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4. 15. 월요일
독투불패 넌천재
원장님 딸.
지금 얘기해 보면 무슨 석기시대처럼 오래 전으로만 느껴지는 90년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날 이름 대신 부르는 호칭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른 나이에 홍대 앞에 본인의 입시미술학원을 하나 차리셨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원장님으로 불리며 원장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방 안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학부모와 상담을 하거나, 강사들에게 월급봉투를 나눠주고 있었다.
학원은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었던 것 같고, 수능철이 끝나면 학부모들이 들러서 양주나, 손수건, 아니면 초콜릿 세트 같은 것들을 놓고 갔다. 그맘때면 아버지는 홍대 몇 명, 중대 몇 명, 하고 학생들 이름과 합격 대학 같은 것들이 길게 나열된 현수막을 만들어서 건물 밖에 내걸곤 했고, 난 옆에서 초콜릿을 까먹으면서 그 사이에 끼어져 있는 학부모들의 감사 카드 같은 걸 보며 뭔진 몰라도 우리 아버지는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수강생들이 희멀건 석고상 앞에 삼삼오오 모여 데생을 하고 있을 때, 난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장난질도 치고, 뭔가 있어 보이는 교복이란 걸 입은 언니 오빠들이랑 떡볶이도 나눠 먹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먹는 잘생긴 강사 오빠 옆에 찰싹 붙어서 코코아를 빼달라고 조르기도 했던 것 같다.
<얼굴 밝히는 건 꼬꼬마 때도 여전했던 모양.
원장 딸이니 한 대 쥐어박지도 못하겠고, 얼마나 귀찮았을꼬(..)>
어느 정도 학원이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건지 아버지는 당시 그 동네에서는 제일 비싸게 쳐주는 아파트를 덜컥 분양 받으셨고, 매우 민감한 미적 감각을 가지신 어머니 탓에 나는 빨간 메리제인 슈즈나, 니삭스, 원피스 같은 걸 입고 벼머리를 한 채로 그 동네를 돌아다녔다.
어머니의 화장대에는 3단 메이크업 박스와 함께 색색깔 화장품이 즐비했고, 그 옆에는 모양도 색깔도 가지가지인 가방들이 하나씩 늘어만 갔으며, 학교에서 학부모 회의에 어머니가 참석이라도 할라치면 쏟아지는 부러움의 시선에 난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다.
주말엔 항상 아버지의 차 트렁크에 캠핑세트를 챙겨다가 온 가족이 함께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고, 방학 때는 마당에 꽃사슴 여러 마리를 키우고 있는 아빠 친구 화가네 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틈나는 대로 아버지를 따라 전시회를 다니며 어린 나이부터 특히 누드사진과 누드화(..)에 눈을 뜨기도 했다.
사는 게 다 이런 건 줄 알았다.
그리고 1997년이 찾아왔다.
그 때였던 것 같다.
주택대출이자, 카드, 돌려막기, 연체, 주가폭락, 이런 듣도 보도 못한 단어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 대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던 게.
아버지는 학원을 지방으로 옮기셨고, 아파트 이외의 다른 형태 주거지는 알지도 못했던 나는 골목길을 따라 어두컴컴한 한 주택의 일층집으로 이삿짐을 나르는 부모님을 동생들과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IMF 위기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만 바꿔놓은 게 아니었다. 아파트에서 애지중지 키워졌던 요크셔 테리어 꼼지도 비좁은 실내공간 탓에 졸지에 꼬질꼬질한 마당개 신세가 되었다.
그 후 아버지가 운영하는 학원은 한두 번 정도 이사를 더 가고 이름은 몇 번인가 더 바뀌었다. 호황을 누린다고는 못해도 나름대로 일정한 수의 수강생들을 데리고 살아가던 입시미술학원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아버지와 친하던 원장님들은 하나 둘씩 도시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거대한 체인 형식의 학원 몇 개가 메우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학원 역시 서울에 본사를 둔 한 학원의 가맹점 형태가 되었다. 다시 한 번 이름을 바꾸고 간판을 바꾸어 달고, 본사 측에서 내려온 전단지나 팜플렛 같은 걸 한 구석에 가득 쌓아둔 아버지의 원장실은 예전과는 무척이나 많이도 달라져 있었다. 문 앞에 붙은 원장실이라는 팻말마저도 그 앞에 붙은 본사의 로고 때문에 정말 이상해 보였다.
화랑이 즐비한 ○○문화거리 같은 것들은 이 도시 저 도시 할 것 없이 자취를 감추었고, 개인이 그림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루트는 싸그리 씨가 말라버렸다. 그리고 화가인 아버지의 친구는 별장과 함께 그 곱던 꽃사슴들을 죄다 팔았다고 했다.
