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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라는 사람이 있었다. 철종의 부마요 조선 후기 명문가 반남 박씨의 일원이었다. 집안은 그렇게 부유하지는 못하였다지만 사람됨은 총명하고 박규수, 오경석 등의 문인으로서 일찍이 개화에 눈을 떴다.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태극기를 처음 그려 사용했다고도 하며 (통역관 이응준이 먼저 사괘를 그렸고 박영효는 수정해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의 변화와 발전를 열망하던 혈기 넘치는 젊은이였다.

 

개화승 이동인에게 밀항자금으로 금붙이를 쥐어 주기도 하는 등 열렬한 개화파였던 그는 당연히 김옥균, 홍영식 등과 어울리며 개화당을 결성했고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다. 우정국 낙성연에 참석한 수구파 대신들은 처참하게 죽어갔고 박영효는 그 선봉에 있었다. 광주유수로서 신식 군대 양성에 열정을 쏟았던 박영효의 무력은 갑신정변의 물리력의 거의 전부였다.

 

정변 후 박영효는 전후영사 겸 좌포장으로 군사권을 쥐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개화당 정권은 3일도 못가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무너졌다. 박영효는 구사일생으로 일본으로 도망갔으나 그 가족은 몰살당했다. 그 아버지는 감옥에서 짚단을 뜯어먹다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영민한 젊은이였으나 나이 들면서 그 영민함은 사악하게 변했다. 일본을 본받아 개화하려던 생각은 제 나라를 먹어 버린 일본에 기대 호의호식하려는 탐욕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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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조선병합은 조선역사상 신시대의 획을 그은 것이라..... 역대 총독의 노력과 관민의 노력으로써 정치, 경제, 산업, 교통 등 제시설이 착착 발전해 왔으며, 이렇듯 놀라운 치적을 보게 됨은 실로 격세의 감이 있다…… 양 민족이 더욱 상호 이해의 정도를 깊이 하여…… 조선문화가 향상되고 민족의 진로가 중달(重達)케 됨을 바란다.”

 

일제로부터 후작이라는 작위를 받았고 이 따위 글이나 쓰고 있었으매 도대체 저 자가 갑신정변에서 활약한 박영효가 맞느냐 하는 한탄이 장안을 메웠고 박영효는 한때 정적이었던 이완용 등과 함께 열렬한 친일 경쟁, 재산 불리기 경쟁을 벌였던 대표적인 친일파로 역사에 남는다. 조선 총독부 중추원 고문, 일본 귀족원 회원, 식산은행 이사로 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인 공로자 명단’에 응당 첫머리에 들어갔으니 그의 일생을 지켜본 사람들 사이에서 어지간히 헛웃음도 나왔으리라.

 

한때는 총명하고 열의 넘치는 젊은이가 탐욕스러운 민족반역자가 된 모습에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어떤 이는 시를 남겨 그의 추한 노년을 규탄하기도 하였다.

 

아래의 시는 박영효가 죽었던 1939년 장례식장에 격문으로 뿌려진 것으로서 작자는 미상이다. 사진은 박영효와 비슷하게 젊어서는 제법 똘똘하다 싶었으나 늙어서는 영 비루먹은 견공이 돼 가는 한 국회의원의 모습이다. 한때 서울역 10만 학생 시위대의 주역이었다는 자가 아집과 탐욕의 늙은 정객이 된 몰골이다. 박영효 사진이 이상하게 안 올라가 대신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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勢上殺多家譜泥 세상살다가보니

세도 당당할제 사람 숱하게 죽여 집안은 진흙탕.

 

旭緊咨道僭蠻治 욱긴자도참만치

아침 해도 오그라들어 탄식하네. 길은 어긋나 오랑캐 세상 됐다고.

 

膏重隘心宰撤仁 고중애심재철인

살쪄 둔중하고 마음 좁아터진 재상은 어짊 따위는 집어치웠으니

 

賤下諸一慨色起 천하제일개색기

천한 아랫것들 모두 하나되어 성난 기색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