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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어느 유학생이 보는 BK21

1999.10.11.월요일
딴지전임 논설우원 Samuel, Seong


이 글은 지난 23호에 [바보 코리아21을 디벼주마]라는 기사가 나간뒤 본우원에게 날아온 멜들중의 하나다. 디비는 것보다 이런 개인의 수기가 훨씬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이 글을 싣는다.





나는 미국, 조지아 공대에서 정보 기술 분야를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이다. 


90년대 초 내가 노량진의 단과 학원 바닥을 기어다니며 "죄수생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때, 지금은 "돈 버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박노해 시인이 쓴 "노동의 새벽"이라는 시집에서 "달러와 엔화에 쌓여 미국으로 일본으로 유학 갔다온 부르조아 개새끼들아"와 비스무리한 어느 한 싯귀를 읽으며 진심으로 공감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당시 유학은 커녕 대학입학의 가능성마저 점차 사그라져가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아마도 박노해 시인은 그 싯귀에서 "달러와 엔화를 뿌리는 부르조아"에 초점을 두고 있었겠지만 나는 "공부 잘 해 유학까지 가는 개새끼"들에 대한 열등감에 몸을 떨었던 것이다.


삼수까지 했던 나도 어떻게 저떻게 하여 대학교란 곳에 들어왔다. C시에 위치한 H대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신문에서 어느 한 개그우먼이 쓴 우스게를 읽은 적이 있었다. 


"내가 아는 어떤 언니가 자기 남편감으로 의사와 군인을 제일 싫어했는데 막상 그 언니의 결혼식에 가보니 군의관이랑 결혼하더라"라는. 나는 고등학교 때 가장 가기 싫었던 대학은 지방대와 후기대였다. 그런데... 삼수까지 하여 들어간 H대는 지방 C시에 위치한 후기대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 H대에서의 6여 년의 시절은 내 발전을 이룬 무척이나 소중한 기간이었다. 내가 H대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를 해 훌륭한 학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H대 입학 당시 거의 문을 닫고 들어온 축에 끼었고 1학년 첫 학기 성적표는 F가 7개 들어있었다(1학년 첫 학기에 3학점 짜리 수업으로만 해서 21학점을 수강했었다). 


당연히 입학 수석이니 졸업 수석이니 하는 명예로운 자리에는 근처에 가본 적 조차 없다.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 한 번 받지 못했고, 복학한 예비역들이 놀면서도 넘긴다는 평점 A를 한 번도 넘기지 못했다. 유학을 준비할 때 내 평점을 보고 누군가는 "그 점수로도 유학을 준비해요?"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일들은 열심히 했었다. 내게는 성적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시험을 볼 때는 열심히 해서 보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크게 집착하지 않으려고 했다. 시험을 보고 나와 서로 답을 비교하는 일도 피했다. 시험을 통해 주어지는 평가란 나라는 인격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내가 몇 줄 적어 낸 답안지에 대한 평가이니만큼 거기에 내 인생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S대니 Y대니 하는 곳에 모의 고사를 보며 내는 모의 원서에서 "당연히" 합격하는 축에 끼던 때도 있었고 그와 반대로 인간 취급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죄수생활을 하며 모의고사를 백지를 내던 때도 있었다. 나는 바뀌지 않았지만 나의 성적이 바뀜에 따라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들쑥날쑥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성적이란 흘러가는 오줌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더군다나 내 친구가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은 더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H대에 입학한 그 해 나는 당시 유행했던 C라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공부하려고 책을 산 적이 있다. 책의 머리말을 읽는데 저자 이름이 낯익었다. 다시 자세히 생각해 보았더니 고등학교 2,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였다. 


그 친구는 K대 전산과를 떨어지고 후기로 A대의 지방 캠퍼스 전산과를 들어갔었다. 우리는 재수를 권했지만 그 친구는 "나는 전산과를 가려고 공부했지 명문대를 가려고 공부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마디로 이를 일축해 버렸다. 그때 우리는 재수를 겁낸다고 비웃었었다. 


