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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다시 읽는 한국 인물 열전(20) - 궁예·왕건 3탄

2003.10.26.일요일
딴지 역사부


 



 왕창근거울사건의 전말


민심(民心)+신심(臣心)+군심(軍心)을 얻었다는 왕건, 이젠 천심(天心)마저도 그에게 기울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꾸며낸 게 왕창근거울사건이다.『삼국사기』에 나오는 사건의 진상은 요렇다.


상객(商客) 왕창근(이름 한번 다이나믹하다!)이란 분이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시전(市廛)에 머무른다. 어느날 덩치가 크고 터럭이 허연 사람이【狀貌魁偉 髮盡白】옛 의관을 입고 왼손엔 사발(『고려사』에는 도마 3개)을, 오른손엔 거울(『고려사』에선 크기가 사방 1척)을 들고 나타나서 왕창근에게 거울을 사겠냐고 묻는다. 안산다고 했다간 그 떡대가 사발로 내려칠 수도 거울로 후려깔 수도 있는 상황이다. 왕창근은 쌀(『고려사』에는 쌀 2말)을 주고 그 거울을 산다. 쌀을 받아든 떡대는 그걸 거리의 거지아이들【街巷乞兒】에게 나눠주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왕창근이 그 거울을 벽(『고려사』에는 길가의 벽)에 걸어뒀는데, 햇빛이 비치니 거기에 가는 글자가 나타난다. 내용인 즉 이거다(『고려사』의 내용은 쫌 다르다만, 큰 차이는 없다).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때린다
사년(
巳年中)에는 두 용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몸을 청목중(
靑木中)에 감추고
하나는 모습을 흑금동(
黑金東)에 나타내도다


왕창근은 예사 거울이 아니라 생각해서 궁예에게 알린다. 그랬더니 궁예는 부하들을 시켜 왕창근과 함께 그 떡대를 찾게 한다. 그치만 그 분은 오간데 없고 발삽사(勃颯寺)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이 그 떡대와 똑같이 생겼더란다【如其人焉】(『고려사』에선, 발삽사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불상 앞의 전성고상<塡星古像>이 똑같이 생겼는데, 좌우에 도마와 거울을 들고 있었댄다). 발삽사(이름도 잼나네)가 어떤 절인진 잘 모른다. 어떤 분은 이 절이 태봉의 중심사찰이라고도 하는데 잘 몰겠다.
 


 이 얘기를 믿어? 말어?


왕창근거울사건이 진짜라곤 믿기 어렵다. 틀림없이 꾸며냈을 거다. 그치만 꾸며냈다 해도 언제 그랬냐가 문제다. 쿠데타 전일까 후일까. 또 대체 어디까지 꾸며댄 걸까.


① 왕건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꾸며낸 썰이다. ⇒ 그럴 수 있다. 도선이 개성의 풍수를 보고 왕건의 후삼국통일을 예언했네 어쩌네 했다는 게 정권 잡은 후 꾸며댄 뻥인 것처럼 말이다. 그치만 글타면 여기서 더 쓸 말 없어지니 뭘로 지면을 때우냐.


②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왕창근이 왕건과 짜고 벌인 생쑈다. ⇒ 뭐 이쪽으로 생각해 보자. 그래야 뭔 말이든 써댈 거 아닌가. 일단 이쪽으로 간주하고 뜯어보자.
 


 왕창근의 이해되지 않은 행동


우선 왕건은 왜 왕창근을 골라 이 생쑈를 벌였을까.


① 왕창근은 국적이 당나라다. 따라서 생쑈를 벌이다 잡혀도 걍 죽지는 않았을 거다. 죽였다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근데... 태봉은 중국과 별 교류가 없었던 듯 하다. 사이가 좋았는지 나빴는지도 모른다). 대국(大國) 국민 좋은 게 그런 점 아닌가. 요새 미국 국민처럼 말이다.


② 왕창근은 직업이 상인이다. 왕건 집안도 일찍이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과정에서 알게된 왕서방 하나 구워 삶은 거 아닐까. 서로 같은 왕씨끼리 팀을 맹글어서 말이다.


