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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쟁패> 시리즈는 웬만하면 지난 기사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시간이 없으면 전편만이라도 꼭 복습하자.



1


함양!


최초의 제국. 그리고 그 제국의 수도.


함양을 향해 가는 주문의 군대는 수십만까지 몸집을 불렸다. 전차는 1천승에 달했다. 전차를 끄는 말과 지휘용 말을 계산하면 못해도 1만 마리 이상의 군마가 있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주문은 중원 최대의 병력을 보유했다. 다시 말해 중원의 최강자였다. 각지에 배치된 진나라의 250만 대군은 급속도로 와해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결집할 여건이 못 됐다.


원칙적으로 주문은 장초왕 진승의 부하다. 그러나 진승은 수하 장수들과 사이가 멀어지는 중이었다. 주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곧 자신의 손에 떨어질 제국의 수도 함양을 주군에게 순순히 바칠 생각이었을까?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목표가 함양이라는 것. 주문은 초나라 저항군의 장교 출신이다. 기본적인 지략은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함곡관을 넘기 위해 전열을 정비하거나 공성계획을 수립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시간과 물자가 한없이 드는 일이다. 그의 군대는 순식간에 불어난 군세인 만큼 오합지졸이었다. 병사들이라기보다는 각지에서 모여든 사내들의 집합체였다. 이제 곧 약탈할 함양의 보물에 대한 탐욕, 그리고 제국에 대한 증오. 열기를 차갑게 식힐 수 없다면 그대로 활용하는 편이 낫다. 주문은 진격 속도 그대로 함곡관을 군대로 ‘덮어버렸다.’ 사상자가 대량 발생해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이렇게 되자 외려 썩어 들어가던 진나라 조정에서 충분한 수성계획을 수립할 여유가 없어져버렸다. 천혜의 요새 함곡관은 허무하게 돌파당하고 만다. 역사는 함곡관 돌파를 묘사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함곡관 수비군의 저항에 따른 주문 군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는 정황은 충분하다.


주문은 함곡관 돌파 후 희수(戱水) 강안에 도착하자 처음으로 진격을 멈춘다. 적의 수비시설을 돌파한 후 전열을 정비하는 거야 당연하다. 하지만 주문은 희수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진 제국에 구국의 영웅이 등장해 군대를 조직하고 전투계획을 수립할 동안 말이다. 함양이 코앞이었고 진격이 빠를수록 좋은 시점이었다. 피해가 상당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다. 사상자를 수습하고 사기를 재충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물은 정비에 필수적인 환경이다. 보병이 밀집한 고대의 군대는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면 전염병 등 위생 문제에 직면한다. 식수는 물론 중요하지만 갈증이 다가 아니다. 당시 중국에서 음식을 해먹는 데에는 불보다 물이 중요하다. 무슨 유인원도 아니고, 불을 못 피우는 군대는 없다. 그러나 물이 없으면 곡식을 삶거나 찔 수 없다. 그렇다면 주문 군이 굶주린 시간도 꽤 길었음을 알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공성(攻城)에 걸린 시간이다. 함곡관은 역시 함곡관이었다.



2


제국의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아방궁의 내실에 숨어 향락에 빠져 살던 2세 황제 호해. 그는 멸망이 닥치자 비로소 대전으로 기어 나와 대소신료를 소집했다.


“대체 어찌하면 좋겠는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환관 조고는 묵묵부답이었다. 조고의 위세에 숨을 죽여 온 신료들 중 하나가 황제 앞으로 나아갔다. 장한(章邯)이었다. 장한의 직책은 소부(少府)였다. 소부란 황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재무관료다. 황제 직할이면서 농토가 아닌 자연물, 즉 산과 해안, 민물에서 나오는 농수산물을 현금화하고 황실의 수공업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요새로 치면 대략 차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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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상으로는 철저한 문관이지만 이후 펼쳐지는 장한의 활약을 볼 때 젊은 시절 무장을 지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여러 번의 전공을 세워 조정의 멤버로 승진한 것이다. 혹은 처음부터 문무를 겸비해 황제의 경호실장이나 수도의 치안총감 정도를 겸했을 수도 있다.


장한은 말했다.


