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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3. 05. 월요일

정우성


 










지난 회


1부


2부


3부


4부




 


 


아이의 자존감


오늘도 나는 이부자리를 편다. 불을 끄고 어둠을 불러서 아이와 잠자리를 같이한다. 그리고 이부자리에 누운 아이에게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아빠의 엉터리 구전동화가 또 시작된다. 눈이 닫히고 귀가 열린다. 환상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 신데렐라가 그 문을 열고 들어온다.

 


 



 


신데렐라가 혼자 방에 있다


언제나 문이 닫혀 있다


오늘은 친구랑 놀고 싶은 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똑. 똑. 똑.


책처럼 이야기처럼


문을 열면 안 돼


늑대가 들어와서는 콱 잡아 먹는다


하지만 신데렐라가 문을 연다


그때 정말로 늑대가 와서는


커다란 입을 벌린다


바로 그 순간이다


신데렐라는 내 친구라며 달려와서는


늑대를 쫓아내는 아이


신데렐라야 이제 괜찮아 내가 있잖아 우리 함께 놀자


신데렐라는 별을 바라보고


딸 아이는 별 모양 집을 짓는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 똑. 똑. 똑.


책처럼 이야기처럼


문을 열면 안 돼


늑대가 들어와서는 콱 잡아 먹는다


하지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신데렐라가 문을 연다


그때 키 작은 아이의 눈동자


내 동생이야 우리 함께 놀자


동생은 달을 보고 달집을 짓는다


색칠을 한다


신데렐라와 딸아이와 동생이


나란히 누워 하늘을 본다


잠을 잔다

 


오늘 이야기는 신데렐라 이야기다. 신데렐라 이야기에 주축을 이루는 것은 ‘관계’다. 신데렐라를 주인공으로 계모, 새언니들, 마법사, 왕자님이 나온다. 하지만 아빠 이야기에서는 신데렐라 외에는 아무도 배역을 맡지 못했다. ‘관계’는 새롭게 설정됐다. 신데렐라와 우리 아이들의 관계로 말이다. 이부자리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다.

 


 


아빠의 노파심


내가 왜 그들에게 배역을 주지 않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좀 해명할 것이 있다. 나는 동화라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부지불식간에 편견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계모와 새언니들이 꼭 나쁜 사람들은 아니지 않은가? 혹시 내가 애 엄마랑 이혼하거나 사별할 수도 있다(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일어날 수 있다). 요즘 이혼율이 높다고 한다. 친구들 중에는 계모와 새언니들이 있을 수도 있다. 좌우간 모르는 일이다. 그런 경우라도 내 아이들이 편견 없이 바라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아빠의 노파심이다.

 


 



 


신데렐라를 행복하게 하는 역할은 ‘왕자님’이 한다. 신데렐라와 왕자님의 관계가 신데렐라를 행복하게 하고, 어린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나는 왕자님과의 관계를 우리 아이들과의 관계로 바꿨다. 우리 아이들이 그 따뜻함을 누리면서 편안히 잠 속으로 건너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빠 이야기는 좀 달랐으면 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정통 이야기’와 ‘아빠 이야기’가 너무 다르면 아이의 사고가 왜곡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다름’을 잘 수용한다. 아이들은 마음씨가 넓고 평화주의자다. 아이들 머릿속에서는 그저 ‘정통 이야기’와 ‘아빠 이야기’가 공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부자리에서 ‘정통 이야기’를 공격하거나 괜히 비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정통 이야기’도 아이들에게는 소중한 법이니까(특히 그 이야기를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들었다면 정말 소중한 것이다). 나는 그저 역할을 왜곡하지 않는다. 단지 배역을 주지 않을 따름이다.

 


 


아이의 자존감


모름지기 사람에게 자존감은 정말 중요하다. 자기 자존감이 높을 수록 자기 자신을 믿고 다독거리게 되므로 고난을 더 잘 이겨낼 수 있다. 자존감에는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없다. 자존감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꿈을 꾸고 인류애를 갖도록 해주는 마음가짐 같다. 자존감이 클 수록,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고 격려하며 스스로에게 따뜻해질수록,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온화한 눈빛으로 대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또한 따돌림과 실패와 환란과 죽음의 구렁텅이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다르다고 한다. 전자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며 후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인 것처럼 느껴진다. 모두 ‘관계’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완벽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자존심도 괜찮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명예라는 것이 있어서 굴욕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자존심도 자연스러운 거다. 자존심이 아예 없으면 자존감도 매우 낮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존심을 마냥 나쁘게 볼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아이의 자존감’ 뿐만 아니라 ‘아이의 자존심’도 중요한 거다.


