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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이천수가 간 곳... 끝나지 않은 전쟁

2003.8.4.월요일
딴지일보


 ETA




 
 

 

한국 시각으로는 지난 주 월요일이었던 7월 28일, 현지 시각으로 27일 - 스페인 북부 산탄데르 공항 주차장에서 난데없는 폭발음이 들렸다. 주차되어 있던 수십대의 차들은 삽시간에 불길로 뒤덮였고, 휴가철의 여유와 운치가 넘쳐나던 이 해안도시의 공항은 금새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신속히 출동한 경찰과 소방관들 덕에 사태는 더 악화되지 않았고, 다행히 죽거나 다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12명의 인명피해를 남긴 지중해 연안 도시 알리칸테 폭탄 테러가 있은지 겨우 닷새만에 발생한 이 사건으로, 행락시즌을 맞은 스페인 전체에 공포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경찰은 1주일 사이에 일어난 이 두 건의 테러 주동자로 스페인 북부 연방 바스크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무장테러 단체 ETA를 지목했다. 특히 산탄데르 공항 주차장 폭파사건의 경우, 지난 1987년 바르셀로나 수퍼마켓 폭탄테러를 자행한 ETA 단원에 대해 스페인 고등법원이 징역 790년형을 언도한 지 이틀 후 발생한 것으로 그 보복의 성격이 강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들이 휴가철을 노려 테러를 자행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마치 연례행사처럼 매년 여름 테러가 발생하고 있어 혹자들은 ETA의 여름 캠페인이라 부르기도 할 정도며 지금까지 30년동안 계속해서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이 30년이란 기간은 독재자 프랑코 총통 사망 이후 스페인이 민주국가로 거듭난 시기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ETA가 무력시위를 통해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스페인의 연방 바스크란 지역은 대체 어떤 곳일까?
 

 

 바스크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

 

집시를 제외할 경우, 다민족 국가인 스페인에서 가장 대표적이라 할 만한 소수민족은 카탈란(카탈로니아) 족과 바스크 족이다. 두 민족 다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고, 스페인 정부에 대해서도 분리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 중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란 족들의 민족적 자긍심은 특히 유명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에도 스페인 깃발이 아니라 카탈로니아 깃발을 게양했었고, 카탈로니아 각급 학교에서는 카탈로니아어를 국어로 가르치고 있다. 더욱이 우리가 스페인어라고 알고 있는 표준어 카스티야 어보다도 오히려 영어를 선호한다.

 

그런데, 스페인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저 바스크 지역에서는 한 술 더 뜬다.

 

카탈란 인과 바스크인을 만나서 "어느 나라 사람이냐?"라고 질문을 던지면, 카탈란 사람들은 이제 거의 다 "스페인 사람이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스크인들은 "나는 바스크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가,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그제서야 신경질적으로 "스페인!"이라고 쏘아붙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카탈란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독자성을 강조할 지언정 이제 스페인에서 분리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스크 사람들은 민족적으로 아무런 동질성을 찾을 수 없는 스페인 안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스크의 언어나 문화적인 특성에서 스페인은 물론이고 위쪽에 맞닿아 있는 프랑스와의 연관성 또한 10원어치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언어만 봐도, 카탈란 어에서는 프랑스의 남부 프로방스 사투리와 유사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고대 로마어에서 파생되어 나온 다른 유럽어들과 그 기원이 같다는 얘기다.

 

하지만 바스크 어는 유럽의 다른 어떤 어족과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언어학자들조차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그 형성기원이 애매하여 외계인들의 언어라는 농담까지 있다. 또한 인종적으로도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RH- 혈액형의 비율이 월등하게 높고, 평균신장도 3cm정도 더 크다는 통계 수치를 바탕으로 스스로 그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투우와 축구로 상징되는 스페인에 묶여 있는 곳이니만큼, 이 바스크 지역에도 두 개의 명문 축구클럽이 존재한다. 하나는 빌바오를 연고로 하고 있는 아틀레틱 빌바오,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휴양지로 유명한 산 세바스찬 연고의 레알 소시에다드 되겠다. 이 레알 소시에다드가 이번에 이천수가 간 팀이다.




 
 

 

그렇다면, 왜 바스크는 아직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70년을 훌쩍 거슬러 올라가는 바스크 인들의 중앙정부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와 증오의 역사가 담겨 있다.
 