“인근 군현의 군사를 결집시켜 수도 함양을 지키게 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맞다. 네트워크가 끊겨있는 데다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시간이 늦어진다. 이렇게 장한은 현실을 인정하고 선택지를 축소시킨 후 유일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여산의 진시황릉 공사 현장에 끌려온 인부들을 훈련시켜 제국의 수도를 지키는 최후의 결전에 나서게 하겠습니다.”


가능할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장한은 이세황제에게 대사면령을 받아냈다. 진나라 본토는 물론 제국 각지에서 끌려와 강제노역하는 죄수들을 해방시켜준다는 것. 물론 수도 방위에 성공한 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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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에서 강제노역하던 죄수들


대장군으로 긴급 승진한 장한이 죄수들을 군대로 편제하고 훈련시켰다. 이후 장한의 병사들이 그에게 바친 충성을 생각하면, 장한은 죄수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품위를 잊지 않았던 것 같다. 목숨을 건 싸움과 자유를 맞바꾸는 거래였지만, 급조된 군대는 장한의 지도력에 의해 단결했다.


여기서 제국의 견고한 시스템이 빛을 발한다. 천하를 통일한 노하우, 즉 우수한 병기와 훈련법, 제식은 죄수들을 순식간에 강군으로 만들었다. 연발 석궁 등 당시의 기준으로는 미래적인 무기를 찍어내던 함양의 생산력이 어디 간 것도 아니었다. 먹음직스런 중원 천하를 내려다보던 함양은 훗날 유방이 쫓겨나 틀어박히는 한(漢) 땅을 등지고 있다. 유목과 농경으로 함양의 생산력을 떠받치던 지역이다. 이곳은 난세에서 떨어져 있다. 즉 제국은 무너지고 있어도 진나라 자체의 힘은 거의 보존된 상태였다.



3


장한이 산소호흡기를 대자 제국의 숨결에 다시 힘이 붙었다. 그는 주문의 군대가 몸을 추스르고 함양성 공성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장한의 군대는 희수 강변에 주둔하고 있던 주문의 수십만 군대와 일대 회전(會戰)을 감행하기로 했다. 


주문은 희수 강변을 따라 서진(西進)할 게 분명했다. 여산을 넘으면 함양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여산에서 일하다가 여산에서 훈련된 병력을, 바로 그 여산에서 득달같이 출동시켜 주문 군을 덮쳐야 한다. 승리해야 하는 건 당연한 기본 전제다. 그래서 적을 정비가 유리한 물가에서 떨어뜨려놓아야 했다. 더욱이 희수는 함양의 귀중한 상수원이었다.


덕분에 주문은 여산을 우회할지, 일단 점령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여산에서 대오가 말끔히 정비된 제국군이 척척 걸어 나왔다. 대체 어디에 저만한 군대가 있었단 말인가? 주문은 기가 막혔을 것이다. 장한의 대승리였다. 그는 주문의 대군을 궤주(潰走)시켰다.


흔히 결정적인 패배를 ‘전멸했다’고 한다. 전멸은 정상적인 편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군사를 잃는 것을 말한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병력의 40% 이상을 잃으면 전멸의 기준을 충족한다.


‘섬멸’은 병력을 전부, 혹은 거의 전부 잃는 것을 이른다. 근대 이전의 전투에서 완전한 승리란 보통 포위를 성공시킨 후 적을 대량 살상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황을 ‘포위섬멸’이라고 한다.


궤멸 역시 결정적인 패배지만 전멸이나 섬멸과는 다르다. 병력이 뿔뿔이 흩어서 막대한 손실을 입는 상황을 말한다. 이 채로 의미 있는 머릿수가 살아남으면 ‘궤주’라고 한다. 주문의 군대는 장한 정도의 실력자를 당해내기에는 너무나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한 번의 반격으로 숨통이 끊어지기에는 그 덩치가 너무나 컸다. 따라서 장한은 포위섬멸을 포기하고 ‘들이받은’ 충격력을 통해 일단 적을 궤주시키는 데 만족한 것이다.