 



 


<아이의 자존감>이라는 베스트셀러 책이 있다(아이의 자존감을 이용해서 성공과 리더가 되기 위한 방법을 강조하는데 글쎄다). 이 책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부모와 아이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어떻게 아이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지에 대한 부모의 역할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따뜻한 칭찬을 자주하라는 것과 너무 ‘안 돼’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준다. 어떤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동의할 수 없다. 우선, 기본적으로 나는 ‘안 돼’라는 말을 자주 쓴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므로, 안 되는 것을 ‘된다’라고 말할 수 없다. 안 되는 것을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아이들의 자존감이 저해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통해서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부모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위로의 표현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표현만으로도 부족하다. 아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부모가 자기를 사랑해 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말이다. 아이는 좀 더 많은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모종의 ‘상징기법’이었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머릿속에서 의미들을 상징화한다. 기분 좋은 것과 기분 나쁜 것이 속속 배치된다. 기분 좋은 것으로는 사랑, 도와줌, 괴물을 물리침, 용서, 포옹, 빛 같은 것들인데 동화 속 캐릭터나 단어, 이미지 같은 것으로 상징화된다. 기분 나쁜 것으로는 미움, 질투, 죽음, 질병, 무서움, 어둠 같은 것들이 마찬가지로 동화 속 캐릭터나 단어, 이미지 등으로 상징화된다. 기분 좋은 것과 함께 하면 편안해지고, 기분 나쁜 것과 함께 하면 긴장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기분 좋은 캐릭터를 이용해서 아이들을 편안하게 하고 기분 나쁜 것과는 멀리하는 것이다. 동화 속 캐릭터와 아이와의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말만 어렵지 실제로는 정말 쉬운 일이다. 이런 관계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환상이 필요하므로 불을 끄고 눈을 감아야 한다. 환상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위해서 아이들은 잠을 잔다.


 



 


아이들에게 환상은 꼭 필요한 요소다. 본디 우리 인류는 환상을 먹고 자랐다.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믿음 등은 인류 정신세계의 잔칫상이었다(합리성이 이 잔칫상을 대신하자 묘하게도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옛 사람들은 어떤 물건이나 동물에 대해서 깊은 신앙을 표현하곤 했다. 바로 그거다. 아이들은 동화나 만화의 캐릭터나 장난감 같은 것들을 무지 좋아한다. 그게 그들의 샤먼이요 토템이다. 아이들은 캐릭터를 정말로 사랑한다. 아이들은 그들에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평소 사랑을 그렇게 많이 줬으면 거꾸로 이제는 사랑을 받아도 되는 게 아닌가?


 


다시 신데렐라 이야기로 돌아가자. 저 이야기는 우리 딸아이가 몇 번이고 듣고 들을 때마다 행복해 했다. 아이는 평소 신데렐라(그 인형과 동화)를 사랑했다. 우리 아이는 신데렐라한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아이들에게 사랑이란 함께 노는 것이다. 어른들에게는 매우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부모한테 받는 사랑은 아이의 자존감에 필수적이지만 부족하다.


 


거기에 캐릭터한테도 사랑을 받는다면 어린 아이는 정말로 큰 위로를 받는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서는 늑대에게 잡아먹힐 뻔한 신데렐라를 자기가 구해줬으므로 대단한 유대감과 만족감을 불러온다. 세상은 따뜻함으로 가득하다. 이부자리 이야기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다.


 


여러분들도 어린 아이가 있다면, 아이가 평소 좋아하는 캐릭터나 장난감을 유심히 관찰한 다음에 이부자리를 펴 놓고, 반드시 눈을 감고, 앞서 소개한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그것들과 자기 아이를 엮어 보라. 즐거운 관계를 만들어 보라. 당신과 아이와 캐릭터는 서로 하나의 끄나풀로 묶이면서 환상 속으로 들어간다. 유대감은 자존감을 두텁게 한다.

 


보아뱀을 설명하는 어린왕자 같은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친절하게 정리해본다:

 



 


(1) 이부자리를 편다


(2) 불을 끄고 함께 눕는다


(3) 눈을 감으라고 하고, 어디 눈을 감았는지 보자고 한다


(4) 규칙을 설명한다(눈을 뜨면 이야기는 멈춘다는 것)


(5) 이야기를 한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따라서 머릿속에서 상상할 수 있도록 충분히 느릿느릿 길게 끈다(가급적 따뜻한 내용의 이야기, 색감 있는 이야기,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 가족이 나오는 이야기, 친구들이 나오는 이야기, 입체감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6) 이야기가 끝나면 "끝!"이라고 말해준다. 그렇지 않으면 더 해달라고 조른다.


(7) 재미있었냐고 물어본다? 틀림없이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부모가 누워서 조곤조곤 이야기해줬으므로 그 자체로 재미있는 거다.


(8) 꿈 속에서 만나자고 한다.


(9) 같이 자거나, 애들이 자면 일어나서 볼 일 본다.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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