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좀 나쁘다 하는 애들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싸움 중 하나가 '너보다 내 눈이 더 나빠'다. 불행배틀(각자가 얼마나 불행한지를 겨루어 모두가 상처받는 전쟁)처럼 소리도 없고 의미도 없는 전쟁이다.
난 이 전쟁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보통 -6D(디옵터)보다 나쁜 시력은 '고도근시'로, -9D보다 나쁜 시력은 '초고도근시'로 분류하는데, 나는 근시만 -8.5D인데다 난시를 합하면 -9D가 넘었다. 웬만큼 눈 나쁘다 하는 애들도 내 앞에선 깨갱하고 꼬리를 말고 도망갔다(물론 승리로 얻은 건 아무 것도 없다).
사실상 초고도근시인 고도근시자가, 보조도구(안경/렌즈)가 없이 보는 세상은 이런 느낌이다.
안경쟁이의 흔한 시선
1) 맨눈으론 10cm 앞이 안 보여서 모든 사람이 예쁘고 잘생겨보인다.
2) 모두가 백옥같은 피부를 가진 것 같음.
3) 다만 어디까지가 얼굴이고 어디까지가 몸인지 구분이 안 됨.
보조도구가 없으면 엄마아빠를 몰라보는 것은 물론 눈 앞에 있는 게 사람인지도 잘 구별하지 못했다.
그 아이는 왜 느닷없이 수술을 했나
안경 하나로 눈이 1/3로 줄어드는 마법 그거 저도 할 줄 알았다.
눈 많이 나쁜 애들이 으레 그렇듯 나도 초등학교 때 안경을 시작했다. 따라서 기억이 맞다면 올해가 안경 15년, 소프트렌즈 10년을 달성한 해다. 참 기쁘지 않다.
첫 안경 5년은 안경만 꼈지만 렌즈(소프트)를 시작하고 나서는 렌즈9, 안경1의 비율로 살았다. 지구에서 제일 싫은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내 안경 쓴 얼굴'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도수 높은 안경과 그 안경을 낀 얼굴이 싫었으므로. 보통 하루에 10시간 정도 꼈고 심하면 12시간도 넘게 꼈다. 8시간이 하루 적정착용시간이란 걸 감안하면 엄청난 객기였다. 그랬다. 내가 언제까지나 어리고 건강할 줄 알았다.
탈은 렌즈 인생 10년에 가까워졌을 때부터 나기 시작했다. 렌즈를 낀 지 5시간 정도 지나면 눈이 뻑뻑해졌다. 속눈썹이 들어갔을 때처럼 간지럽고 따갑기도 했다. 아픔에 본의 아니게 길거리에서 윙크를 하고 다니기도 했는데(눈에 뭐 들어간 사람처럼), 슬픈 건 어느 누구도 윙크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귀엽고 잘생긴 엑소의 첸을 닮은 연하남이 걸려들길 바란 게 아닌 것도 아니어서 약간조금많이 아쉬웠다.
핏발이 서서 벌개진 눈에 인공눈물을 들이붓는 모습을 보고 주변인들은 라식 혹은 라섹으로 대표할 수 있는 '시력교정수술'을 하지 그러냐고 말했다. 수술 그까이꺼 암 것도 아니라면서 며칠만 참으면 새 세상이 열린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며칠의 고통을 못 참겠다는 거 아닙니까...
단순히 아픔이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사실 나만큼 고통에 강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성형외과, 치과, 피부과를 합해 얼굴에만 천만 원 넘게 들이면(다 내가 냈음) 고통엔 도가 트기 마련이다. 문제는 도가 튼만큼 고통을 잘 알았다는 것이다. 수술 중 마취(국소마취O, 전신마취X)가 풀려 생살을 꼬매보면 모르고 싶어도 고통의 극한을 알게 된다. 특히 쌍꺼풀 수술 중에 마취가 풀렸을 땐... (심한말)
이후에도 (국소)마취가 풀린 적이 있었고(이 때는 겨드랑이여서 근성으로 참았다), 이런 몸은 나로 하여금 '안구에 하는 마취라고 안 풀린다는 보장이 있는가?'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만들었다. 아직 시력교정수술 하다가 마취풀렸다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내가 그 첫 번째 사람이 된다면? 원래 모든 사고는 나한테 일어나면 100%랬다.
