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5. 07. 17. 금요일

카인







이와타 사토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인지를 떠올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닌텐도의 대표이사라 하자 그제서야 5초 만에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애도의 묵념이 떠오른 5초, 고인에게는 죄송한 일이지만 이게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다.


닌텐도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이름의 1위는 아무래도 미야모토 시게루일 수밖에 없다. 게임계의 대부, 마리오와 젤다의 아버지, 일본을 찾는 유명스타들이 만나보고 싶어 하는 인명록 안에 꼭 들어가 있는 사람, 닌텐도를 대표하는 기획자, 과장하면 '게임의 신'이다. 후대 게임기획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 그에 비하면 이와타 사토루 역시 거장이긴 하나 이름값이 밀린다. 이와타 사토루의 전임자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도 그보다는 유명하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게임용 카드 제작 회사이던 닌텐도를 게임기 콘솔의 제왕으로 키워냈고, 게임기=닌텐도의 시대를 만들었다. 야마우치 히로시 이후, 영어권에서 비디오 콘솔 게임을 지칭하는 구어는 'nintendo game'이 되어버렸다. 한 언어의 관용 표현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이 무게감에 비하면 이와타 사토루는 역시나 밀린다.


장르의 선구자와 표현의 점령자에 비해 이름이 밀리는 이와타 사토루가 경영자로서 헤쳐나가야 했던 시기도 업적 쌓기에 불친절했다. 이와타 사토루가 이어받은 닌텐도는 세계를 제패한 제국이 아니었다. N64와 게임큐브의 실패로 인해 제국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있었던 닌텐도였다. 뒤이어서는 스마트폰에 기반한 모바일 혁명이 몰아닥쳤고 그 와중에서 닌텐도가 보여준 것은 거의 없었다. 이 정도 되면 그를 거장이라 부르기엔 애매해 보인다. 미야모토 시게루처럼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킬링 타이틀이 많은 것도 아니고, 야마우치 히로시처럼 시대를 지배한 제왕인 적도 없었다.


그도 자신이 2인자 콩라인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닌텐도의 대표이사로서 회사의 최종 결정을 맡고 있으니 업계가 주목하는 회사의 얼굴은 자신이었고 자신이어야 했다. 때문에 그는 자기를 대표할 수 있는 이미지를 '직접' 만들어나갔다.


d1.png

d3.jpg 

d2.jpg d4.jpg


이와타 사토루의 '직접' 포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처음에는 대중들이 이 동작을 희화화하는 것에 섭섭함이 있었지만, 이내 예능용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깨닫고는 열심히 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이와타 사토루가 직접 포즈를 '직접' 해주는 것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지난 2015년 7월 11일, 이와타 사토루 대표이사는 담관암으로 별세했다.


이와타 사토루는 프로그래머로 게임계에 발을 디뎠다. 도쿄공대를 나온 엘리트지만, 정작 대학에서 배운 것은 없었다. 애초에 프로그래밍 덕후였던 그는 대학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입학 이전에 독학으로 이미 마스터해버렸던 것이다. 명문대를 나온 엘리트답지 않게 그가 입사한 회사는 중소 벤처기업인 HAL 연구소였다. 중소 벤처답게(?) HAL 연구소는 92년에 파산하고, 닌텐도가 이 회사에 경영지원을 결정하면서 이와타는 닌텐도의 중요인물이 된다. 애초에 HAL 연구소에 닌텐도의 자금이 들어가는 조건 중 하나가 이와타가 HAL 연구소의 대표이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이 투자는 이와타에 대한 투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닌텐도가 이와타를 주목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프로그래밍 실력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오락실용 게임이었던 벌룬 파이트(Balloon Fight)를 패미컴으로 컨버전을 하기로 했는데, 이와타가 만든 버전이 닌텐도에서 만든 버전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빨랐던 것이다. 이런 식의 프로그래밍 노하우는 쌓이고 쌓여, 자회사의 사장인 이와타는 본사인 닌텐도로 자주 불려가 주요 프로젝트에 참여하곤 했다. 애초에 프로그래밍 덕후인 그는 사장이면서도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해 프로그래밍을 하는 일이 잦았다.