주문에게는 다행이었다. 함양까지의 길이 직선적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함곡관을 넘었다. 그러므로 궤주하는 병사들도 다시, 이번엔 거꾸로 함곡관을 통과해 사지를 빠져나가게 마련이다. 주문은 함곡관 동쪽 ‘조양(曹陽. 현재의 하남성 영보현 동쪽)’이라는 곳에 터를 잡고 패잔병들을 그대로 흡수할 수 있었다. 함양 침공군의 몸통을 거의 그대로 보전한 채 재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다행이었을까. 장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흩어진 패잔병이 다른 지휘체계를 만나 게릴라나 반군의 형태로 재등장하는 것이야말로 제국의 입장에선 골치 아픈 일이다. 무리한 포위섬멸을 괜히 포기한 게 아니다. 이렇게 되면 외려 주문의 대군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


장한이 대장군의 지위에 오르자 호해의 개념 없는 정치(정치란 걸 하지도 않았지만)로 멈춰있던 함양의 생산력이 용트림을 하며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국 각지에 퍼진 현지 주둔군과의 통신망 역시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급한 불을 끈 장한은 함양으로 돌아가 제국군을 제대로 재조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4


기껏 넘은 함곡관을 제 발로 빠져나온 주문의 군대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함곡관 안에는 장한이 버티고 있다. 계속되는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장초군은 최초의 패배에 얼어붙고 말았다. 피해를 수습하고 전열을 정비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수비가 한층 강화된 함곡관을 다시 넘을 수도 없었다.


주문은 2~3개월의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함양 측도 자신처럼 숨을 고르고 있을 거라 믿은 모양이다. 그러나 함곡관 안쪽에서는 기적이 일어난 후였다. 조용했던 함곡관 문이 열리고 완벽한 위용을 갖춘 제국군이 쏟아져 나왔다. 진나라의 국색(國色)은 검은 색이었다. 당연히 군기와 투구의 술도 검정이다. 장교들의 장식용 깃털도 까마귀나 검은 독수리의 것을 쓴다. 번쩍거리는 청동제 무장과 철제 전차, 최첨단 쇠뇌, 정확한 규격의 장검과 극으로 무장한 진나라군은 은유적으로나 문자 그대로나 ‘암흑 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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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서부전선에 참전한 미군들은 훗날-영화 <스타워즈>를 보고 나서- 나치 독일군을 가리켜 ‘스타워즈를 보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들의 눈에는 제3제국군의 초월적인 전차, 세련된 군복, 정밀한 무기 등이 그만큼 미래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주문이 지휘하는 장초군은 무기와 제식도 통일되지 못했다. 이들에게 제국의 대군은 하늘에서 우주선을 타고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문군은 조양에서, 장한의 제국군에 2차 격파되고 만다. 주문은 다시 조금 더 동쪽의 ‘민지(澠池)’라는 곳으로 퇴각해 10여 일 간 병사들을 수습하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여기서 장한과 주문의 실력 차이가 드러난다. 장한이 과연 10일 간 주문을 ‘놓친’ 걸까?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격파한 적을 ‘궤멸’이나 ‘궤주’시키지 못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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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은 이미 전쟁의 주도권을 손에 넣은 장한의 손아귀에 있었다. 장한은 주문의 대군을 약화시키면서 결정적 전투를 준비했다. 그는 수십만 명의 반동세력을 산 채로 제국에 흩트려 놓을 생각이 없었다. 장한은 주문에게 결사항전을 준비할 10일의 시간을 주었다. 마침내 장한의 제국군이 나타났을 때 승부는 정해져 있었다. 민지 전투는 주문 군단의 완전한 파멸로 마무리되었다. 주문은 무너져가는 아군 진영 안에서 칼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로써 함양은 반란군의 위험에서 구원되었다. 동시에 장한은 장초군의 주력을 소멸했다. 장한은 개선장군이 되어 보무도 당당히 함양에 귀환했을까? 아니, 정벌은 이제 시작이었다.



5


여기는 장한과 주문이 격돌한 회수로부터 한참 서북쪽.


장이와 진여, 그리고 원정군 장수 무신은 충분한 수의 조나라 젊은이들을 모았다. 연설에만 의지할 필요가 없어진 그들은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연전연승이었다. 그러다가 범양(范陽)을 공격할 때였다. 범양에는 괴철(蒯徹)이라는 인물이 살고 있었다. 그는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고,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배경이라곤 하나도 없는 변방의 백성에 불과했던 괴철은 난세가 열리자 자신을 성공시켜 줄 주군을 찾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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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단 무신의 군대에 공격받고 있는 범양의 현령을 찾아가 관심을 끌었다.


