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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명승부] 전설의 4인 첫빠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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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두란

2003.6.27 금요일
딴지일보 복싱부

  지난 기사 링크






  추억의 명승부 (1)
  
추억의 명승부 (2)
  
추억의 명승부 (3)
  
추억의 명승부 (4)
  
추억의 명승부 (5)


독자 열분덜 정말 오래 기다리셨다. 이번 회차부터는 지난번 기사게시판에서 언급했듯이 80년대 4인방(Fabulous Four)에 관해 몇 회에 걸쳐 디벼볼 예정이다. 몇날 몇일을 기사의 전개방법에 대해 혼자서 고민을 때려봤다. 4인방끼리 최초의 충돌인 두란과 레너드의 1차전부터 그들만의 리그가 마무리되는 두란 vs 레너드 3차전까지 시합이 열렸던 연대순으로 엮을 수도 있을테고 아니면 각 선수별로 4회에 나눠서 정리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텐데 필자는 오랜 고민 끝에(사실 기사 쓰기 편한 쪽으로 생각하다보니)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하여 앞으로 선수별로 1회, 총 4회에 걸쳐 기사를 작성할 예정이고 연재순서는 장유유서 정신에 입각해 나이도 젤 많고 링캐리어에서도 젤 선배인 두란(51년생)을 맨 먼저 다루기로 하고 다음은 순서대로 해글러(54년생), 레너드(56년생), 헌스(58년생) 순이 되겠다.









한창 시절의 두란. 저 앙다문 입술을 보라!!


네 선수 중 두란에 관해서는 기사를 쓰기가 솔직히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필자가 70년대 초반 태생이라 두란의 최전성기랄 수 있는 라이트급 시절의 시합들을 Live로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세 선수들에 비해 아무래도 현장감이 떨어진다는 기본적인 한계가 있을 것이다. 최대한 현장감을 느껴보기 위해 필자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는 40대 복싱환자 형님께 조언도 구했고 자료도 도움받긴 했지만(준배형님, 캄사합니다) 그래도 막상 두란에 대한 글을 쓰려니 Insight 위주가 아닌 단순 Fact의 나열에 그치고마는 함량미달 기사가 될까 저어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함께 올리는 사진들은 대부분 복싱매거진(일본)에 올랐던 사진들이고 이외에도 펀치라인, 복싱매거진(한국) 등에서 빌려왔다. 그리고 인터넷 크로스카운터의 여러 복싱논객들의 글에서도 많은 도움을 입었음을 밝힌다.








기사 들어가기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한 가지. 지난 6월 7일, 필자가 2회차 기사에서 다루었었던 아투로 가티와 미키 워드의 3차전이 아틀란틱시티에서 열렸었다. 경기 직후 파이트뉴스닷컴을 디벼봤더니 가티가 4라운드에 워드의 궁뎅이를 때리다가 오른손을 다쳤고 6라운드, 워드의 양훅을 허용하고 다운까지 당했지만 스피드의 우위를 살려 죽 시합을 리드하며 3~4점차의 넉넉한 심판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두었다고 했다.


필자는 경기 직후 인터넷을 통해 10라운드만 먼저 접할 수 있었는데(6월 22일 KBS Sports 채널에서 이 경기를 녹화중계해 주었다) 10라운드 종료 공소리가 울리는 순간 경기 중계를 맡았던 HBO의 캐스터 짐 램플리는 Its done 이 한마디만 날린 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해설자인 떠벌이 래리 머천트도 마찬가지였다. 경기 후 두 선수가 뜨겁게 껴안고 서로를 느끼는 모습에선 어떤 숭고함마저 느껴지기까지 했는데 이순간 램플리는 침묵을 깨고 "What Micky Ward And Arturo Gatti share together, only they know, only they can touch it, only they feel it..."이라는 감동 만빵의 멘트를 날려 더욱 필자를 숙연케 했다.


도하 언론에 의해 "Classic Trilogy"라는 근사한 타이틀로 명명된 이 두 선수의 3연전은 진정한 스포츠맨쉽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준 21세기 최고의 명승부로 기록될 것이다.


