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뽀] 우리는 동티모르로 간다. |
1999.10.11.월요일 딴지 인도네시아 특파원 가람 누사 떵가라(Nusa Tenggara) 군도 우측 끝에 자리잡은 작은 섬, 그것도 동쪽 일부 뿐인 동티모르, 인도네시아의 평균적인 인구증가율을 기준한다면 이미 백만은 넘었어야 마땅할 인구가 아직 60만을 겨우 웃돌고, 75년 이후 최소 20만명의 생명이 인도네시아 군부의 탄압과 학살로 스러져 갔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진 그곳에, 이제 우리는 존엄해야 할 인권수호를 위해 총칼을 들고 첫발을 내 딛는다.
이 한국군 활동이 인도네시아의 3만 한국교민들의 생존권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인가, 아니면 정부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잘못된 정보로 인한 교민들의 오해에서 빚어진 한낱 기우에 불과한 것인가. 한국기업들이나 교민들에게 있어 그 불안과 공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9월 21일 아침, 인도네시아의 한국교민들 중에는 정부의 파병강행결정이 알려지자 머리끝까지 화를 내며 한국정부의 강퍅함에 독설을 뿜는 사람들이 있었다. 재 인도네시아 한인회와 수많은 한국인협의회 공동명의의 동티모르 파병반대결의서가 발표된 지 하루만의 일이다. 현지에서 왕성하게 사업을 벌이고 있는 코린도그룹(Korindo Group)의 사옥도 한국인 관리자들의 한탄으로 가득찬 것은 물론이다. 승은호 회장의 코린도그룹은 인도네시아에서도 대기업으로 꼽히는 원목업계의 주역으로, 훨씬 앞서 진출한 깔리만탄(Kalimantan)의 왕 최계월회장이 창업한 코데코그룹을 그 명성이나 규모 면에서 추월한지 이미 오래인 명실공히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한국기업이다. 그 모체인 동화기업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으리라 생각된다. 한국에는 보루네오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인도네시아 군도 최대의 섬인 깔리만탄에 원목사업의 근거지를 둔 코린도그룹은 파푸아뉴기니의 서부를 점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이리얀자야(Irian Jaya)에도 진출하여 현재는 원목사업뿐 아니라 제지, 합판, 제화, 내해운송 분야에 폭넓은 사업을 벌리며 깔리만탄의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난 대부분의 도로들을 닦았고 벌채한 원목을 대체할 광활한 산림조성단지를 이룩하고 있다. 산림과 하안에 분포한 이들 공장주변에는 없던 마을이 생겨날 정도로 대단위의 현지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기업이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인들과 현지관리들을 수없이 접촉하고 협조를 구해야 할 이들로서는 한국정부의 동티모르 파병결정이 치명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다. 현지기업들과 다각적인 사업을 모색하고 또한 진행중인 여러 한국종합상사들에게도 동티모르 파병문제는 역시 뜨거운 감자다. 97년의 경제위기 발발과 98년 5월의 자카르타 폭동 이후 침체의 늪에 빠진 인도네시아에서의 사업이 조금씩 회복기미를 보이는 시점이기에 파병에 따른 후유증에 대한 우려가 눈덩이처럼 더욱 더 불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과 우려의 시각은 지난 9월 20일 인도네시아 교민대표들에 의해 발표된 동티모르 파병 반대결의문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 결의문의 내용에 따르면 교민대표들은 한국군 파병이 필연적으로 한국교민들을 타겟으로 하는 테러와 폭동을 유발시키고 한국기업들은 반한 감정에 기반을 둔 노사분규와 불매운동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언뜻 보기에 피해망상에 가까운 단정을 내리고 있다. 공포는 그렇게 사람들을 왜곡하고 때로는 비겁하고 지극히 자기보호본능에만 충실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포의 실체 그렇다면 그런 공포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만일 98년 5월의 자카르타 폭동이 없었다면 현지교민들은 정부의 동티모르 파병의 후유증을 이토록 우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과 그 후 경과를 간과한다면 교민들의 공포의 배경을 이루는 정서를 이해하기 어렵다. 