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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와 캐서린 왕비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였지만... 지나친 낭만은, 그 거품이 걷혔을 때 현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두 사람 사이는 점점 소원해지고 있었다. 헨리가 형수와 결혼한 것이 하나님을 노하게 해서 벌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은 결코 언론플레이만은 아니었다.

 

어떤 벌이었는가.

 

캐서린은 삼남 삼녀를 낳았지만 모두 사산되거나 갓난아기 때 죽었다. 유일한 생존자는 훗날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메리 공주 뿐이었다. 헨리는 이것이 진짜 저주일까봐 공포에 떨기까지 했다. 그에겐 중년이 되어서도 아들이 없었다.

 

원래의 왕가인 플랜테저넷의 피를 받은 남자들이 영국에 있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왕가가 남한테 넘어간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캐서린에 대한 애정은 점점 식어갔다. 그러니 헨리가 ‘앤 불린의 까만 눈에 반해서’ 캐서린을 내버렸다는 평은 조금은 불공정하다. 손이 귀한 튜더 왕가의 수장인 그에게는 적장자가 간절히 필요했다.

 

캐서린한테는 좀 안된 이야기지만, 헨리는 육탄공세를 펼치는 이들을 많이 경험해봤다. 그러다보니 자극적인 성생활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반면 우리의 캐서린은 독실한 가톨릭교도에 보수적이고 양순한 사람이었다. 왕비와의 잠자리는 무미건조했다.

 

또한 캐서린은 6살 연상이었다. 헨리 생각엔 나는 아직 젊고 건강하고 세상엔 묘령의 여인들도 많은데, 앞으로도 캐서린을 왕비로 모시고 살 여생이 답답하게 다가왔다. 거기다 캐서린이 이대로 폐경한다면 왕통이 끊길 판이었다.

 

그러나 캐서린과의 결혼은 헨리가 원한 일이었고, 사랑도 그가 먼저 했다. 바람도 그가 피웠다. 앤 불린은 마침 이럴 때 나타난 것이었다. 그래서 헨리가 앤 불린에게 반해서 캐서린을 내버렸다는 평은, 조금은 불공정한 동시에 조금만 불공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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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 캐서린, 우 : 앤 불린

 

헨리의 이혼 결심이 공공연히 드러나자 각자가 자기 사정대로 정세를 해석했다.

 

먼저 교황청. 교황은 종교적 권위는 지존이었지만 세속 군주로서는 줄타기 외교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처지였다. 이때 로마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은 스페인 황제였다. 황제에게 캐서린 여왕은 숙모였다.

 

“감히 잉글랜드 왕 따위가 짐의 집안 어른이자 유럽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을 버리네 마네 한단 말인가? 개념이 빠에야에 말아먹지 않고서야...”

 

교황도 머리란 게 있는 이상 겉으로는 근엄해도 스페인의 군사력 눈치를 봐야 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눈치만 안 뵌다면 못할 장사는 아니었다. 당시 교황청의 수입 중 중요한 부분은 바로 왕의 결혼 문제에 개입해 이혼과 재혼을 승낙해주면서 로비자금 및 뇌물로 얻는 수입이었다.

 

‘헨리가 재혼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있단 말이지. 상당한 목돈인데 이거... 바티칸의 계좌가 성령으로 촉촉해지면 하늘에서 그레고리안 성가가 울려 퍼지고...’

 

불쌍한 캐서린은 왕의 이혼 요구에 억장이 무너졌다. 하지만 성심을 다해 백성을 챙기고 그 와중에도 왕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도만 한다면, 내 목소리가 하늘에 닿을 때까지 진실하게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 자신의 처지를 알아봐주실 테다. 그녀는 자신 뿐 아니라 헨리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백성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우리는 캐서린 여왕님 못 잃는다아아...”

 

캐서린의 마차 행렬은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군중들에 둘러싸여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임금님이 잘 노는 거야 알았지... 그래도 마음만큼은 여왕님에게만 있을 줄 알았건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아, 아니 어떻게 변하옵니까 폐하.”

 

백성들은 언젠가부터 헨리 8세의 마차가 지나가면 여왕님을 버리시면 안 된다고 읍소를 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앤의 마차가 지나가면 욕을 해댔다. 앤은 기껏해야 ‘기사의 딸’이었으므로 멀리서 욕하는 게 죽을죄는 아니었다.

 

메리 불린도 자기만의 사정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 윌리엄 캐리가 병으로 죽고 나서 과부가 되었다. 이때 앤은 메리를 궁궐에 불러 자신을 모시게 했다. 자매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앤은 자신을 향한 헨리의 욕정을 메리의 몸에 풀게 하고 언니를 시녀로 부렸다. 메리는 동생에게 복종하면서도 별 생각 없었다. 외로운데 동생이 불러줘서 좋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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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의 스캔들> 메리 불린役 스칼렛 요한슨, 앤 불린役 나탈리 포트만

 

메리와 앤의 부모는 둘째 딸 여왕 만들기 모드에 돌입했다. 그러면서 소문이 퍼졌다. 영국판 증권가 찌라시였다.