이렇게 현장을 사랑하는 덕후는 2000년에 본사 사장인 야마우치 히로시의 소환을 받게 된다. 불려간 이와타는 그때부터 후계자 교육을 받는다. 닌텐도가 카드 회사로 창립한 이후, 처음으로 히로시 일가가 아닌 사람이 닌텐도의 최고경영자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야마우치 사장은 HAL 연구소의 대표이사로 이와타를 앉힌 때부터 그에게 경영을 맡길 심산이었던 것 같다. 2년 뒤인 2002년, 경영자이기보다 프로그래머이며 게이머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이와타 사토루는 저물어가는 제국을 물려받는다.


이와타의 대표이사직 취임에는 많은 우려가 쏟아졌다. 닌텐도를 창립하고 경영해왔던 히로시 일가에는, 야마우치 사장의 사위이자 닌텐도 미국 지사를 설립해 성공적으로 시장을 장악했던 미국 지사 사장 아라카와 미노루가 있었다. 기획자 라인에는 '게임의 신'이라고 하는 미야모토 시게루가 기획자로서의 명성 면에서 이와타를 한참 앞서고 있다. 이런 쟁쟁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야마우치 히로시가 고른 후계자는 일단 성공적으로 닌텐도의 재기를 이끌어낸다.


nintendo_ds_lite.jpg  

2005년의 NDS



vg.consoles.01.lg.jpg

2006년의 Wii


닌텐도의 두 번째 전성기를 만들어낸 기기는 NDS와 Wii였고, 이는 이와타의 게임관과 연계된다.



"게임은 알기 쉬워야 한다. 모든 계층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닌텐도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의 목표는 '게임기의 가전제품화'였는데, 이 목표를 향한 경쟁에서 Wii가 앞서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닌텐도의 연령대 점유율을 보면 어떤 의미인지 드러난다. 2, 30대는 닌텐도를 선호하지 않는 반면, 저연령대와 40대 이상의 고연령대는 닌텐도 점유율이 압도적이었다. NDS의 이중 스크린+터치펜 도입과 Wii의 체감형 컨트롤러 덕에 게임이 구현할 수 있는 체험 환경이 크게 넓어진 덕이었다. 게임이라는 장르 특유의 '체험 효과'를 좀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골프 게임을 할 때 Wii의 컨트롤러를 '직접' 클럽 휘두르듯이 쓰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게임의 저변이 넓어졌고, '게임은 깔끔한 두뇌 스포츠'라는 인식이 시장을 넓히는 효과를 가져왔다. 넓어진 시장에서의 승자는 닌텐도였고.


하지만 닌텐도의 제2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이어 찾아온 물결은 스마트폰이라는 모바일 혁명이었다. 닌텐도를 통해 게임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화한 고연령대는 물론이고 저연령대도, 굳이 닌텐도의 기기를 사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동등한 수준의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휴대용 게임기는 스펙이 한참 높아져 가는 스마트폰과 힘겨운 경쟁을 해야 했다. 때문에 게임기 회사들이 선택하는 주전략이 변화했다. 패색이 짙은 휴대용보다는 가정용의 스펙을 높여서 PC와 가격 경쟁을 하는 편이 훨씬 나았던 것이다.


이렇게 변화한 시장 상황에서 닌텐도가 내놓은 후속작 3DS와 WiiU는... 결과만 놓고 보면 처참한 실패였다. 전작들의 아우라와 점유율을 전혀 이어가지 못했다.


satoru_iwata_nintendo_001.jpg


이와타 사토루는 이 고난의 시기를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직접' 마케팅의 얼굴이 되어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는 한편, 수가 줄어든 닌텐도 기기의 게임을 확충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모바일 업체와의 전략 제휴도 체결했다. 이렇게 상황 반전 시도를 이어가던 도중이 현재의 시점이다.


명성 면에서 닌텐도의 콩라인으로 머무르고 있었던 이와타 사토루는 이미 한 번 닌텐도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두 번째 위기는 그가 자초한 것이긴 하지만 빠져나올 수단을 열심히 강구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사망으로 인해 공을 패스 받은 사람은 소프트웨어 개발 쪽에서 신이 된 미야모토 시게루와 하드웨어 개발 쪽의 베테랑인 다케다 겐요의 2인 체제다. 이와타의 최고 조언자였던 두 사람의 임시 체제가 정식 체제가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프로그래머 출신인 이와타 사토루는 자신의 업무 스타일을 이렇게 말한다.