 

 스페인 내전

 

원래 스페인은 카톨릭을 국교로 하는 군주제 국가였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군주제가 몰락하고, 1931년 제 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요때부터 스페인의 민주화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는데 지방자치제, 여성 참정권, 출판/집회/결사/교육의 자유 등을 골간으로 하는 신헌법이 공표된 것이다. 하지만 신헌법에 명시된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 원칙에 대해 여전히 카톨릭을 신봉하는 세력들의 반발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1936년, 좌파 정치세력인 인민전선이 총선에서 다수의석을 획득하여 집권한다. 공화국 출범과 함께 박차를 가하고 있던 개혁정책들은 더더욱 순풍에 돛을 달게 된 것이다. 농지개혁안을 비롯하여 여러 개혁법안들이 꼬리를 물고 제출되었다.

 

하지만 이 1936년도 스페인의 봄은 오래가지 못한다. 정부의 좌경/용공화를 보다못한 군부의 핵심인물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스페인 내전의 시작이었다.






 
 

 

스페인 내전의 장본인
Franco Bahamomde

 

군부는 무장하고 있었고, 공화국을 사수해야 한다는 시민군들과 민병대의 손에는 무기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파시스트 프랑코에 대한 시민들의 적의는 대단했으며, 특히 바로셀로나에서는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운 인구가 반란군부를 반대하며 거리로 나섰다.

 

민병대들은 공화국의 노선을 지지했던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기도 하였으나 정규군의 무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민중들의 거센 반발에 밀려 수세에 몰린 것은 오히려 반란군들이었으며, 프랑코는 독일의 히틀러와 이태리의 무솔리니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인민전선과 민병대의 선전은 다른 나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는데, 파시즘의 확산을 막고자 세계 각지에서 스페인 내전의 의용군으로 자원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의 이 의용군에는 앙드레 말로, 조지 오웰, 어네스트 헤밍웨이와 같은 유명 작가들도 끼어 있었다.

 

이 국제여단이 도착할 무렵까지만 해도 이미 인민 전선은 반란군을 거의 진압한 상태였다.

 

그런데....
 

 

 게르니카

 

1937년 4월 26일, 장날이었던 바스크 지방의 옛 수도 게르니카의 하늘을 독일의 폭격기 편대들이 뒤덮었다. 프랑코의 SOS를 접수한 히틀러가 공군 지원을 보낸 것이다. 이 공습으로,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바스크 인 1,654명이 사망했고, 889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게르니카의 인구는 약 7,000명 정도였으니 그 인명피해의 규모는 실로 엄청났던 것이다.

 

히틀러는 프랑코의 지원요청에 따라, 폭격용 폭탄의 실습을 겸하여 게르니카를 공격한 것이었으며 머지 않아 일어날 세계 제 2차 대전에 앞서 그 스파링 파트너로 게르니카를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날의 공습으로 충격을 받은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전쟁의 참상과 파시스트를 고발하는 참여 예술의 걸작을 남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게르니카되겠다.




 
 

 

게르니카 폭격 이후 수세에 몰렸던 프랑코와 반란군들은 활로를 찾게 된다. 특히 바스크 지역에서부터 자신들의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하는데, 이와 동시에 인민전선과 민병대측은 또다른 위기에 휘말린다. 스탈린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는 것에 불만을 느낀 민병대의 한 세력(POUM)들이 반기를 들고 무정부주의적 노선을 채택한 것이다. 이로써 민병대들 사이에서도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끼리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되었다.

 

인민전선의 분열을 기회로, 프랑코는 단숨에 빌바오까지 점령하여 바스크 지역을 손에 넣게 된다. 빌바오 함락과 함께 교황청에서도 이제는 프랑코의 손을 들어 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프랑코는 여세를 몰아 1939년 마드리드 대공세에 들어가 3월 26일 마드리드를 함락하는데 성공하고, 4월 1일에 전쟁이 종결되었음을 선언한다. 3년간 계속되었던 스페인 내전이 반란군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

 

1939년 쿠데타 성공 이후, 1975년에 프랑코가 사망할 때까지의 스페인은 1인독재 암흑시대였다.