그리고 2년 후 나는 그 친구가 들어간 대학보다도 훨씬 못하는 H대에 들어와 그 친구가 집필한 C 프로그래밍 책을 사서 이제 막 컴퓨터를 공부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자신의 미래에 현명한 결정을 내린 그 친구와 우리 나라의 "성적"이라는 괴물에 영혼을 팔아버린 나의 차이가 여기서 난다는 생각이 들자 서러움이 몰려와 눈물을 뚝뚝 흘리던 것이 기억난다. 이런 경험이 있는 나에게 있어 성적은 - 결과의 좋고 나쁨을 떠나 - 내게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을 밖에.


그래서 나는 다른 일들을 열심히 했다. 하루에 열 몇시간씩 "학점이 아닌" 컴퓨터 기술과 "기술이 아닌" 컴퓨터 문화를 공부하기도 했고, 한 달만에 소주 백여병과 맥주 이백여병을 자취방에 쌓을 만큼 술을 마시기도 했었다. 변변치 않은 컴퓨터 학술 동아리를 하나 세운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시절도 있었고, 그런 동아리에서 열에 아홉은 실패한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젝트를 한답시고 어린 후배들 모아 군기 잡고 연설을 하다가 결국 술자리에서 "필름이 끊겨" 후배들 등에 업혀 간 적도 많았다. 


일에 미쳐 밤새 키보드를 두들긴 적이 있는가 하면 "pain을 모르는 폐인은 폐인이 아니다"라는 기억도 안 나는 글을 쓰며 징징댄 적도 있었다. 어째든 분명한 것은 그때그때 내가 선택했던 것에 정신없이 미쳐 지냈다는 것이다.


그랬던 내가 98년 가을에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다. 내가 유학을 처음 생각한 것은 97년 봄이었다. 97년을 하루 남긴 12월 30일 나는 본격적인 유학 준비로 하고 한편으로 미국 생활도 경험하려는 생각에서 뉴욕으로 이민 간 누나의 집을 향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무렵 한국은 IMF가 터졌고 환율은 끝도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유학생은 "벌어오기도 힘든 외화를 외국에 가져가 뿌리는 매국노"였다. 공항에서 "미국엔 왜 가요?"라고 물어보는 안기부 수위처럼 생긴 어떤 덩치 좋은 출입국관리소 직원에게 "유학 준비 차 해서 놀러가요" 했다가 맞을 뻔하기도 했다. 


물론 의도적으로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그 자식은 거기서 듣도 보도 못한 "외국 관광세"라는 것을 출국자들에 받고 있었는데 그게 영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흔히 돈 많은 놈들이 그러하듯 "라스베가스에 놀러 가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 가서 5개월 정도 지내면서 나는 시험도 보고 원서도 냈다. 그러면서 유학비를 벌기 위해 첫째 매형이 운영하는 컴퓨터 모니터 조립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매형은 고장난 컴퓨터 모니터를 대량으로 구입해와 주중에는 수리를 하고 주말에는 컴퓨터 판매쇼(주말마다 각 도시를 돌아다니며 일종의 깜짝 세일을 하는 이동 시장이다)에 고친 모니터를 가지고 나가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영어도 배울 겸해서 나는 한번도 해 본 적 없는 세일즈맨으로 일하게 되었다. 주말마다 보스톤, 알바니, 필라델피아, 시라큐스 등등 뉴욕주와 뉴저지주의 북쪽에 위치한 도시를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안되는 영어로 모니터를 팔았다. 그때 미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지 깨달았다. 보스톤이나 시라큐즈는 매형의 공장에서 자동차로 4-5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인데도 일일 판매권에 속했다. 미국의 교통 환경으로 본다면 서울에서 대구까지 모니터를 팔러 갔다 오는 셈이었다.


한동안 주말 세일즈맨으로만 일하다가 얼마 후에는 금요일에도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가지고 있는 재주라고는 컴퓨터밖에 없어서 금요일에는 쇼에 가지고 나갈 전시용 컴퓨터들을 손보고 세팅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렇게 매주 3일씩 일을 해서 5개월 동안 약 6000달러를 벌었다. 


