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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조 규동 전문 체인, 요시노야

 

‘규동(牛丼. 소고기 덮밥) 체인 레스토랑’ 하면 어디가 떠오릅니까? 요시노야(吉野家), 스키야(すき家), 마츠야(松屋)는 한국에도 아는 분이 많을 것 같아요. 나카우(なか卯)나 도쿄 치카라메시(東京チカラめし), 돈테이(どん亭) 등이 떠오르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천차만별,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요.

 

그럼 “규동 전문점”이라는 점을 강조하면 어떨까요. “개인적으로는 스키야가 좋아서 자주 가는 편인데 규동 전문점으로서는 역시…”라는 대답도 있을 겁니다. 맞아요, ‘요시노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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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요시노야도 요즘 대세인 ‘메뉴 다양화 흐름’을 타는 모양새이지만 규동 전문 체인이라는 정체성은 다른 체인점에 비해 잘 지키고 있는 편이 아닌가 하는 평가입니다(필자 및 주변 친구 기준). 그래서 이번에는 규동 체인 오브 규동 체인, 요시노야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2. 니혼바시(日本橋)의 어시장에서 영업하던 “규메시집”이 국내외 2,000개 점포가 넘는 거대 체인으로

 

일본인이 (공식적인) 역사상 처음 소고기를 먹기 시작한 메이지(明治)시대. 사람들은 주로 “규나베(牛鍋)”라고 해서 오늘날의 소고기 전골과 같은 방법으로 소고기를 먹었다고 하는데요, 그런 규나베를 밥에 얹은 게 규동의 시초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규나베 붓카케(牛鍋ぶっかけ)”라고 불렸다던데 요시노야가 당시 니혼바시 어시장(日本橋魚市場)에 창업한 것도 이 무렵. 1899년이었다네요.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어시장이 츠키지(築地)로 옮김에 따라 요시노야도 츠키지로 이전했지요. 1945년 도쿄대공습(東京大空襲)으로 전포가 소실됐다가 전쟁이 끝나자 야타이(屋台 ; 작은 조리대와 카운터석만으로 이뤄진 간이식당. 지붕과 바퀴가 있어 빗속에서도 영업할 수 있고 이동할 수 있음. 말하자면 “이동식 소형 포차”)로 영업을 재개, 1947년에는 다시 점포 영업을 시작했지요.

 

큰 전기는 1958년에 도래합니다. 창업자이자 아버지인 마츠다 에이키치(松田栄吉) 씨의 뒤를 이어받은 마츠다 미즈호(松田瑞穂) 사장이 1958년에 요시노야를 기업형 규동집으로 만들려고 주식회사 요시노야를 설립했습니다. 당시 규동은 우나쥬(鰻重 ; 고급스런 장어덮밥) 못지않게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여겨졌는데도 손님은 끊이지 않았다네요. 어시장을 오가는 도매상들이 비교적 많은 현금을 갖고 다녔기 때문이겠지요.

 

미즈호 사장이 세운 매출목표는 당시 연매출의 무려 6배, 1억 엔이었답니다. 그런데 시장은 일요일이나 공휴일은 문을 안 열지요. 계산해보니 영업일에 1,000명 이상의 손님이 와야 이룰 수 있는 목표였던 겁니다. 하지만 가게에 있는 자리는 15개 뿐. 미즈호 사장은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있는 게 더 낫다 할 정도면 없는 게 좋다”는 방침을 내세우며 규동 외의 모든 메뉴를 그만두는 전략을 취합니다. “규동을 먹으러 오는 손님은 소고기를 먹으러 오는 거다”라고 깨달은(직감한?) 미즈호 사장은 그때까지 들어가던 야키도후(焼き豆腐 ; 불에 쬐어 구운 두부)나 죽순 등을 빼내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에 소고기를 늘리고 규동에 딱 맞는 양파만으로 규동을 만들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가 먹는 스타일의 규동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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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야 1호점(도쿄・츠키지). 창업 당시 규동은 “규나베”를 그대로 밥에 얹은 것이었으나 요시노야를 기업으로 성장시키려는 2대째 사장이 “한 메뉴”와 “소고기 위주”로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심플한 규동 스타일을 확립했답니다.