서설이 길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두란을 거론하기에 앞서 80년대 4인방이 복싱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자. 70년대는 누가 뭐래도 알리, 포먼, 프레이저로 대표되는 헤비급의 시대였다. 그러나 알리의 은퇴를 기점으로 헤비급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등장한 가운데 중자 중량급이 배출한 네 명의 기막힌 사내들은 숱한 명승부를 연출하며 80년대 복싱역사를 찬란하게 수놓는다.


90년대 초엽 미국의 모복싱전문지에서 복싱전문가 41명을 대상으로 80년대에 벌어진 모든 세계 타이틀매치 중 베스트 파이팅, 베스트 챔피언, 베스트 라운드, 최고의 이변 등 4개 부문에 관한 설문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 결과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두란vs레너드 1차전을 다룬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 기사


베스트 파이트 Top5는 4인방끼리 벌인 스타워즈 시리즈가 모조리 휩쓸어버렸고(1위부터 해글러vs헌스, 해글러vs레너드, 레너드vs헌스 1차전, 레너드vs두란 1차전, 해글러vs두란) 베스트 챔피언 Top5에서도 레너드(1위)와 해글러(3위)가 선정되었으며 베스트 라운드 Top5에서도 해글러vs헌스 1라운드(1위), 헌스vs레너드 14라운드(3위), 헌스vs바클리 1차전 3라운드(4위), 두란vs바클리 11라운드(5위) 등 4경기가 선정되어 이 네 선수가 거의 전부문을 독식(?)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80년대 링지의 "Fight of the Year"에서도 81년(레너드vs헌스 1차전), 85년(해글러vs헌스), 86년(해글러vs무가비), 87년(레너드vs해글러), 89년(두란vs바클리) 등 모두 5차례에 선정되기도 해 기량 뿐만 아니라 경기내용의 완성도에 있어서도 동시대의 타체급 챔피언들을 월등히 앞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의 평가도 외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펀치라인(88년 8월호)에선 국내 복싱전문가 20여명이 뽑은 복싱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에 대한 설문조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알리를 젖히고 레너드가 1위로 선정되었으며 나머지 세 선수(두란 4위, 해글러 6위, 헌스 16위) 모두 상위에 랭크되어 있어 Fabulous Four가 단순히 80년대만을 대표하는 복서가 아닌 시대를 뛰어넘은 불세출의 복싱스타임을 공인하고 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몇년 전부터 각종 복싱사이트 게시판의 끊이지 않는 이슈 가운데 하나는 80년대 4인방과 최근 최고의 복서로 평가받고 있는 오스카 델 라 호야, 로이 존스 주니어, 펠릭스 티토 트리니다드, 버나드 홉킨스, 쉐인 모슬리(모슬리에게 슈거라는 닉네임은 과분하다) 등과의 실력비교였다.


Fabulous Four의 시합을 Live로 경험하지 못한 20대들은 주로 최근 복서들의 우세를, 4인방의 시합을 직접 체험했던 30대 이후 복싱팬들은 4인방의 절대 우세를 주장하는 경향이 강하다. 가상대결이란 게 정답이 있을 수 없고 상대성 측면에 있어 많은 부분 지배당하기 마련이므로 기량의 절대치를 계량화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며 그런 비교가 큰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굳이 비교우위를 논해보자면 호야나 티토의 팬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최근 복서들 중 Fabulous Four와 그나마 제대로 맞짱뜰 만한(승부를 점치기 힘들 정도의 시합을 펼칠 수 있는) 선수는 로이 존스 주니어 단 한 명 뿐, 나머지 선수들의 Size는 작게는 한 급수, 많게는 두 급수 정도까지 차이가 난다고 생각한다. 이에 관한 자세한 언급은 생략하겠다. 끝이 없는 논쟁이며 이번 기사의 주제와는 조금 맞지 않기 때문이다.


재작년쯤이던가. 모복싱매니아가 복싱코리아 게시판에 올렸던 짧은 한 줄의 푸념이 떠오른다.


“언제까지 4인방인가????”


4인방이 링을 떠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을만큼 그들의 영향력과 카리스마가 대단했으며 최근 복싱의 긴장감과 밀도가 떨어진다는 묘한 역설이었다.


