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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미스와플의 남녀마찰계수 측정보고서 - ④소년과 남자를 구별하는 방법


2009.7.2.목요일



"돈 좀 빌려줘."
"얼마나?"
"70만원 정도? 더 있으면 더 줘도 되고."
"그 돈이 왜 필요한지 물어봐도 돼?"
"예비군 훈련을 빠져서 벌금을 내야해."
"벌금이 70만원이나 돼?"
"벌금은 20만원인데, 이 것 저 것 돈이 더 필요해서."


질문이 길어지자 그의 대답에는 조금씩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가만히 한숨이 나왔다. 고작 70만원 정도 빌려주는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가 싶지만, 고작 70만원을 융통할 수 없어 내게 빌리는 그의 처지가, 그리고 그런 남자를 사귀는 나의 처지가 한심한 건 또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당시 여기저기 잡문을 쓰며 용돈벌이나 하고 있었다. 한때는 직장도 다니고 갑근세 같은 것도 내고 그랬던 모양인데 뜻한 바가 있어 직장을 그만둔 지 삼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3년동안 뜻한 바는 별다른 결실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었고, 벌어놓은 돈은 거덜 나 버렸다. 서른 넘은 나이에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고 사는 처지에 나를 만난 것이다. 나는 그의 어디가 좋았을까?


나를 매혹시킨 것은 그의 천진함이었다. 웃으면 얼굴 가득 미소가 그려지며 작고 가지런한 치아가 일제히 드러났다. 게다가 나는 그를 만나기 앞서 지나치게 현실적인 남자와 잠깐 데이트를 했더랬다. 오직 나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일 외에는 관심도 없던, 부모가 시키는 대로 보수정당에 투표를 했다는 그 남자에게서 획일적인 기성복 냄새와 따분한 인생의 냄새를 한꺼번에 맡았던지라 꿈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의 가치가 더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외모와 환경만큼이나 생각도, 하는 짓도 순수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아이처럼 흥을 내었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그 자리에서 감동을 표현할 줄 알았다. 기분이 좋으면 길거리에서도 입을 맞추었고, 나를 들어 올려 빙글빙글 돌리기도 했다. 비 내리는 게 너무 좋다고 밤새 길거리를 걸어 다니고, 편의점 컵라면에 삼각김밥 한 개면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곤란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내가 밥을 사고 차를 사고 술을 샀지만 그런 것들은 개의치 않았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꿈이 어느 정도 실현이 되면, 그는 분명 어른남자로서의 역할도 잘 해 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뭐 까짓거 못해낸다 하더라도 그 정도는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나마, 이런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현실적인 부분이야 내가 감당하면 그만이고, 그는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며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살게 하면 되지 않나. 남자도 지켜주고 싶은 여자를 위해 평생을 고생하는데 여자라고 못할 게 어디 있나. 그런 생각까지 잠깐 했더랬다.


그렇게 마냥 지켜주고 싶었던 그의 순수함을 향해 내가 처음 짜증을 느낀 것은 사귄지 석달 남짓 되었을 때이다.


토요일 늦은 밤에 우리는 심야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전형적인 허리우드 액션물이었는데,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지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 한다 싶을 만큼 억지가 많은 영화였다. 폭탄이 수십개가 터지고 사방에서 총질을 하는데도 주인공이 절대 죽지 않는 것이다. 죽기는커녕 그 와중에 적을 모두 물리치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이층 건물 지붕을 넘어가고, 또 그 와중에 또 농담을 지껄이고 여자에게 키스를 날리는 씬이 남발했다. 보는 내내 너무 웃기다고 생각한 나는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정말 웃긴다. 지가 람보야?"


영화가 끝난 뒤, 그의 표정이 굳어 있다. 영화가 새벽에 끝나 함께 우리집으로 왔는데 오자마자 등을 돌리고 눕더니 이내 잠이 들어버린다. 아침이 된 뒤에도 말을 하지 않다가 집에 가겠다고 일어서자 나는 그제야 정색을 하고 대체 왜 화를 내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재밌게 보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기분이 잡쳤어. 그 주인공 내가 좋아하는 배우란 말야.”


