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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제곱] 성실한 납세자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2009.7.2.목요일


정치인이나 대기업 회장님을 비롯하여 이 땅의 한가락 하는 모든 이들과 그들의 식솔들은 세금포탈을 해서 잘도 먹고 살더만 나는 아마 하라고 등을 떠밀어줘도 못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훌륭한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살게 해 주는 것에 대해 당연히 세금 꼬박꼬박내는, 그러나 일단 내고 나서는 나랏님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써 주실까 하고 믿어 의심치 않는 성실한 납세자가 되어야 함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뭐 사람이 언제나 당연한 일만 하고 사는 건 아니니까.


얼마 전 나에게 (2008년 귀속) 종합소득세. 주민세. 과세표준확정신고 및 자진납부 계산서 라는 것이 날아왔다. 문제는 이걸 작성해서 신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세청에서는 친절하게도 (단일소득 - 단순경비율적용대상자용) 이라고 적어놓았기 때문에 아, 내가 단일소득 - 단순경비율적용대상자구나 하고 생각은 하게 되었지만 솔직히 그게 내가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얘기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나 자신을 국가에서 어떻게 규정하는지조차 채 파악이 안 되는 인간에게 종합소득세. 주민세. 과세표준확정신고 및 자진납부 계산서라니... 계산서라고는 평생 신용카드 긁고 사인해주고 받은 뒷장과 현금영수증이 전부인데 이건 또 무슨 계산서란 말인가.


그러나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난 이미 이 길이 천리는 되고도 남는다는 것을 애진작에 파악했던 것이다.) 일단 심호흡을 하고 주욱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내서에는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무신고가산세가 부과된다고 하니 일단 하란거 안하면 벌금 때리겠다 정도로 접수. 그 다음에는 국세청에서는 우리의 신고편의를 위해 보유정보를 기초로 신고안내자료와 신고서 기재사항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전 기재하여 안내하고 있지만 이게 만약 잘못되었으면 (그러니까 잘못될 수도 있단 말인 거지? 지금?) 다시 고쳐서 적으란다. 그리고 전산으로 적혀있는 소득 외에 근로소득 등 다른 종합소득이 있으면 이를 합산하여 신고해야 하고 이 경우에는 종합소득세. 농어촌특별세. 주민세 과세표준확정신고 및 자진납부계산서 [별지 제 40호 서식(1)] 을 사용하여야 한다는데. 천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기 적힌 것 이외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다. 단순하고 가난한 삶이 나에게 득이 될 때도 있구나 싶어 잠시 감격스러워진다.


마지막으로 신고서는 각 항목에 적혀있는 실명과 4쪽의 작성요령을 반드시 읽으신 후 작성하란다. 정 모르겠는 인간들은 국세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신고서 작성요령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여져 있다. (후에 이 상세한 정보 제공받으려고 들어갔다가 무려 3시간이나 삽질을 한 끝에 상세하긴 하되 일반인이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역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설명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고안내자료에는 원천징수액과 지급처 사업자등록번호가 적혀있다. 솔직히 뭔 소린지 모르겠다. 누구 사업자 등록증이란건지. 난 사업자 등록증 같은 거 낸 적이 없는데.. 가만 지급처라고 했으니 내게 돈을 줄 사람의 사업자 등록번호인가? 아...모르겠다. 일단 패스. 가산세 안내에는 신고서 3쪽의 해당란에 적으라는데 왜 굳이 1쪽에다 이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겠음. 역시 패스.