이 정도로 Fabulous Four에 대한 잡설을 마치고 오늘의 주인공 두란을 디벼보도록 하자.



 파나마 운하보다 더 유명한 사나이


4인방 중 가장 오랜 기간 현역으로 활동한 선수가 두란이다. 68년 2월에 프로에 데뷔해 교통사고로 인해 링을 떠나기 전 마지막 시합이 2001년 1월이었으니 무려 만 33년 동안 복서생활을 한 것이다. 30여년 선수생활 중 우리 나이로 서른 아홉이 되는 89년에 4체급 석권의 신화를 달성했는데 근육의 유연성과 탄력면에서 흑인에 비해 처지는 라티노인 두란이 그 나이까지 정상권의 기량을 유지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대부분 라틴계열의 복서들이 10대 중후반의 어린 나이에 데뷔해 20대 초중반에 절정기를 맞고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쇠락의 길을 걷는 것이 다반사였음을 상기한다면 두란의 이력은 무척이나 특이하고 또한 경이로운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두란의 33년 복싱 생활 중 최고의 하일라이트는 72년부터 80년에 이르는 10여 년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두란은 기실 80년대 4인방이라는 레테르와는 어울리지 않는 선수라고도 할 수 있다.









79년 두란의 모습. 꽤 잘생겼다


파나마가 배출한 최고의 스포츠스타 로베르토 두란은 파나마운하 입구의 황폐한 슬럼가인 초릴료에서 멕시코인 아버지와 파나마인 어머니 사이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노병엽의 영웅열전 두란편에서는 9남매 중 둘째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외신을 종합해보면 8남매 중 막내가 맞는 듯 하다). 두란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으며 이로 인해 두란은 혹독한 어린 시절을 겪게 된다.


어머니를 도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매일같이 자루를 매고 2마일이 넘는 거리를 수영을 해 망고 열매를 따와서 시장에 내다 팔았으며(욕심껏 망고를 따왔다가 자루가 무거워 익사할 뻔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구두닦이, 신문배달, 페인트칠 그리고 길거리에서 노래도 하고 춤을 추기까지 했다(두란이 여러가지 악기, 특히 드럼을 잘 다루며 노래에도 꽤 실력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수입을 다른 소년들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거리의 소년들과 매일같이 싸워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 제대로 된 학교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이 즈음 두란은 자신의 인생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철도회사와 방송국을 경영하고 있는 파나마의 대프로모터 카를로스 에레타였다. 두란이 몰래 망고 열매를 따오던 농장이 바로 에레타의 농장이었고 에레타는 자신의 농장에서 몰래 망고 열매를 따고 있는 10살의 소년 두란을 혼내지 않고 오히려 밥을 먹이고 용돈까지 줘서 보냈던 것이다. 후에 이 인연이 새로운 매듭으로 이어지게 될 줄은 에레타도 두란도 몰랐었다.


계속되는 싸움질 때문에 13살에 학교에서 쫓겨난 두란은 우연한 기회에 복싱에 입문하게 된다. 길거리에서 싸움질을 하고 있는 두란에게서 미완의 가능성을 발견한 전 파나마 챔피언 새미 메디나는 곧바로 두란을 이끌고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마리논짐으로 데리고 가서 복싱을 시켰으며 타고난 싸움꾼이었던 두란은 곧바로 자신의 길이 복싱임을 감지하고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다. 스트리트 파이팅의 경험을 살려 운동에 매진하던 두란은 10승 3패의 조금은 보잘 것 없는 아마 전적을 남기고 16세에 프로에 데뷔하게 된다.



 돌주먹(Manos de Piedra)


데뷔 이후 두란은 무시무시한 화력을 과시하며 대부분의 시합을 KO로 장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국 내에서 인기복서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두란의 시합에는 심판이 필요없다는 풍문이 들릴 정도였다. 한창 인기가 치솟던 70년 5월에 벌어진 미래의 세계챔피언 에르네스토 마르셀과의 라이벌전은 자국 내에서 엄청난 관심 속에 벌어졌으며 파워의 우세를 앞세운 두란의 10회 TKO로 마무리된다.