대부분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체구에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씩 웃기를 좋아하여 좋게 봐서는 순박하고 나쁘게 봐서는 쌈박질하면 맨날 질것 같이 나약한, 그리고 한국사람 특유의 고성으로 윽박지르기 시작하면 찍 소리도 못하고 찌그러지기 일쑤인 아주 녹녹하고 만만한 사람들... 그래서인지 그간에도 한국교민에게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한바탕 위협을 받은 후에도 조금 한숨을 돌릴 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에 대한 경멸적인 시각은 즉시 되돌아 오곤 했다. 가까운 예로 전직장의 공장장은 자가용에 흠집을 냈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인 운전사에게 욕설을 퍼부우며 일방적으로 해고했지만 앙심을 품은 그 운전사가 밤마다 칼을 품고 집 주위를 한달 쯤 배회하며 위협을 가하자 결국 끝까지 주지 않으려던 소정의 퇴직금을 내주고서야 합의에 이른다. 그 후 귀국하기 전까지 6년여간 새로 구한 운전사를 이용했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나름대로 성의를 다하는 그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항상 쥐새끼 같은 놈이라고 부르는 것을 공장장은 잊지 않았다. 5월 폭동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 98년 5월의 자카르타 폭동이다. 트리삭티(Tri Sakti) 대학에서의 벌어진 반정부시위의 과잉진압으로 수명의 대학생들이 목숨을 잃은 후 더욱 격화된 시위는 도시 빈민들이 약탈과 방화의 형태로 가세하면서 수십년간 철권통치를 해 온 수하르토 정권을 몰락시켰을 뿐 아니라 자카르타에 며칠간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그려냈다. 공식적으로도 1,2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고 꼬타(Kota), 그로골(Grogol), 하르모니(Harmoni), 망가두아(Mangga Dua), 글로독(Glodok) 등 도심의 주요 화교상업지역은 붉은 화염과 피어 오르는 검은 연기에 휩싸여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재산과 기회들이 불길 속에 사그러들었다. 당시 취재 카메라들 앞에서 V자를 그리며 중국인 상점들로부터 컴퓨터며 집기들을 들고 유유히 사라지던 그 수많은 약탈자들 가운데 누구 하나 그 후 체포되어 응분의 대가를 치렀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자카르타는 더 이상 우리가 잘 알던 도시가 아니었고 정겹기만 하던 인도네시아인들의 미소에도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껴야 했다. 자카르타 북동부 짜꿍(Cakung) 지역의 유일한 부촌인 따만 모데른(Taman Modern) 주택단지도 폭동 당시 심각한 위협을 당했다. 주택단지 초입의 도로에 몰려 든 수천명의 인근 빈민들은 밤이 어두워지자 트럭을 타고 주택지에 진입하여 입구 가까이 대형주택 몇 곳을 약탈했고 초입의 사하밧(Sahabat) 백화점을 위시하여 경비원들이 모두 달아난 경비소 앞까지 이르는 약 200미터 구간의 모든 상점들을 불태우기에 이른다. 다행히 바람방향이 중간에 바뀌어 불길은 더 이상 주택단지까지 번져 오지는 않았지만 당시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최소한의 재산을 지키겠다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주택단지 중앙공터에 승용차들을 주차시키고 자신들은 뒤쪽 수영장으로 대피해 불길을 피해 보려 했다. 이미 1년 반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사하밧 백화점은 그날 불길에 그을린 모습 그대로 음산하게 서 있고 불탄 상점들은 일부 복구한 곳도 있지만 아직 대부분이 당시 화재로 내려앉은 지붕들을 앙상하게 드러내놓고 있다. 다른 지역의 주택단지들이 그러하듯 그 동안 따만 모데른도 겹겹의 담장과 철문, 바리케이드들이 들어서 이제는 마치 요새와 같은 모습을 띄고 있다. 당시 교민들의 피해는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98년 10월 3일 주 인도네시아 한국 대사관의 홍정표 대사는 현지 영자신문인 자카르타 포스트(Jakarta Post)와의 한국특집 인터뷰에서 한국기업들의 현지투자법인이 380여개라고 공식 발표한 바 있다.