물론 이런 취업은 당연히 불법으로 이민국직원이나 경찰에게 걸리는 즉시 "10년간 미국 퇴장"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때만큼 경찰 보기를 무서워 한 적도 없는 것 같다.


98년 6월초에 나는 내가 원했던 어느 한 공대에 입학 허가를 받았고 그 이후 귀국해서 3개월을 지내다가 98년 9월에 다시 미국으로 나왔다. 미국을 떠날 때 나는 "10년 동안 한국에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기 2주전쯤에 열흘에 걸쳐 혼자 전국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다. 군산, 제주도, 광주와 지리산, 여수, 부산, 강원도의 강릉과 설악산을 두루두루 걸쳐 지나갔다. 울릉도와 독도에 가려고 속초의 어느 항구에 갔었는데 IMF로 인해 그 유람선이 휴업하게 되어 가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마라도의 수평선과 정동진의 일몰의 그 아름다움과 지리산녘 어느 여관에서 얻어먹은 지리산 산채밥의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태평양을 건너갔다. 그 때 내 손에는 부모님이 주신 등록금과 내가 벌어둔 돈이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하든 내가 돈을 벌어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정신없이 첫 학기를 보내던 10월 어느 날 GRA(Graduate Research Assistant)라고 불리는 연구 조교를 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하나 들어왔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자리가 난 것이다. 월급은 1200달러 정도였고 등록금 지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 중간에 한 번 GRA 자리를 한 번 바꾸기는 했지만 - 계속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97년 여름 학기에 H대를 졸업하고 한 학기 동안 대학원에 있었다. H대 대학원은 그래도 대학원생들에게 주는 혜택이 좋아 되도록 등록금을 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여러 기회를 주었었다. 


수업 조교(미국에서는 이를 TA - Teaching Assistant라고 부른다)와 컴퓨터 관련 교양 과목의 시간 강사 자리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대학원생은 늘어나는 반면 조교와 강사 자리는 한정이 되어 있어서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대학원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 


내가 한 학기 머무는 동안에도 이런 일로 서로 뒤에서 욕하는 것을 자주 보아야했다. 특히 IMF가 터진 이후 취업을 하지 못한 많은 학생들이 대학원으로 몰리면서 이런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연구조교로 일하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 받고 있는데 이 돈은 학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용한 연구실에서 외부 프로젝트를 따와 내게 주는 것이다. 


교수(또는 연구소)는 외부 프로젝트를 따와 연구자금을 벌고, 학생은 교수(연구소) 밑에서 그 프로젝트를 위해 일하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는 물론 그 프로젝트에서 했던 일을 바탕으로 학위 논문을 써서 졸업하고, 교수(연구소)는 비교적 저렴한 인건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 한마디로 매부 좋고 누이 좋은 제도이다.


내가 휴학 기간까지 포함하여 6여 년 넘게 H대에 몸을 담고 있는 동안 대학원생 중에 순수하게 "연구 조교"로서 연구비를 받아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었던 사람은 한 명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이외에 내가 모르는 몇 명이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째든 H대 같은 지방대에서는 이렇게 순수한 외부 프로젝트가 들어오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한국에서 얼마 전에 BK21 계획을 놓고 시끄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BK21 얘기가 나올 때부터 나는 "S대를 위한 잔치"일거라 생각했다. 내가 똑똑해서 앞일을 미리 내다본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구조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BK21이 S대용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BK21의 선정결과는 그러한 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BK21 사업에 있음직한 비리나 불공정한 선정 방법을 고발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진아(?)들에게 돈을 나누어 줘봐야 낭비일 뿐이다. 똑똑하고 가능성 있는 한 명에게 투자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냐?"라고 말해 물의를 일으킨 어느 한 S대생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고, "S대가 이 나라를 망친다"며 S대 폐지론을 주장하는 과격분자들에게 찬성의 한 표를 던지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우려하는 것은 소위 "위로부터의 혁명"이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는 것을 볼 때 이번 BK21 사업도 행여나 큰 투자와 기대에 그 결과가 못 따라주지 않을까란 것이다. 


