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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대표팀이 올림픽 8강에 진출했다. 요즘이야 월드컵에든 올림픽에든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나서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되어 버렸지만 2-30년 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아시아의 호랑이라며 거들먹거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엉뚱한 팀에게 발목을 잡히고 허리를 꺾여서 이른바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던 역사는 길고도 쓰라렸다. 30년 한이라고 불렸던 월드컵 도전사는 다시 떠올리기조차 복장 터지는 일이지만, 한국 축구의 한은 월드컵에만 서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월드컵보다는 한 수 아래의 무대인 올림픽에서도 굽이굽이 문경 새재 마냥 그 한은 똬리를 틀고 있었다. 


48년, 해방 뒤 처음 열린 런던 올림픽에 태극기를 바늘로 꿰맨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첫 경기에서 대이변을 일으킨다. 중남미 강호 멕시코를 5대 3으로 이겨 버린 것이다. 오늘 새벽 한국팀을 거의 그로기로 몰아넣었다가 한 방에 침몰한 멕시코, 지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멕시코를 정부 수립되고 며칠도 안 지난 신생 독립국 축구팀이 꺾은 것은 홍해의 기적까지는 못 가도, 한강의 기적 정도로는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기적은 반복되지 않는다. 바로 다음 게임에서 스웨덴에게 12 대 0으로 난타당하고 보따리를 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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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올림픽 당시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 모습


다시 한 번 한국 축구팀이 오륜기 아래서 뛸 기회를 따낸 것은 1964년 동경 올림픽이었다. 하지만 통일아랍(이집트 + 시리아)에게 10 대 0으로 깨지는 등 3전 3패, 한 골 넣고 20골 먹는 골 득실 -19의 성적으로 대한해협을 건너오고 만다. 1988년 개최국 프리미엄으로 머리 긁적이며 진출할 때까지 한국의 올림픽 출전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본선 진출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이스라엘의 다비드의 별에 찍히거나 말레이시아 골키퍼 아르무감의 손에 바지가 벗겨지거나 일본에게 닛뽄도 칼질을 당했던 것이다. 그 기억 가운데 84년 미국 LA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역사가 떠오른다.


당시는 올림픽 본선 진출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도 높았던 해였다. 83년 세계 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당당 4강에 진출했던 '용감하고 씩씩한 대한 건아'들이 적잖이 수혈되어 있었고, 눈만 봐도 오소소소 소름이 돋는 독사 박종환 감독이 그 팀을 이끌었다. 스파르타를 너무 좋아했던(?!) 감독의 훈련 방식과 고참들에 대한 형편없는 대접에 분노한 최순호, 최인영, 변병주, 이태호가 태릉 선수촌을 이탈하여 징계를 받고, 다시 복귀하는 등등의 굴곡은 있었지만 여전히 희망은 푸르렀고 바람은 하늘에 닿았다. 


2승 1무씩을 기록한 가운데 맞붙은 사우디아라비아. 대회가 열린 곳이 싱가포르였기에 시차가 별로 없었던지라 온 동네에서 TV 소리가 천둥처럼 울리고 있었다. 제법 붐비던 동네 어귀 퇴근길은 빗자루로 쓸어낸 듯 평화로웠다. 일찌감치 집에 돌아왔거나 TV 나오는 다방으로 사람들이 집결했던 것. 잔뜩 상기된 사람들의 얼굴에는 '이번에는.....'하는 기대가 사우나 안 땀방울 떨어지듯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우디만 잡으면 나성에 가서 편지를 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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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나 불안한 점이 있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8강전이 끝난 후 북한 선수들과 임원들과 일부 응원단은 태국 심판을 집단으로 구타했다. 남한에게 진 북한 선수들은 아오지 탄광행이 틀림없으리라는 무시무시하고도 우스꽝스런 착각이 우리 국토 우리 산하를 지배하던 무렵이었기에 북한의 '망동'은 '징한 놈들'의 악명을 드높이기에 좋은 입방아 재료였다. 그런데 그사이에 수군수군 들리는 소리로는 그 경기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편파 판정이 난무했고, 결국 머리카락이 곤두선 북한 애들이 심판을 밟아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때 북한의 상대는 중동의 부국 쿠웨이트였다. 


"그 알라(신의 이름이기도 하고, 부산 사투리로는 아이를 의미하기도 한다) 섬기는 중동 아~들이 돈은 많아가꼬 심판들 억수로 맥일 꺼 아이가." 


또 다시 한 번 언급드리자면 우리의 상대는 그 중동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였다. 


