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목차

 

1. 후삼국 시대를 연 두 영웅 - 링크

2. 송악의 잠룡 왕건 - 링크

3. 궁예의 관심법과 왕건의 결심

4. 패강의 눈물

5. 삼국통일

6. 광종의 히든카드

7. 고려판 사법고시

8. 고려의 노스트라다무스 최지몽

9. 전쟁의 신 서희

10. 천추태후와 강조의 변

11. 거란의 2차 침입과 몽진

12. 양규와 하공진

13. 강감찬과 귀주대첩

 

 

<지난 편 역사, 한 줄 요약>

 

1. 왕건의 탄생에는 도선 스님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2. 세력이 막강한 궁예가 송악을 향해 다가오자, 송악의 호족이자 왕건의 아버지인 왕륭은 자진해서 궁예 밑으로 들어갔다.

 

3. 궁예 밑으로 들어가게 된 왕건은 궁예의 신임을 얻으며 승승장구한다.

 

4. 세력이 더욱 커진 궁예는 자신의 주군이던 양길과의 전투에서 이겨 승자가 된다.

 

5. 궁예는 후고구려 건국을 선포한다.

 

6. 건국 2년 뒤, 궁예는 왕건을 시켜 후백제의 나주를 친다. 왕건은 손쉽게 나주를 점령했다.

 

7. 궁예는 호족 세력을 본격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 일환으로 수도를 이전한다.

 

8. 수도 이전으로 궁예는 호족들과 대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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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의 관심법이 시작되다

 

궁예는 삼국통일 이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호족들을 지금 휘어잡지 못하면, 통일은 고사하고 내가 먼저 당할 수 있다.’

 

궁예는 호족의 힘을 약화시킬 정책을 시행했다. 호족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했고, 그들의 사병을 중앙으로 편제시켰다. 호족들은 반발했고 거센 상소 릴레이가 빗발쳤다. 

 

쉽게 물러설 수 없었던 궁예는, 종교를 악용하기로 했다.

 

출처-<KBS1 드라마 ‘태조 왕건’>

 

“짐은 이 나라의 왕이자 미륵불이다. 석가모니를 대신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러 이 땅에 내려왔다. 짐이 지난 백일 간 부처님의 뜻에 따라 쓴 이 책들이 그 증거다.”

 

궁예는 머리에 금빛 두건을 두르고,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백마를 탄 채 저잣거리로 나섰다. 뒤로는 비구니와 어린 동자 수백 명을 따르게 했다.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겼으나, 아무도 이상하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때, 석총 스님이 궁예를 제지하러 나섰다.

 

 

“폐하는 미륵이 아니십니다. 폐하께서 지으신 책은 부처님의 말씀을 그릇되게 전하고 있습니다. 부디 이를 멈추시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애써 주십시오.”

 

그러나 궁예의 귀에 석총 스님의 말이 들릴 리 없었다. 궁예는 자신의 미약한 논리를 채우는 방법으로 대화와 토론이 아닌, 공포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마침 본보기가 필요한 참이었다. 

 

마구니가 꼈구나

 

궁예는 석총 스님을 철퇴로 때려죽였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궁예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는 ‘관심법’을 빌미로 자기 뜻에 따르지 않는 호족을 제거해 갔다. 심지어 호족의 딸이었던 자기 부인과 아들까지 죽였다. 가족까지 죽일 정도로 궁예의 공포 정치가 극에 달하자, 더 이상 궁예가 미륵불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없었다(...).

 

이제는 궁예의 관심법을 이용해 일신의 영달과 출세를 노리는 자까지 나타났다. ‘아지태’란 자였다. 그는 궁예가 싫어할 만한 인물을 모함하고, 궁예가 듣기 원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폐하! 여기 제가 파악한 수상한 자들의 동태이옵니다. 폐하께서 관심법으로 확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둘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왕건은 이런 상황을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왕건은 아지태를 잡아들였다. 당시 왕건은 명실상부 궁예의 오른팔이었다. 912년 나주를 공격한 견훤을 물리친 공으로, 이듬해부터 백관의 우두머리인 파진찬과 시중을 겸하고 있었다. 왕건은 궁예가 준 권력으로 궁예의 가려진 눈을 뜨게 하려 했다. 왕건은 아지태를 엄히 추궁했다.

 

 

“너는 어찌하여, 거짓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가? 네가 만약 이 자리에서 나에게 사실을 고한다면 살 것이고, 거짓으로 세 치 혀를 놀린다면 너를 죽일 것이다. 나에게 그 정도 힘은 있다.”

