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점령한 GHQ(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일본 국민들의 정치적 반발을 방지하기 위해 섹스와, 스크린, 스포츠로 대변되는 우민화 정책을 펼쳤다.
전두환 정권은 이 모든 걸 이어받아 우리나라 국민들의 우민화 정책에 나선다. 1980년대 전두환 집권과 동시에 시작된 수많은 ‘이벤트’와 ‘규제완화’엔 이런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물론 명과 암은 분명히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산업의 토대는 1980년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게 프로야구다. 전두환은 정권을 잡은 직후 의욕적으로 프로야구 출범을 추진했다. 1인당 GNP 2천불 시대에 프로야구라니...
프로야구 뿐 아니라 축구, 씨름, 농구 등등 국민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수많은 이벤트를 만들어 냈다.
이 당시 한국의 방송 채널은 딱 두 개였다. 이 두 개 채널의 스포츠 중계 비율은 어땠을까. 1981년 19%(?)에 불과했던 스포츠 프로그램이 1982년에는 27%, 1983년에는 28.2%가 된다. 소폭의 증감이 있긴 했지만, 전두환 정권 내내 TV 편성에서 스포츠 중계는 25% 수준을 유지한다.
컬러 TV와 수많은 프로 스포츠의 등장은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박정희 시절 사회 전반에 퍼져있던 엄숙주의는 겉으로만 보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통치의 방식만 달랐을 뿐 목적은 똑같았다.
서울올림픽과 세지마 류조
스포츠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는 전두환 정권의 정책목표를 완성한 건 올림픽이었다.
소설 <불모지대>로 알려진 세지마 류조(瀬島龍三)는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우익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44기를 차석으로 졸업 후 2차대전 내내 대미전쟁 작전을 짰다. 전쟁 말기엔 만주로 넘어갔다가 일본 패전 직후 소련군의 포로가 돼 시베리아에 끌려갔다. 귀국 후 상사에 취직 말단에서 시작해 그룹 회장 자리까지 올라간다. 이후 본격적으로 보수우익(보수우익이라 쓰고 극우라고 읽으면 된다)으로서의 활동을 보인다.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군관학교, 일본군 출신들 장군들이 세지마 류조를 존경했고, 이것은 고스란히 신군부에게 전해졌다. 이들은 세지마 류조를 모티브로 한 소설 <불모시대>를 탐독했고, 일본 내 우익인사들과의 접촉면을 늘려갔다(일본 우익 인사들은 냉전 한 가운데에 한반도 정세가 안정되는 것이 일본에게도 이롭다는 판단 하에서 이들은 한국의 민주화를 외면하고, 군부정권을 지원했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 세지마 류조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박정희가 대통령이던 시절 청와대를 방문하곤 했던 것처럼 정권이 전두환으로 넘어갔을 때에도 세지마 류조는 한국으로 건너왔다. 일본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전두환의 정상회담, 일본의 40억 달러 경제 협력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안들을 성사시켜 집권 초 정통성에 문제가 많았던 전두환 정권을 측면 지원했다.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에게 올림픽 유치를 권유했다(일본도 올림픽 유치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세지마 류조는 올림픽이나 만국박람회 같은 국가 이벤트를 유치하면, 국민적 자존심도 회복하고 정치적으로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유치해 성공해본 경험담을 전해준 거다. 이 당시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올림픽과 만국박람회로 톡톡히 재미를 봤었다.
전두환은 솔깃했다.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증명해줄 뿐더러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고, 정권 안보 차원에서도 이득이었다.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겠다고 계획했던 박정희의 전례도 있었다(물론 10.26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 개최 카드가 수면 위로 올라온 거다. 올림픽은 힘겨워 보였다. 일본 나고야에서 1977년부터 대회를 준비했다. 하다 못해 아시안 게임이라도 유치해보려고 생각을 고쳐먹으려 했지만, 상대해야 할 국가가 북한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밀어붙였고,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모두를 유치할 수 있게 됐다. 올림픽 덕분에 전두환은 재야 민주화 인사들과 야당, 학생들을 압박할 최고의 명분을 얻는다.
“나라에 잔치가 벌어지는데, 그 앞에서 깽판을 칠 것인가?”
국민통합, 국론통일의 명분으로 올림픽만한 게 없었다.
그러나 정권 말기, 올림픽이 거꾸로 전두환에게 칼을 들이민다.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 전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에서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한다면 어떻겠는가?
아무튼 80년대 내내 전두환은 스포츠를 통한 우민화 정책에 열을 올렸다. 그 자신이 박정희가 복싱을 볼 때 옆에서 추임새를 넣어주며 사랑을 받았던 전력이 있지 않은가? 실제로 그는 스포츠를 좋아했고, 스포츠를 통해 사람들을 규합하거나 마음을 얻었다.
그리고 스포츠를 통해 국민을 다스렸다.
덤. 한일 우민화 정책의 결과
한국과 일본 둘 다 3S 정책을 통해 우민화 ‘교육’을 받았지만, 결과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단적인 예가 ‘코미디’다. 한국은 민주화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방송계 전반에 걸쳐 ‘정치’를 소재로 한 코미디가 나왔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정치를 소재로 한 코미디가 나오지 않는다.
정치나 시사관련 뉴스를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은 '정치과잉'이라 불릴 정도로 정치, 시사관련 뉴스가 많다. 공중파나 케이블 채널 뿐 아니라 유튜브, 팟캐스트 같은 뉴미디어에도 정치관련 뉴스가 쏟아진다. 그에 반해 일본은 시청률에 묶여 정규 뉴스 방송의 시간이 줄어들고, 그나마의 정치뉴스는 아침 나절에 하는 ‘뉴스 와이드 쇼’ 형태로 대체되고 있다(종편에서 보는 ‘떼토크’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다).
일본 진보진영 내에서도 일본인들은 ‘저항의식’이 없다며 한탄을 하며, 한국의 ‘촛불혁명’을 부러워만 하고 있다. 한국은 정치과잉이고, 일본은 정치를 외면하고 있다.
어째서 그럴까? 일본 지식인들은 일본의 지난 역사, 그러니까 전국시대와 뒤이은 에도시대의 문화와 함께 ‘1억 총중류(一億總中流. 국민의 90%가 중류층)'라는 묘한 평등의식이 저항에 대한 동력원을 꺼뜨렸다는 말도 한다.
일본 보수는 진보진영의 토대 자체가 무너졌다는 주장을 하는데, 아사히 신문과 이와나미 서점(株式会社岩波書店 : 이와나미 문고로 유명한 서점. 일본 내에서는 고전이나 학술 연구성과를 보급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계열 잡지로 유명한 ‘세계’지가 있다)이 한 축을 이루고 이들과 보조를 맞추는 지식인과 문화인들, 그리고 이 두 축을 매개로 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 호흡하는 구도였으나, 이 모든 토대가 다 사라져버렸다.
당장 시민사회단체의 기반이 허물어진 상황이고, 아사히 신문의 영향력도 많이 줄어든 상황. 결정적으로 일본 시민들에겐 ‘저항의 기억’이 없다. 한국 시민들이 4.19 혁명, 5.18 항쟁, 6.10 항쟁, 재작년의 촛불 혁명까지 시민이 스스로 떨쳐 일어나 정권에 저항한 적이 있는 것에 반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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