드디어 대망의 2 페이지. 일단 기본사항에 내 이름과 주소 친절하게 적어주셨다. 거기다 지 생일 까먹었을까봐 민증번호 앞자리까지 적어두니 세심한 배려 온 몸을 훑고 지나간다. 소득구분에서는 부동산 임대가 아닌 사업에 체크표시가 되어있다. 그렇다 나는 사업자인 것이다. 그저 원고 쓰고 책 써서 먹고사는 기타전문직 쯤 되는 줄 알았더니 나라에서 보는 나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전에 점쟁이가 나는 사업하면 무조건 떨어먹는다고 했었는데 어쩌면 내 팔자가 이 모양인 건 내가 알게 모르게 사업을 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내 업종 코드는 940100.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숫자의 조합이 왠지 멋있다. 그 옆에 일반율이라는 란에도 69.2라는 숫자가 쓰여 있는데 이게 높을수록 좋은 건지 낮을수록 좋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솔직히 뭘 의미하는지나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종합소득세액의 계산이 시작된다. 31번 총수입금액 ; 매출액을 적습니다. 이미 국가에서는 내 수입을 다 파악하고 옆에 적어두었다. 32번 단순경비율에 의한 필요경비 :31 총수입금액 × 14 단순경비율(?%) 역시도 계산을 해 두었으며 종합소득금액과 소득공제도 이미 다 적어 놨다. 금액이 맞는지 틀렸는지 같은 건 머리 아파서 확인하고 싶지도,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그 아래 인적공제 대상이은 내가 뭔가를 적어내야 할 곳이다. 나는 혼자 사니까 내 이름 하나만 적었다. 그런데 혹시 호적상의 가족을 다 적어야 하는 건가? 아니지 나는 이미 따로 나와 떨어져 살고 있으니까 나만 적는 거 맞겠지? 온갖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내 이름 달랑 하나 적는다. 내외국인 코드에는 뭘 써야 할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국인이 1번이라는 것을 이 종이의 제일 상단 왼쪽에서 찾아내어 겨우 적었다. 다음 인적공제 들어가신다. 기본 공제가 백만 원이다. 해당사항이 없는 것 같다 싶은데 아래 부녀자 공제란이 있다. 부녀자는 결혼 한 여자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여염집 처녀는 공제를 못 받나? 궁금해서 다 뒤져봤더니 제일 끝장에 있다. 부녀자공제: 배우자가 없는 여성으로서 부양가족이 있는 세대주이거나 배우자가 있는 여성 50만원. 그러니까 이건 결혼 안했으면 먹여 살릴 가족이 있거나 아니면 결혼 했으면 50만원을 공제해준다는 소리군. 해당사항 없음이다.


그다음 기부금 공제. 좀 쪽팔리는 얘기지만 어디 가서 기부를 해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사랑의 전화 1통에 2천원 뭐 이런 거나 해 봤다. 개인연금저축 공제는 계인연금저축 불입액에 40%를 곱한 금액과 72만원 중 적은 금액을 적으란다. 학교 다닐 때는 왜 수학 문제를 이따위로 빌빌 꼬아서 내나 싶었는데 이게 다 이런 거 계산하라는 친절한 배려였다 깨닫고 나니 새삼 스승의 은혜 가슴깊이 아로새겨진다. 그러나 역시 개인연금을 들고 있는 게 없으므로 모처럼 배운 걸 써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멀리 사라졌다. 연금저축 공제도 연금보험료 공제도 당췌 적을 것이 없다. 보험이 몇 개 있기는 한데 그게 연금보험인지 뭔지 잘 모르겠다. 이건 엄마가 잘 알테지만 전화했다가 괜히 잔소리만 들어먹을 것 같아서 관뒀다. (주로 딸년들 보험은 엄마가, 남편 잘못만나 고생하는 자기 친구 설계사에게 들어준다.)


과세표준은 33-34로 하라는데 다행스럽게도 옆에 숫자가 적혀있다. 휴~ 그 아래 세율도 산출세액도 모두 적혀있다 야호! 근데 가만. 앞에서 이게 틀릴 수도 있으니 올바르게 작성하라고 했지? 그러나 나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지들도 못 찾아낸 오류를 내가 어찌 찾아낼 것이며, 이미 못 찾아낸 오류를 내가 이 서류를 제출한 후에 다시 찾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 아래 새액공제이다.  세액공제서 53번~57번의 합계 금액을 적으랍신다. 다시 온 종이를 샅샅이 뒤져서 찾아본다. 그런데 작성방법에 절대 1번부터 2번, 3번 이런 식으로 순서대로 나와 있지 않다. 14번 했다가 그 다음에 바로 16번. 다음은 36번이다. 가뜩이나 눈 아픈데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 있는 숫자라 다 똑같아 보이지만 무조건 53번에서 57번까지를 찾아야한다. 그런데 내가 미쳤는지 이 용지가 미쳤는지 작성방법란에 딱 53번에서 57번만 없다. 사람 환장하겠다. 그럼 이 숫자들은 어디 가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빌어먹을 다시 보니 아까 세액공제란 바로 밑에 있다. 그럼 애초에 아래를 참조하라고 하던가 이런...씨.