 

1968년 도쿄・신바시(新橋)에 2호점을 낸 규동 체인 요시노야는 이때부터 급성장하기 시작합니다. 1996년에는 국내 500개 점포, 2001년에는 국내외 합쳐서 1,000개 점포를 달성. 2007년에는 지주회사 체제를 채용함에 따라 요시노야 홀딩스를 설립, 그 산하기업으로 주식회사 요시노야가 들어갔지요. 2018년 8월 현재 국내 1,205개 점포, 중국・미국・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해외 829개 점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시노야도 창업 이래 두 번이나 존망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첫 번째 위기는 1980년 회생신청입니다. 급격히 점포 수를 늘린 바람에 식재료 확보에 지장이 생기자 요시노야는 규동 국물을 분말국물로 변경하고, 소고기를 수입제한이 없었던 냉동 건조 고기로 바꾼 겁니다. 소비자를 속일 수 없었는지 맛이 떨어짐에 따라 매출도 급락했습니다. 도쿄지법은 요시노야의 회생신청을 받아들였고 세존(セゾン)그룹이라는 기업이 자본참가함에 따라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지요. 도산의 위기를 겪은 요시노야가 규동 맛에 “코다와리(こだわり ; 까다롭게 따짐)”를 보이는 것도 그때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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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리 규동에만은 큰 “코다와리”를 보이는 요시노야. 단 한 그릇의 규동에도 많은 코다와리가 숨어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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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도산위기는 소홀한 소고기와 국물이 초래했지만 지금은 최대의 코다와리 항목이 됐네요.

 

또 하나의 위기는 2004년의 규동 판매 정지 사태입니다. 이른바 광우병 문제 때문에 2003년 말 미국산 소고기가 수입 금지되면서 규동에 필요한 소고기를 확보하지 못하게 된 거지요. 규동은 요시노야의 주력메뉴였던 만큼 큰 타격이 됐습니다. 규동 판매가 정지된 후에도 소고기가 확보되는 대로 수시로 “규동 부활 행사”를 개최해서 규동을 팔기는 팔았어요. 당시 점포에 손님들이 긴 줄을 섰고 심지어 일부 점포에서는 점장이 감동하는 바람에 눈물을 흘렸더니 손님들도 같이 울었다는 일화가 있답니다.

 