20대 초반의 쌩쌩하던 시절의 두란


논타이틀에 불과한 이 시합에 걸린 도박 판돈이 미화 400만불을 상회했다고 하니 두란의 인기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마르셀전이 있은 얼마 후 두란은 커다란 행운을 잡게 된다. 바로 카를로스 에레타의 눈에 들어 정식계약을 맺게 된 것이다. 71년이었고 당시 두란의 계약금은 300달러였다.


에레타는 두란에게 토니 제일, 에자드 찰스 등을 길러냈던 노련한 트레이너 레이 아셀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아셀은 당시 뉴욕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탓에 록키 마르시아노의 오랜 커트맨이자 자신의 오랜 친구인 프레디 브라운을 고용해 두란을 맡겼다. 물론 시합이 잡히면 함께 트레이닝을 도와주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이후 이들은 오랜 기간 한 팀으로 활동하게 된다.


브라운이 두란에게 강조한 복싱철학은 네가지였다. 첫째, 레프트가 중요하다. 둘째, 복싱은 맞지 않고 때리는 예술이다. 셋째, 얼마나 강하게 때리느냐가 아니라 상대의 어디를 맞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넷째, 승부의 관건은 스피드다.


이러한 스승의 지침을 고스란히 흡수한 두란은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뛰어난 디펜스는 물론이거니와 단신(170cm)임에도 불구하고 왼손잽과 스트레이트의 쓰임이 좋고 리드미컬한 풋웍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인파이터의 본령이랄 수 있는 맹렬한 대쉬와 양훅, 보디블로우는 적재적소에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며 자신만의 KO방정식의 기초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윽고 두란은 미국 무대에 첫선을 보이게 된다.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에서 벌어진 미국 무대 데뷔전에서 두란은 베테랑 베니 후에르타스를 1회 TKO로 가볍게 제압하고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르게 되고 곧바로 다음 달에 파나마로 돌아와 전 세계챔피언 일본의 고바야시 히로시를 7회 KO로 잡는다.  








두란 vs 마르셀, 두란 vs 고바야시 KO장면 동영상



이후 2승을 더 추가한 두란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금발의 테크니션 켄 부케넌을 13회 TKO로 스톱시키고 대망의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획득하게 된다. 12회까지 포인트에서 앞서던 부케넌은 13회 종료와 동시에 애매한 두란의 로우 블로우를 맞고 링바닥에 쓰러져 경기를 포기했고 주심은 두란의 TKO로 처리해버려 경기 후에 잡음이 많았으나 필자가 보기에 경기를 포기할 정도의 치명적인 주먹은 아니었기 때문에 경기를 포기한 부케넌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두란 vs 부케넌- 부케넌의 똥꼬를 노리는 두란








두란 vs 부케넌, 두란 vs 이시마쓰 KO장면 동영상


         
1차 방어전을 앞둔 두란은 세 차례의 논타이틀전을 가졌다. 요즘은 드문 일이 됐지만 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챔피언들의 논타이틀전은 흔한 일이었다. 72년 11월 두란은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에스테반 데 헤수스와 논타이틀전을 가져 1회 헤수스의 레프트훅에 다운을 당하는 등 답답한 경기를 펼치며 10회 판정패함으로써 생애 첫 치욕을 당하게 된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연승가도에 불을 붙인 두란은 세차례의 방어전(지미 로버트슨, 헥토르 톰슨, 가쓰 이시마쓰)과 7차례의 논타이틀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며 74년 3월 또 한 번 헤수스와 맞서게 된다.


1차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1라운드에 헤수스의 레프트훅에 다운을 당하며 불안한 출발을 보인 두란은 경기 후반 헤수스를 꾸준히 다그쳐 11회 KO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두란 vs 헤수스 2차전- 두 번째 대결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있는 헤수스와 두란








두란 vs 헤수스 2차전 주요장면 동영상(1R, 11R)



75년부터 77년까지 두란은 더욱 업그레이드 된 기량을 선보이며 레이 램프킨, 에드윈 비루에트, 레온시오 오르티스, 사울 맘비, 루 비사로, 에밀리아노 비야, 알바로 로하스, 빌로마 페르난데스 등 당대 라이트급의 세계 랭커들을 모두 제압하면서 정력적인 행보를 이어나간다.