일단 찾았으니 보긴 보자. 53번은 납세조합공제인데 납세조합영수증상의 33번 납세조합공제액을 적습니다란다. 납세조합영수증은 또 뭘까? 이런 이름의 영수증은 금시초문이다. 54번은 전자신고세액공제. 이건 납세자가 전자신고 방법에 의하여 직접 신고하는 경우 2만원을 공제해준단다. 아...이제 알겠다. 그 상세하다던 국세청 홈페이지가 왜 그렇게 어렵고 미로처럼 되어있는 지를 말이다. 결국 돈이었다. 2만원 공제 해 주기 아까웠던거지. 일단 더럽다 안 받는다 퉤퉤퉤 한다.


55번은 정치자금기부금 세액공제. 후후 왜 사냐 건 그냥 웃지요. 56번은 이월 세액공제인데 전년도에 공제받지 못한 전자신고세액공제 등을 말한단다. 전년도에 뭔가 덜 공제해준걸 받을 수 있게 해 준다는 모양인데 나는 도무지 전년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건 뭐 안 준돈 주겠다는데도 몰라 못 받을 판이나 어쩔 수 있나. 작년에 내가 뭔 혜택을 얼마나 받았는지도 기억 안나는데 거기서 뭐가 빠진 건지 알 리가  없다. 57번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믿을 수 없게도 공란으로 뻥 비어있다. 아마 여기까지 읽다가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부 여리고 심약한 이들을 위해 잠시 쉬어가는 페이지쯤 되나보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찾아보라는 번호 찾아보고 이해가지 않는 말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봤다. 그러나 뒷장의 가산세액계산명세부터는 정말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다. 무신고, 부당무신고 가산세율 40/100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현금영수증 발급거부 불성실건수 5,000원 이것까지 다 모르겠다. 근데 어쩐지 본능적으로 이건 나와는 좀 해당사항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비워뒀다. 그리고 그 아래에도 죽죽 모르겠음, 이해불가, 판독불가의 향연이다.



제일 마지막에 신고인은 소득세법 제 70조 및 지방세법 제 177조의 4와 국세기본법 제 45조의 3에 따라 위의 내용을 신고하며, 위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였고 신고인이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정확하게 적었음을 확인합니다 에다 년 월일과 신고인, 그리고 도장을 콱 찍으란다. 내용의 딱 3분의 1도 못 알아듣겠는데 내가 무슨 수로 이걸 정확하게 적었다고 주장하겠는가. 거기다 법까지 들먹이면서 말이다. 무슨 난독증 환자도 아닌데, 분명히 한글인데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글들만 가득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수학이나 영어는 언어와 기호 자체가 한글과 사맛디 아니하므로 이런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정말 거짓말 한 스푼만 보태자면 나는 국세청 홈페이지를 뒤지느라 3시간. 이 서류를 보면서 어떻게든 끼워맞춰보려고 애쓴 시간 3시간 (단. 중간에 너무 허기가 지는 바람에 비빔면 하나 끓여 먹었음) 해서 도합 6시간이나 이러고 나니 헛구역질이 막 밀려 올라왔다. (그리고 창밖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환청도 들렸다.) 결과적으로 성실한 납세의 의무를 행하기도 전에 토사곽란을 하며 죽어버릴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을 썼다. 회계사인 사촌 오빠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오빠는 퇴근하는 길에 들러서 서류를 갖고 국세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작성해서 무려 2만원을 환급받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통화를 해 보니 어쩌고 저쩌고의 이유로 약 25만원 정도 환급받을 금액이 있다나? 사촌 오빠는 어째서 내가 25만원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려 했으나 나는 이미 그들이 내게 그 수고로움의 대가로 25만원을 지불했다고 믿어버린 후여서 딱 잘라 거절했다. (만약 25만원을 더 내라고 했으면 기를 쓰고 알아냈겠지만 말이다.)


투덜은 나의 힘
스테로이드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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