그렇게 평생 수술이라면 학을 떼고 살 줄 알았으나... (라고 하기엔 이후로도 손을 많이 댔음)
얼마 전부터 한쪽 눈이 잘 안 보이기 시작했다. 이물질 낀 것 같은 느낌이 딱 결막염이었다(상태가 몇 년 전에 결막염 걸렸을 때와 비슷했다). 렌즈 대신 안경을 끼면 자연치유가 될까 싶어 안경만 쓰고 다녔지만, 효과가 1도 없었다. 아무래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절망했다.
사실 결막염 자체는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 빼곤 불편한 것도, 이렇다할 고통도 없다. 안약만 잘 넣고 병원만 잘 다니면 금방 낫기도 한다. 다만 치료하는 3주에서 한달 정도 렌즈를 끼지 못했다. 즉, 안경만 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 대학 시절 처음 안경을 쓰고 나타난 날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던가, 처음 안경을 쓰고 출근했던 나를 보고 못된딴지 사람들이 얼마나 놀려댔던가. 안생긴 개그맨을 닮았다고 했던 그 말을 아직 잊지를 못하고 있는데...
키 작고 흐리게 생겨서 안경을 안 써도 입만 다물고 있으면 만만해보이는데, 안경까지 쓰면 좁쌀보다도 못해졌다. 왠지 안경을 쓰면 화장도 안 하고 옷도 막 입고 마는데, 그럼 꼭 공부 잘하는데 경쟁의식 심해서 자기보다 공부 잘하는 애들 견제하느라 친구 없는 히스테릭한 초등학교 4학년 애처럼 보였다.
평상시(입 열지 않았을 때) '남녀노'에게 무시를 당했다면 안경 쓴 상태에선 남녀노소 모두에게 무시를 당했다. 쟤는 초등학생 같은데 왜 이렇게 얼굴에 그늘이 많냐는 앞담화부터 시작해서 친하지도 않으면서 어깨동무하며 돈 좀 빌려달라고 하는 중학생까지 조심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한 달 동안 강제로 안경 쓰고 다니기'형은 사실상 나에겐 엄벌이었다.
원빈도 안경 앞에선 그냥 김씨 아저씨가 되는 것을... (원빈 본명: 김도진)
그 때 친구가 한 말이 나를 홀렸다. 흔히들 알고 있는 시력교정수술, 그러니까 라식, 라섹, 렌즈삽입술(자세한 것은 아래에서 설명) 말고도 '스마일 라식'이라는 수술이 있다는 것이었다. 가격은 라식/라섹보다 1~200만 원 정도 비싸지만, 고도근시도 할 수 있으며, '하루 만에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했다.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임에 틀림없는지, 어차피 결막염으로 추정되는 무언가 때문에 당장 수술도 못할 거면서, 마치 당장이라도 눈에 레이저를 댈 사람처럼 안과 진료예약을 했다. 안경을 쓰고 다녀야 하는 약 한 달 동안 당할 수모(교복 입은 애들이 모여있으면 돌아가고 지갑 보여달라고 하면 알겠으니 얼굴만은 때리지 말아달라고 빌어야 할)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예약을 하지 않을까? 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강제안경행이 불러온 강제공부
'예약=수술'이라는 등식이 무조건 성립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나에게 예약은 곧 수술을 결정했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한 번 하기로 마음 먹은 건 어떻게든 하고 말아서 엄마아빠의 혀를 내두르게 하는 일을 20년 넘게 해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개과천선할 리가 없다. (역시 하루이틀 일은 아닌지라 엄마는 '나 안과 예약했고 수술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든다'라는 말에 그저 먼산을 보았고, 아빠는 조금 귀찮다는 듯 병원에 데려다줘야 하냐고 물었다. 복수의 성형수술과 치아교정, 약간의 피부과로 앵간한 돈을 들이면 부모님마저 하나 밖에 없는 딸 얼굴에 무감해지는 상황에 이른다. 물론 이 얼굴을 누구에게 받았냐고 물었을 때 할 말이 없어서겠지만...)
암튼 사람은 변하면 죽는다고 했으니 '예약은 곧 수술이다'라는 명제를 성립시킬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돈(그것도 카드회사가 내주는)과 '한 달 동안 강제 안경'을 저울질 해보면 답은 정해져있는 것이다.
이 차이를 참을 수 없다. (feat. 좁쌀눈)
라고 해도 문제가 있었다. 이전까지 시력교정수술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라식, 라섹 등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레이저로 각막을 깎는다' 밖에 없었다(렌즈삽입술은 이름으로 유추할 수라도 있지). 라식과 라섹의 차이, 그리고 신기술이라는 스마일 라식에 무슨 차이가 있는 지를 몰랐다. 분명 차이가 있으니 '라식' '라섹' 등으로 나누어 부르는 걸 텐데...