공을 들고 오는 심판은 인도네시아 사람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단정히 머리를 깎고서 엄숙히 양 팀 선수들을 불러 주의 사항을 전달하는 품이 매우 익숙하고 절도가 있었다. 마침내 그의 입술에서 휘슬 소리가 울려 퍼지고 경기가 시작됐다. 


한국팀은 몸이 가벼워 보였다. 최순호, 이길용, 정해원, 신연호 등으로 구성된 공격진은 지금 더듬어 봐도 사상 최강에서 한두 푼 빠질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첫 골을 터뜨린 것은 그 화려한 공격진이 아니라 수비수였다. 전종선으로 기억하는 수비수가 센터서클을 넘어 어슬렁거리는데 공이 떼굴떼굴 그 앞으로 굴러들었고, 달려들어오는 탄력으로 날린 슛이 근 4~50미터를 날아가 사우디의 네트에 꽂히는 게 아닌가. 


울트라 롱 슛. 그 대포알의 아름다운 궤적은 지금도 온몸의 땀구멍을 열고 솜털을 곤두세운다. 과거 이스라엘 전에서 센터 서클에서 날려 이스라엘 골키퍼의 혼을 빼놨던 최종덕의 롱슛, 86년 아르헨티나의 골문을 뚫었던 박창선의 롱슛, 91년 남북 단일 청소년팀의 북한 조인철이 미사일처럼 쏘아 아르헨티나를 침몰시켰던 그 롱슛과 더불어, 나는 이름 가물가물한 수비수 전종선의 롱슛을 황홀하게 기억한다. 박종환 감독의 절친 코미디언 고 이주일 씨도 그의 자택에서 경기를 보다가 미친 듯이 환호하고 있었다. 그는 "이 슛은 한국 축구사에 남을 것이다"라고 부르짖었다. 분위기 좋았다. LA는 거저 가는 거처럼 보였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나의 살던 동네는 삼등 삼등 완행열차 타고 동해바다로 떠나가는 분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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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별것 아니었다. 이윽고 또 한 골이 터졌다. 2 대 0. 잘하면 대량득점으로 석유 졸부들의 팀을 고향 앞으로 쫓아 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부터였다. 심판의 휘슬이 개념과 어이를 상실한 채 불러 제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백태클을 해서 한국 선수가 넘어졌는데 사우디 선수를 고의로 덮쳤다고 파울을 주지 않나, 역습 찬스를 잡아 신나게 뛰고 있는데 휘슬을 불어서 우리 문전에서 프리킥하라고 친절히 안내해 주지 않나, 분명히 사우디 선수에 몸 맞고 90도로 꺾이고 터치아웃이 되었는데 드로 인이 사우디 것이 되지 않나. 


그리고 마침내 사우디의 만회골이 터졌다. 전반을 깔끔하게 2대 0으로 끝내고 싶었던 우리의 염원을 짓밟는 골이 우리의 네트를 가른 것이다. 그나마 골키퍼가 잘 막아냈는데 얄밉게도 주워 먹기로 한 골을 뺐어간 것이었다.


축구에서 2 대 0과 2 대 1은 하늘과 지하철 차이다. 1 대 1에서 2 대 1이 되는 것이랑, 2 대 0에서 2 대 1이 된 것 또한 느낌과 분위기가 판이하다. 2 대 0에서 2 대 1이 되는 것은 지금까지 여유 있던 자들의 마음이 바빠짐을 의미하며, 동시에 눌리고 있던 자들의 활개가 펴지는 순간임을 의미한다. 아니나다를까 후반 시작하자마자 휘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맥없이 사우디에게 한 골을 허용했다. 2 대 2. 경기는 원점이었다. 그러나 한 골 먹으면 두 골 넣자는 박종환 감독의 스타일대로 한국팀은 공격의 고삐를 놓치지 않았고, 덕분에 세 번째 골을 얻어냈다. 사우디의 자살골이었다. 또 한 번 거대한 함성이 동네를 뒤덮었다. 


사우디 놈들 이제는 한풀 꺾이겠지 싶었다. 사우디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둔해졌고, 슈퍼리그 득점왕이었던 이길용의 날랜 몸놀림은 연신 사우디의 문전을 헤집고 있었다. 이제 좀 안심하고 보자면서 다리 긴장 풀고 무릎을 펴던 찰나, 지금도 잊기 어렵고, 생각만 해도 주먹이 부르쥐어지는 장면이 펼쳐지고 말았다. 


