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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실린 백범일지를 통해, 삼일절과 광복절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의 정신과 업적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가 우리 역사에 큰 영향을 남긴 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분께서 돌아가신 이후 70년 가까이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다면? 심지어 정부가 나서서 고인의 능묘를 훼손한다면?


믿기 힘들겠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주석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8주기인 6월 26일, 그 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효창원의 역사

 

1786년, 조선 정조 임금의 장자가 5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시호를 문효세자라 하여 경기도 고양 율목동에 묘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효창원의 기원이다(현 용산구 효창공원)효창원은 당시 울창한 삼림을 갖춘 것으로 유명했다. 동으로는 용산 청파로, 서로는 마포로, 남으로는 도원동과 도화동에 이른다고 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여의도공원의 3분의 2 정도에 맞먹는다고 할 정도였다고.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되면서 효창원의 수난이 시작된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효창원의 울창한 삼림에 눈독을 들여 야영지로 활용한 것에서 시작하여 유곽촌을 비롯한 갖가지 건축물들이 들어섰던 것이다. 이어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의 불법 군사 점령이 시작되면서부터 효창원은 일개 공원으로 전락하여 기존 문효세자의 무덤 또한 경기 고양 서삼릉으로 이장되고 말았다.

 

효창원 사진 - 딴지일보.png

 

그러던 효창원이 지금과 같이 바뀌게 된 것은 해방 이후 김구 선생이 환국하고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의사의 묘소를 설치하게 되면서부터다. 1945년 11월, 김구 주석은 미군정 왕실재산관리처에 효창원을 애국지사의 묘소로 활용할 계획을 타진했고, 이듬해인 1946년 7월 6일 삼의사의 유골 봉환식이 국민장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1948년 이동녕 선생과 차리석 선생의 유골이 추가로 봉환되었고, 안중근 의사의 가묘 또한 설치되었다. 왕가의 무덤이 민족 영웅들의 성지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1949년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흉탄에 피살당함에 따라 선생의 무덤 또한 효창원에 안치되었다. 백범의 비서였던 선우진 선생의 말에 따르면 효창원에 순국 선열들의 묘소를 추가로 더 신설할 계획이었다고.



효창원의 비극

 

이렇게 민족의 성지로 변모한 효창원에 암운이 드리우게 된 것은 주석 김구 선생의 서거 이후부터였다. 김구 선생의 라이벌이었던 이승만은 당시 국민들이 존경해 마지 않던 백범을 매우 언짢게 여겼다. 그러나 이미 백범은 서거해버린 상태. 이에 이승만은 백범의 뜻을 깔아뭉개고자 여러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 일환이 바로 백범 일지의 금서 지정과 효창원 능욕이었다. 당시 만인의 존경을 받던 백범의 죽음은 그야말로 국가적 비극이었는데, 서거 이후에도 선생의 묘소를 방문하는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자 이승만 정권은 경찰을 동원하여 참배객의 출입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에 새벽 중에 경찰의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몰래 참배를 하고 집에 가는, 이른바 '도둑참배'란 웃지 못할 촌극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경향신문 4289년 6월 10일 - 딴지일보.png 

이승만 정권 당시 효창원 훼손을 다룬 경향신문의 기사 - 1959.06.10


그래서였을까, 이승만 정권은 군인과 관변 단체를 동원해 효창원 자체를 훼손하기 시작했다. 1956년 이승만 정권은 공병대와 불도저를 동원해 효창원 외원에 있던 연못을 메워 버리고 15만 그루의 나무를 베어냈다. 당시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비서실에서 지시한 일이라고 한다. 명분은 효창운동장 건설이었으나, 이것이 순수 체육 시설 확보를 위한 것이라고 믿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효창원 훼손이 더욱 심각해진 것은 박정희 정권 때였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이후 서거 11년 만에 추모식이 곳곳에서 거행됨과 동시에 백범암살진상규명 결의가 선언됨으로써 효창원 성역화(정확히 말하자면 정상화)가 이루어질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그런 기회마저 5.16 쿠데타로 완전히 짓뭉개지고 말았다.

