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4. 12. 금요일
루저C
나는 루저다
1
나는 루저다. 키가 작다는 썰렁한 농담이 아니다. 지금 내가 죽었다는 소식에 자살로 추정을 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하게 볼 사람이 없을 정도로 현재의 삶이 벼랑 끝에 몰려있다는 얘기다. 빈곤 노인에 비해 사정이 나을지 모르나, 20대와 달리 40이 넘은 상태에서의 경제적 빈궁은 ‘루저’로서의 자격으로는 충분하다.
사실 루저로서의 삶을 어제 오늘 맞닥뜨린 것도 아니고, 또 나 같은 루저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넘쳐나는 현실에서 구질한 삶을 토로하는 것은 별반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노숙자조차 회상할 자신의 리즈시절이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야말로 일관되고 줄기차게 루저의 삶을 이어온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루저의 정서를 갖고 루저로서 세상을 해석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버렸다.
세상에 넘쳐나는 성공 처세담과 자기 계발 책들을 보다 보면, 나 같은 루저는 인과응보의 결과로서 그 어떤 의문이나 불평불만 없이 루저의 삶을 걸어야만 마땅하다. 긍정적인 마인드, 좋은 습관, 독한 의지, 언행일치, 냉정한 판단력, 기계같은 시간 관리, 근면함... 성공하는 삶의 자세로서 제시되고 나열되는 인격적 미덕은 지금까지의 내 생활과 아무래도 거리가 멀었던 거 같으니까.
그런 저서의 저자들은 대체로 연봉 몇 억의 캐리어우먼, 기업의 CEO 등으로 입지전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대체로 각고의 노력으로 간난신고했던 시절을 극복하고 피어난 결과로서 성공의 경험을 제시한다. 그렇게 성공한 자들의 삶의 궤적과 나의 삶을 비교하다보면, 밀려오는 자괴감과 자책 속에 이미 늦어버린(것 같은) 나의 현재에 깊은 회한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속된 자책과 반성 속에서도 상황이 악화만 되어가다 보면 마음 속 한편에 반발심이 피어오르며 주변과 사회 등 외부로 분노와 원망이 향하게 마련이어서, 자살이나 혹은 묻지마 살인까지 벌어지는 극단적인 현상으로 번진다.
이 때, 경쟁에 지친 자들이나 패배자들을 위한 위로의 메시지가 날아 온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마라, 기쁨은 언젠가 오리니’와 같은 키치적 위무에서부터, 멈추면 보일 것이라며 일상의 행복을 찾으라는 조언에 이르기까지 성공에의 강박을 덜어주는 잔잔한 책들이 인기다. 성공을 향해 질주하고, 때론 넘어졌던 우리는 ‘아픈 청춘’과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라는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잠시나마 안도를 한다.
최근의 힐링 열풍은 치열해져만 가는 경쟁 사회 속에서 혹독한 자기계발의 채찍질로 얻은 마음의 생채기를 달래는 연고의 역할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상투적 위로도, 저격수의 총알처럼 날아오는 여러 종류의 빚독촉 고지서와 함께 시작되는 팍팍한 일상 속에서는 다시 봄눈처럼 힘없이 녹아들뿐이다. 아무리 아껴도 수입을 항상 능가하는 지출 현황을 보다보면 오늘이 불안하고, 내일이 두렵기만 하다.
2
얼마 전, 내 주변 지인들 서 넷이 호프집에서 술 한 잔 할 자리가 있었다. 행색은 다들 비슷했지만, 사는 형편을 들여다보면 조금씩 달랐다.
하나는 대출 몇 천을 받아 1억 전세를 살면서 맞벌이를 하지만 수입이 들쭉날쭉하여 미래에 대한 불안에 늘 시달리고 있었다. 다른 한명은 200이 안되는 수입이지만, 급한 김에 제3금융권에 대출 천만 원을 받아 수입의 3분의 1을 이자만 갚아가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4억 가까운 빚 속에서 허덕이며 일자리를 구해보려는 친구... 모두 점차 늙어감을 느끼는 40대 전후의 친구들이다.
그런데 이렇듯 형편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다들 폐지 줍는 미래를 맞이할까봐 불안해하는 것은 똑같았다. 내 주변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이와 같은 사연은 도처에 널려있다. 청년, 중년, 노년할 것 없이 다들 너무 너무 힘겹게 살아간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건 개인 처세술과 힐링으로 극복 될 문제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를 휩쓴 신자유주의적인 정책과 이념에 분노하고 복지국가에 대한 요구가 사회적으로 빗발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경제민주화’, ‘공정사회’라는 담론이 사회를 휩쓸고,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폭발적으로 판매되는 현상은, 더 이상 개인의 노력만으로 어쩌지 못하는 불평등한 구조에 대한 사회적 반발심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사회적 정의’, ‘공정 사회’ 등을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저마다의 내용이 다르게 나올 수도 있을 정도로 모호한 개념이긴 하지만, 어쨌든 더 이상 이 상태로는 안 된다는 의식의 사회적 표출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같은 루저들은 빈곤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하는 데 관심이 있다. 또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실천을 하기에는 우리의 삶은 너무나 강팍하다. 하루 하루 벌어먹기 힘들다. 봉기, 반란 같은 혁명적 상황이라도 오면 나서서 짱돌이라도 던져보련만, 일상이 지속되는 이런 생활 속에 어떻게 ‘실천’해야 ‘좋은 세상’이 올지 감이 안 온다.