 

공화국 시대의 개혁정책은 싸그리 무시되었고, 노조는 모두 해체되었다. 반대파들은 모다 숙청당했으며, 시민들은 프랑코의 전위대들에 의해 감시당하면서 입도 뻥긋 못한 채 살아야 했다.

 

하지만 다른 어떤 지역보다 집중적인 고초를 견뎌야 했던 곳이 바로 카탈로니아 지방과 바스크 지방이었다. 카탈로니아의 바르셀로나는 인민전선의 거점이었다는 이유로, 바스크 지방에는 게르니카 폭격의 무자비함을 은폐하기 위해 더 강도높은 탄압을 감행했던 것이다. 카탈란 어와 바스크 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카스티야 어만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했으며, 각 민족의 고유문화 역시 철저하게 말살하는 정책을 폈다.

 

또한 프랑코는 철권통치와 아울러 소수민족들의 자긍심을 억누르기 위해, 축구라는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지원함으로써 다른 민족들의 축구 클럽들을 압도할 수 있도록 도와준 팀이 바로 레알 마드리드였던 것이다.

 

프랑코의 절대적인 지지하에 레알 마드리드는 1954~1958년동안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5연패, 1961~1965년동안 또 프리메라리가 5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게 되었으며, 1956~1960년동안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5연패 트로피를 줄줄이 먹어 치운다. 특히, 원정경기시 레알 마드리드는 검은 색 유니폼을 입는다고 해서 저승사자 군단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지금까지 총 다섯 번에 걸쳐 프리메라리가 5연패의 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축구는 프랑코의 문화정책으로만 쓰인 게 아니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자기 민족의 독자성을 표출할 수도, 프랑코에게 적대감을 드러낼 수도 없었던 독재치하의 스페인 국민들에게는 레알 마드리드와 맞서 싸우는 자신들의 연고팀을 응원하는 것이 유일한 분노의 표출 통로이기도 했었던 것이다. 특히, 시합을 너머 전쟁을 방불케 하는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간의 이른 바 클래식 더비가 대표적으로 꼽힌다.
 

 

 더비 전쟁, 그리고 레알 소시에다드






 
 

 

Real Sociedad

 

하지만 축구로 이어진 스페인 내전은 비단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로 끝나지 않았다. 프랑코가 레알 마드리드를 내세웠던 만큼, 프랑코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응원하는 팀들은 모두 레알 마드리드를 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먼저, 수도 마드리드를 연고로 두고 있는 축구팀으로 레알 마드리드 외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약칭 AT 마드리드)라는 클럽이 있다. 왕실에서 내려줬다는 작위 레알을 붙이고 있는 만큼 상류층과 부자들이 응원하는 레알 마드리드와 달리 AT 마드리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서민들이다. 그리고, AT 마드리드 서포터들이 레알 마드리드를 증오하는 것 역시 상상 이상이다.

 

정치적 약자로서 탄압에 대한 분노를 유감없이 표출하려는 AT 마드리드와 레알 마드리드간의 경기에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간의 클래식 더비에서도 그들은 바르셀로나팀을 열렬히 응원한다. 정치적인 울분이 민족적인 감정 따위는 깨끗이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FC바르셀로나의 상징적 카탈란 루이스 엔리케

 

한편 바르셀로나에도, FC 바르셀로나 외에 에스빠뇰이라는 이름의 연고 구단이 존재하고 있다. 프랑코는 FC바르셀로나를 견제하기 위해 이 에스빠뇰팀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맞수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FC바르셀로나에게 에스빠뇰 클럽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에스빠뇰의 서포터 구성원도 애초 프랑코를 지지하는 군인, 공무원, 경찰들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프리메라리가에서 FC바르셀로나가 레알 마드리드의 대항마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에는 그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치적인 이유도 커 보인다. 바르셀로나가 파시즘에 끝까지 저항했던 인민전선의 근거지였다는 점에서 FC바르셀로나는 아직까지 투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애초 클럽 이상의 클럽라는 모토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 그들의 유니폼에는 스폰서 광고를 달지 않았고, 대신 멀리 중국에까지 다수의 팬클럽을 거느리게 되었다. 마치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 여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플레이는 세계 각지의 팬들로부터 응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교황마저도 FC바르셀로나의 쏘시오(회원)임을 밝힌 바 있다.






