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0.

 

1942년 미 국무부 공식기록에 베트남에서 넘어온 ‘민족주의자’의 이름 하나가 적힌다. 본명은 구엔 타트 탄(Nguyen Tat Thanh). 일반인에게는 ‘호치민’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호치민.jpg

 

미국은 일본과 태평양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일본의 적은 곧 미국의 친구였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말하며 베트남을 점령했고, 호치민은 중국으로 건너가 베트남 독립동맹(Viet Nam Doc Lap Dong Minh Hoi), 베트민(Viet Minh')을 결성한다.

 

당시까지 미국은 호치민을,

 

“괜찮은 민족주의자”

 

정도로 바라봤다. 그러나 중국의 실력자였던 장개석의 생각은 달랐다.

 

“저놈은 빨갱이다!”

 

장개석은 호치민을 체포했다. 이때 미국은 가동할 수 있는 중국 내 모든 외교채널을 총 동원해서 호치민을 구해줬다. 그 다음 호치민을 CIA의 전신인 OSS(전략사무국 :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서 일하게 한다.

 

정보와 통역을 맡은 호치민은 미국에게 끊임없이 베트남 게릴라들에 대한 지원과 훈련을 부탁하였고, 미국 특수부대원들은 10년 뒤 자신들과 싸울 이들을 열심히 잘 가르쳤다. 이 중에는 베트남 독립전쟁의 선봉장이자, 비엔 디엠 프와 케산 전투에서 프랑스와 미국을 궁지로 몰아 붙였던, 베트남 최고의 전략가이자 국민군 사령관인 보구 엔 지압 장군도 있었다.

 

일본 패망 한달 전인 1945년 7월엔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호치민에게 OSS가 설파제와 키니네를 주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호치민이 5년 후 엄청난 골칫덩어리로 변할지 몰랐다. 당시 호치민은 민족주의자였고 공통의 적인 ‘일본’과 함께 싸우는 동지였다.

 

 

1.

 

OSS(전략사무국 :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들어진 첩보기관이다(전시 첩보기관).

 

윌도.jpg

윌리엄 J. 도노반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전시 첩보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정보조정관(COI : Coordinator of Information) 수장으로 윌리엄 J. 도노반을 임명한다(당시는 대령이었다. 1차 대전 참전 후 예편한 도노반은 민간 복귀 후 검사 생활을 하다 2차 대전 발발 후 정보관련 일을 위해 군에 복귀했다. 이후 소장까지 진급한다). 이때까지 미국의 해외정보는 미 육군, 미 해군, FBI, 국무부 등이 각자 수집, 관리, 보고했는데, 이걸 도노반이 관리하게 된 것이다.

 

1942년, 정보조정관 사무실은 미국 합참의장 산하의 전략사무국(OSS)으로 이름을 바꾼다.

 

oss2.jpg

 

OSS에 관해서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하는 것보다는, 이 한마디로 정리하면 될 거 같다.

 

“CIA의 전신(前身)”

 

 

2.

 

 

광복군 국내 진공작전에 대한 ‘썰’이 많다.

 

“일본이 한달만 늦게 항복했어도, 한국은 승전국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일본이 한달만 늦게 항복했어도, 광복군이 서울 하늘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을 텐데...”

 

“광복군이 국내 진공을 위해 훈련받고 있었는데, 하늘이 우릴 돕지 않았다.”

 

일단 국내진공작전에 대한 정보가 일반에 ‘덜’ 알려진 부분이 많다는 걸 전제로 말해야겠다(이건 후술하겠다). 개인적으로 광복군이나 기타 ‘한인들’로 이루어진 국내 진공작전에 대한 생각은,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큰 ‘활약’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다. 비관적인 평가라 할 수 있다.

 

 

광복군 창설.jpg

 

우선 '국내 진공작전'이란 표현 자체가 잘못됐다. 국내 '진공'이 아니라 ‘침투'가 맞다고 본다. 진공(進攻)이라는 건 말 그대로 한반도로 떨어져 진격을 한다는 것인데, 기록을 확인해 보면 ‘진공’이란 말을 쓸 정도의 작전은 아니었다. 잘해봐야 ‘위력정찰’이지, 냉정하게는 정찰작전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리고 이런 작전들이 뒤섞여 ‘공수작전’으로 포장(혹은 오인), 서울에 낙하산 부대를 떨어뜨리는 공수작전까지 이어지게 됐다는 거다.

 

(‘김구 선생님이 안타까워했던 게 그때 서울 하늘에 공수작전을 펼쳤다면, 한국은 승전국 지위를 얻었을 텐데’ 같은 정체불명의 발언은 실제 역사와는 동떨어져 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을 가지고 사실인 양 말한다면 오히려 그분들을 욕되게 하는 거라 생각한다. 광복군이나 독립지사들의 노력과 헌신에 대해선 제대로 기록하고 알려야 할 부분이 이것 말고도 너무 많은데 말이다! 이번 기획의 목적은 당시 이루어졌던 작전에 대해 잘 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고 알기 쉽게 푸는 것이란 점을 강조한다)

 

추측이지만, 서울 공수작전은 OSS가 준비했던 '냅코프로젝트(Napko Project)',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 이 모든 걸 아우르는 '올리비아 계획(Scheme Olivia : 중국을 우회한 한반도 침투계획)'이 섞여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다.

 

이 작전들의 실체는 이번 기획에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3.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전인 1941년 9월, 미국의 COI가 하나의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일본이랑은 한판 붙을 거 같은데 정보를 얻어야 하지 않을까? 설사 전쟁이 나지 않더라도 나쁠 건 없지.”

 

“어떻게 얻을까? 일본인들을 포섭할까? 아니면, 일본계 미국인?”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은 어때? 생긴 것도 비슷하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일본말도 잘해. 결정적으로 잘 되면 조선땅에서 소요사태 일으키고, 완전 개꿀이잖아?”

 

1941년 9월부터 COI는 중국을 통한 대일정보 수집계획을 추진했는데,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20150608001610_0.jpg

 

“조지워싱턴 대학교 철학 학사,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 국제법 박사? 이 정도면 미국 사람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완전 미국 사람이잖아? 조선 내 영향력은 어때?”

 

나름 임시정부에서 먹어주나 봐. 미국의 한인들한테 끗발 날려.”

 

접촉해볼까?”

 

COI의 2인자였던 굿펠로우는 이승만에게 호의적이었다. COI는 게일(Esson McDowell Gale)을 책임자로 지정하고, 이승만과 접촉하게 했다. 당시 게일은 이승만을 ‘작은 손문’ 정도로 생각했다. (이승만에 대한 정치적, 인간적 판단에 대해서는 개인적 의견을 배제하고 ‘미국 측’ 자료를 근거로 서술하겠다)

 

“이승만은 중화민국의 손문 박사와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다.”

 

COI와 이승만은 1941년 9월부터 그해 12월까지 계속 접촉했고, 대규모 회의도 했다.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이승만은 이걸로 자신의 정치적 자산인 ‘미국’을 얻었다고 본다. 이승만은 COI에 상당히 좋은 이미지를 남겼고, 미국의 정보 수장과 그 오른팔로부터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는다. 게일은 이승만의 영향력을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한국인 애국자들을 집결시킬 수 있는 존경받는 인물”

 

이승만이 자리를 잡는 순간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로지 미국 입장에서의 이승만을 서술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라)

 

우호적인 분위기가 흐르던 와중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이 일어났다.

 

진주.jpg

 

COI의 한인들을 활용한 작전계획에 일대 전환점이 일어난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