우선 '내 시력이 왜 좋지 않은가' 하면... 각막이 잘못했다. 잘하지 않았으니 눈이 안 보이는 거겠지.
시력교정수술은 크게 '레이저를 통한 각막절제'와 '안내렌즈삽입술'로 나눌 수 있다.
아무튼 각막이 굉장히 잘못했기 때문에, 시력교정수술을 위해서는 ①레이저로 각막을 혼내주거나, ②눈에 렌즈를 집어넣어야 한다.
이런 불친절한 설명으로 끝내는 거냐고 묻는다면 난 학창시절부터 과학수학이 지구에서 두 번째로 싫었고 지금도 싫다고 답하겠다.
과학의 산물인 '거울'이 내 안경 쓴 모습은 이렇지 않단 걸 알려줬기 때문
1) 레이저로 각막을 조지겠어(레이저 수술)
'레이저로 각막을 교정하는 수술'로, 라식과 라섹, 스마일라식이 여기에 포함된다. 물론 방법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레이저를 쓴다는 점 빼고는 다른 수술이라고 볼 수 있다(따라서 다르게 명명하는 것). 노랗고 뚱뚱하다고 모두 피카츄는 아닌 거고...
기본적인 수술의 틀은 이렇다.
- 각막 앞부분을 절개한다
- 레이저로 각막실질층(시력을 좌우하는)을 깎아 시력을 교정한다.
라식과 라섹의 수술법
누구나 문방구에서 산 레이저로 수술할 수 있을 것처럼 간단하게 써놓았지만 원래 남이 하는 것만큼 쉬워보이는 게 없다.
차이점이라고 하면,
각막(앞부분)을 얼마나 절개하느냐가 가장 큰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등이 있다. 스마일라식은 가장 나중에 나온 수술답게(라식->라섹->스마일라식 순) 비교적 고도근시도, 각막이 얇아도 수술할 수 있다. 절개를 조금만 하기 때문에 각막손상도 적고 회복기간도 짧다. 광고문구로 '하루만에 일상생활가능'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빨리 낫는다는 거 아니겠냐구.
라고 하지만 갖은 수술로 통해 느낀 것은 '고통과 회복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쌍꺼풀 수술해도 안 아픈 친구는 안 아프고 티눈 수술을 해도 아플 사람은 아프다. 슬프게도 난 언제나 후자였으니 아무리 '하루만에 일상생활가능'이라고 광고를 해도 진짜 거기에 해당될 확률은 적었다. 삼일 죽도록 아플 거 하루 반 정도 죽을만큼 아픈 거면 모를까...
그럼에도 한 번 팔려버린 정신과 그간의 수술로 쌓은 내공은, 수술 후의 고통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아픈 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라 미래의 나니까 왠지 다 괜찮은 것 같았다.
2) 렌즈삽입술
얘는 이름 그대로 눈(홍채와 수정체 사이)에 렌즈를 삽입하는 수술이다.
특징이 있다고 하면 눈에 문제가 생겼을 때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이다(넣은 렌즈를 빼면 됨). 또 레이저 수술이 불가능한 사람도 할 수 있고, 난시교정렌즈, 다초점 렌즈도 넣을 수 있다.
그리고,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존나게 비싸다. 어디까지나 지인한정이지만 렌즈삽입술을 하면서 500만 원 밑으로 지불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다초점렌즈를 삽입한 지인A는 600만 원 정도 들었다고 했다(본인은 싸게 했다며). 시력 하나 얻자고 충정로에 빚쟁이들이 쫓아오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으니 나한테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이런 걸 공부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 필요없다. 처음부터 돈으로 시간을 사기로 했다. 는 인생을 팔아야 하는 렌즈삽입술은 제외하고... 그 중 쪼까 비싸다는 스마일라식을 1지망, 2지망, 3지망으로 정했다(처음부터 그랬음). '3일 만에 개안'의 시작이었다.
원래 내일 없이 살았다. 앞으로의 나는 신용카드가 해결해줄 것이다.
여담.
시력교정수술의 시초는 일본인 안과 의사 사토가 각막 안팎을 인위적으로 절개한 것이라고 한다('안경이 깨지면서 각막을 다친 학생의 시력이, 굴절력 변화로 오히려 좋아졌다'는 것에서 착안했다고). 좀 무서운 건 첫 수술을 실패했다고 하던데, 대체 누구의 눈으로 실패했을까 하는 것이다. 왠지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생각도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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