“제가 가만히 소식을 들으니 공께서 장차 돌아가실 것 같아 미리 조문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나 또한 공께서는 이 괴철을 얻으시어 목숨을 구하게 됐으니 경하를 드립니다.”


이렇게 미끼를 던지니 일단 물어는 봐야 하지 않겠는가?


“어째서 내가 죽는단 말이냐?”


“진나라의 법은 매우 엄중합니다. 공께서는 범양령이 된 후 10여 년 동안 다른 사람의 부모를 죽이고 아들들을 고아로 만들었으며, 발을 자르고, 머리에 글로 묵형(墨刑. 죄인의 이마나 팔뚝에 먹줄로 죄명을 써 넣던 형벌)을 가하기를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입니다.”


발을 자른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을 뜻한다.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는 부로(父老)나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효자들이 가슴에 비수를 품고도 감히 공의 배를 찌르지 않은 것은 진나라의 법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지금 천하에 대란이 일어나 진나라의 법은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가슴에 품은 비수로 대감의 배를 찔러 명예를 회복하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조문을 드리려는 이유입니다.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무신이 거느린 군사들은 이미 이곳에 당도했으나 공께서는 굳게 범양을 지키고 있으신데, 성내의 젊은이들은 모두 다투어 공을 죽여 무신군에게 바치려고 합니다. 공께서는 어서 무신에게 저를 보내어 화를 복으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정신이 번쩍 든 범양령은 자신만 믿어보라고 큰소리치는 괴철을 무신군에게 보냈다. 괴철은 무신과 장이, 진여 앞에서 현란하게 이빨을 털기 시작한다.


“원컨대 장군께서 저의 계책을 들어주신다면 성을 공격하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도 사방 천리의 땅을 평정할 수 있지요.”


“무슨 뜻이오?”


“지금 범양령이 범양성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가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여서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죽기 싫고, 잃을 게 많은 탐욕스러운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군께 항복하고 싶어 하지만 하지만 장군께서는 이곳 조나라의 성을 점령할 때마다 진나라 관리들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자신도 그렇게 될까마 성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게지요.


장군께서는 범양령을 원래의 자리에 둔다는 명령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범양령은 즉시 성을 장군에게 바칠 것입니다. 범양의 젊은이들 역시 감히 범양령을 살해하지 못할 테죠. 그리고는 범양령에게 명하여 주륜화곡(朱輪華轂. 바퀴를 붉게 칠한 고위관리 전용의 고급 마차)을 타고 연나라와 조나라 교외의 땅을 달리게 하십시오. 연과 조 두 나라 관리들은 먼저 항복한 범양령이 멀쩡히 살아서 여전히 부귀를 누리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겁니다. 연과 주 두 나라의 땅에 있는 성 모두를 싸우지 않고 얻을 수 있습니다.”


무신의 입장에서 괴철의 조언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장이와 진여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대로 하자, 정말로 조나라 땅에 소문이 퍼졌다.


<순순히 항복하면 전처럼 잘 먹고 잘 살게 해 준단다!>


싸우지 않고 항복한 성이 30개가 넘었다. 이렇게 무신은 빛의 속도로 조나라 일대를 접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괴철은 역사에서 수증기처럼 사라진다. 자신의 진짜 주군을 만날 때까지 말이다. 아마 범양령도, 무신도 그의 야심을 충족시켜주기에는 부족한 인물이라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다.


문제는 장이와 진여였다. 진승에게 마음이 떠난 두 사람은 무신에게 거절하기 힘든 치명적인 제안을 한다.


<조나라 일대를 진승에게 바치지 말고 당신이 차지하라!>


그렇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농노 출신인 진승은 그래서 왕이 됐다. 진승의 부하인 무신이 왕으로 독립하지 말란 법 있는가? 진승은 더 이상 카리스마 넘치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부하들을 의심하는 치졸한 권력자였다. 무신은 조나라 왕으로 등극했다. 장이는 승상이, 진여는 대장군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진승은?


당연히 뚜껑이 열렸다.



5.5


독자여러분, 잠깐 이야기 진행에서 삼천포로 새 보자. 위의 챕터 5의 내용에 약간의 위화감이 들지 않는가?