 

아지태는 왕건에게 이실직고했고, 왕건은 이 일을 궁예에게 보고했다. 왕건 덕분에 파직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이들은 왕건을 은인으로 여겼다. 

 

“왕건 그자가 온화한 성격인 줄 알았더니, 나설 때는 또 확실히 나서는군요.”

 

“폐하께서 너무 숨통을 조이시니 반사이익을 얻는 것도 있지만, 확실히 난 인물이긴 하지요. 우리랑 말도 잘 통하고.” 

 

왕건을 바라보는 대신들의 시선이 변한 것을 눈치챈 궁예는 이후 왕건을 유심히 쳐다보는 날이 잦아졌다. 왕건도 자신을 바라보는 궁예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모를 리 없었다. 왕건은 대책 마련을 위해 최측근을 불렀다.

 

“폐하께서 장군을 바라보시는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언제 관심법을 쓰실지 모를 일입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이리 이별주를 하기 위해 자네들을 부른 것이 아니냐?”

 

“무슨 말씀입니까?”

 

“나주로 내려가야겠다. 비는 피해 가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들은 여기서 폐하를 잘 보필하고 있거라.”

 

 

왕건은 나주로 갔다. 그러나 몇 년 후, 궁예는 왕건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직면하게 된다. 

 

 

왕건에게도 닥친 궁예의 관심법

 

세상을 뒤엎을 폭풍은 ‘왕창근’이라는 장사꾼이 궁예에게 바친 거울에서 시작되었다. 저잣거리의 상인 왕창근 앞에 기괴한 모습의 노인이 나타나 해괴한 말을 했다.

 

“이 거울을 사게.”

 

“그 뉘신데 장사치한테 물건을 사지는 못할망정 팔려고 수작이요?”

 

“자네는 이미 한눈에 알아보지 않았나. 이것이 보통 거울이 아니란 것을!” 

 

평범해 보이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은 거울임을 왕창근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눈치챈 노인의 말에 놀랐지만, 짐짓 배짱을 부렸다.

 

“뭔 소리를 하는지. 이게 내가 가진 돈 전부요. 이거 받고 넘기든지 딴 데 가보시든지 하시오.”

 

노인은 왕창근에게 받은 돈으로 굶주린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 주었다. 왕창근은 노인이 저잣거리를 떠나자 서둘러 집으로 갔다. 그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햇빛 아래 거울을 두고 측면을 바라보았다. 거울에는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긴 글이 적혀있었다.

 

‘옳거니! 역시 보통 거울이 아니었구나. 폐하께 바쳐 한 몫 단단히 잡아야겠다.’

 

왕창근의 거울에 적힌 내용은 학자들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두 명의 학자가 며칠을 매달린 끝에 겨우 그 뜻을 해석할 수 있었다.

 

“이 내용 그대로 폐하께 아뢰었다가는 피 바람이 불 것입니다.”

 

“하필이면 송악의 용이 다른 용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황제가 된다는 내용이니 그 참.”

 

“이렇게 합시다. 송악이 들어간 내용은 모조리 빼고, 서라벌의 왕자였던 이가 왕이 된다는 내용으로 결론을 내립시다. 우리 둘만 입을 다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이 될 것이요.”

 

그러나, 거울에 적힌 내용에 대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거울의 글 내용을 밝혀낸 학자 자신이 비밀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918년 마침내 궁예의 관심법이 왕건을 향했다. 영문도 모른 채 입궐한 왕건은 궁예의 물음에 사지가 마비되고, 생각이 경직되었다.

 

 

“내 관심법은 그대도 잘 알 것이다. 그대는 어째서 역심을 품고 있느냐?”

 

“………………”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역시 내 관심법이 맞았구나. 너는 신하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나와 스무 해를 넘게 했는데도 욕심을 다스리지 못했구나. 하지만 나는 너를 이해한다. 너도 한낱 미물인 인간이기 때문에 욕심을 낼 수 있다. 사실대로 잘못을 인정하면 미륵불인 나는 너를 용서할 것이다.”

 

“폐하…. 소신은…..”

 

왕건의 대답을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은 영원처럼 무겁게 좌중을 짓눌렀다. 그때 붓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며 정적을 깼다. 붓은 왕건의 발 앞에서 멈췄다. 붓을 떨어트린 장주 ‘최응’은 서둘러 왕건 쪽으로 갔다. 그는 몸을 숙여 붓을 줍는 척하며 왕건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부인하시면 죽습니다. 하지 않은 일이라도 인정하시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제 말을 믿으셔야 합니다.”