규동을 팔지 못할 동안 요시노야는 부타동(豚丼 ; 돼지고기덮밥)을 비롯한 다른 메뉴를 팔며 버텼습니다. 아마 미국산 소고기를 재료로 쓸 수 없었던 사태가 “요시노야 하면 오로지 규동”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는 큰 계기가 됐을 겁니다. 현재 공식 홈페이지에서 공개하고 있는 메뉴를 살짝 봐도 요시노야의 메뉴 다양화 노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메뉴 페이지를 열어 보니까 덮밥류만으로도 규동, 부타동(돼지고기덮밥), 토리동(닭고기덮밥), 규갈비동(소갈빗살덮밥)은 기본, 카레덮밥까지 포함하면 덮밥류가 무려 다섯 가지나 됩니다. 게다가 종류마다 먹는 법을 달리하는 소분류가 있어서 매우 다양한 “○○동”을 먹을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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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야 공식 홈페이지의 메뉴 첫째 페이지. 덮밥류만으로도 5가지나 되는 대분류가 있어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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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동만으로 4가지. “サラシア(사라시아)”는 무슨 식물 이름이라던데 혈당치 상승을 완만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네요. 혈당치에 신경 쓰이는 분은 먹어봐도 되겠지요. “コモサラ(코모사라)”는 도저히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알아보니까 “小盛(코모리 ; 小사이즈)”랑 “サラダ(사라다 ; 샐러드)”의 합성어라네요. 균형있는 식생활을 지향하는 분에게 인기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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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타동은 맛의 배리에이션이 많네요. 부타김치동(돼지고기김치덮밥)은 맛이 없을 리가 없고 기간한정인 네기시오부타동(파소금돼지고기덮밥)도 너무 맛이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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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고기나 소갈빗살을 밥 위에 얹으면 또 다른 메뉴로 변신. 의외로 김치가 요시노야에 적극진출한 것도 놀라운 것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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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카레덮밥까지 팔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자주 가는 편은 아니지만, 아직 요시노야에서 카레를 먹는 사람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필자가 가장 놀랐고 요시노야가 단순히 메뉴 다양화를 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바뀌려는 것을 실감했던 게 “お子様・ファミリー(아이·가족)”의 존재입니다. 종류가 그리 많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요시노야 하면 두말할 나위 없이 규동인데, 그 “규동”에는 “(원칙적으로) 일이 끝난 아저씨가 혼자 먹는”이라는 뜻이 담겨있었거든요. 물론 요시노야가 공식적으로 그렇게 선언한 것은 아니고 사실상 그랬단 말이지요. 그래서 옛날 같으면 여성분이 혼자 가는 것조차 꺼려지는 곳이었고 더군다나 가족끼리 (특히 아이를 데리고)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런데 이제 요시노야가 아이를 데리고 오는 가족 손님을 상정한 메뉴를 출시한 겁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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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족”용 메뉴까지 출시되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ベジメニュー(베지메뉴)”입니다. 아마 “베지터블(채소) 메뉴”를 줄여서 지은 이름일 텐데 이 세 가지 메뉴 역시 새로운 요시노야를 실감시키네요. 신기하게도 좀 외로운 느낌이 들지요(아저씨의 고백). “베지메뉴” 밑에 나온 “朝ごはん(아사고항 ; 아침식사)”은 필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간단한 일식 백반이지요. 특히 아침에 시간이 빡빡한 회사원분들에게 인기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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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지메뉴”와 “아침식사”. 베지메뉴는 요시노야다운 분위기 제로. 아침식사 백반은 은근한 인기 상품이라 하네요.

 

아침이 있으면 점심이나 저녁은? 당연한 질문입니다. 왠지 모르겠는데 요시노야엔 점심은 없고 저녁만 있더라고요. 메뉴판에 보면 “晩ごはん(방고항 ; 저녁식사)” 바로 밑에 “定食(테이쇼쿠 ; 백반, 정식)”라는 분류도 있어요. 신기하지 않아요? 백반류가 왜 굳이 저녁식사와 따로 분류되어 있는지 분명하지 않은 겁니다. 궁금해서 다시 홈페이지를 확인했더니 “저녁식사”로 분류된 메뉴는 오후 3시부터 밤 12시까지만 되며 무료로 밥을 곱빼기로 변경할 수 있다잖아요. 종류도 많은 것 같아요. 저녁, 밤에 바쁜 분들에게도 착한 요시노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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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야에는 백반(정식)류도 많은 모양. 웬만한 일식집 못지않은 충실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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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부터 밤까지 주문할 수 있는 “저녁식사” 시리즈는 공깃밥 곱빼기가 무료입니다.

 

요시노야의 메뉴 다양화는 멈출 줄 모릅니다. 위에 덮밥이 5가지라고 말했지만 바로잡아야겠습니다. 맙소사 “鰻重(우나쥬)”가 있었던 겁니다. 쉽게 말하면 “장어덮밥”인데 “우나돈”이 아니고 “우나쥬”인 점이 중요합니다. 우나”동(덮밥)”이 규동이나 부타동 등 다른 덮밥류와 똑같이 도자기 그릇에 담긴 것에 반해 우나”쥬”는 “쥬바코(重箱)”라고 해서 나무로 만든 사각의 도시락 상자 같은 그릇에 담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우나쥬”라는 말을 들으면 무조건 “고급스럽다”고 느껴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여러 설명이 있는데 일단 우나쥬는 사용되는 장어의 부위나 양이 우나동보다 좋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필자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홈페이지가 요시노야 거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얼굴을 가진 모양입니다. 문제는 요시노야의 우나쥬가 “쥬”로 불릴 만한 질을 갖추고 있느냐인데 어차피 먹을 수 없는 필자한테는 아무 의미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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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우나쥬는 가격도 만만찮네요. 네 자리가 넘는 가격을 요시노야에서 볼 줄 몰랐어요.