 
 

 

지난 시즌 소시에다드 돌풍의 핵이었던 터키출신 스트라이커 니하트

 

이같이 투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FC바르셀로나와는 달리, 바스크 지역과 그 민족을 대표하는 팀 레알 소시에다드는 빙신같은 피해자의 이미지가 훨씬 강하다.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의 독재 치하를 거쳐오면서 그 어떤 지역과 민족보다 가혹한 핍박을 당했지만, 민족 내부의 결속력만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탓에 바스크 지역과 그 팀을 바라보는 다른 지역과 민족에게 있어서는 거의 왕따에 가깝다.

 

특히 1975년 프랑코 사망이후 스페인이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좀 살만해지면 나타나 테러를 일삼는 바스크 무장단체 ETA 역시 그같은 시선에 마이너스 점수를 더해주었다. 어떤 면에서 카탈로니아를 스코틀랜드에 비유할 수 있다면, 바스크는 아일랜드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레알 마드리드 vs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vs 에스빠뇰과 같이 같은 연고 팀들끼리의 더비도 살벌한 것이 프리메라리가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상황이다만, 바스크 지역을 대표하는 두 팀 - 레알 소시에다드와 아틀레틱 빌바오간의 적대감은 그리 강하지 않다.

 

소시에다드가 상류층, 빌바오가 서민층들의 지지를 받고, 레알 소시에다드가 외국 선수들을 기용하는 것에도 열려 있는 반면 빌바오는 일백푸로 바스크인들만을 선수로 기용하는 등의 노선차이는 있으나 두 팀간의 더비에선 다른 지역의 더비 매치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대감이 넘친다. 선의의 경쟁자로서 서로를 다독이는 이 두 바스크 팀들에게 있어 적은 단 하나,

 

레알 마드리드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난 7월 17일 레알 소시에다드 입단식을 가졌던 이천수는 기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레알 마드리드를 꺾겠다. 나아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꺾고 싶다."

 

입단식 자리에서 내뱉은 이 당돌한 한마디는 곧바로 바스크 지역 언론, 축구 전문지의 탑을 장식했다.

 

이천수에게는 단순히 강팀을 꺾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을지 모르나, 바스크 지역의 사람들에게 레알 마드리드를 꺾겠다는 말은 70년간의 억눌림과 설움을 대변해 주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내전시의 게르니카 대폭격, 그리고 파시즘 철권통치하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40여년간 찍소리 못하고 얻어터져야 했던 소수민족의 꽉 묵힌 체증을 내려준 한 마디였단 얘기다. 게다가 레알 소시에다드는 2002~2003 시즌 프리메라리가 돌풍의 핵이었으나 마지막에 안타깝게도 레알 마드리드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바스크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이천수의 그 호언이 실현되기를 열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축구는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전쟁이며, 스페인 내전은 축구경기 속에서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며 :
1. 스페인 내전을 좀 더 생생하게 느껴보고 싶은 분들은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빌려 보시기 바란다. 스페인 내전당시 국제여단으로 참여했던 한 영국인의 관점에서 스페인 내전의 시작부터 끝까지 연대기적으로 잘 묘사한 작품이다.
2. 최근들어 바스크지역 일각에서는 "독립은 무슨 독립, 그냥 이대로 살자구"라는 목소리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고 한다. 이는, 바스크 지역이 카탈로니아 지역과 아울러 스페인 내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가 이루어져 현재까지 자기네들이 스페인 전체를 먹여살리고 있다는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3. 흔히 바스크 인형이라고 불리는 도자기 인형은 바스크 지역과 전혀 상관없음이다. 게다가 요 인형의 원래 이름은 비스크(Bisque) 인형인데 울나라에서 잘못 발음되고 있는 것이다. 대신 우리가 베레모라고 부르는 빵모자를 처음 만든 곳이 바로 바스크 지역인데, 그래서 일부에선 베레모를 바스크 모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4. 지역과 민족의 이름은 스페인 본토 발음에 따르기보다 비교적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발음대로 표기하였다. 바스께를 바스크라고 적어 놔 놓고 루이스 엔리케는 엔리크로 적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5.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림은 게시판에 글 올려주신 미술사공부자님의 지적에 따라 흑백에 가까웠던 원본 이미지로 대체하였다. 감사.

 

 

 

호나우딩요 이적으로 들떠있는 FC바르셀로나 서포터
카오루 (meanjune@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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