헌데 거울을 산 뒤 왕창근이 보인 행동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고려사』에 따르면 거울을 시장의 벽에 걸어놓았단다【懸其鏡於市壁】. 쌀 2말을 주고 산 사방 1척짜리【方一尺許】거울을? 뭔가 수상쩍지 않나? 그걸 거기에 걸어놓은 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겠다는 뜻이다. 글고나서 지가 먼저 바람을 잡았겠지. "어라~ 여기 뭔 글자가 씌여져 있네" 하고 말이다. 글타고 그걸 왜 궁예한테 갖다 뵈주냐. 궁예한테 잘보이려구? 궁예 승질 더럽단 소문 못들었을까. 선뜻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다.
 


 생쑈의 진상을 디벼보자


그럼 텍스트를 바탕으로 이 생쑈의 진상을 디벼보자. 먼저 그 떡대는 뉘신가.


① 아예 가공의 인물일 수 있다. 그 분이 없어도 왕창근이 썰 푸는 덴 아무런 지장 없다. 발삽사 불당의 진성소상을 보고, "아∼ 바로 저 사람이여여!" 하고 쌩까면 땡이다.


② 부러 변장한 인물일 수 있다. 그 분이 발삽사 불당의 진성소상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근데 일케 공들여 치장했는데 누군가 보고서 알리바이를 맹글어 줘야 보람이 있다. 누가 그걸 맹글어줘? 뻔하쥐. 거지아이들이다. 생쑈의 리얼리티를 살리려면 일케 보는 게 낫다.


근데 말이다. 왕창근이 쌀 2말을 짊어지고 시장에 나오진 않았을 거다. 당나라 상인이 철원에서 쌀상수 한다면 좀 어색하쟎은가. 그럼 숙소에서 쌀을 주고 거울을 샀단 거다. 숙소에 쌀이 있었구나. 텍스트를 보면 왕창근은 시전에서 우거했단다【寓鐵圓市廛】. 근데 숙소에 쌀이 있다? 그럼 자취를 했단 말인가(만약 쌀 2말을 갖고 나왔다가 우연히 이 거울을 샀다면, 이건 100% 짜고 친 고스톱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왕창근은 상인이다. 아니, 당나라 상인이 철원에 와서 자취를 해? 아님 명색이 왕서방인데 현찰도 물품도 없어서 숙소 주인한테 쌀을 꿔? 현찰 아니면 물품을 주고 거울을 샀어야 자연스럽다. 뭐 바이어나 오파상이라 해도 현찰은 있어야 한다. 근데 왜 하필 쌀일까.


뻔하다. 그래야 거지아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갸들한테 현찰이나 물품 주면 이상하쟎은가. 거지아이들에게 절실하면서도 제공자의 자비심이 돋보이는 것으론 쌀이 딱이다. 나눠주기도 오죽 좋은가. 분량만 조절하면 쌀알 개수만큼 불특정 다수에게 나눠줄 수도 있다. 텍스트 보면 떡대가 왕창근한테 쌀이랑 거울이랑 바꾸자고 한 거 아니다. "거울 안살래?" 하니까 왕창근이 쌀을 준 거다. 즉 쌀은 왕창근이 고른 품목이란 뜻이다.


요컨대 이 생쑈의 목적은 거울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있다. 생쑈가 펼쳐진 장소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시중(市中)·가항(街巷),『고려사』에선 시중(市中)·연로(沿路)·시벽(市壁) 등으로 나온다. 모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개 장소이다. 거기서 일부러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짓거리를 벌인다. 희한한 복장을 한 떡대가 나타가 왕창근에게 거울을 팔고, 그걸 거지아이들에게 나눠준다. 왕창근은 그 거울을(사방 1척이면 당시로선 대형이다) 벽에 걸어놓고 뭔 글자가 씌여 있다며 방정을 떤다. 일종의 길거리 퍼포먼스다. 온갖 UB통신이 난무하는 진원지격인 시장 또는 거리 한복판에서 말이다.


암튼 왕창근의 역할은 이걸로 쫑이다. 궁예에게 거울을 건네주고, 발삽사 불당 진성소상이 그 떡대랑 똑같다고 증언한 걸로 사명을 완수한 거다. 거울에 씌여 있는 글이 뭔 뜻인지 몰라 답답함에 사무친 궁예가 부하들을 풀어 왕창근과 함께 떡대를 찾아나선다. 떡대를 본 목격자는 넘쳐난다. 쌀 받은 거지아이들만 해도 여럿이다. 거지아이들의 특성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사방팔방을 누비며 썰을 퍼뜨린단 거다. 알라들 말은 어른들 말보다 설득력이 빡쎄다(「벌거숭이 임금님」생각해 보시라). 거리나 시장에 나왔던 사람들도 한몫 했을 거다. 따라서 이 소문은 삽시간에 철원 전체로 퍼져나갔으리라.
 