 

박정희는 1962년 효창원 내 선열 묘소들을 이장할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유족들과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자 이를 취소하였다. (박정희는 본인 입으로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 말을 했으나, 실제로는 김구 선생의 존엄을 그 누구보다도 짓밟은 사람이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1968년 박정희는 백범 묘소와 삼의사 묘소 사이의 삼림을 모두 파헤치고 골프장 건설을 지시했다. 그 이유는 '미관상 보기 좋다'였다. 물론 선열묘소보존회를 비롯한 시민사회계의 반발이 또 터져 나왔다. 골프장 건설 계획 또한 여론이 나쁘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나면 과연 친일파 박정희라고 할 수 있을까? 박정희는 1969년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에서 북동쪽으로 35m 떨어진 곳에 반공투사위령탑을 설치하였다. 군사정권의 반공 기조를 헌법에도 명시된 국시인 자주독립 정신보다 위에 두겠다는 의도였다. 이후 원효대사상과 놀이터, 노인회 회관, 육영수 송덕비, 운동 시설 등이 효창원 내에 설치되었다.

 

박정희는 1970년대에 유관순 유적지와 왕실 묘역, 현충사 등을 민족의 성지로 조성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했고, 또 이를 선전했다. 백범 김구 선생께 보인 그것과는 180도 상반된 것이었다.

 

김구 선생 동상.jpg 

그랬던 박정희는 남산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을 세우고, 친필까지 써넣었다.

이 얼마나 파렴치한인가?



효창원 정상화 시도와 무산

 

이후 2000년대 들어 효창원을 다시 민족의 성지로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노무현 정부는 광복 6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효창원 성역화를 계획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당시 국가보훈처에서 제시한 성역화 사업은 실제 성역화, 즉, 정상화와는 매우 거리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세운 건물들은 그대로 두고, 효창운동장은 철거하고 나서 그 자리에 도로 새로운 잔디밭을 세우는 것이 성역화 사업의 세부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잔디밭 위에는 대규모 공연장과 주차장까지 세우려고 했단다.

 

결국 이 계획은 백범기념사업회 등을 비롯한 종교계, 역사학계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고, 지금까지도 효창원의 성역화는 진척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2013년 효창원을 국립현충시설로 승격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민주당의 김광진 의원이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효창원이 있는 용산구의회의 답변이 아주 걸작이다. 도시 한가운데 묘지를 만드는 것이 말이 되냐며 비난을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묘역을 천안 독립기념관 쪽으로 이장하라고까지 하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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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건만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면 이런 망발을 할 수가 있는 것일까? 말로는 독립 정신을 기린다고 하지만 정작 독립의 원훈들이 모셔진 효창원을 제대로 가꾸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은 고사하고 되려 묘소를 이장하라고 한다. 화장해서 한강물에 뿌리라고 결의안을 내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정도다.

 

일부에서는 효창원을 성역화하면 기존 공원은 어찌 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는 50년이 넘는 효창운동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연못과 녹지를 조성하여 생태광장으로 하면 충분히 해결되는 일이다. 국립묘지화도 무덤을 추가 조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기존의 애국 선열의 묘소를 국립현충시설로 대우한다는 것일 뿐이다. 무엇이 못마땅한 것일까?



효창원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다.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애국선열들께서 누워 계시는 민족의 성지이자 독재 정권에 의해 훼손된 우리나라 건국정신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를 어찌하나? 이미 이승만 박정희는 죽은 지 오래요, 효창원 성역화는 여전히 진척이 없는 상태인걸.

 

백범 선생의 기일인 오늘도 선생께서는 시야를 가로막는 콘크리트 운동장을 바라보시며 쓸쓸히 주무시고 계신다.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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