 

계속 메뉴판을 보니 소바(메밀국수)까지 파는 지경. 이제는 요시노야를 규동 전문점이라 부르기가 꺼려질 정도. 혹시 필자가 요시노야를 규동 전문점으로 너무 미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좀 찜찜해지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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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바까지 파는 요시노야. 과연 지금 요시노야를 규동 전문점이라 불러도 될까?

 

그런데 말입니다. 소바를 팔고 있다는 이유로 ‘요시노야가 규동집을 포기한 거 아니냐’고 생각한 필자를 비웃는 듯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눈을 의심했는데 맞습니다. “吉呑み(요시노미)”. ‘요시노야에서 한잔하자’는 표어입니다. 규동 전문점으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홈페이지에서 술집으로 이용해 달라는 문구라고요?

 

하지만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요시노야에는 맛이 있는 안주가 있고, 마무리로 먹는 식사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게다가 요시노야는 담배를 필 수 없어요. “일본 술집은 술도 맛이 있고 분위기도 좋은데 담배 피우는 색기가 많아 곤란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연기 없는 환경에서 술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술집”인 셈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요시노미"는 요시노야가 가지던 잠재력을 꽃피운 전략이라 할 수 있겠지요. 단 하나 문제가 있다면 술집으로서는 조명이 너무 밝은 점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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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야를 술집으로 변신시키는 “요시노미”. 컨셉이 “チョイ飲み(쵸이노미 ; 살짝 마시기)”인 만큼 본격적으로 술을 마실 수는 없겠지만 만취만 안 하면 판매제한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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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류는 두말할 나위 없고 술 종류도 많지는 않지만 ‘최소한’은 사수한 인상. 쵸이노미에는 충분이겠지요.

 

이제 요시노야를 규동 전문점으로 여겨도 되는지 자신이 없고 자칫하면 규동 외의 메뉴를 시켜버릴까 불안한데 일단은 선입견 없이 가보고 결정하도록 하지요.

 

 

3. 현장탐방

 

이번에 찾아간 집은 요시노야 나리타공항 제2터미널새틀라이트점(成田空港第2ターミナルサテライト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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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서 귀가하는 길에 잠깐 들른 건데,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위화감. 필자는 그다지 자주 요시노야를 이용하는 편이 아니지만, 여기 지점은 필자마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어색한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결제 수단의 다양성입니다. 요시노야는 보통 신용카드를 받아주는 데는 아예 없고 교통카드도 극히 일부 점포에서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겨우 ‘와온(WAON)’이라는 선불식 전자카드를 쓸 수 있는 정도지요(필자가 요시노야에서 결제할 때 와온을 써요). 하지만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 많이 이용하는 나리타공항 제2터미널점에서는 신용카드는 물론이고 온갖 결제 수단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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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야 나리타공항 제2터미널새틀라이트점 입구. 계산대에 보면 각종 결제용 카드를 위한 단말기가 나란히 비치되어 있네요.

 

또 하나의 특징은 자리 배치입니다. 일반적인 요시노야는 점포 안쪽에 오픈 키친(개방형 부엌)이 있고 키친과 연결된 카운터석이 “U”자형으로 되어있는 구조이지요. U자 바깥쪽에 손님이 앉고 종업원이 안쪽을 오가면서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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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요시노야 점포

 

하지만 나리타항공 제2터미널점은 아닙니다. U자형 카운터석이 없어서인지 부엌도 폐쇄형. 아마 캐리어를 끌고 오는 손님이 많아서일 텐데 자리와 자리 사이의 공간이 넉넉히 확보된 인상입니다. 결코 나쁘지는 않은데 요시노야에 왔다는 느낌이 안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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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점포와 전혀 다르게 자리가 넉넉히 배치된 나리타공항 제2터미널점. 안쪽에 “荷物置き場(짐 두는 곳)”이 있는 것도 공항에 있는 지점답지요.