두란의 영광의 제단 앞에 희생양이 된 선수들 중 6차 방어 상대였던 레이 램프킨은 시합 후 병원으로 실려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는데 두란은 TV에 출연해 다시 싸울 때는 램프킨은 병원이 아니라 영안실에 있을 것이라며 큰소리를 쳤고 무패의 유망주 루 비사로는 더 이상의 선수생활을 지속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게 얻어맞기도 했다.








두란 vs 램프킨, 두란 vs 비사로 KO장면 동영상




야성과 지능을 겸비하게 되는 이 무렵의 두란은 그 어떤 형용사로도 수식이 어려울만큼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타고난 터프니스와 펀치력에 캐리어가 쌓이면서 단순한 하드펀처가 아니라 서서히 상대를 침몰시키는 교활한 테크니션으로 진일보한 당시의 두란은 상대의 장단점을 파악해 공격루트를 찾아내는데 있어 가히 천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란 vs 비사로- 원없이 두들긴 루 비사로전


더욱 정교해진 보디웍은 어떤 상대에게도 클린 히트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레프트로부터도 라이트로부터도 어느 주먹으로부터라도 자연스럽게 리드펀치를 낼 수 있었다. 롱과 쇼트의 믹스가 매우 부드러웠으며 상대의 펀치를 죽이면서 받아치는 카운터는 경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였다. 거기에 불덩어리 같은 스태미너와 맷집, 정평난 보디블로우와 쉴새없는 연타, 탁월한 접근전 능력까지 갖춘 당시의 두란은 카를로스 몬존과 더불어 전체급을 통틀어 가장 허물기 힘든 챔피언으로 인식되었다.


두란이 WBA타이틀 10연속 KO방어행진을(고메스의 17연속 KO방어에 이은 세계 2위 기록) 벌여나가는 동안 숙명의 라이벌 헤수스는 76년 5월 일본의 가쓰 이시마쓰를 15회 판정으로 꺾고 WBC 타이틀을 획득하고 3차 방어까지 무사히 치르게 된다.


둘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라스베가스 시저스팰리스 호텔에서 벌어진 숙명의 통합타이틀전은 두 선수 모두 비미국권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전역에 생중계 된다. 돈 킹이 프로모팅을 맡았던 이 시합은 두 선수의 네임밸류에 걸맞게 대전료 역시 두란이 30만 달러, 헤수스가 20만 달러로 라이트급 역사상 최고액이었다.









두란 vs 헤수스 3차전- 맹렬히 대쉬하는 두란


트레이닝 도중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스파링파트너가 파나마를 비하하는 발언을 하자 격분한 두란이 난동을 부리는 등 링밖의 잡다한 소란도 있었지만 시합에 나선 두란은 서두르지 않고 더욱 깊어진 수읽기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헤수스를 압박, 12회 TKO승을 이끌어내며 확고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한다. 11라운드까지 채점에서도 109 : 104, 107 : 104, 107 : 102로 두란의 일방통행이었다.








 두란 vs 헤수스 3차전 12라운드 동영상 보기


 
대 헤수스 3차전을 승리로 이끈 두란은 오랜 체중고를 이기지 못하고 라이트급 타이틀을 반납하고 웰터급으로 두체급을 한꺼번에 올린다(평소 두란의 체중은 75~80kg으로 라이트급 한계 체중인 61.23kg과는 무려 15kg 이상 차이가 났다). 두란이 주니어웰터를 거쳐 웰터로 올라갔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그의 4체급 석권 신화는 아마도 5체급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당시 주니어웰터급 챔피언은 말년의 안토니오 세르반테스와 사엔삭 무앙수린이었는데 둘 모두 두란의 상대가 되기에는 버거운 선수들이었다.


몬로 브룩스를 8회 KO로, 전 세계챔피언 카를로스 팔로미노를 10회 판정으로 잡아 웰터급 무대에 완전히 적응한 두란은 두 번의 추가 시합을 모두 KO로 장식하며 웰터급 탑 콘텐더로 도약,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 슈거 레이 레너드가 가지고 있던 WBC웰터급 타이틀 사냥에 나선다.


다음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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