비록 BK21사업을 결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발톱에 낀 때만큼이나 보잘 것 없는 것이긴 하겠지만, 나의 연구 조교 경험을 볼 때, 대학의 연구 분위기 조성과 그로 인해 이루는 업적은 단지 돈와 두뇌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돈과 훌륭한 두뇌만 있다면 뭐가 안되겠냐?"란 생각은 "소수의 현명한 엘리트가 세상을 지배하면 유토피아가 온다"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소리가 아닌가 한다. 요즘 "벤쳐"라는 단어에 모두들 난리를 치고 있다. 정부가 어느 날 1조쯤 쏟아 남산 어느 한 절벽에 실리콘 벨리와 비슷한 동네를 만든다고 해보자.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국내의 그런 경직된 사회 분위기에서?


미국의 연구 분위기는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에 뿌리를 깊게 심어 풍겨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막말로 "개나 소나" 다 다니는 초등학교 때부터 똑똑한 애 못난 애 구분 없이 한 명 한 명의 창조력을 키우는 교육 분위기에서 나오는 것이며, "실력만 있으면 백그라운드는 말 그대로 백그라운드일 뿐이다"라며 과감하게 투자해 주는 능력 위주의 사회 분위기에서, 자유로운 상상력과 개성을 존중하는 문화에서 나온다고 말하면 너무 "미국 것은 무조건 OK!"하는 사대주의적 발상일까 ?


국내에서 어느 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때 S대와 어느 별 볼일 없는 지방대가 지원한다면 어느 쪽으로 프로젝트가 떨어질 것인지는 지나가는 누렁개도 다 아는 사실이다. BK21 역시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설령 BK21 평가원들이 아침에 뭘 잘못 먹고 정신이 나가 그 지방대에 100억쯤 준다고 해도 이런 학벌에 대한 편입견과 경직된 사고 방식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그런 돈은 국고낭비라는 평가 밖엔 못받는다. 물론 그 대학에 대한 투자가 실패한다면 또다시 "지진아" 소리가 나올 것이다. 다양성과 공평성을 통한 장기적인 발전보다는 "똑똑한 한 놈 밀어주기"식의 당장 보이는 결과만을 기대하는 사회이니까 말이다.


미국에도 MIT나 하버드 같은 명문대는 있다.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GRA를 가지고 이런 혜택이 마치 미국 모든 대학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다 주어지는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없는 것도 잘 안다. 내가 다니는 학교도 소위 "명문"자를 듣는 학교 중의 하나에 끼고 연구비 유치율이 1위를 달리고 있는 만큼 특이한 경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미국의 모든 회사나 정부 연구 단체가 MIT와 하버드, 아니면 내가 다니는 학교에만 투자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보았다. 유명한 학계 저널에 실리는 논문을 보면 정말 다양한 대학에서 다양한 형태의 연구 지원을 받아 연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MIT와 하버드가 가장 명문임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대학들의 가능성과 능력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따라서 여러 곳에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여러 곳에서 비슷한 연구를 하며 서로 때로는 경쟁도 하고 협력도 할 수 있는, 그래서 나오는 업적이 종국적으로 미국이라는 한 공통체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는, 그런 프로세스가 자연스럽게("윗분"으로부터의 인위적인 조작이 아닌) 형성이 된 것이 지금의 미국의 연구 문화가 아닐련지. 


"S대 아니면 안돼", "In 서울도 아니면 그게 대학이냐?" 같은 사고 방식이 너무 자연스럽게 깔려 있고, 지금도 성적 때문에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날리는 중고학생들이 있는 국내 분위기에서 BK21이 퍼붓게 될 수천 억의 돈이 과연 건전하고 공평한 연구 분위기를 창조할 수 있을지 의심이 자꾸 가는 것이 내가 그 사업에 대해 너무 무지해서 나오는 기우임을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 詩愛郞 ( caerang@netscape.net )


딴지일보 논설우원 Samuel, Seong
( outerlimit@ddanzi.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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