한국팀의 패스미스를 기회로 역습을 펼치던 사우디 선수가 페널티박스 바깥에서 걸려 넘어져서 페널티 에리어를 굴렀는데 갑자기 인도네시아 주심의 팔이 날카로운 반월도처럼 골대를 향하는 게 아닌가. 아나운서의 찢어지는 비명이 싱가포르의 밤하늘을 울렸고, 수백만이 내지르는 욕지거리가 서울의 별들을 놀라게 했다. 페널티킥이었다. 슬로우 비디오를 백번을 들여다봐도 접촉은 페널티 박스 바깥에 있었지만 페널티킥이었다. 독사 박종환 감독이 눈 부라리며 항의해도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다. 거센 항의를 요리조리 피해 다니던 주심이 그라운드에 공을 갖다 꽂은 이상 정기동 골키퍼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려야 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응답을 얻지 못했다. 3대 3 적어도 그날 하늘을 주관하는 신의 이름은 알라였다. 바로 몇 분 뒤 또 한 골이 한국 문전을 통과한 것이다. 4대 3 사우디 입장에선 꿈같은 역전 골. 우리 입장에선 프레디와 제이슨이 동시에 출연한 악몽의 가위같은 역전 허용. 


그래도 승리의 여신은 한국에 미련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상한 골 감각의 이길용(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명복을...)이 또 한 골을 터뜨리고 185센티의 장신 최순호에게 매미처럼 덥석 안겨 버렸을 때 사람들은 정신 나간 것처럼 환호했다. 아무리 악의 무리가 기승을 부려도 끝내 승리하고야 마는 짱가와 마징가와 로보트 태권브이와 똘이장군과 그렌다이저처럼, 돌진하는 우리 용사 막을 자 그 누구냐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경기의 맥을 돼지갈비 자르듯 턱턱 자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심판이었다. 


심판의 모션은 유독 컸다. 휘슬 소리는 다른 심판의 배는 되었고 프리킥 이후 어느 쪽의 반칙인가를 지정하는 손짓은 엄숙할 지경이었다. 물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칼 같은 심판이었다. 미드필드 싸움에서 사우디에게 반칙 판정을 할 때도 있었다. 사우디 선수가 이건 아니지 않냐고 항변하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근엄하게 눈 내리깔며 사우디 방향으로 팔을 뻗었다. 그렇게 공정을 가장하면서, 검은 옷을 입었으되 사우디 국기를 가슴에 단 듯한 주심은 경기 흐름을 사우디 쪽으로 몰아갔다. 


마침내 사우디의 5번째 골이 터졌다. 5대 4. 결승골이었다. 


야구도 아니고 핸드볼도 아닌 발로 하는 축구에서 90분에 아홉 골이 터졌다. 아시아 축구 연맹이 성립한 이후 최고의 명승부라는 감탄이 나왔고, 사실 한국 사람이라는 입장을 벗어 던진다면 그 경기는 명승부의 반열에 들만 한 경기였다. 그러나 실력으로 해도 충분한 명승부가 될 수 있는 게임에다가 쥐약을 뿌린 것은 다름 아닌 심판이었고 그에게 필시 달러를 먹였을 사우디 관계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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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경기를 보면서 아버지는 화날 때 한 번씩 발산하시는 함경도 사투리로 욕설을 퍼부으시며 '국력'의 미약에 비분강개하셨다. 권투에서도 한국 선수가 애매하게 지면 국력이 약해서 그런다며 분노하셨지만 (이를테면 김태식이 미국 가서 마테블라에게 졌을 때) 축구에서는 그 감정이 유독 심했던 기억이 난다. 이 경기는 그런 경우들 가운데에서도 압권이었다. 


"사우디! 에이 호랑말코같은 새끼들(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라에 힘이 없어서 그래! 나라에 힘이 없어서!"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 부두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서 '(피난 중) 제주도 말을 가장 빨리 알아들어서 칭찬을 들었던' 어린 시절, 하도 질릴 정도로 먹어 이후로는 평생 입에 대지 않으시는 비지로 대변되는 가난, 그 후 생존 투쟁을 거쳐 나오신 아버지에게 스포츠는 결코 스포츠일 뿐인 존재가 아니었다. 


이제 그 시절로부터 32년이 흘렀다. 한국이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함에 따라 다음 경기는 8월 14일 휴가 기간 중 아침 7시, 온두라스와의 일전으로 결정되었다. 축구 중계라면 결코 놓치지 않으시는 아버지는 아마 새벽부터 나를 두드려 깨우실 것이다. 


"야, 야, 축구한다." 


이제는 국력 따위 생각 없이, '경기 그 자체로 즐길' 때가 되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보는 축구는 그렇게 쉽게 '쿨해질' 것 같지 않다. 온두라스에 진다고 '국력' 말씀은 나오지 않겠지만.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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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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