실제로 부마와 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룸펜, 구두닦이 등 사회 밑바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전선의 맨 앞에 서기도 했다. 6월 항쟁 때도 학생들 못지않게 룸펜들이 길거리에서 쇠파이프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박정희만 없으면, 혹은 대통령 직선제만 치루면 세상이 뒤바뀔거라는 어떤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실현되었어도 여전히 루저의 삶은 크게 뒤바뀌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반란보다는 투표소에서 희망을 꿈꾸게 된 90년대에 들어섰을 때, 민주정부로 정권이 바뀌면 어떤 희망이 생길 거라는 또 다른 믿음을 갖고 살았고 그 또한 실현되었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심지어 거의 평생을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을 변호하던 정의로운 사람이 집권했을 때 이제는 정말로 뭐라도 좋아지겠지 하는 부푼 기대도 역시 루저들에겐 아무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러하니, 민주와 정의를 떠들면서 그때가 정의로웠던 시대였노라고 떠드는 놈은 미친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건 뭐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래서 지나고보니, 루저들이 그나마 희망을 안고 살았던 과거 70-80시대,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에 개발시대를 상징하며 들어왔던 이명박과 박근혜에게 기대를 걸었지만은 역시나 세상은 루저들에게 단 1cm도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그동안 직선제, 정권교체, 개발시대로의 회귀 등... 가장 밀도가 높은 사회적 이슈에 희망을 걸었고 실제로 구현이 되었지만 날개 없이 추락하는 루저들의 삶은 가속도만 붙었을 뿐이다. 중력 개객기.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 ‘경제민주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목표로 한다니, 이건 너무 막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세상이 언제 오겠는가.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도 모르고 내 생애에 그런 세상을 맛볼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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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회적인 희망을 걸기에도 우리는 너무 지쳤다. 그냥 세상일에 차라리 눈을 감고, 나와 내 가족 하나만 어떻게든 건사해보자는 생각이 다시금 고개를 내밀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나는 좀 더 독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일까. 자기 계발서도 더욱 강해져서 이제는 혹독하게 자신을 매질하는 ‘독설’까지 등장했다. 더욱 강한걸로 때려주세요
TV특강쇼로 유명세를 떨친 유수연의 베스트셀러 [유수연의 독설]에는 노골적인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금수저를 물고 나오지 않는 이상 불평하지 말고, 세상을 고민할 시간에 필요한 스펙을 쌓기 위해 독기를 품고 노력하라, 자기 앞에 초라하게 놓인 무능력한 현실을 시대탓, 사회탓 하는 것은 인생을 방치하는 것일 뿐이다, 어설픈 노력조차 필요 없다. 혀를 내두를 만큼의 지독한 노력을 해라. 그래야 성공이 아니래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게 된다. 자는 시간 빼놓고 10분 단위로 시간을 설계하며 일벌레로 살고 있다는 그녀로서는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서 그런 노력을 보이지 않는 이들이 다 한심해 보였을 것이다.
팍팍한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이전보다 더한 독기를 품고 죽든 살든 이판사판으로 덤벼들어야 하는 결기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혹독한 자기계발과 힐링, 그리고 사회적 변화의 모색은 개인 삶에 모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이처럼 서로 동떨어진 듯한 해법에 각자도생으로 저마다의 길로 접어들면서 살게 된다.
우리 같은 루저들에게 멘토를 자처하며 저마다의 해법을 내놓는 저자들은 대체로 엘리트로서의 위치가 굳건한 자들로서, 자신의 발언에 대한 신뢰를 이력으로 증명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보면 그들이라고 해서 딱히 새로운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베스트셀러 저자 멘토의 조언 대부분은 부모와 선생에게 지겹도록 듣는 잔소리를 좀 더 세련된 필치와 어법으로 전환한 것에 불과하다. 그 책의 독자들도 모두 다 아는 상투적 내용이지만 작심삼일의 나약한 의지력을 소유한 스스로에게 담금질 도구로 소모할 요량으로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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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저로서 40년이 넘은 생을 살아오며, 사회변화를 위해 나름 애도 써본 필자는 자기 계발서에 쓰여진 내용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진정 루저에게 필요한 인생 철학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한 발 더 나가 성공한 자들이 루저들을 굽어살피며 조언하는 일반적 유형에서 벗어나 멘토를 자처하는 그들에게 역으로 충고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우리 사회의 엘리트와 성공인들이 흔히 던지는 ‘강한 의지’, ‘노력’, ‘능력 보상’, ‘꿈’, ‘희망’, ‘긍정적 마인드’ 등의 메시지를 현실에 빗대어서 정밀하게 살펴보면서 앞으로 글을 연재할 계획이다. 성공한 자들이 그동안 우리 루저에게 너무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이 글은 일방적으로 수신만 받아온 우리 루저들이 오랜만에 당신들에게 보내주는 답신이 될 것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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