진 2세 황제 호해는 암군이라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거꾸로 그렇기에 그에 대한 평가는 명징하다. 진 제국은 천하의 백성들에게 굴종을 요구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래도 우리는 장한의 존재가 거슬리진 않는다. 그는 진나라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국을 위해 일어선 게 인류 보편적 가치에 반한다고 하려면, 우리는 장군이 아니라 종교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진나라 본토인이 아닌 이들에게 제국은 악(惡)이다.


진나라의 통치는 폭압이었다. 진승, 오광의 난이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결국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그들의 ‘봉기’가 진나라의 성격 때문에라도 정당했기 때문이다. 살상은 결코 좋지 않다. 그러나 당시 중원 정세의 맥락에서, 제국 조정의 대리자로서 현지인들을 탄압한 진나라의 관료들이 처단당하는 일은 정의에 부합한다. 그런데 괴철에겐 대의명분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력자들에게 주목받는 것이 전부다.


괴철 같은 ‘구직자’들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치자. 의사결정권자인 무신, 장이, 진여의 경우 보다 손쉽게 조나라 일대를 차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진나라 관리들을 처단하는 일을 기꺼이 포기했다. 정의라는 개념의 핵심엔 ‘처단’이라는 말이 도사리고 있다. 세 사람 모두 본래 조나라 사람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허나 허울뿐인 대의명분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편이 낫다. 실리적이기만 하다면 언제든 포기해도 되는 게 명분이란 말인가.


이즈음 국제적 명사였던 장이, 스타 협객이었던 진여가 노출한 야심은 너무 노골적이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인 위나라의 사정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두 사람은 난세를 틈타 한 자리 차지해보려는 행렬의 선두에 서 있다. 물론 그래도 된다. 야심이 나쁜 건 아니다. 그들의 모습이 타락이든 야성이든, 그리 된 것이든 원래 그런 이들이었든 모두 당사자들의 자유다. 동시에 ‘실리적 야심’이 자신들에게 불러온 결과에 후세의 우리가 동정해줄 필요도 없어진다.


이만하면 장이와 진여의 미래에 대한 복선이 되리라고 본다. 물론 다른 야심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6


진승은 장초의 수도이자 본거지인 진성에 있는 무신, 장이, 진여의 가족들을 모조리 처형하려고 했다. 진승은 주문의 대패 소식을 들은 직후였다. 한 마디로 정신줄이 나간 상황. 다행히 신하가 뜯어 말렸다. 


“지금 세 사람의 가족을 죽이면 진나라 같은 적을 하나 더 만들게 됩니다!”


맞는 말이었다. 진승은 가까스로 분을 누르고 세 사람의 가족들을 궁중에 초대해 융숭하게 대접했다. 장이의 아들 장오에게는 군(君)의 작위까지 내려주었다. 그는 반역자들에게 축하 인사를 전달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했다. 물론 축하는 본론이 아니었다.


<축하한다. 축하하고... 이제 조나라의 군사력을 서쪽으로 돌려 위기에 처한 주문을 구하고 함께 함양을 함락하라!>


무신, 장이, 진여 3인방은 진승의 절규를 쿨하게 씹었다. 장이와 진여는 무신에게 말했다.


“자 이제 조나라 땅이나 넓히시죠. 어차피 저 양반 우리 가족 못 죽입니다.”


무신은 흔쾌히 반응했다.


<훗, 그럴까?>


무신은 휘하 장수인 한광(韓廣)을 보내 옛 연나라 땅을 공략하게 했다. 연나라 사람들은 한광에게 저항하지도, 그렇다고 항복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뜬금없게도 한광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나라의 폭정부터 독립하고 싶었던 한나라의 유력자들은 한광에게 달콤한 제안을 했다.


<이대로 바로 우리 연나라의 왕이 되시죠? 저희가 잘 보좌해드리겠습니다. 장군께서는 왕이 되시고, 우리는 독립하고, 이게 바로 윈윈 아니겠습니까?>


무신도 진승을 배신했다. 왜 자기라고 무신을 배신하면 안 되는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단 말이더냐! 한광은 기꺼이 연나라 왕위에 올랐다. 무신과 장이, 진여는 진승처럼 뚜껑이 열려서 연나라로 쳐들어갔다. 여기까지만도 개판인데, 아직 모자랐나 보다. 코미디 한 편이 거하게 연출되었다.