 이병도 선생의 생각


돗자리 썰 아니더라도, 왕창근거울사건이 진짜라고 믿은 분들은 거의 없을 거다. 우리의 이병도 선생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셨다.








경문(鏡文)의 전부는 모두 145자로 고려사 태조세가에 실려 있다. 경문의 내용은 고려태조 왕건의 등극과 삼국통일을 예언한 도참시구(圖讖詩句)로서 조작임에는 틀림없으나, 우견(愚見)으로는 그 조작이 후세에 된 것이 아니라 당시 왕건을 추대하려는 혁명파에서 일반 민심을 자극코자 일부러 이를 조작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이상한 복색으로 가장시켜 외국상인인 왕창근에게 전매(傳賣)하였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고경(古鏡) 조작파에서 그러한 소상과 비슷한 복식을 입혀 이인(異人)으로 가장시켰던 모양이다(이병도 역주,『삼국사기』하, 을유문화사, 1996, 491쪽, 주 15·16)


이 분은 떡대만 왕건의 끄나풀로 보신 듯 한데, 돗자리는 왕창근이야말로 이 생쑈의 쥔공이었다고 본다. 떡대는 조연이다. 글고 또다른 조연들이 있다. 거울에 씌여진 글의 해독을 맡은 분들이다.
 


 또다른 조연들①-문인들


거울에 새겨진 글이 뭔 뜻인지 몰라 답답스러운 궁예, 문인인 송함홍·백탁·허원 등에게 그 뜻을 풀어내라고 다그친다. 이 분들이 풀어낸 뜻인 즉 담과 같다(풀어내긴 개뿔을 풀어냈겠냐. 왕건이 던져준 대본을 걍 읊었겠지).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보내니 :
                        진마(
辰馬)=진한(辰韓)+마한(馬韓)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때린다 :
                        닭[
]=계림(鷄林)=신라, 오리[]=압록강(鴨綠江)
사년(
巳年中)에는 두 용이 나타나는데 :
                        이름이 용(
)인 사람(=용건)의 자손=왕건
하나는 몸을 청목중(
靑木中)에 감추고 :
                        청목(
靑木)=소나무[]=송악(松岳)
하나는 모습을 흑금동(
黑金東)에 나타내도다 :
                        흑금(
黑金)=철()=철원(鐵圓)


요컨대, 송악 출신 왕건이 철원에서 정권을 접수하시고 후삼국을 통일하신단 거다. 근데 이분들은 궁예에게 이대로 말하지 못한다. 자칫하면 지들과 왕건이 아작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충 얼버무리며 넘긴다. 그 뒤 궁예가 더욱 흉폭해지니 신하들이 모두 덜덜 떨었단다【王凶虐自肆 臣僚震懼】.


근데 말이다. 글타면 그 글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궁예가 쫒겨나기 전까지는 비밀에 붙여졌어야 한다. 텍스트대로라면 문인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 왜 지들이 이걸 남한테 말했겠는가. 그치만 비밀에 붙여지지 않았다. 어케 아냐고? 쫌 있다 장수들이 왕건에게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부추길 때 일케 말한다.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귀가 저러한데【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어찌 엎드려 있다가 독부(獨夫)의 손에 죽으려 하십니까.


이 장수들은 대체 어케 그 뜻을 알았을까. 뉘앙스로 봐선 왕건도 이미 알고 있는 듯 하다. 그럼 이들은 떠도는 소문을 듣고 알았을까. 그럴 리 없다. 아무리 궁예가 포악하다 해도 심복들은 있다. 공포정치를 펼칠 수록 정보망은 촘촘하다. 이들이 소문을 듣고 알 정도라면 궁예가 모를 리 없다. 그럼 가뜩이나 의심많은 궁예가 왕건을 걍 놔둘 리 없다. 벌써 빠작냈을 거다.


근데도 왕건은 무사하다. 그럼 뭔 소린가? 문인들이 몰래 왕건측에만 알려줬거나, 애당초 그런 일이 없었는데 나중에 꾸며댔단 거다. 그게 그런 뜻이었다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건 쿠데타 일으킬 때나 정권 잡고 난 뒤여도 아무런 상관 없다. 쿠데타의 정당성만 침튀기며 알려주면 되니까.
 


