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1987년 6월항쟁이 끝난 뒤 전국적으로 그야말로 폭풍 같은 ‘789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태풍의 일말은 부산 부두에도 어김없이 밀어닥쳤습니다. 어떤 해운 회사의 선원들이 노조를 결성했는데 그 동안 쌓인 한이 깊었던지 투쟁 와중에 사무실을 박살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을 돌아보고 오신 동네 아저씨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얼마나 박살을 냈는지, 우리 회사 전라도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 광주에서 전두환이 왜 싹쓸이했는지 알겠다고. 이렇게 지독하게 난리를 치니 그런 거 아니겠냐고.”

 

6월항쟁의 뒤끝이고 고3으로 희미하게나마 알 건 알 나이였던 저는 그 ‘전라도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해할 수 없었지요. 아무리 사무실이 박살이 났다지만 어떻게 거기서 광주를 대입할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점차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김영삼의 대권 가도를 방해하는 김대중에 대한 적대감이 격화되면서 저는 그 이유를 대충이나마 짐작하게 됐습니다. 입술 가벼워 말 깨나 한다는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말을 수없이 들은 겁니다.

 

“당할 만하니 당했지. 만다꼬(뭐한다고) 총을 들고 지랄이고.”

“하도 난리를 치니 밟아뿐 기라.”

“총 들고 덤비면 우짜겠노. 확 마 우찌 해 뿌야지.”

 

그나마 1987년 이전에는 더더욱 그런 말들이 공공연하게 눈먼 화살이 돼서 쏟아졌을 것이고, 위에 등장하는 이름 모를 전라도 사람은 화살을 맞다맞다 못해 어이없는 방패를 치켜들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도무지 광주를 이해하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가동해야 했던 자기파괴적인 방어막이 아니었을까요. 

 

90년대의 걸작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정치는 지지리도 못하지만 연기는 꽤 잘하는 김을동씨가 광주 희생자의 어머니 역으로 등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김을동.jpg

 

“타지 사람이니까 살아 있어야지. 살아서 넘들한테 우리 이야기해 줘야지. 우리 말을 안믿을지 모르니께 반장님같은 타지 사람이 우리 얘길 해 줘야 써.” 

 

상당수의 타지 사람들은 정말로 오랫 동안, 그리고 끈질기게 광주 이야기를 믿지 못했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간첩들이 그랬겠지, 난동을 부리니 진압을 했겠지 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애써 외면했고, 권력욕에 눈 먼 학살자와 대한민국 국민의 대결이 아니라 ‘광주’에서 일어난 일로 그 의미를 가뒀고 광주 사람들이나 아파할 뿐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로 짐짓 선을 그었습니다. 

 

그 와중의 공포를 짐작하기란 저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말은 안믿을지 모르니까 타지 사람이 우리 얘길 해 줘야 한다.”는 그 절박한 호소의 깊이를 헤아리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광주는 제게, 우리들에게, 수많은 타지 사람들에게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입으로 저들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부르짖은 것 같았고, 그 아래에서 나는 그를 모릅니다 부인했고 십자가에 매달린 이가 우리 죄를 대속하였으나 그를 깡그리 모르거나 모른 체하며 살았던 십자가였습니다.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 (<광주여 무등산이여>, 김준태)이었습니다.

 

완벽하게 고립됐던 광주의 1980년 5월. 봄햇살이 창살처럼 온 나라에 드리우던 암울함 속에서도 목숨을 던져 광주를 얘기한 ‘타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북 영주 출신의 한 대학생은 1980년 5월 참혹한 광주 현지를 방문 중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대한민국 국민을 짐승처럼 때려잡는 현장을 목격한 그는 함께 있던 사람에게서 <모래시계>에서 김을동씨가 한 대사를 거의 그대로 듣습니다. “계엄군과 싸우는 것보다 광주 소식을 외부에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 

 

김의기.jpg

김의기2.jpg

 

그는 광주를 탈출하여 서울로 올라왔고 도청이 함락되고 항쟁의 불길이 꺼진 3일 뒤, 5월 30일. 종로 5가에 있던 기독교 회관에서 유인물을 뿌리며 광주의 진실을 외치다가 유인물과 함께 땅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서강대학교 76학번 김의기. 그가 직접 쓴 ‘동포에게 드리는 글’에는 이 질문이 대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의기는 영주 출신이었지만 그 순간 광주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선동하려다가도 결국은 분통이 터져 “지금 뭣들을 하고 자빠졌는가.” 라고 악을 쓸 수 밖에 없는 광주 사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9일 뒤 신촌에서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자기 몸에 불을 당기며 광주의 진실을 외칩니다. 제대 얼마 안남은 방위병 김종태였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 광주에 대한 강연을 들었을 때 그는 “말도 안되는 선동하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던 평범한 청년이었지요. 못믿겠으면 직접 다녀오라는 말에 이 방위병은 말년 휴가를 광주행에 썼고 그곳에서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머리에 이고 올라오게 됩니다. 

 

maxresdefault (1).jpg

maxresdefault (2).jpg

 

그는 유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사질러 (불싸질러) 광주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 드리고 싶습니다.....도저히 이 의분을 진정할 힘이 없어 몸을 던집니다.” 안에서 터져나오는 분노로 스스로를 불태워버린 김종태는 부산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광주 사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0년이 흘렀습니다. 턱도 없는 인민군 광주 침투설에 욕지기가 치솟다가 “5.18 망언에 분노하는 ‘광주’” 기사에 덜커덕 다리가 걸립니다. 틀린 제목이 아니고 당연한 보도일 수도 있지만 5.18 망언에 분노하는 건 광주만이 아니라고 욕설 섞인 일갈을 하고 싶어지는 거지요. 광주 사람들을 두고 ‘괴물’이니 뭐니 하는 국회의원을 볼 때 정말로 그 입을 찢고 싶었습니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로 “확 쎗바닥 갖다가 뿌리까지 뽑아삘라.” 욕을 퍼부어 주면서 말이죠. 당신들이 모독하는 광주 때문에 분노하는 건 광주만이 아니라 ‘타지’도 포함돼 있으며, 광주 사람들 뿐 아니라 타지 사람들도 당신들을 때려죽일 듯 증오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김의기와 김종태 두 경상도 청년, ‘타지’ 사람이지만 동시에 광주 사람이었던 둘을 떠올립니다. 주말마다 분주한 집안 일정이 있어 어찌 될지는 모르게습니다만, 가능하면 이번 토요일 시위에 가보고 싶습니다. 간만에 경상도 사투리 끄집어내서 자한당 호로잡놈의 자슥들한테 걸판진 욕도 퍼부어 주고 결코 광주는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새살 아래에서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딱지져 있는 기억임을 얘기해 주고 싶습니다. 

 

아울러 타지 사람으로서 광주에 지지를, 그리고 광주를 모독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보냅니다. 아울러 '타지' 분들의 동참도 기대합니다. 아래처럼. 

 

서울 태생 부산 출신, 롯데 자이언츠 팬. 김형민.

 

518.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