무신이 군영 밖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을 나갔다가 연나라 군에 생포된 것이다. 연나라 측은 왕을 내놓으라고 찾아간 조나라의 사자들을 속속 죽이며 생떼를 부렸다.


<아 그러게 조나라 대왕 전하를 순순히 드리겠다니까? 조나라 땅의 반을 주면...>


<야 이 미친놈들아 운 좋게 득템했으면 돈이나 좀 달라고 하지 웬 땅장사를 그렇게 해먹으려고 하냐! 그래도 한광 당신! 얼마 전가지 모시던 상관을 붙잡아 놓고 이건 너무 치사하지 않냐!>


<아니 누가 우리 군사들이 있는 데서 어슬렁대시라고 부탁이라도 했냐? 그럼 적국의 왕이 나 좀 잡아줍쇼 하는데 어쩌라는 거냐! 입장 바꿔서 장수도 아니고 왕을 득템했는데 너네 같으면 한 몫 단단히 잡을 생각 안 하겠냐? 응?>


그래도 마지막 사자는 한광의 정신줄을 돌려놓는 데 성공한다.


<저기요, 조나라 왕 무신을 죽인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거야말로 장이와 진여가 바라는 거 아닐까요? 만약 그렇게 되면 조나라는 두 사람의 차지가 될 겁니다. 님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세 사람의 사이즈가 어떤지는 님이 옆에서 봐서 잘 알 거 아닙니까? 평범한 장군 출신인 무신을 적으로 돌리는 게 낫겠습니까, 능력치가 검증된 장이와 진여를 적으로 돌리는 게 낫겠습니까?>


이 논리에 깜빡 넘어간 한광은 별다른 조건도 없이 무신을 석방한다. 이렇게 조나라와 연나라는 서로의 독립을 일단 인정한다. 대분열시대의 막이 올랐다.



7


진승의 몰락은 도미노처럼 연쇄반응으로 다가왔다.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형양에서 발생했다. 진승의 혁명 파트너인 오광의 군대는 형양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피해만 누적되는 상황이었다. 주문의 군대가 대패하고 주문도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오광의 부하 장수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민지 다음은 형양이었다. 이유의 지휘하는 성 안의 수비군과 장한의 구원군이 협공하면 오광의 군대는 끝장이었다. 그렇다면 정답은? 오광 밑의 두 장수가 공모했다.


<형양성 내의 수비군을 묶어둘 수 있는 소수의 군사만 남겨두고 장한의 군대와 결전을 치르는 게 낫지 않은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 필패다.>


문제는 오광이었다. 이즈음 오광은 부하들로부터 "오만하고 병법에 무지"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었다. 특유의 선동, 선전 실력으로 동지인 진승을 왕으로 옹립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장수로서는 실격이었던 것이다. 형양성에서 바닥을 드러내며 혁명가의 아우라마저 증발해버렸다. 카리스마를 상실한 그는 부하들에게 그저 짐이었다.


오광이 있어봐야 방해만 될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 장수들은 그를 죽여버렸다! 그들은 오광의 머리를 진승에게 보내 자신들의 행동을 승인해줄 것을 요구했다. 파트너를 잃은 진승은 정신이 아득해졌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답이 없다. 민중봉기의 심장이었던 그는 타지의 휘하 무장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진승은 어쩔 수 없이 오광을 죽인 장수를 상장군에 임명했다. 이 상장군은 원래의 계획대로 적당한 군사를 형양에 남겨놓고 진격, 다가오는 장한의 제국군과 격돌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장한은 군기가 문란해진 장초군을 그야말로 짓이겨버렸다. 문제의 '상장군'을 간단히 사로잡아 죽여버린 장한은 기세를 몰아 형양까지 내달렸다. 형양성에 남은 포위병력은 도마 위의 생선 신세였다. 장한은 포위군의 지휘관을 전사시키며 깔끔하게 생선을 발라먹었다. 승상 이사의 아들 이유의 지휘 아래 수개월을 버틴 형양성이 해방되었다.


