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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드롬이었다. 하이 포니테일을 틀어 올린 안소희가 고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만두처럼 빵빵한 볼을 가리며 '어머나' 다시 한 번 말해보라던 순간, 원더걸스의 '텔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소희는 초대 국민 여동생 문근영(<어린신부>)의 왕관을 이어받았다. 모르는 사람도 없겠지만, 가수로서의 소희는 절망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작은 성량과 불안한 음정, 음 이탈도 예사였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어머나' 하나만 야무지게 보여주면 그만이었는데. 깜찍하게 아양을 떨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소희를 연호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 '어머나'가 십 년을 돌고 돌아 '샤샤샤'로 귀환했다. 연예인이 가는 자리마다 "XX씨, '샤샤샤' 한 번 보여주세요", "'샤샤샤' 댄스를 시청률 공약으로 걸겠습니다"와 비슷한 말들이 '두 유 라이크 김치?' 혹은 '두 유 노우 강남스타일?'에 준하는 진부한 공식처럼 오고 갔다. 너나할 것 없이 발그레한 볼을 앙증맞게 닦아내고, 소셜미디어는 연관이 있건 없건 #샤샤샤 태그로 물들어, 트와이스의 사나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이름을 알리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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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늦여름을 신속하게 불사르고 종영한 엠넷의 댄스 경연 프로그램 '힛 더 스테이지'는 한 가지 의문을 유산으로 남겼다. 걸그룹에게 춤이란 무엇일까? 국내 정상급 그룹에서 춤 간판을 맡은 샤이니 태민과 인피니트 호야는 말할 것도 없고, NCT U 메인 댄서 태용의 화려한 춤사위에 상대적으로 묻히는 텐이나, 연식은 오래됐어도 이렇다 할 커리어 없이 공백만 1년 째인 빅스타의 필독, 아이돌 사업으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판타지오’의 신인 아스트로 라키마저도 이렇게 잘한다.


그러나 여성 멤버 경연을 생각하면 천상지희 출신인 스테파니나 카라의 전 멤버 니콜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밑천만 드러낸 격이었다. 소녀시대 효연의 퍼포먼스는 10년 경력을 생각하면 아쉬운 수준이었고, 시스타 보라의 둔한 몸놀림은 넘치는 의욕을 무색하게 했다. 트와이스의 모모, 러블리즈의 미주, 다이아의 은진 역시 경험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남돌과 여돌의 평균 능력치 차이가 이 정도란 말인가? 오해 마시라, 생득적 신체 조건을 빌미 삼아 ‘춤은 역시 남자가 춰야 제맛’이라는 성차별적 일반화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판’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보이그룹 시장은 후퇴하지 않는다. 통시적인 방향성을 갖고 건실하게 진일보해 온 보이그룹은 날이 갈수록 더 잘 부르고, 더 끼가 넘친다. 군무는 칼처럼 잘 맞고 작곡이나 랩 메이킹도 곧잘 해서 이제는 ‘개나 소나 아이돌 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능력치 인플레이션 시장이 됐다(외모는 오히려 1세대~2세대보다 하향 평준화되었다!). 그리고 이 무한경쟁에서 파이 확보에 성공한 보이그룹들-빅뱅, 2PM, 샤이니, 비스트, 인피니트, EXO, 빅스, 방탄소년단, 세븐틴 등-을 돌아보면 제각기 다른 표정들이 재미있다. 연예기획사가 사활을 걸고 던진 출사표라, 하나하나 공들인 태가 나고, 장인의 인장이 박힌 진검처럼 그룹색과 아이덴티티가 고유하다. 이렇듯 체계적으로 양성되어 코어 팬덤의 집중적인 수혈을 받는 보이그룹은 망해도 재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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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그때그때 몰리는 화제성이라는 녹을 먹고 자라는 걸그룹은 벼락부자를 닮았다. 직캠이 유독 예쁘게 찍혔다거나(EXID의 하니), 입간판이 아름답다거나(AOA의 설현), 빗속에서 넘어져 가며 춤추는 ‘꽈당’ 동영상이 입소문을 타서라거나(여자친구), 입대 체험 예능에서 ‘이이잉~’ 한 번 했다가 스타덤에 오르기도 한다(걸스데이의 혜리). 여돌을 ‘대세’로 만드는 계기들은 대개 부차적이고 우연적이다. 대중매체를 접하는 그 수많은 시청가 무슨 단체 최면에 걸려서 꽂힐지 모르니, ‘듣보’ 신세 면하려면 품위고 나발이고 세간에 최대한 많이 오르내려야 할 운명인 것이다.
 