 

그래서 그런지 요시노야에선 역시 규동을 먹어야지 싶었던 생각은 어디 날아가 버리고 백지상태로 메뉴판을 바라보게 된 필자. 의무감이 없어진 바람에 선택한 메뉴는 맙소사, ‘牛カルビ丼(규갈비동 ; 소갈빗살덮밥)’이었습니다(죄송합니다). 게다가 평소 같으면 식사만 시키고 다른 것은 하나도 안 시키는데 긴 여정을 마친 허탈감이 있었는지 豚汁(돈지루 ; 돼지고기 된장국)까지 시켜버렸습니다.

 

점포 분위기는 전혀 요시노야답지 않은데도 역시 요시노야입니다. 손님이 많지 않았던 것도 있어서 식사는 금방 나왔지요. 생각보다 돈지루 그릇이 커서 좋은 인상. 무엇보다 처음에 먹게 된 규갈비동이 맛이 있어 보이는 게 기분을 고양시켜 줍니다. 여행을 마치고 긴장이 풀린 심리상태가 낳은 뜻밖의 선물인 것 같아 앞으로 가끔 멍한 상태서 요시노야를 가봐도 재미있겠단 생각이 든 필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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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하자마자 나온 규갈비동과 돈지루. 돈지루는 된장국이라 할 수도 있는데, 돼지고기의 기름기가 더해져서 약간 짙은 맛이 나요. 다른 된장국과는 확연히 다르지요. 일본 味噌汁(미소시루 ; 된장국)를 잘 먹는 분은 한번 먹어봐도 좋겠습니다.

 

자, 그럼 규갈비동부터 먹어 봅시다. 얼핏 보니까 고기는 일본에서 흔히 말하는 “焼き肉のたれ(야끼니꾸노 타레 ; 고기구이용 양념)”로 맛을 낸 것 같습니다. 고기구이용 양념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보통 간장 맛에다 약간 얼큰한 맛을 더한 게 일반적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것은 일본에서 흔히 먹는 고기구이용 양념으로는 약간 매운 편인 것 같아요. 단 (자칭이긴 하나) 고기가 갈빗살인 만큼 달달한 소고기 기름 맛이 느껴지고 살짝 매운맛의 옷이 갈빗살 맛을 뛰어나게 느껴지게 하네요. 또 좋은 건 양념의 양이 적절하다는 점. 규동을 먹으면 필자에게는 츠유(국물)이 좀 많지 않나 싶은데 규갈비동은 양념이 그릇 바닥까지 안 갈 정도여서 딱 좋습니다. 아무래도 양념 맛이 진해서 그런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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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와 양념의 조합도 괜찮고 양이 적당하므로 전체적인 궁합이 괜찮습니다.

 

다음은 돈지루를 먹어 볼까요. 돈지루는 쉽게 말해서 된장국에다 돼지고기가 들어간 국인데 돼지고기의 기름기가 더해져서 맛의 인상은 된장국이랑 전혀 다릅니다. 돼지고기의 기름기 때문에 맛이 약간 달고 진해진 거지요. 된장국이면 아무거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지루의 베이스가 되는 된장국 건더기는 무와 당근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철의 규칙이 있고 두부가 들어가면 더 좋습니다. 요시노야의 돈지루 역시 이 원칙을 지키고 있고 두부도 들어갔네요. 합격점 줄 수 있는 돈지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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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지루에는 무와 당근이 꼭 들어가야 하고 두부도 들어가면 더 좋습니다.