"절대 No라고 말하지 않는다. No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예스맨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불가능한 측면은 긍정하되 요청을 부정하지 않고 대신 대안을 강구한다. 그리하여 이와타의 대응은 이렇게 나온다. "이 게임의 개발이 난항이라고요? 흠, 어디 봅시다. 아하. 이거 뒤엎어야겠는데요. 이대로 진행하면 2년 정도 걸립니다. 하지만 싹 엎어버리고 제가 처음부터 하면 1년 정도 걸립니다. 어느 쪽을 선택할래요?" 실제로 게임 Mother2의 개발 과정에서 나왔던 말이다. 어떤 무리한 요구를 받게 되어도 일단 요구가 가능해지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간다. 이런 사람이 만약 '절대 안 됩니다.'라고 말하면 무게가 있다. 상하 모두가 그 판단을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Mother3의 개발 중단은 이와타의 판단을 야마우치 사장과 미야모토 시게루가 신뢰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후 '이제는 가능하다'고 이와타가 판단하게 되자 Mother3는 개발을 재개했다.


이러한 대안 강구와 최종 결정을 이와타 혼자 해내지는 않는다. 그는 프로그래머답게 팀 단위로 의논해 결정하는 것에 익숙했다. 전임자 야마우치 히로시는 이와타에게 사장직을 넘기면서 주주들과 이사회의 권한을 강하게 만들어두어 사장 독재가 불가능하게 했다. 이와타의 공식직함명은 '대표이사', 즉 이사들 중의 장으로서 CEO를 맡은 것이다. 이와타는 이 체제를 잘 이용하여 주주 및 이사들과의 회의를 통해 결정권을 행사했다. 당연히 이사회 회의 석상의 논의는, 무엇이 불가능한 것이고 그걸 극복하거나 우회하려면 어떤 대안이 있는가가 주제였다. 사과와 책임 인정도 확실하다. 3DS와 Wii의 실패를 주주들이 질타하자, "경영 판단에 문제가 있었습니다."라고 인정해버렸다.


이런 리더십은 무너지지가 쉽지 않다.


'직접' 포즈를 앞세운 자신의 친근함 또한 잘 이용했다. 3DS 이후 다시 침체되는 닌텐도의 새 마케팅 전략 중 하나는 '사장이 묻는다' 영상이었다.


interview02_img01.jpg


자신은 프로그래머 출신이라 기획이나 하드웨어 쪽 업무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알지 못하니, 이번 게임 혹은 이번 하드웨어에 대해서 개발자들에게 물어본다는 컨셉이다. '나는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내 질문에 답하면서 나를 좀 쉽게 이해시켜 주세요.' 그리고 '직접' 포즈로 친근해진 사장이 '직접' 질문을 하고 있으니 일반 대중에게도 쉽게 먹혀들어간다. 구체적인 제품 홍보인 셈인데, 그 형식이 '설득과 대화'다. 이사회와의 논의를 경영 업무의 중요 포인트로 삼는 리더십의 마케팅 버전이다.


이와타 사토루는 명성면에서 콩라인이었을지 모르나 그게 흠결이 되긴 힘들다. 그는 민주사회에서의 바람직한 리더십이 어떤 식으로 구현되고 작동하는지를 '직접' 보여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까지 매진했지만 끝맺지 못한 닌텐도 2차 재기 프로젝트의 향후를 기대해본다. 닌텐도로서는 그게 최고의 추모가 될 것이다.


일개 게이머인 나 또한 그의 경영과 개발을 긍정하면서 그를 보낸다. 그가 뿌려둔 즐거움은 내 삶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으니까. 편히 쉬시라.


iwa.jpg

岩田 (이와타 사토루) 

1959년 12월 6일 ~ 2015년 7월 11일

 

"명함 속의 저는 회사 사장입니다. 제 머리 속의 저는 게임 개발자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 속의 저는 게이머입니다."







카인

트위터 : @Kain_Sulna


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