그래서 걸그룹 시장에서는 ‘어그로’가 통한다. 멜빵을 내리며 일사불란하게 엉덩이춤을 추는 걸스데이 더러 애들도 보는 TV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선비질해도, 펑퍼짐한 체육복에 머리에는 헬멧을 동여매고 점프해대던 크레용팝을 일베충이라고 손가락질해도, 결국엔 가는 곳마다 그들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이다. 걸그룹은 중소기업도 노려봄 직한 일종의 투자 대비 고효율 상품이다. 일단 물타기에 성공하면 당분간은 아무리 흉한 콘셉트로 나와도 흥행이 보장되지만, 이미지 소비가 심한 만큼 물갈이가 빠르다. 요컨대 심혈을 기울여 걸그룹을 기획할 동기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전효성의 하드캐리로 순식간에 정상에 올랐다가 백일몽처럼 공중분해 된 시크릿의 말로가 전형적이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인기가 쪼그라들기 전에 치고 빠져야 하니 소속사는 가수가 무대에서 졸도할 때까지 스케줄을 돌리게 되는데, 그 안타까운 모습마저 ‘꿋꿋한 여자아이들’이라는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으니 얼마나 잔인한 시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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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경 덕분인지 걸그룹 콘텐츠는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약 5년 전을 기점으로 시크릿, 시스타, 걸스데이, AOA, EXID 등 섹시 계열의 그룹들이 가요계를 휩쓸었고, 본격적으로 판도가 갈린 작년부터는 여자친구, 러블리즈, 오마이걸, 우주소녀, 다이아 등 소녀 계열의 그룹들이 봇물 터지듯 양산됐다. 예외라면 f(x)나 원더걸스, 레드벨벳, 마마무, 블랙핑크 정도를 꼽겠지만, f(x)와 원더걸스를 제외하면 유의미한 논의가 불가능한 단계다. 레드벨벳은 f(x)의 유사품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블랙핑크도 데뷔와 동시에 ‘2NE1의 예쁜 버전’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전성기 브라운아이드걸스의 포지션을 재점유한 마마무는 장외경기로 본다).


걸그룹의 계보를 정리해보면, 이들이 판매하는 상품은 퍼포먼스가 아니라 여성의 표정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도 단 두 가지 표정. 섹시하거나, 순수하거나.


그중에서도 트와이스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인기와 댄스 가수로서의 퍼포먼스라는 요소가 ‘무관할 수도 있음’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무명의 설움 느낄 겨를도 없이 데뷔곡부터 삼 연타를 기록한 트와이스는 가사를 받아적은 듯한 코레오그라피(안무)로 여돌의 퍼포먼스의 난이도 하락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도 트와이스의 매력’이라고 한다.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된다며 줄다리기를 하고(‘Cheer Up’), 손으로 새 부리를 그려 병아리와 독수리를 흉내 내고(‘I’m Gonna Be A Star’), 예쁘지도 않은 포즈로 굳이 ‘TT’라는 문자를 형상화하는(‘TT’) 율동에 가까운 모션이 누구나 추기 쉽고 보기에 불편하지 않아 좋다는 것이다. 노래를 잘해서도, 춤을 잘 춰서도 아니고, 복잡하지 않아서 좋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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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와이스의 히트는 걸그룹을 소비하는 방식이 ‘귀엽고 예쁜 것’ 이상의 무엇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 단계에 고착되었음을 시사한다. 보이그룹이 아크로바틱과 마샬 아트를 소개하며 날아다니는 동안, 걸그룹은 엉덩이 잘 털면 합격이고 윙크 예쁘게 하면 사랑받는 기쁨조로 퇴보했다. 노래는 점점 부르기 쉽게, 춤은 더 따라 하기 쉽게 단순화된다. 트와이스의 인기에 쐐기를 박은 ‘샤샤샤’가 일 더하기 일은 귀요미라던 국민 애교 스킬 '귀요미 송'과 차별화되는 점은 무엇이던가. 여돌의 단순화-평면화 현상은 다수의 여성 팬으로 구성된 코어 팬덤이 없는 그룹, 즉, 일반 남성 그룹이 주축 되어 소비하는 그룹일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일반 남성 소비자가 여돌에게 기대하는 것은 댄스 가수로서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나 프로페셔널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 사원은 커피나 잘 타오면 된다는 것처럼, 자꾸 어려운 말 하는 여자 애인이 피곤한 것처럼.


작금의 여성 이미지 소비 경향은 결국 주체성 문제로 환원된다. 걸그룹은 남성의 욕망이 철저히 투사되어야만 하기에 주체성이 허용되지 않는 대상화의 공간으로 전락했다. ‘국민 첫사랑’ 혹은 ‘국민 여동생’ 타이틀이 여성 연예인에게 객체성을 내면화하는 전략으로 작용하는 세계에서는, 걸그룹 시장도 일 잘하고 자기주장이 있는 여성이 아닌 꽃처럼 전시해 놓고 감상할 수 있는 섹시하거나 순수한 여성상 모집의 장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걸그룹으로서 추구해야 마땅한 ‘본업’이던가? 퇴행 속에서도 누군가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자기 목소리를 내고 진짜 춤을 추고, ‘예쁘다’가 아니라 ‘멋지다’는 환호를 들을 어떤 날을.



탱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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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