 

돈지루도 맛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이제 느긋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지요. 다음에는 규갈비동을 다진 파랑 같이 먹어보지요. 양념 맛이 약간 진하게 느껴지는 분은 파의 시원한 맛으로 중화시켜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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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랑 같이 먹어도 시원해서 괜찮습니다.

 

다음은 테이블 위에 비치된 七味(시치미 ; 고춧가루 등 일곱 가지 향신료 가루를 섞은 조미료)를 뿌려 먹어봅니다. 다만 요시노야의 시치미는 “시치(七)”는 일곱 가지 향신료가 아니라 네 가지라네요. 고추, 진피(陳皮 ; 말린 귤의 껍질), 참깨, 파래입니다. 참고로 고춧가루 한 가지만 가리킬 땐 ‘一味(이치미)’라고 합니다. 한 맛이라는 뜻이겠지요. 하여튼, 막상 시치미를 뿌렸는데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고기 맛을 낸 양념이 진하고 약간 짠맛이 있는 데다 향신료가 더해져서 전체적으로 끈덕진 인상. 필자 취향에는 안 맞았던 것 같은데 짙은 맛을 좋아하는 분에게는 괜찮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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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미를 뿌려 맛이 너무 끈덕져진 (자칭) 갈빗살. 짙은 맛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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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미는 테이블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기, 파, 시치미의 궁합을 시도해봅니다. 파가 힘세서 그런지 시치미만 뿌려 먹는 것보다 살짝 시원한 느낌이 들었네요. 시치미를 괜히 뿌렸나 싶기도 했는데 필자가 둔감해서 미묘한 맛의 차이를 못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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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시치미를 같이 먹어봤더니 시치미의 효과를 못 느꼈어요. 둔감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말이지요.

 

여기서 식사가 나온 순간부터 계속 풀지 못하고 있던 2가지 의문에 대해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왜 고추장이 같이 나왔는지, 또 하나는 이 고추장을 어떻게 쓰는 지입니다.

 

일단 주문할 때 필자의 일본어가 살짝 한국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직원분이 어차피 고추장을 달라고 할 필자를 배려해주는 차원에서 미리 고추장을 줬다는 설. 그러나 필자의 일본어는 N1도 합격할 수준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고 특히나 (JLPT 검정 항목에는 없지만) 말하기는 다른 항목(읽기, 듣기, 문법)보다 훨씬 더 자신이 있는 특기 분야입니다.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규갈비동(소갈빗살덮밥)이라는 메뉴의 특성입니다. 이름에 “가루비(カルビ ; “갈비”의 일본어식 발음)”가 들어간 만큼 한국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려고 한국에서 즐겨먹는 조미료를 붙여봤다는 설. 일견 일리가 있지만 이 글로벌시대에 ‘갈비’하면 ‘한국’, ‘한국’하면 ‘고추장’이라는 식의 단순해도 너무나 단순한 사고를 과연 세계의 요시노야가 할 것인가. 정답은 아직 어둠 속인데 정답 확률을 전자 5%, 후자 90%, 기타 5%로 쳐놓도록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의문은 이 고추장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입니다. 규갈비동에 뿌려서 비벼먹는 건지, 아니면 돈지루에 넣는 건지. 규갈비동에 뿌리는 것도 검토해 봤지만 양이 너무 적습니다. 안 쓰는 것도 아까워서 그냥 돈지루에 넣어 봤지요. 뭔가 극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역시 양이 부족해서 기대한 변화는 없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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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은 돈지루에 넣었습니다. 국물 빛깔도 맛도 거의 안 바뀌었지요. 고추장을 준 이유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는 웬만하면 규동을 먹어야 했는데 깜빡 규갈비동을 시켜버렸고 돈지루까지 먹게 됐습니다. 때문에 요시노야에 갔는데도 음식값이 무려 770엔. 평소 같으면 절대 안 하는 짓인데 여행 막판에 약간 긴장감이 풀린 심리상태, 그리고 점포설계가 요시노야답지 않아 규동 외의 메뉴가 눈에 들어와 버렸다는 사정이 맞물려 그랬던 것으로 아무쪼록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반성하면서도 규동 외의 메뉴도 꽤 맛이 있다는 발견을 한 자체는 큰 수확이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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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요시노야를 발견하고 집으로. 카시와까지 JR선을 타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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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역에서 갈아타는 나리타선은 배차 간격이 넓은 완전 시골 노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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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역은 옛날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옛 일본의 풍경을 보는 듯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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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요시노야를 소개한다면 역시 규동을 먹어야지 생각해서 훗날 집 근처 지점에 갔습니다. 덤으로 간단하게 리포트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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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노야 16호(16번 국도)와카시바점(16号若柴店) 외관. 드라이브스루도 있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여기에도 공항에서 먹었던 규갈비동에 무즙을 곁들인 메뉴가 있었어요. 무심코 시켜버렸습니다... 고기 맛을 낸 양념과 무즙의 궁합은 끊어도 끊을 수 없는 로미오와 줄리엣. 초강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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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갈비동+무즙(中)은 590엔. 약간 비싼 편인데 맛은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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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즙과 짙은 맛의 양념이 딱 맞습니다. 나름 맛이 있게 먹었던 파와 고기의 조합 따위는 한순간에 날려 버리는 아름다운 궁합입니다.