모든게 이상해졌다.
해태, 우성, 삼익, 공영, 한신, 기아, 쌍방울,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만큼 엄청난 수의 기업들이 부도를 맞았고 주가 500선은 붕괴되었다. TV에선 연일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함께 목숨을 끊은 가족들의 동반자살 이야기가 나왔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개천에서 용쓴다'로 바뀌었고 학자금 대출을 받는 대학생은 대학생 7명 중 1명 꼴로 늘어났으며, 스펙이라는 단어가 생기면서 취업이란 말도 못하게 어려운 것이 되었다. 정리해고가 일상화되면서 그나마도 더 이상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해주진 못하게 되긴 했지만.
강산이 바뀐다는 10년보다도 더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이상한 현실은 어느덧 이상한 게 아닌 보통의 현실이 되었고, 아버지는 더 이상 원장님이 아니고 나도 더 이상 원장님 딸이 아니다.
학원을 정리한 후 짧지 않은 시간 방황하면서도 계속 그림을 잡고 있던 아버지는 얼마 전 다시 본격적으로 붓을 들었다. 그리고 큰딸이 딴 나라에서 최저임금노동자이자 도시빈민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을 때 청송 산골짜기로 홀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주산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주산지: 청송군 부동면 소재지인 이전리에서 약 3km 지점에 있는, 약 270년 전에 준공된 저수지>
추상에서 반추상으로 바뀐 요즘 아버지의 그림들은 '오오오 드디어 내가 당신의 그림의 주제나마 이해하는 게 가능해졌습니다!'는 기쁨을 준다. 예전엔 워낙에 그림들이 어두웠던데다 당최 알아보기도 힘든 형상들의 항연이었던지라, 나같은 문외한이 뭘 알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리가.
바뀐 그의 그림처럼 아버지와 나 사이에도 이제껏 부재중이던 소통이란 것이 생겨났다.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 뭔가 안 맞으면 싸우기도 한다.
혼자 막연하게나마 구상 중인 것이 있다.
언젠가 적당한 입지에 적당한 건물을 하나 마련해다가, 오갈 데 없이 창고에 쌓여있는 아버지의 예전 그림들부터 최근작들까지 싹 다 벽에다 걸고 상설 개인전이 가능하게끔 하는 거다. 이른바 전용 갤러리라는 그거.
유망한 신진작가들 그림도 따로 공간을 만들어서 돌아가며 전시해주고, 한구석에서는 커피도 팔고(프라푸치노 뭐, 이런건 귀찮으니까 메뉴는 아메리카노로 통일! 우유 추가는 셀프) 쇼파같은 것도 놔서 그림 보면서 그림들 사이에서 발 뻗고 좀 쉬다 가게 하면 참 좋겠다. 매체를 통해서 입소문도 좀 내고, 갤러리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온라인으로 구매도 가능하게끔 하고, 좀 더 잘 되면 외국에 뮤지엄들이 하는 것처럼 소소하게 작품 프린트가 들어간 상품들도 한 구석에서 팔고, 뭐 그런 것들.
관건은 아버지가 협력을 해줄 것인가 말 것인가인데, 멍석 깔아놓으면 '뭐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거냐' 라고 한 마디 할지는 몰라도 은근슬쩍 '수익분배는 몇대몇이 되는거냐'라고 덧붙일 분이기에 크게 걱정은 안 한다.
다들 좋은 그림 많이 보고, 즐기고, 그 사이에서 쉬고, 생각하고, 나눌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이상한'게 아니라 '보통 현실'이 되는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 믿는다. 그리고 그 때까지 도화백은 계속 그림을 그릴 거고.
난 그의 그림이 참 좋다.
추신 : 매번 독투불패 눈팅만 하다 좋은 글들 읽으면서 너무 날로 먹나 싶기도 하고 아버지 전시회가 올 한 해 언젠가는(...) 열릴 예정이기도 해서(제발) 아버지 그림에 대한 반응도 볼 겸 슬쩍 글 하나 투척해봅니다.
전시회 반응도 안 좋고 영 안 되겠다 싶으면 밤 중에 벙커에 침입해서 벽마다 아버지 그림으로 도배를 해놓고 올까 고민 중입니다.
편집부 주 벙커 침입, 환영합니다. 다만 벙커1에 무단 침입하여 작업을 하다 포획되는 경우, 법적인 책임은 묻지 않으나 사측 방침에 따라 7년간 무상직원 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용기있는 도전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편이나 본지는 누군가를 잡거나 추적하는데 괜찮다 싶을 정도의 노하우가 있는 바, 전시회에 관한 문의는 bunker1master@gmail.com 으로 상담을 거치는 안락한 방법도 있다는 것, 알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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