장한이 수복한 요충지 형양성에 반란 토벌 지원군이 당도했다. 장군으로 임명된 사마흔과 동예(董翳)가 지휘하는 두 군단이었다. 제국의 조정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끊어졌던 제국의 군사력 네트워크가 상당 부분 회복되었음을 알 수 있다.(사마흔의 전직은 옥리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대형 교도소장부터 시골 관아의 간수가지 모두 옥리다. 지난 글들을 모두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사마흔은 전자였다. 그 사이 시간동안 장군으로 승진한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


진승이 머물고 있는 진성은 반진세력 전체의 수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진승의 영토 전부였다. 이제 간절한 SOS 신호를 보내 봐야 와 줄 사람이 없다. 그럴 의지도 여건도 안 된다. 위구를 위나라 왕으로 세운 주불 같은 경우를 보자. 그는 이미 위나라 사람이다. 북방으로 파견한 무신-장이-진여 팀은 이미 자기들끼리도 분열해 있다. 물론 모든 장수들이 진승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다. 본거지와의 통신 속도가 장한의 진격 속도보다 느린 게 문제였다.  



8


이 시점에서 진승은 진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성에 갇혀 있었다. 진승은 장한의 대군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를 두 번 파병한다. 결과는 예상대로다. 장한은 딱 두 번의 전투로 두 개의 적 야전군을 청소해버렸다.


진승의 저항은 이제 발악이 되었다. 장초 조정의 2인자(‘채사’라는 인물이었다)가 일군의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달려 나갔다. 장한은 채사의 군대를 증발시켰다. 진성 서쪽에 주둔해 있던 마지막 군대 역시 제국군에 분쇄되었다. 저항능력을 모두 상실한 진성은 더위에 얼음이 녹듯 자연스레 함락되었다.


진승은 수레를 타고 탈출했다. 그의 최후는 비장하지 못했다. 진승은 누추하게도 전차를 몰던 부하 ‘장가(莊賈)’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했다. 장가는 제국의 표적이 된 진승과 함께 움직이는 게 부담스러웠으리라. 충성을 다하다 같이 죽느니 자신만이라도 살아남는 선택을 한 장가는 곧바로 제국군에 항복했다(장가의 운명은 다음 편에 나온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왔던 “진승왕(陳勝王. 진승이 왕이 되리라!)”


그는 왕이 되었고, 죽었다. 대택향에서 봉기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진승과 오광이 사라진 천하. 그러나 난세는 이제 시작이었다. 제국은 항씨 가문이 양자강을 건너는 것도 몰랐고 사수군 패현 풍읍 중양리 출신의 논두렁 건달, 유방이라는 인간의 존재는 더더욱 몰랐다. 아무튼...


천하 각지에 움츠려 있던 제국의 관리와 군사들이 몸을 펴기 시작했다. 현지 주민들에게 ‘탈취당한’ 제국의 관할지역을 되찾을 때였다.



outro


이쯤해서 지금의 판도를 정리해 보자.


0) 먼저 진승과 오광이 난세를 시원하게 열어제끼고 나서...↓


1) 진 제국: 에이스 장한의 등판으로 산소공급 성공
2) 진승과 오광의 초나라: 멸망
3) 항씨 가문의 초나라: 강동(양자강의 동남 방면)을 접수하고 북상 중
4) 장이&진여 콤비: 무신을 조나라 왕으로 옹립, 조나라 복원
5) 한광: 4번의 무신-장이-진여를 배신하고 연나라 왕위에 등극
6) 전담과 그의 전씨 일족: 주불을 물리치고 제나라 복원
7) 주불: 6번의 전담에게 패했으나 위구를 옹립, 위나라 복원에 성공


이제 전국칠웅 지도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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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허전하지 않은가? 그렇다. 첫 화부터 등장한 장량의 조국, 한나라가 분리 독립 목록에서 빠져있다. 이제 장량의 좌충우돌이 시작된다. 항우와 경포(영포)가 만나고 범증이 등장한다. 유방에게도 해야 할 일이 생긴다.


이번 화 연재가 많이 늦었다. 일신의 사정 탓에 그렇게 됐다. 게을러서 늦은 건 아니니 이해해 주시고, 담편은 꼭 담주에 편집부에 꽂을 거다. 진짜로.


그럼 다음 편에...



어디 뒤로 가기를 누르려고. 모든 교양은 남 얘기다. 안 물어봐도 알려주는 남 얘기, [안알남] 들으러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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