 또다른 조연들②-장수들


왕창근거울사건 꾸며대서리 우격다짐으로라도 천심을 얻어낸다. 이제 거사(擧事)만 남은 셈이다. 그치만 여기서도 왕건의 체면을 살려줘야 한다. 쿠데타가 고뇌에 찬 결단이었음을 돋보이게 해줘야 한다.


918년 6월 어느날 밤, 장군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 4명이 몰래 모의를 하고 왕건의 집으로 찾아가서 부추긴다. 궁예가 너무도 난폭하니 쫒아내고 당신이 왕이 되란 거다. 그러자 왕건이 정색을 하고 거절하며【作色拒之】일케 말한다.


내가 충성스럽고 순직하다고 자처해 왔는데【吾以忠純自許】지금 (주상이) 포학하다 해서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저 신하가 임금을 바꾸는 것을 혁명이라 하는데, 박덕(薄德)한 내가 어찌 감히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의 일을 본받을 수 있으랴.


첫 번째 거절이다. 그러면서 지 잘난 체는 골고루 한다. 지가 충성스럽고 순직하다며 방정을 떨다가 박덕하다고 겸손을 핀다. 이런 왕건의 말을 듣고 장수들이 걍 물러가면 그림이 안된다.


때는 다시 오지 않으므로 만나기는 어렵고 잃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습니다. 지금 정치는 문란하고 국가는 위태로와 백성들이 모두 상전을 원수처럼 미워합니다. 지금 덕망이 왕공(王公)보다 높은 이가 없습니다. 하물며 왕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귀가 저러한데, 어찌 엎드려 있다가 독부(獨夫)의 손에 죽으려 하십니까.


요컨대 민심도 천심도 몽조리 왕건편이니 마땅히 쿠데타를 일으켜야 한단 거다. 근데도 왕건의 반응이 밍밍하다. 두 번째 거절인 셈이다.
 


 역사를 바꾼 유씨 부인


그러자 이번엔 왕건의 첫 번째 부인 유씨(柳氏)가 껴든다.


인()으로써 불인(不仁)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랬습니다. 지금 여러 사람의 의론을 들으니 첩도 분심(憤心)이 일어나는데, 대장부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의 마음이 갑자기 바뀐 것은 천명(天命)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얼씨구나. 쿠테타 모의하는 자리에 마누라가 왜 있나. 부부간 금슬도 좋고 마누라 끗발도 쎄구나.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장수들이 떠밀어도 움쩍않던 왕건, 유씨 부인이 빽빽대며 갑옷 앵겨주니까 마지못해 주섬주섬 챙겨입고 나선다. 두 번째까정 거절하고 세 번째야 수락하는 거, 이거 공식이다. 삼고초려(三顧草廬)도 그런 거다. 첫 번째 덜컥 받자니 체면이 좀 안선다. 그래서 두 번째까정 튕기다가 세 번째엔 마지못해 받는 척 뺑끼치는 거, 고전적 수법이다.   


왕건 지는 끝까지 충성을 다하려 했으며, 신심(臣心)·민심(民心)·천심(天心)이 한꺼번에 쏟아지는데도 질질 버티다가 개 끌려가듯 마지못해 쿠데타에 나섰단 거다. 이런 쿠데타, 돗자리 아는 한 동서고금에 없다. 이런 말은 다른 분들도 하셨다. 담처럼 말이다.


왕건은 쿠데타 당일 마치 떠밀리다시피 하여 자의반 타의반 거사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성공한 쿠데타치고 그렇게 엉성하게 계획하는 경우는 없다. 이는 조선 태조가 개국할 만반의 채비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굳게 사양한 이른바 삼양수견(三讓雖堅)을 한 후 즉위한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요컨대 왕건을 축으로 한 쿠데타 모의는 치밀하게 준비되었고, 그랬기에 결국 성공하게 된 것이다(이도학,『궁예·진훤·왕건과 열정의 시대』, 김영사, 2000, 155쪽).


만약 텍스트대로라면, 궁예에 대한 왕건의 충성심이 별거 아녔다고 짐작할 수 있다. 정말로 왕건이 그랬다면, 장수들이 미쳤다고 그런 분한테 가서리 쿠데타 하자고 꼬드기겠는가. 전두환 대통령 시절 장세동 안기부장한테 가서 뒤집어 엎자고 부추기는 꼴 아닌가. 뭔가 넘어갈 만한 여지가 있으니 그런 거 아니겠나(뭐, 모든 게 왕건 작품이라면 할 말도 없지만).
 