(섬유/의류업체 약 120개사, 신발 약 48개사, 완구 30개사,- 삼성, 현대, 대우 등 그룹계열사 51개사, 기타 기계, 전자, 금속화학업체 등) 연락사무소들까지 통틀어 말하자면 공식적으로는 500-600 군데가 되겠지만 현지 자카르타의 한국교민 2만명을 포괄하기에는 턱도 없는 숫자다. 이중 대충 절반은 가족없이 본인만 달랑 나와 있는 공장의 생산기술자, 장기출장자 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기업이 최소한 2,000개는 되어야 마땅하다. 때로는 대사관 발표보다는 더 신빙성있는 현지 교민정보지 자카르타 벼룩시장을 보면 이런 의문이 조금은 해소된다. 합작법인은 차치하고라도 외국인 투자업종은 아니지만 인도네시아인 이름을 빌어 세워진 한국업체들이 부지기수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여행사와 슈퍼마켓, 학원, 컴퓨터상점, 환전소, 도박장, 사우나, 건강원, 가구점, 자동자 정비소에 이르기까지. 호화 식당과 가라오케만 자카르타에 백 군데에 가까운 것은 물론, 자카르타에는 한국인 가라오케 조합까지 있다. 공단지역의 업체들은 거의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폭동이 극심했던 지역의 한국인 상점들은 화교상점들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5월 폭동 그 후 폭동이 잠잠해진 후 자카르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평온을 되찾았지만 이 사건은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뿐 아니라 현지 인도네시아인들에게도 짙은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순박하고 녹녹해 보이는 그들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 그래서 언제 어떻게 폭도로 돌변할지 모르는 불안정성을 지닌, 그리하여 결국 그런 야만적 잠재성의 인간들과 공장에서, 거리에서, 주택지에서 하루하루를 함께 지내야 한다는 서스펜스 사이코 드릴러 급의 공포. 일상생활은 폭동 전과 다를 바가 없어 한국인 식당과 가라오케는 다시 손님들로 넘쳐 나고 경찰들 주머니는 갈취한 돈으로 두둑해지기 시작하고 각종 사회비리들이 원위치를 찾아 돌아왔지만 지방으로부터 흉흉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하고 각종 범죄의 당사자들, 또는 범인으로 오인된 사람들이 군중들 손에 처단되는 정글로(Jungle Law)가 거리를 지배했다. 땅그랑에서는 오토바이를 훔치던 두 명의 용의자가 성난 주민들에게 사냥당해 경찰이 나타나기도 전에 무참히 맞아 죽고 한국인들이 자주 다니던 마하캄(Mahakam)의 한 환전소에는 M16으로 무장한 강도가 들어 경비원이 사살되기도 하고 정체불명의 닌자들이 횡횡하던 수라바야(Surabaya) 인근지역에서는 수개월간 회교지도자들과 흑마술사로 추정되는 주민들이 200명 이상 살해되면서 차량에 끄리스(Keris = 인도네시아 전통 단검)을 지니고 있던 여행자들이 닌자로 몰려 자경단 청년들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 누구 한 명 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이때의 분위기는 지난 99년 1월 31일자 자카르타 포스트지의 1면 톱기사에 공포의 도시, 자카르타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도 읽을 수 있다. 다음은 그 일부를 번역해 본 것이다.
이상은 이미 8개월이나 지난 기사이지만 이것은 여전히 현재 자카르타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한국교민들이 한국정부의 동티모르 전투병력 파병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5월 폭동 당시의 상황들이 이번에는 한국교민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발생할 지도 모른다는 점, 그리고 당시 보안군이나 경찰들이 화교들을 외면한 것과 같이 한국교민들의 피해를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점, 그리고 이번 파병과 그 후유증으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충분한 명분을 주어 그 후 발생할 모든 일들에 대해 인도네시아인들은 추호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형태의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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