 

“앤 불린인가 머시긴가, 우리 여왕님을 내쫓으려고 하는 걔. 글쎄, 언니도 임금님하고 잠자리한 것도 모자라 엄마까지 궁궐에 드나들면서 폐하께 몸을 바친다면서?”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소문은 퍼졌고, 기정사실화 되었다. 무서운 건, 토머스 불린, 이 인간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두 딸은 물론 아내까지도 기꺼이 왕에게 제공할 위인이었다는 사실. 아내 엘리자베스도 그런 남편을 사랑했다. 그래서인지 소문이 도는 중에도 두 사람의 금슬은 좋았다. 어떤 면에서 완벽한 한 쌍이었다.

 

영국의 넘버2 울지 추기경에게 폭탄이 떨어졌다. 그의 권력은 오직 왕이 자신을 신임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무소불위로 빛났다. 그래서 그는 그 누구보다 왕의 욕망을 대변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자신을 원수로 여기는 앤의 욕망, 왕비 자리를 꿰차겠다는 야심도 동시에 대변해야 했다. 울지는 교황의 허락을 얻어내야 하는 애매한 위치에 빠지고 말았다. 즉 앤에게 자신에게 앙갚음할 힘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처지였다.

 

헨리는 울지를 교황과 교섭하는 자신의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이 말인즉슨 말만 하라는 게 아니라 로비도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울지야 바티칸에 가서 쌔끈하게 뇌물로 기름칠을 하고 이혼 허락만 받아오면 되지만...

 

그러고 나면 교황청은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있는 스페인 황제에게 무슨 꼴을 당할 것인가? 하지만 찬송가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영국에서 건너온 금화가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결국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로마 직속 추기경 캄페지오를 교황의 특사로 임명해 영국에 보내기로 했다. 이제 울지와 캄페지오가 잘 대화... 아니 흥정해서 가격을 맞추면 될 일이었다. 애초에 울지의 직분 자체가 교황의 특사였다. 한 사람의 특사와 특사가 협상을 한다? 원칙을 따지자면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중요한 건 거래였다.

 

캄페지오 추기경이 영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아무도 캐서린이 비장의 반격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에게 영국의 여왕이 된다는 것은 어떤 과정이었던가? 고통과 인내의 과정이 아니었던가? 유럽 최고라는 자신의 혈통보다, 친정보다 영국의 여왕이라는 직분에 더욱 자부심을 느꼈던 그녀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캐서린 왕비는 ‘로마 청원’을 했다. 로마 청원이란 교황이 직접 주재하는 교황청의 종교법정에 직접 판결을 묻는 것이었다. 유럽 최고 혈통인 캐서린은 당연히 교황에게 직접 정의를 호소할 수 있었다.

 

로마 현지에서는 스페인 군사력의 눈치가 보여 도무지 캐서린의 편을 들지 않을 수가 없다. 헨리 8세와 울지 추기경의 계획은 파토가 났다. 백성들은 환호했다.

 

“캐서린 왕비님 사이다”

 

영국 왕을 적으로 돌릴 것이냐, 스페인 황제를 적으로 돌릴 것이냐...? 진퇴양난에 빠진 클레멘스 7세는 재판을 무기한 연기하면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

 

‘존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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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of the Trial of Queen Katherine

캐서린의 재판

 

한때 교황을 협박하며 차기 교황을 노렸던 울지 추기경. 이제 그는 교황이고 뭐고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교황님께 싹싹 비는 처지가 됐다.

 

“교황님 제발 혼인무효 인가를 좀 내주십시오...”

 

“나 아퍼. 담달에 야그하자.”

 

“우리 폐하가 언제 이혼 허가를 받아올 거냐고 저를 닦달하는데 아주 죽겠심더 기냥!”

 

“어허 정정한 사람이 왜 죽는다는 소리를 하나. 나 같은 환자도 살아있는데. 콜록콜록콜록.”

 

“교황님 다음 재판은 꼭 열리는 거지요? 네?”

 

“아 글쎄 재판장을 내부공사해야 한다네.”

 

“아 씨 교황님!”

 

“아이고 깜짝이야. 낫던 병이 놀라서 도졌네그려. 한두어 달 더 누워있어야 할 거 같어~”

 

헨리는 무려 추기경씩이나 되면서 주군을 위해 교황의 시원한 판결을 받아오지 못하는 울지를 짜증과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울지는 불안했다. 그러고 보니, 앤 불린 저 여자 나를 파멸시키겠노라 맹세했었지...

 

파멸의 그림자가 울지의 주변을 서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