 싱겁디 싱겁게 끝난 쿠데타


쿠데타 모의는 밤에 이뤄졌다【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글고 그날 밤 바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왕건을 꼬드긴 장군들은 문을 나서며 "왕공(王公)이 의기(義旗)를 들었다!"고 외친다. "우리 쿠데타 일으킨다!"고 외쳐대는 꼴이다. 간땡이도 크다. 그러자 순식간에 앞뒤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성문에 이르니 벌써 1만 명이 떠들며 지둘리고 있더란다. 대체 궁예의 부하들은 뭐하고 있던 거냐.


아니, 정권을 뒤엎은 뒤 왕으로 앉히려는 분이 결심도 안했는데, 만반의 태세를 미리 갖춰놓고 OK 사인을 기둘리는 쿠데타도 있냐. 그러다 왕건이 No~ 하면 어쩌려구. 쿠데타가 싫으면 말고냐. 왕건이 마지못해 나서자 곧바로 터져서 성공을 거두는 그런 쿠데타는 맨정신으론 상상하기 어렵다. 정말 쿠데타가 전광석화처럼 일어나 성공했다면, 그건 오래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단 뜻이다. 누가? 뉘긴...
 


 궁예, 백성들에게 맞아죽다?


암튼 드뎌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궁예는 제대로 저항조차 못해보고 도망친다. 글고 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왕이 (쿠데타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평복【微服】차림으로 달아나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안되어 부양 백성에게 해를 입었다(『삼국사기』).


궁예는 변복(變服)을 하고 북문으로 달아나니 궁녀들이 궁안을 깨끗이 하고 태조를 맞아들였다. 궁예는 산골로 달아났다가 이틀 밤을 지낸 뒤에 배가 몹시 고파 보리 이삭을 잘라 훔쳐먹었다. 그 뒤 곧 부양 백성에게 살해되었다(『고려사』).


부양(斧壤)이라면 지금의 강원도 평강이다. "부양·철원 일대의 사람들이 그(궁예의) 해독을 견디지 못하였다"는 기록처럼 궁예 땜시 고생 많았던 지역이다. 그럼 그 사람들은 궁예인 줄 알고 잡아서 때려죽였을까. 그럴 수 있다. 궁예는 외모가 튄다. 드라마 대로라면 빡빡에 애꾸다. 평복으로 갈아 입었다 해도 척하면 뻑이다. 그치만 일단 무작정 의심키로 맘먹은 돗자리, 이것도 그대로 믿지 못한다.


쿠데타 성공의 열쇠는 최고통치자를 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데 있다. 그래서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도 총리인 장면을 못찾아 애태우지 않았나(장면 총리, 수녀원에 짱박히셨다가 나중에 겨나오셨다). 근데도 왕건이 궁예를 놓쳤다? 뭐 놓칠 수도 있겠다. 근데 백성들이 잡아서 때려죽였다? 왕건한테 갖다 바치면 인생이 활짝 꽃필텐데... 때려죽였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치만 왠지 수상쩍은 냄새가 난다.


궁예의 최후를 일케 꾸며대면 왕건은 지 상전이었던 궁예를 지 손으로 죽여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백성들이 즉결처분했다니 궁예가 평소 민심 팍팍 잃은 걸 보여줄 수도 있다. 그야말로 마당 쓸고 돈 줍는 격이다.
 


 만고불변의 진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


근데... <태조 왕건> 작가님, 궁예의 최후를 절묘하게 그리신다. 왕건과 일잔건배한 뒤 지 부하의 칼에 생애를 마치신다. 왕건도 궁예도 둘다 멋지게 띄워주려는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그치만 개연성은 얄짤시리 없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그 생생한 사례가 바로 궁예·왕건에 대한 텍스트다. 그 진상을 누가 알 수 있겠냐만, 궁예는 실제 이상으로 나쁜 넘이 된 게 틀림없다. 이런 희생자가 어디 궁예뿐이겠는가. 전쟁은 전부 아님 전무의 처절한 게임이다. "Winner take it all"의 비정한 게임이다. 그래서 우리는 승자의 텍스트를 그대로 믿지 못한다.


※ 그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더 내공을 쌓아 언젠가 다시 나타나련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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