 

 

왕건은 역모를 부인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궁예의 측근인 최응의 말을 믿어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어째서 말을 고하다 멈추었는가? 그냥 사실을 말하면 되는 일이다.”

 

궁예의 호통이 이어졌고, 왕건은 생각을 마치고 짧게 대답했다.

 

“죽여주시옵소서. 제가 은혜를 잊고 감히 역모를 도모하였습니다.”

 

궁예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왕건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뜻밖의 말로 최응을 제외한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하하하핫~ 역시 그대는 정직하도다. 다시는 짐의 인내심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라. 이번에는 미륵불이 용서하였으나 다음번에는 다를 것이야.”

 

 

왕건은 연신 절을 했고, 최응을 비롯한 신하들의 부축을 받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계속해서 피할 수만은 없을 것이야.’

 

 

왕건의 결심

 

같은 해 6월, 왕건의 최측근인 신숭겸, 복지겸, 홍유가 대낮에 왕건의 집을 찾았다. 자신들의 방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왕건에게 신숭겸이 말했다.

 

“야심한 밤이 눈에 더 잘 띄는 법입니다. 준비는 마쳤습니다. 한 마디만 내려주시면 되옵니다. 신하들도 민심도 모두 황제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역사가 우리를 반정이라고 기록할 것이다. 또한 남은 자들에게 나쁜 본보기 될 것이야.”

 

“역사는 결국 승자를 지지할 것입니다.”

 

왕건이 궁예를 치는 것을 주저하고 있자, 훗날 신혜왕후가 되는 그의 첫 번째 부인 유 씨가 왕건의 갑옷을 챙겨서 방으로 들어왔다. 

 

“대세는 기울었습니다. 그날의 치욕을 잊으셨습니까? 다시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마세요. 의복을 갖추고 저 문을 나가 입궐하십시오.”

 

왕건이 집을 나서자 준비를 마친 군사들이 궁으로 향했고,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환호했다.

 

 

신라의 왕자로 태어났다가 버려지고, 스님이 되었다가 한 나라를 건국한 황제까지 된 궁예의 파란만장한 삶에 이제 마지막이 다가왔다. 궁예는 의관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채 궁을 빠져나갔다. 이후 무명의 백성에 의해 길바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마지막치고는 너무나 허망했다. 역사의 패자인 궁예는 제대로 된 무덤 하나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설화로 남겨지며 민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궁예가 궁을 빠져나와 도주하던 중 어떤 강 앞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강을 ‘한탄강’이라 부른다는 설화도 있다. 또한 어떤 산에서 크게 울기도 했다는데, 그 산을 ‘명성산’이라 부른다. 명성산에는 오늘날까지도 궁예능선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918년 6월, 왕건은 마침내 궁예의 그늘에서 벗어나 고려 건국을 선포한다. 표면적으로 견훤과 양강 체제가 구축된 듯 보였으나,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여전히 고려에는 궁예의 퇴진을 바라지 않았던 세력이 남아 있었고, 왕건의 반란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력도 있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건 ‘환선길’이었다.

 

“내가 왕건보다 부족한 것이 무엇이더냐!”

 

<계속>

 

 

 

<오늘의 역사, 한 줄 요약>

 

1. 호족과 대립하던 궁예는 호족 견제를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

 

2.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며, 관심법을 사용했다. 

 

3. 이즈음 왕건은 백관의 우두머리인 파진찬과 시중을 겸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

 

4. 어느덧 궁예의 관심법은 왕건에게도 향했다. 궁예는 왕건의 역모를 의심했다.

 

5. 궁예가 원하는 대답을 하며 왕건은 일단 지금의 위기를 벗어났으나, 위험은 계속될 것이었다.  

 

6. 궁예의 폭정에 고심하던 왕건은 드디어 쿠데타를 일으킨다.

 

7. 궁예를 몰아낸 왕건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왕건의 집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력이 아직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움직인 건 '환선길'이었다.

 

 

※ 역사의 빈틈은 개연성을 고려하여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꿨음을 알린다.

 

 

 

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기나긴 역사 중 흥미로운 주제를 집어 한 편 한 편 이야기로 엮는다.    필요할 때는 스스로 재연(?!)하는데, 가서 허접한 연기를 비웃어주자...!   유튜브 채널 <역사킹> 링크

 

 

필자의 지난 책들   1. 찌라시 한국사 (링크)   2. 찌라시 세계사 (링크)   3. 나 아직 안 죽었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