서평 기사 가운데 하나의 전문을 소개한다.
이 순 사기꾼 넘들아. 온 나라가 고액과외 땜에 몸살을 앓고 학교 선생님들은 기가 죽어 지내고 있는 판국에 뻔뻔스럽게 테레비에 얼굴 내밀고 나와, 아이 돌잔치 땜에 세미나 못 나갔을 때, 만학도로서의 비애를 느꼈다고 엄살 블루스를 치고 앉았냐. 씨바, 그렇게 바쁜 넘이 수능담당자 등의 인터뷰나 몇 년 간의 수능시험에 대한 철저한 분석할 시간은 있나부지. 수능 길잡이 책 하나 쓴 사람한테 너무 가혹한 비판이 아니냐고 말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물론 공부하는 요령을 가르친다는 선의를 무조건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선의라면 왜 막판 뒤집기라는 요행과 선동의 말로 표출되어야 하느냐는 거다. 더구나 황 도사는 대학에서의 전공을 살리지 못하는 시행착오를 겪고 늦은 나이에 전공을 바꾼 사람이다. 그가 진정으로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면, 미래를 내다보며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 진학 안내서를 써야 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뒤집기 인생이라도 그렇지, 수능 막판 뒤집기가 도대체 뭔가? 우리 나라의 교육계 현실을 냉정히 돌이켜보면 이런 황 도사 류의 무당선생들이 끼치는 악영향에 대해 새삼 몸서리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다. 그들은 성적 향상의 지름길 운운하며, 청소년들에게 공부 = 게임이라는 야만적인 등식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게임은 가능한 적은 노력으로 최대의 이윤을 뽑아내는 경제성 원리에 좌우되며 약삭빠른 상황판단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돌성이 없으면 지게 되어있는 치열한 전쟁터와 같은 것임을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그리고 그 야만의 전쟁터에서 람보처럼 승승장구 적들을 무찌른 자신의 자랑스런 훈장들을 번쩍여 보이는 거다. 서울대 진격작전 공로훈장, 언론계 침투작전 포상훈장, 의과대 고지점령 무공훈장... 그들에겐 안되는 게 없다. 적들에 둘러싸였다구? 걱정 마, 막판 뒤집기 일당 백 전술이 있지. 고등학교 교육의 전문가는 누구인가? 당연히 고등학교 선생님들이다. 이건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이런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교육의 전문가는 따로 있는 거다. 저 번쩍이는 훈장을 단 무리들이 바로 고교교육의 거룩한 전문가들이다. 고액과외 사건이 찜찜하게 마무리 된 지금, 수학능력 평가가 치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입시추위처럼 끈질기게 달라붙는 비상식적 교육의 틀 속에 우리의 청소년들을 가두어 놓으려는가. 우리의 청소년들에게만이라도 올바른 목표를 향해서 때론 바보스럽게 매진하는 것, 때론 내가 아닌 옆 사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해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노력한만큼만 대가를 받는 것이 바로 공부임을 가르쳐주어야 하지 않겠나.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 교육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성공적이라고 개그를 해대는 수구언론과 여전히 공부도사들의 굿판을 제공하고 있는 정신없는 방송들, 그리고 검찰을 비웃는 진짜 고액과외 선생들의 달콤한 유혹 속에 있는 수험생들에게 이런 답답하고 궁색한 말이 통할까냐만은, 부채도사들의 말에 속지 마라. 공부는 쉬운 게 아니다. 그리고 TV 니네 조심해 !
- 딴지 교육부 기자 최가박당( hoggenug@netsgo.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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