자기가 좋아하는 주인공을 향해 비웃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밤새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열 두 살짜리 남자애처럼 보였다.


그가 순수한 어른 남자가 아니라, 그저 아직 철이 덜 들고 덜 자란 소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달이 더 지난 뒤이다. 그렇게 관계가 한번 삐긋한 이후부터 점차 마음을 다칠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평화를 사랑하며 싸우는 것을 못견뎌한다는 그는, 조금만 기분이 상하면 삐치는 걸로 싸움보다 더 큰 불화를 조장했고, 계획했던 일이 계속 난항을 겪게 되면서 걸핏하면 핸드폰을 끄고 잠수를 타기 일쑤였다. 그러다 어느 날 또 불쑥 전화를 걸어와 지금 어디 나와 있으니 데리러 오라는 요구를 해 왔다. 만나러 가면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차에 뛰어들기 무섭게 키스를 퍼붓거나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소년처럼 웃었다.


한동안 혐오했던 현실적인 남자가 다시 조금 그리워졌다. 어디로 튈지, 어느 지점에서 삐칠지 알 수 없는 서른살의 남자와 사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와 마지막 만났던 날,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차에 오르자마자 그가 내게 한 말이다.


"담배 한 대 사게 이천원만 줘 봐."


돈을 받아든 그는 담배를 사러 길 건너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차에 앉아 길을 건너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서 더 이상 그의 순수함을 가상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냥 인생에 대한 대책이 없고 게으르며, 책임감이 부족한 서른 살의 소년일 뿐이었다. 어른이 될 생각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은 그저 그런 소년.


나는 그가 소년에서 얼른 어른으로 자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순수한 소년의 외모와 감수성 이면에 나를 지켜주고 나를 끌어줄 강한 남자의 힘을 숨기고 있으리라 내심 믿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보이는 저 것이 전부일 뿐이며,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들도 별 볼일 없다는 것을 느껴버리자, 더 이상 그의 천진함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밖에 모르고, 그러면서 동시에 매미의 날개를 찢는 잔인함을 가진 소년들.... 편의점을 나와 내게로 다가오는 그를 보면서,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저 남자와 사귀기 위해서는 내가 엄마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내 삶을 감당하기도 너무 고달프다는 것을. 사실이 그랬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한 서른 살의 남자를 감당할 만큼 서른 살의 나는 강하지도 어른이지도 못했다.


나와 헤어진 뒤에 그는 어쩌면 나와 비슷한 또 다른 여자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그 여자에게도 돈을 꾸고, 물론 갚지도 않고, 시간이 남아돌아 집이나 만화가게에서 빈둥거릴지라도 예비군 훈련에는 빠지면서, 그리고 돈을 꾸어 벌금을 물면서 그렇게 살아갈 것 같다.


아니다. 어쩌면 그는 지금쯤 진짜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일구고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가고 있을 런지도 모른다. 새벽같이 일어나 전철을 타고 두 시간 거리의 회사로 출근을 하고, 밤이면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가장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잃은 것은 소년성이고 찾은 것은 자존심일 것이다. 결국 소년과 남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자존심에 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 깨닫게 되었으니까.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는 덜 자란 소년 혹은 소녀가 있다. 나이 들어 간다고 해서 마음까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어른인 척 하며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 안에 있는 소년과 소녀들을 필사적으로 숨길 줄 안다.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숨겨야 살아지는 것이므로.


소년인 채로는, 소녀인 채로는 생의 무게감을 정직하게 지며 살아가기 어렵다. 소년의 모습을 숨기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 그것은 소년의 얼굴 뒤에서 조금이라도 쉽게 살아보려는 이기심의 발로일 것이다. 어머니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다 자란 소년을 키울 수는 없다.  







#소년과 남자를 구별하는 방법


소년의 가장 큰 취약점은 언제나 경제력이다. 경제력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경제력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쉿!(She it!)> 저자 미스 와플(marune@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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