 

앗, 규동을 먹어야 됐었잖아… 반성하면서 또또 방문했습니다. 그동안 비교적 비싼 메뉴를 시킨 것도 좀 그랬고요. 이번에야말로 싸게 규동을 먹어야지 싶어 갔더니 맙소사, 규동보다 살짝 더 싼 메뉴를 발견해 버린 겁니다. 바로 부타동(돼지고기덮밥)이지요. 규동보다 더 달달하고 덜 끈적한 소스로 먹습니다. 처음 먹어봤는데 너무 맛이 있었어요. 가격도 350엔으로 규동보다 30엔 더 싸고요. 지갑이 쌀쌀할 때에도 만족스레 먹을 수 있는 메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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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 최고의 부타동(돼지고기덮밥). 350엔에 이 수준이면 충분히 만족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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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소스가 그릇 바닥에 살짝 괼 정도가 좋습니다. 소스를 늘리고 싶을 때엔 “つゆだく(츠유다쿠)”로 시키면 됩니다(무료).

 

또또또 해버렸습니다. 이번엔 꼭 규동을 먹겠단 굳은 결의를 안고 방문. 그러나 또… 얼마 전에 왔을 때엔 보지 못했던 “카라아게동(일식 닭튀김 덮밥)” 행사를 하는 겁니다. 규동 외의 메뉴도 꽤 맛이 있다는 엄숙한 사실을 이미 알게 된 필자는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경험상 카라아게도 무즙과 같이 먹는 게 맛이 있어요. 원래 우유부단한 필자가 마치 “결단의 사나이”가 됐듯이 바로바로 “오로시(무즙) 카라아게동”을 주문. 바삭바삭한 옷과 안에 숨어있는 육즙만으로도 맛이 있는 카라아게에다 기름기를 절묘하게 조절해주는 시원한 무즙의 궁합. 끊어도 끊을 수 없는 춘향과 몽룡이지요. 초초강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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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아게동(일식 닭튀김 덮밥)은 역시 오로시(무즙)와 함께. 초초강추 메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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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즙이 쩌는 카라아게. 질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아서 놀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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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 있던 요시노미 홍보. 요시노야에 혼자 가서 한잔하면 뭔가 떨어질 데까지 떨어져 버린 사람 같을까 봐 무서워서 못 하고 있습니다. 먼저 친구랑 같이 가서 조금씩 해야 될 것 같아요.

 

규동은 언제 먹느냐 항의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실은 아직 못 먹고 있습니다. 핑계 삼아 말씀드리면 규동은 한국에도 먹어본 분이 많이 있을 거고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규동 외의 메뉴를 소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방향으로 넉넉히 용서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